〈역사〉학교에서 말하지 않는 3.1운동에 대한 이야기

이민숙┃전교조 해고자

1. 들어가며

2019년 오늘, ‘과거사’가 여러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출발에 (문재인정부가 주도한) ‘3.1운동 100주년’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촛불 이후 혐오대상이 댄 태극기가 광화문 광장에 다시 자랑스럽게(?) 나부끼고,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앞장서고, 교육부는 물론 교육계의 좌우를 대표하는 전교조, 교총 모두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겠다고 했던 지난 3월, 명색이 역사교사인 나는 조금 불편하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기억할 것이다. 2015년 박근혜 정권은 ‘역사 국정교과서’를 통한 이른바 역사쿠데타를 시도하였다. 당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를 반대하였고 나도 몇 번 ‘역사쿠데타와 노동개악’이란 주제로 불러주는 노조가 있으면 조합원 교육을 다니곤 했다. 당시 한 동지의 질문을 받았었다. ‘그렇다면 (국정화가 아니라면) 지금의 역사교육은 정상입니까’라는 취지의 질문이었다. 물론 나의 답은 ‘아니다’였다. ‘지금도 노동자민중의 저항의 역사는 턱없이 부족하게 기술되어 있다, 단지 최소한, 유관순과 전태일마저 지우려는 의도를 적시하자’는 불충분한 답으로 대신했었다. 역사쿠데타는 중단되었고, 문재인정권은 국정화 반대 시국선언 교사에 대한 징계는 취소하였으나 딱 거기까지다. 겨우 박근혜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지 역사를, 특히 노동자민중의 역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에는 종이 한 장, 아니 바늘 끝 정도의 차이도 없다. 그래서 일게다. 삐딱한 태도로, 관이 주관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을 지켜보았던 것은.

2.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러나 학교에서는 말하지 않는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운동은 어디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때 보통 배경과 원인, 경과, 결과 및 그 사건이 끼친 영향 등을 말하게 된다. 3.1 운동을 학교에서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3.1운동의 배경과 원인, 경과, 결과 등을 말하고, 그 사건이 끼친 영향은 이렇다로 마무리한다.

문제는 3.1 운동에 대하여 우리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알고, 배우고 있다는 것. 특히나 3.1 운동 발생 배경과 끼친 영향에 있어서 ‘사회주의 운동’이 감춰져 있다는 것, 해서 이른바 반쪽짜리 역사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해방이후 ‘붉은 기운’을 제거해 온 남쪽의 역사인식, 역사기술(어디 역사인식과 기술의 문제일뿐인가만은)의 반영이며, 우리가 복원해야 할 과제이다.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배경?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노동자, 농민이 권력을 장악한 평등한 국가가 진짜로 등장했다!−이 당시대에 끼친 영향, 특히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던 인민들, 운동가들에게 어떤 희망, 전망을 주었을지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생생하게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몇 가지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텐데, 이를테면 독립운동가들에 의한 사회주의 단체-정당 건설의 붐(조선사회당, 한인사회당, 전러한족공산당 등)이라든지, 노동쟁의의 증가라든지(1916년과 17년, 각기 파업 8회 → 1919년 50회로 증가)를 보면, 당시 러시아혁명(사회주의 혁명 사상)이 ‘조선의 독립과 노동 해방’의 전망을 부여하였음은, 러시아혁명이 미친 세계사적 영향이 일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도 비껴가지는 않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하면, 학교에서는 3.1운동의 배경을 가르칠 때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주요하게 기술하고 설명하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 일부 교과서에서 ‘러시아혁명’이 언급되고는 있다지만 말 그대로 언급의 수준이고, 대부분은 ‘윌슨에 의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정설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1]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 발표는 레닌의 민족자결주의[2]1917년 4월 볼세비키 전국협의회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민족자결권’ 결의 / 1917년 10월 볼세비키 정부 민족자결주의 재확인 … Continue reading)를 뒤따라한 것일뿐더러, 목적도 미국 주도로 전후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패전국 식민지들을 승전국들이 차지하기 위한 명분 부여에 불과한 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또 다른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 세력이었던!)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해방이후 남한사회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 친미적 인식, 국가주도의 역사교육이 갖는 왜곡의 결과라 할 것이다.

교과서에서도 주요하게 3.1운동의 배경으로 다루는 2.8독립선언에 있어서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은 언급되지 않는다. 2.8독립선언서에는 직접 러시아혁명을 언급하고 있어, 러시아혁명이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 학교에서도 제대로 다뤄야 마땅하다. 그러한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려는 노력 없이 이벤트로 남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독립선언문 낭독 33인, 현재라면 누구랑 같을까?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놓고 크게 3가지(외교론, 실력양성론, 혁명론(무장봉기론))로 구분되어 있었고, 우리가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독립선언문 낭독 민족대표 33인’은 이른바 외교론(외교적 방식을 통한 독립 달성)에 중심을 둔 사람들이라 이해하면 빠를 것이다. 이들이 탑골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중들과 만나지 않고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제 경찰에 전화하여 자수한 것은 그들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다. 즉, 조선은 독립을 바란다는 ‘선언’, 즉 외교적 표명으로 그들이 할 일을 다한 것이다. 한편 33인은 거리의 인민들 앞에 서지 않은 이유를 ‘군중심리에 의한 폭력사태 우려’라 밝혔다. 그들이 인민에 대해 어떤 인식을 보여주는지 확인할 수 있는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1백년 전과 1백년 후 지금과 겹쳐지는 모습들은 없는가? 이른바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대표’한다는 자들의 행보, 대중투쟁을 재단하고 대중의 자발적 분출을 두려워하며 틀 안에 가두려하는 것과 말이다. 투쟁은 멀리하고 입장만 발표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1백년 전 (대부분이 이후 친일파로 전향하는) 33인의 행위에서, 2016년 촛불시위 초기 ‘정권퇴진을 걸지 말라’고 주장했던 사람들, 소위 명망가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빨갱이로 몰렸나? 빨갱이였나?

문재인대통령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사상범-빨갱이로 몰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들은 빨갱이로 몰렸을까? 아니면 그들은 빨갱이였을까? 빨갱이가 사회주의자들을 의미한다면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것이 아니라 ‘빨갱이’였다. 실제 일제강점기에는 빨갱이들이 그득했다. 특히 노동자농민에 의한 평등국가 건설(러시아혁명)의 영향과, 3.1운동을 통한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열망의 분출을 통해 ‘사회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당시 ‘맑스보이, 엥겔스걸’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지는’ 상황[3][쟁점 한국사(근대편)] (이기훈 외)이었다 하니 사회주의의 확산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아무튼 일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란 지금까지의 식민지와는 다른,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고, 독립 그 자체는 혁명적 과제라는 것, 자유롭고 평등한 국가란 곧 노동자농민이 주체가 되어 건설한 러시아 사회주의 국가를 생각했음은 이해하는 일은 그닥 많은 논리나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사상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시절과 다르게 당시 인민들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꿈꾸었고 그것이 곧 독립운동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 상당수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 즉 빨갱이였던 것이다.

3.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3.1운동

3.1운동은 인텔리겐차, 청년, 노동자, 농민, 아동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민들, 약 60만~100만명이라는 다수의 대중들이 참여한 긴 기간(짧게는 3월~5월, 길게는 해를 넘겨서까지)의 운동이었으며, 평화적 만세시위부터 면사무소 습격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 독립운동이었다.

또한 3.1운동을 전후로 하여, 미국의 역할에 독립의 희망을 걸었던 이른바 외교론자들의 실패, 민족실력양성론자들의 한계(유산자 운동, ‘독립은 먼 미래에나 실현 가능한 일이다’라는 인식)를 보고 배우고 느끼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독립과 자유는 ‘전세계 혁명적 근로자들과의 연대 속에서’ 가능하다고 판단하며 ‘맑스주의의 호소에 귀를 기울’[4]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재인용 (89쪽~)이는 사람들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형성시키는 과정이었고, 사회주의는 조선 독립의 주요 방법론을 제공하였다. 3.1운동 이후 ‘노동계급의 해방, 철저히 자본가계급과 투쟁’하는 조선노농총동맹이 등장하고,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시작[5][근대를 보는 창] (최규진) 재인용된 것은 모두 우연이 아니다.

문재인대통령이 3.1운동 1백주년 특사에서 말한 것처럼, 3.1운동은 ‘담배를 끊어 저축하고, 금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고, 심지어 머리카락을 잘라 팔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온’ 전통의 계승이 아니며, ‘​민의를 사용하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은’ 비폭력평화운동만이 아니었다.

역사는 늘 승자에 의한 기록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승자독식에 의한 왜곡된 기록을 지우고,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대장정을 써오는 민중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해서 권력의 입맛에 맞게 잘 포장된 ‘3.1운동 100주년’을 거둬내고, 노동자의 눈으로 3.1운동을 바라본다면, 우린 다시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을 만나게 될 것이고, 3.1운동 이후 이 땅의 노동자들이 싸워낸 ‘투쟁’에 주목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의 혁명’을 조직해간 독립운동가, 아니 혁명가들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지만 말이다.

1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 발표
2 1917년 4월 볼세비키 전국협의회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민족자결권’ 결의 / 1917년 10월 볼세비키 정부 민족자결주의 재확인 (재인용 출처 : ‘사회주의자’ 박남일 기고 글. 2019. 2. 28
3 [쟁점 한국사(근대편)] (이기훈 외
4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재인용 (89쪽~
5 [근대를 보는 창] (최규진) 재인용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역사〉백범은 탁월한 독립운동가 김립을 왜 죽였을까?

다음 글

〈역사〉애국에 대하여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