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ㅣ 농민
러시아 혁명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 식민지 시대의 공산주의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 불과 7년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식민지 통치하에서 조선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을 제압한 일본은 모든 종류의 무기를 압수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집회를 금지하는 등 극도의 무단정치를 시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은 국내의 조선인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었던 반면, 동부 시베리아와 만주에 산재하는 많은 조선인 이주자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가운데는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동맹군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러시아 혁명의 중추인 볼셰비키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러시아인들에게는 최근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아픔을 격은 조선인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러시아 혁명은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혁명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사상 처음으로 붉은 깃발 아래 움직이는 한국 정치운동의 첫 출현이었다
이렇게 20세기 한국 역사는 러시아, 중국 혁명과 뗄 수 없다.
그 까닭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연히 일본의 현대사와도 뗄 수 없다. 20세기 한국 역사이지만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 – 해방 운동의 확장된 공간의 의미에서 러시아와 중국 혁명과도 한국 역사는 뗄 수 없는 것이다.
이 중층된 역사를 모르면 우리 독립운동사를 이해할 수 없다.
예컨대 21세기 국회에서 ‘김원봉’을 두고 사상논쟁을 하고, 하다 하다 홍범도 흉상 육사 철거 논란으로 시끄러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 다 과거를 그때 그때 권력의 입맛에 맞는 교훈만을 역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근대 100년을 돌이켜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강권침탈에 의한 타율적 근대화의 역정을 반제국주의 항쟁 속에서 함께 헤쳐나왔다. 이런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 공간의 맞물림은 한-중 뿐 아니라 한-러까지 이어진다. 이 고리를 모르고는 조선의 다양한 반제 독립 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통일 과정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없다.
특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출범한 이후 우리 독립 혁명가들은 소련과 중국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세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민족해방 투쟁에서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상대가 소련이었다. 그러니 소련의 원조와 간섭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의 연합전선 형성과 분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7년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고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민족해방운동’을 맑스주의 ‘틀’ 내에서 대등한 ‘혁명’으로 끌어 올린다. 그런 까닭으로 레닌은 1917년 혁명을 하고 1918년 코민테른을 만들면서 곧바로 식민지 해방 혁명가들을 다 불러 모은다. 또 동방노력자대학이라는 학교를 모스크바에 세워 민족해방 혁명가들을 공산주의 사상가로 교육시키고 자금 지원도 하고 활동가로 보내서 당도 만들어 주고 군사 훈련도 시킨다.
사실상 20세기 전반에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민족해방 운동 특히 무장 혁명운동들은 거의 대부분 소련의 지원이 없었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식민지 지역의 모든 공산당들은 자생적으로 생긴 당이 인도외에는 없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을 대변하는 국민당 군대도 소련 공산당이 만들어 줬다.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던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 학교를 코민테른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국민당 군대는 다 소련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 돈으로 활동하고 소련군이 다 교육시켜 준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보면 중국 국민당과 미군은 나중이고 사실 거의 독립 운동의 전부를 소련의 지원에 의지했다.
이처럼 소련은 식민지 해방운동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 까닭은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쉐비키는 러시아 혁명이 세계혁명으로 발전해야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믿었던 서유럽 노동 운동하는 놈들이 혁명 한다고 소련 인민들의 피땀같은 돈만 받아 처먹고 혁명은 안했다. 이렇게 소련이 고립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향이 식민지 민족해방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서유럽 좌파라고 하는 놈들은 그 당시 자기들 세력 기반이 식민지 수탈에서 나오는 초과이윤에 물적 토대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깰려고 하지 않았다. 즉 노동 운동한다는 놈들이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아시아 – 아프리카 식민지 수탈을 인정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서유럽 극좌파하고 하는 사람 중에 아시아 – 아프리카 문제에 코멘트하는 사람은 아주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정말로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유럽인들이다.
이게 서유럽 좌파나 진보의 실체다.
근데 소련은 그 자체로는 상당히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가지게 되는 의미는 바로 저 유럽 중심주의를 깨고 맑스주의를 아시아 – 아프리카 식민지 지역 인민들의 해방 투쟁으로 확정 시킨 것이 소련 공산주의의가 갇는 의의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련(코민테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형성된 어떤 세계 질서 속에 여전히 있다.
흐루쇼프가 데당트를 얘기했을 때 서유럽 좌파들은 상당히 반겼다. 거의 대부분 찬성했지만 베트남 공산당 같은 곳에서는 난리가 났다. 동서 화해해서 전쟁의 위협을 없애자는 좋은 의도인데 왜 반대했겠나? 흐루쇼프가 유럽 제국주의와 화해 조건으로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군사지원을 일체 끊었다. 이게 데탕트의 양면이다.
서유럽쪽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아시아 식민지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 민족의 목숨이 달린 것이었다. 갑자기 지원이 끊어져버리면 유럽 제국주의에 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제정세에서 강대국이 내세우는 명분들이 겉보기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는 러시아 혁명과 여기서 나온 코민테른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우리 독립운동사의 고난과 분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역사가 훌리오 발데온은 “그것이 성공의 역사이든 실패의 역사이든, 공정한 것이든 부정한 것이든 간에 과거를 아는 것은 컴플렉스나 양심의 가책 없이 현재를 대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 가운데 하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옳은 말이 아닌가?
홍범도 흉상 철거 및 국회에서 벌어졌던 김원봉 사생논쟁은 사실 정말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멀지 않았던 과거의 시간들을 마치 선사시대 유물을 대하듯 말하고 취사선택하는 무지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식민지 시대 독립군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아니라 그들의 관심은 조선의 국권 회복에 있었으며, 대부분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은 미약했다. 다른 동아시아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극히 모호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혼돈과 불확실성이 이데올로기의 무대를 지배했던 당시 새롭게 공산주의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각기 다른 의미와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이해없이 흑과 백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이분법으로 그 시대를 재단하는 것은 너무 야만적인 폭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