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노동자신문 20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박현욱 ㅣ 노동예술단 선언
“우리가 99%다” 이 구호를 기억하시는지? 소위 ‘미국발 금융위기’라 불리는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그 여파로 이어진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통해 확산된 구호다. 꽤 명성을 얻으면서 우리 투쟁 현장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었던 이 구호가 그렇게나 인기를 끈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그 의미가 와 닿고, 요즘 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점 등이 그 이유지 싶다. 내 식으로 받아들이자면 자본주의라는 계급지배 체제에서 지배계급은 단 1%이고 99%가 (피지배계급인) 민중, 바로 ‘우리’라는 것. 따라서 세상은 절대다수인 ‘우리’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외침이다.
심히 단순한 이 메시지에 가슴이 웅장해지기까지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참으로 새삼스러웠기 때문일 거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정 노동에, 그나마 모진 목숨 이어가려면 평생 채무노예의 삶을 강요받아야 하는 것이 공황기 노동자 민중의 삶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그저 개인의 팔자소관으로 여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내가 운이 없어서, 혹은 내게 문제가 있어서 당하는 불행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우리가 각각의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을 땐 그렇다. 그 와중에 우리가 99%란다. 그걸 누가 몰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알고 있는데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인식하지 못하도록 훈련되고 길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수밖에.
아무튼 ‘나’라는 개인이 ‘우리’가 되었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겪는 고통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도나도’ 겪고 있었고 따라서 팔자소관도, 개인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판이 뒤집힌’ 것이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세상이다. 절대다수인 ‘우리’가 아니라 극소수 지배계급의 의지대로 돌아가는 그 세상 말이다.
그런데 뿌듯해야 할 이 구호를 접할 때마다 오히려 기운이 쭉쭉 빠지는 기분을 느껴보신 적 없으신지? 나는 종종 그랬다. ‘그래…. 우리가 99%인데 왜 여태껏 저 1%를 못 이긴 거냐….’ 전설 속 싸움 이야기라고 해봐야 17 대 1인데 하물며 99대 1의 싸움이라니. 그런데 언제나 그 99가 1에 지배됐다니. 1도 못 이기는 99인 우리는 당최 뭐냐 이 말이지….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리가 99라고 아무리 외쳐댄들 공허하기만 할 뿐이지 않겠나.
답이 안 나올 땐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란 말이 있다. 내가 1이라면 99인 상대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소수가 다수를 이길 수 없으니 언제나 내가 다수가 되고 상대가 소수인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10명이 100명과 싸워 이기려면 10대 1의 싸움을 백 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건은 100을 어떻게 각각의 1로 만들어 놓을 것인가이다. 저들 지배계급은 그렇게 할 수 있었기에 99의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수 있었다. 각각으로 쪼개진 99가 하나의 99가 된다면 저들 1은 결코 99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우리 입장에서의 관건은 저들의 역이다. 어떻게 각각으로 쪼개지지 않고 하나의 99가 될 것인가?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쳐대기만 하면 진짜 하나가 되는가? 우리가 그렇듯 저들 자본도 늘 ‘노사는 하나’라고, 회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라고 말하는 99 각각은, 사실 1에 대한 99로서의 ‘우리’보다는 우리 회사, 우리 지역, 우리 동문 등등을 더 진짜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느끼게 하는 요소는 ‘우리’라는 집단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은 다른 집단과는 변별적으로 존재하는 구성원 간의 동질성이고 그 바탕 위에 형성된 것이 바로 그 집단의 (고유한) 문화이다. 1과 99 사이의 변별성은 다름아닌 계급이다. 99가 구호가 아닌 진짜 하나로서의 99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피지배계급으로서의 문화와 그에 대한 공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잠시 돌아왔지만, 이 글은 노동자 문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지면을 통해 노동자 문화의 존재 여부에 관해 얘기했었다. 그러나 실존 여부건 정체성이건 그것을 왈가왈부해야 하는 이유를 수긍할 수 없다면 모두 헛짓이지 않겠나?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노동해방 세상으로 가는 길은 절대다수인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의 독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당연히 자본은 절대로 노동자들이 계급으로 각성하게 해선 안 된다. 바로 이 계급투쟁의 중심에 문화가 있다. 노동자가 계급으로서의 독자적 자기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눈앞에서 절절하게 벌어지는 물리적 투쟁으로 외화 되지 않기에 잘 못 느낄 뿐, 그 이상으로 치열한 계급투쟁 그 자체이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해 한글 말살, 창씨개명 등 문화통치에 열을 올렸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지배의 대상이 스스로 고유한 그들만의 문화를 옹골차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무슨 수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나?
해서 이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를 넘어 99%인 우리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가 무엇인지 답해 보자. 문화적으로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