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지 ㅣ 평화활동가
2021년 새날이라고 하지만 변함없는 노동 착취와 이윤 창출에 눈이 벌건 재벌공화국 한국에서 고통과 분노를 삭혀야 하는 노동자 민중에겐 새해고 나발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일곱 명이 현장에서 일하다가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절망스런 세상을 바꾸려고 수십 일, 수백 일을 차가운 한뎃잠을 자거나 단식 투쟁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선거때만 종복 흉내 내고 평소엔 반들반들 기름기 흐르는 국회의원 나리들은 천금같은 노동자 목숨 지켜달라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너덜너덜한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고 노동법은 개악시켜 버렸다. “자본가 만세, 자본주의여 영원하라”고 미친듯이 외쳐대며 촛불의 의지를 짓뭉개버린 문재인 정권이다.
이러한 때에 이 정권과 동업자 관계인 유시민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를 읽는 속내가 못내 불편했다. 그의 저작을 타박하는 게 아니다. 그와 아무런 연고도 일면식도 없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20대엔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비롯한 그의 여러 저작들을 읽고 밤잠 설쳐가며 시대와 역사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치무대에 뛰어든 그에게서 표리부동한 모습이 포착되었고 그게 거북살스러워지면서 그와 관련된 어떤 글도 멀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는 그가 열정과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던 시기의 저작이어서 관심있게 읽었다.
사실 역사 전공자인 내겐 역사를 인식하는 그의 논리가 별반 새로울 게 없었다. 정신 똑바로 박힌 역사학도라면 그 정도의 고민과 비판의식은 상식에 속했다. 다만 동서고금의 역사연구 방법과 흐름, 문제점을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책으로 돋보이는 구석은 있었다. 역사는 ‘인간사회의 변화 과정’를 의미하는 동시에 ‘사회의 변화 과정에 대한 기록’이지만 서술 과정에 한계를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저자 유시민은 지적했다. “역사가가 자기의 기분이나 희망, 나름의 세계관이나 이해관계에 맞추어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댔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못 믿을 역사책’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국가권력이 미리 심사하고 검열하기 때문에 제일 못난 것이 ‘교과서로 쓰는 역사책’이라고도 했다. 우리가 역사 기록을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였다.
한말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단체 신채호가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묘청의 난’과 뼛속깊이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좋은 사례이다. 묘청은 개경은 땅 기운이 쇠퇴했기 때문에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인종을 설득하는데 명분이 있어야 했다. 북방의 금나라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고 고려 임금을 황제로 칭하자고 귀에 솔깃한 주장을 하며 서경천도 작업을 펴지만 김부식 등 개경 귀족들은 권력의 기반을 잃을까봐 훼방을 놓아 묘청은 반란을 일으킨다. 인종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대주의 사관을 이식한 <삼국사기>를 편찬, 역사왜곡 작업에 착수한다. 만주와 요동지방에 걸쳐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반 넘게 한강 이남으로 옮겨놓았는가 하면 고구려 유민들이 옛 고구려 영토에 세워 신라와 맞섰던 발해의 역사를 없애 버렸다. 그외에도 자기 입맛대로 골라 넣거나 누락시키는 수법을 동원하여 신라의 계보를 잇는 사대주의 역사관을 완수하여 고대 역사를 안개속에 밀어넣어 버렸다.
임진왜란를 거치면서 많은 고대사 기록이 소실되어 삼국사기만이 남게 되었다고 유시민은 얘기하고 있지만 사대주의 사관에 절어있는 지배계급이 의도적으로 자료를 소각시켰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고대사로 유일무이한 삼국사기를 식민지 침탈 작업을 하던 일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조선은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므로 일본이 도와주어야 근대화를 할 수 있다’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뿌리내리기 위해 ‘조선사 편수회’라는 역사 편찬 기관을 만들때 고대사 기본사료로 삼국사기를 채택했다는 사실에서 일제의 구린 속내가 엿보였다. 지금까지도 역사왜곡으로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이었다. 아시아에 제국주의 침략을 한 추악한 역사를 자국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역사 교과서를 검열하고 난도질을 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5.16을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한 혁명’이라고 했고 10월 유신을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우겼으며, 무고한 광주시민 수천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고 대통령에 오른 살인마 전두환은 적반하장으로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가르치게 했다. 유시민이 예로 든 동서 고금의 ‘못난 역사책’ 행진은 끝이 없었다.
“왕조시대의 역사가들은 누구나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이나 가치관에 따라 쓸 것은 쓰고 깎을 것은 깎아가며 역사를 저술”했으므로 인간이 쓴 역사를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거듭 당부했다. 역사학이 근대에 이르기까기 과학의 분야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가 유럽은 ‘중세 카톨릭의 억압’을, 중국의 경우에는 ‘역사 연구에 대한 국가권력의 엄격한 통제’를 원인으로 꼽았다. 유시민은 “역사는 시간이라는 제왕이 지배하는 왕국”이므로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고 과거에 편입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망각의 늪에 잠긴다.”라고 하면서 ‘역사가는 불운하다”고 했다. “모든 시대의 지배자들은 그 시대 역사기록을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고 조작함으로써 미래의 역사가를 지배하려고 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멋진 말도 남겼다.(유시민의 주장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
그래도 꽤 오래전, 역사기록의 모범을 보인 이로 중국 한 왕조때 <사기>를 펴낸 역사가 사마천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연현상이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회와 역사를 파악하고 서술했다. ‘역사’라는 개념도 없던 시대에 현대의 역사서에도 뒤지지 않는 사마천의 저술에는 승자 뿐만 아니라 패배자, 저잣거리의 장사꾼과 다채로운 인물 등을 등장시켜 역사기록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소개했다. 역사의 암흑기는 뭐니뭐니해도 중세 유럽이었다. 역사가 신학의 비루한 시녀 노릇이나 했던 시기였다. 성서에 나오는 글귀를 근거로 천지창조 연대를 계산하거나 창조주를 위해 역사를 연구하는 허구와 상상의 작업이 전부였다. 속세의 기록이라고 해봐야 황제, 왕, 교황, 교회 지도자, 귀족들의 기록이 전부이고 대다수 구성원인 농노들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역사가 과학의 영역으로 기지개를 켠 때는 19세기 콩트를 중심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객관적인 법칙을 인식하자고 주장한 실증주의가 등장하면서였지만 그들은 사료를 모으고 검증하는데 그쳤다. 실증주의 한계를 드러낸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역사가 버클이었다. 그는 역사상 모든 변화는 ‘자연’과 ‘인간 지성’이라는 두 요소의 상호작용이라고 했다. 자연이 험준하고 웅장한 곳일수록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는 운명론이나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고 하면서 인도를 예로 들었다. 반대로 자연환경이 친근하고 부드러운 곳에서는 현세를 긍정하는 낙천적인 철학과 인생관이 발전하게 되며 유럽이 그렇다고 했다. 그의 역사 법칙은 과학적 인식과는 거리가 먼 유럽인의 편견으로 가득찬 운명론에 불과했다. 유럽의 온대지방에 태어난 사람들은 문명과 진보의 주역이 되고 자연환경이 웅장한 곳에 태어난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구제해 주기 전에는 미개족속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유럽인의 인종적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고 객관적 사실에도 어긋난다고 유시민은 비판하고 있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이런 오류는 독일의 역사가 랑케와 역사주의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랑케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감정과 개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라고 하면서 일반 법칙이 아닌 개별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집착했다. “이 역시 그의 조국 독일이 산업과 정치에서 영국과 프랑스보다 뒤떨어진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드러낸 생각일 뿐이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있다. 한 술 더 떠서 프로이센 왕국의 독재체제를 옹호한 랑케는, ‘공평하고 과학적인 역사’를 내세우며 유럽의 시민혁명을 옹호한 역사가들과는 달리 진보적인 역사 법칙을 거부한 한계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랑케의 잘못은, 자신의 당파적 보수성을 감추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쓰면서도 공정하고 냉정한 학자인 척 하였고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유시민은 안타까워했다.
민중사학과 과학적인 역사의 발전법칙에 희망을 준 학자는 마르크스였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사회와 역사도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을 역설한 그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걸출한 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역사 법칙의 이름을 빌어 자본주의 붕괴가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라고도 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제 1장 첫 문장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의 장인과 직인, 요컨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는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언제나 사회의 혁명적 개조로 끝나든가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함으로서 막을 내렸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은 물질적 이해관계라고 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불평등과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은 체제와 질서를 바꾸기 위해 역사의 고비마다 투쟁을 하곤 했으며 역사가 발전했다. ‘국가’는 소수의 지배 계급이 다수의 피지배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군대와 경찰’ 등을 통한 ‘폭력’이 국가권력의 본질이므로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고 사상투쟁을 수반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유시민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물들어있는 한 노동계급이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상 모든 시대에 피지배 계급은 자기의 사상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문자를 사용하고 지식을 축적한 것은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에 피지배 계급은 자기를 둘러싼 사회관계를 체계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윤리 도덕을 강요받았고 또 받아들였다.”
다수의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의 사상을 거부하고 전복하는 투쟁을 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거라고 하면서도 마르크스 이론에 한계가 있다고 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어떤 역사 이론도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결정짓지는 못한다. 역사는 똑같은 대본에 따라 수없이 되풀이하는 연극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투쟁이 공산주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지만 서유럽에서는 혁명 대신 개량을, 공산주의 대신 수정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래서 적어도 서유럽의 노동자 계급에 관한 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견해는 설득력을 잃었다.”
라고 했다. 유시민은 조국과 애국심, 민족주의를 부정한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도 냉소를 보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하면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중략) 옛 사회주의 나라 정부들은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르기로 간주하고 여러 민족을 사회주의 이념 아래 통합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공산당의 독재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무섭게 다시 살아나 곳곳에서 유혈이 낭자한 민족분규와 내전을 불러일으켰다.”
유시민의 단정적인 의견에 동의하기 힘들다. 그는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원시 공산제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를 성급하게 판단했고 노동계급의 변혁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근시안적인 주장을 하고 있었다. 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그는 ‘공산주의 실패, 자본주의 승리’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 버렸다. 소련 붕괴에 혈안이 된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야비한 물량공세와 공작, 폭력성에 대해선 애써 눈을 감은 채 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해체가 자본주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합의 원리’라는 역사 발전 법칙으로 본다면 공산주의야말로 자본주의 붕괴후 다가올 역사라고 본다.
유시민의 ‘아니면 말고 식의 진단’ 이후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발악을 하며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는 등 미쳐 돌아가고 있지 않았는가? 제국주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본주의 전매특허인 ‘실업’과 ‘환경파괴’는 일상이 되어 버렸고 주기적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망조가 든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수단으로 파시즘이 부활했으며 세계 곳곳에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 봉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혁명 투쟁을 기반으로 한 변증법적인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한편, 사민주의를 채택한 서유럽, 북유럽의 복지제도는 자본주의의 우월함이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부르주아들이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복지 등 사회주의의 장점을 차용한 개량주의 정책에 불과할 뿐 빗나간 마르크스 이론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민족주의’라는 용어도 19세기에 등장한 근대적인 표현일 뿐 역사성을 찾아볼 수 없음에도 유시민은 민족주의에 대단한 의미를 두고 있다. 가엾은 식민지 백성들이 조국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지만 원래 내가 알기론 ‘조국’이나 ‘애국심’이라는 표현도 제국주의 반동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로 민중을 옥죄는 쇠사슬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 소련이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있는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많은 기록을 볼 때 공산당이 민족주의를 억압했다는 표현도 유시민의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소련과 동구권의 상황을 가지고 사회주의에 대한 민족국가, 국민국가의 승리라고 속단하며 변증법적인 역사발전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땀흘려 일하고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이 계급투쟁의 승자가 되는 건 역사의 순리고 정의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봉하고 자본가들 뒷배나 봐주는 문재인 정권의 나팔수 노릇하며 특유의 궤변을 늘어놓거나 현학적인 수사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유시민. 그가 한 때 헌신해 왔던 변혁운동의 빛이 퇴색돼 보이는 건 내가 예민한 탓일까?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고통받는 노동자 민중 편에 서서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거나 투쟁현장에 연대 다니며 실천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전국 맛집 찾아다니는 TV프로그램에 나와 그들만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유명인 포스가 전부였다.
그의 머리로 생각하는 ㅡ이미 실제로 많은 역사가들이 문제 제기하고 있었던ㅡ 동서양의 역사 이야기를 읽고 일정부분 공감하긴 했으나 공허하게 와 닿은 건 그래서일까? 적어도 내 경우엔, 역사는 머리가 아닌 살아 펄떡이는 가슴과 몸의 실천으로 완성된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