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7호 7-7 노동운동가 故 김승만 동지를 기리며 – ―노동해방의 꿈과 희망을 다시 세운다!

박찬웅 ㅣ 노동전선 선전편집위원장

사람이 한평생 일관된 삶을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세상이 변하면 그 변화에 맞추어 신의 생각도 맞추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신념과 사상은 변화의 가운데서도 동일성을 가지게끔 해준다. 그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게 하며 힘든 운동가로 사는 삶을 유지하게 만든 것은 민중이었다. 사회의 절대다수이자 생산의 주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하지만 역사의 매듭에서는 떨쳐 일어나는 민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은 고 김승만 동지의 삶에 원천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렵고 힘들었던 삶의 여정과 똑 닮은 듯한 산행을 좋아했다. 수많은 친구와 산행하며, 정상에 오르는 과정은 운동에서 실천해야 할 단결과 연대의 과정이었다. 정상에서 만끽했던 성취감은 기필코 쟁취할 새 세상을 향한 각오를 다지는 의식이었다.

고 김승만 동지는 1971년에 태어나 2024년 54세로 짧게 인생을 마감했다. 청년기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청년기의 열정에 나이가 더해지며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족할 수 있을 때도 자신을 스스로 담금질했다. 오산에 있는 이주노동자센터를 찾아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했으며, 구조조정의 광풍 속에서 고립된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노동전선)에서 곤궁한 상근 환경에서도 주요 직책을 맡아 말없이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전국의 투쟁 사업장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비정규직 철폐 운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던 그에게 있어서 절박한 투쟁들에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산행의 보람이 정상에서 이루어지듯이 그가 가고자 한 길은 민중과 함께 싸워 쟁취할 노동해방의 세상이었다.

그는 노동당 당원이었으며,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이었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집행위원이기도 했다. 프닉스정치경제연구소와도 관계를 맺었고, 사회주의 정치신문 발간을 계획하는 소모임에도 참여했다. 지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자신을 삶을 태워 하나의 불꽃이 되고자 했다. 그가 던진 불꽃은 ‘단결하라,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혁명의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새롭게 전진하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그의 폭넓은 활동만큼이나 먼저 간 동지에 대한 애석함을 가진 많은 동지가 있었다. 이렇게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동지들의 뜻에 따라 노동전선은 일주일간의 추모 기간을 지정하고 임시 분향소를 차렸으며, 추모위원회를 구성해서 7월 5일 추도식, 6일에는 고별식을 가졌다. 7월 7일(일)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대성리 근처 산에서 개최된 고별식은 “해방의 그날 (노래공장 1992)” 추모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참석자 전원이 손을 잡았다. 노동해방 세상을 향한 헌신과 노력을 기리며 그 뜻을 받아 안는 모습에 먼 곳에서 고 김승만 동지도 기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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