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17):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17):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변증법이 모순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정하고 존중해도 좋은 차이들도 있다. 타인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지 않는데도 미적 취향 따위가 다르다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박해하는 데에 변증법적 모순의 이름으로 동조할 이유는 없다. 차이를 차별로 바꿔놓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제들이 현실적인 문제이며,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자본주의적 적대관계와 모순들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차이의 형이상학이 이론상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우리의 사고방식만 아니라 무의식적 욕구와 감각까지 자본독재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상황에서는, 미적 취향조차 각자의 입맛에 맡겨놓아도 아무 상관이 없는 중립지대 따위가 아니다.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원리는 미감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무엇을 멋있다고 보는가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행위 목표를 결정할 수 있는데, 그 결정요인들은 오늘날 대체로 자본독재를 통해 생산되고 유포되는 상품들의 물질적 관념적 자극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미감의 문제는 지극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기존 미감에 대한 비판적 자각과 극복, 곧 미감의 해방은 자본독재에 맞선 해방운동의 핵심요소에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민중이 일치단결하여 미감의 통일을 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생활 조건과 경험 차이에 따른 미감의 차이와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자본독재 하에서도 적대와 모순의 자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차이들은 얼마든지 인정과 존중의 대상이 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류가 자본독재로부터 해방된 단계에서야 미감의 차이와 다양성도 진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상태로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격을 압도적으로 규정하는 모순들, 예컨대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 혹은 엥겔스가 명시하는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들은 영구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자본독재를 극복한 단계에서는 그러한 모순들도 소멸하거나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띠게 되어 인정할 만한 차이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변증법이 현실적 모순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다. 현실적 모순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것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는 이데올로기들은, 모순의 극복을 방해함으로써 모순관계를 통한 권력과 이익의 독점을 유지하는 데에 봉사한다. 기득권세력은 끊임없이 계급화해와 사회적 대화 등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적으로 엄존하는 적대와 모순을 마치 없는 것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본독재와 그 토대인 계급모순을 극복할 수 없도록 노동자들의 변혁적 정치적 에너지를 자본독재 내부의 권력투쟁 속에 흡수하려 든다. 노동자정치운동이 노동자국가와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전망을 버리고 체념에 빠지는 순간 자본독재 내부 권력투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필연이다. 자본독재와 계급모순, 그리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구축한 불평등한 지배관계를 요지부동의 자연조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자본독재가 만들어낸 지배적 감각과 욕구들이 얼마나 체념을 거들었느냐 아니면 저지했느냐 하는 것은 정신분석과 심리소설의 관심거리가 될 미세차이의 문제일 뿐이다.

2.

체질적으로 체념을 싫어하는 우리는 변증법적 모순의 특성을 좀더 세세히 살펴볼 수밖에 없다. 헤겔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레닌은 변증법을 한마디로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학설”이라고 규정한다.(철학178) 좀더 상세한 규정에 따르면 “변증법이란 대립물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으며, 어떻게 동일한가(어떻게 동일하게 되는가)−그것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상호전화함으로써 동일하게 되는가−왜 인간의 오성은 이러한 대립물들을 죽은 경직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건적인, 동적인, 상호전화하는 것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관한 학설이다.”(철학54) 그가 밝히는 변증법의 주요 특징들 16가지 가운데에도 “대립물의 통일”, “이들 대립물, 모순된 경향들 등의 투쟁 내지 전개”가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 “대립물의 통일뿐만 아니라 각각의 규정, 각각의 질, 각각의 특징, 각각의 측면, 각각의 성질이 저마다의 대립물로의 이행” 또한 주요 특징들에 포함된다.(철학177-178) 이러한 역동적 논리에 비춰볼 때 제반 영역들 사이에 엄격한 칸막이를 치는 사고방식, 예컨대 ‘인식론적 단절’을 들먹이며 초기 맑스의 이데올로기적 특성과 후기 맑스의 과학적 본질을 엄중하게 갈라놓는 알튀세르의 사고방식은[1] L.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64쪽 이하 참조.변증법 이전의 기계론 혹은 형이상학으로의 퇴행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대립물의 통일⋅상호전화⋅이행 등은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현실적 대상 자체의 특성으로 파악된다. 알튀세르의 분류법상 이미 과학의 영역에 깊이 들어선 맑스는 생산과 소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러한 역동성을 면밀히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생산은 직접적으로 소비이기도 하다’. 개인은 생산 행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지출하고 소모한다. 또한 생산은 생산 수단과 원료의 소비이다. 반대로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 소비 형태인 음식물 섭취에서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생산한다는 것은 명백하다’.[2]K.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김호균 역, 그린비 2007, 59쪽 참조. 이하 ‘요강1’로 약칭. “요컨대 생산은 직접적으로 소비이고, 소비 또한 직접적으로 생산이다. 각자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반대이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 사이에는 매개 운동이 일어난다. 생산은 소비를 매개하고, 소비의 재료를 창출하며, 생산이 없으면 소비에서는 그 대상이 결여된다. 그러나 소비는 생산물들에게 비로소 주체를 창출해줌으로써 생산을 매개하는데, 생산물들은 이 주체에게 생산물들이다. 생산물은 소비에서 비로소 마지막 마무리가 지어진다.”(요강1,60) 이 설명에서는 대립물의 통일⋅상호전화⋅이행이 손에 잡힐 만큼 생생히 드러나지 않는가.

여기서 맑스의 관심사는 변증법적 원리를 생산과 소비라는 현실 문제에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전화⋅이행⋅통일을 그 피상적 대립을 넘어서 실제의 역동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 대상의 살아 있는 본질을 파악하는 관점에서 맑스는 생산과 소비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생산과 소비가 이루는 전체 과정에서 “생산이 실재적인 출발점이고 따라서 총괄적 계기”라는 점을 강조한다.(요강1,63)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욕구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한 유물론적 해답을 내놓는다. “소비가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욕구는 대상에 대한 감지를 통해 창출된다. 예술적 대상은 −다른 모든 생산물도 마찬가지로− 예술 감각이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공중을 창출한다. 따라서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을 위한 주체도 생산한다.”(요강1,61-62) 이처럼 생산의 출발적 지위를 인정한다면, 자본독재에 대한 예속을 강화하는 통속작품을 생산하면서 대중들의 현재 욕구를 알리바이로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민중의 현재 욕구를 근거로 변혁운동의 불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려 애쓰는 패배주의가 번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맑스의 유물변증법에는 주체가 빠져 있다는 식의 헛소리가 설 자리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운동의 주체는 대중의 어떤 욕구를 창출할 것인지, 이를 위해 어떤 변혁모델을 생산할 것인지, 자신의 실천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전망을 제시할 것인지 더욱 고심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3.

생산과 소비는 대립물로서 상호전화⋅이행⋅통일을 이루지만, 과잉생산이나 생산부족으로 양자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아니면 우리는 양자의 모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도 늘 모순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 형식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에 사회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3]K.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478쪽. 이 설명에 따르면 생산력들의 ‘발전 형식’이었던 생산관계들이 생산력들의 ‘족쇄’로 변전할 때 비로소 양자가 모순에 빠진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모순은, 사회 혁명을 통해, 즉 새로운 생산관계 내지 소유관계의 형성을 통해 다시 생산관계들이 생산력들의 ‘발전 형식’으로 전화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주체들의 적극적 역할이 없는 사회 혁명은 없다.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모순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 모순은 주체들의 적극적 운동을 통해 극복될 수도 있다. 혁명을 통해 생산관계⋅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한에서 그렇다. 물론 혁명 없이는 생산관계를 바꿀 수 없다. 생산관계를 바꾸는 것이 혁명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 속에서는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생산력이라도 자본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발전할 수 없다. 더구나 자본증식을 위한 무한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증대하는 유기적 구성은 장기적으로 평균이윤율을 저하시킴으로써 증식의 구조적 한계를 앞당긴다. 이는 생산력 발전의 족쇄로 되며 경쟁과 과잉생산으로 인한 주기적 위기와 함께 혁명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의 생산력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전의 형식이 아니라 족쇄로 만든지 이미 오래되었다. 문제는 생산관계를 바꿀 주체의 형성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측면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적대적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이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처럼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에 이르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출발과 함께 형성되며 자본독재가 유지되는 한 존속한다. 하지만 이 모순 역시 영구불변의 자연상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순이며, 따라서 주체들의 적극적 운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의 폐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계급 자체를 소멸시킴으로써 극복된다.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더라도 자본독재의 유물이 노동자들의 삶을 잠식하고 있는 한 이 모순은 설혹 완화된 형태로일지라도 다양하게 변형되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고 활용하기 나름으로 추진력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노동자국가가 범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기 전 제국주의세력과 대결하는 단계에서는 한동안 계급모순의 적대적 성격이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이때 자본독재 하에서 불가능한 생산력 발전을 통해,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활동을 보장하는 물적 조건을 만드는 것 자체가 계급투쟁을 결정하는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물적 조건은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으로도, 예컨대 보편적 4시간 노동제로도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엄청난 생산력을 가지고도 인류는 보편적 4시간 노동제를 관철하기까지 자본독재와 장기간의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만 아니라 자본독재 하에서도 해소되거나 완화될 수 있는 크고작은 모순들이 있다. 그 대부분은 자본독재의 극복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진보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보수 거대양당에 맞서는 다당제 구상이 관성적 정치공학적 셈법에 빠져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전망을 포기한다면, 그 어떤 방식으로 다시 새판을 짜도 노동자정치는 오늘의 위기가 만들어내는 혁명 에너지를 살려낼 수 없고 기득권정치의 늪에 빨려들고 말 것이다. 이 경우 양당제와 다당제라는 대립물은 자본독재 속의 분파 자격으로 통일될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무슨 일이든 노동자국가 건설의 장기 전략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2023. 7. 3.)

1 L.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64쪽 이하 참조.
2 K.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김호균 역, 그린비 2007, 59쪽 참조. 이하 ‘요강1’로 약칭.
3 K.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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