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16): 모순과 차이의 형이상학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16): 모순과 차이의 형이상학

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차이를 인정⋅긍정⋅존중하라는 요구가 교양 있는 삶의 불문율로 자리 잡은 듯했다. 이 계율을 무시하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단결을 호소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자본을 향한 적대의 칼을 갈자는 말이라도 꺼내면, 세상 물정 모르는 꼰대 취급받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는 자꾸 벌어졌고, 서열체계는 노동계만 아니라 유년기부터의 교육과정과 일상적 소비생활 전체를 규정하며 차별과 불평등의 원리를 끊임없이 우리의 뼛속에 새겨넣어 왔다. 어느새 요지부동으로 굳어진 이 서열체계는 제국주의적 경제성장과 함께 자본독재를 호위하는 최종병기 역할을 해냈다. 차이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지배질서 혹은 자본의 체계적 분할통치 전략과 별다른 마찰을 만들지 않으며 번창해 왔다. 단결투쟁하지 말고 차이를 존중하자는데, 그리하여 각자 차이 나게 살겠다는데, 자본독재가 그것을 권장하면 했지 굳이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서열체계는 결코 존중해선 안 될 차이들만 아니라 사회적 불행과 적대관계들의 발판이기도 하다. 서열체계 속의 어느 위치에 있든 불안과 불행을 떨쳐내기 어려우며, 어디서나 동지가 아닌 경쟁과 차별의 상대 혹은 적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서열체계가 견고할수록 이 적대관계의 에너지가 그 발판인 서열체계 자체나 그 토대인 자본독재를 향해 집중되기 어려워진다. 이는 그동안 변혁전망이 희미해지게 된 한 가지 원인이기도 하다. 또 역으로 변혁전망이 희미해지는 현상은 서열체계와 함께 자본독재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려면, 자본독재의 무기인 경제성장이 흔들리고 그 구조적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서열체계 속에 산재해 있는 적대적 에너지가 자본독재를 향해 집중될 필요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이 활짝 열리고 있는 시점 아닌가. 자본독재의 노골적인 노동적대정책은 노동자민중 내부의 서열과 차이를 넘어선 단결투쟁을 강요하고 있다. 한국사회를 엄습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래도 살 만하다’고 여겨온 시한부 환각을 나날이 허물며 노동자민중을 계급전쟁의 현실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미제국주의 주도의 대중⋅러 적대정책, 혹은 이미 진행중이거나 앞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대량살상전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설혹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전세계 노동자민중이 치러야 할 희생과 고통의 크기는 가늠할 방법조차 없다. 자동화를 비롯한 고도의 생산력 증대는 자본증식의 한계를 돌파하기는커녕, 유례없는 노동력 절약을 통해 대량실업과 평균이윤율 저하를 급속히 불러올 뿐이다. 소련붕괴 이후 30여 년 동안 자본의 폭주를 통해 벌어진 이 토대 차원의 변화로 인해, 이제 주체적 조건의 변화에도 제대로 불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즉 그 동안 서열체계에 적응하여 각자도생의 길에서 소확행을 찾으며 차이의 윤리에 붙잡혀 있던 변혁의 주역들이 드디어 노동과 자본의 근본모순을 직시하고 단결과 조직과 투쟁의 윤리를 절실히 받아들이리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물론 위기의 시대에 부응하는 이론 지형의 근본적 전환이나 주체적 조건의 변화가 이미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단결투쟁을 혐오해온 차이의 문화부터가 ‘심오한’ 형이상학으로 무장되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차이 형이상학에 동조하기 어려운 이유는 충분하다. 우선 우리는 어떤 차이가 차이에 머무는 한 긍정하고 존중하겠지만, 그것들이 억압적 지배관계 속에서 차별의 먹잇감으로 둔갑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이 긍정’의 이념은 차별에 맞선 전쟁에서 ‘차별을 없애라’는 직접적 구호보다 무기력하며, 차별에 맞서는 전략을 생산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차별 문제에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긍정이 아닌 부정을 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차이 형이상학은 부정과 모순을 끝없이 경멸한다. 그 수사법은 선동적이다. “차이는 가벼운 것, 공기 같은 것, 긍정적인 것이다. 긍정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짐을 던다는 것, 가볍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환영, 대용품 같은 환영만을 산출한다.”[1]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140쪽 참조. 이하 ‘차이’로 약칭. 차이의 교리에 따르면 부정은 “상위원리의 그림자, 이미 산출된 긍정 옆에 머물러 있는 차이의 그림자일 뿐이다.”(차이160) 이 차이의 교리를 자본독재의 근본 문제에 적용하자면, 그것은 생산수단과 노동력 가운데 무엇을 소유하느냐의 차이, 즉 계급 차별을 부정하는 짐을 짊어지지 말고 그 짐을 덜고 가볍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엄존하는 차별을 명확히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즉 차별을 부정하려는 해방운동의 윤리를 ‘긍정의 환영, 대용품 같은 환영’, ‘이미 산출된 긍정 옆에 머물러 있는 차이의 그림자’ 등으로 폄하하는 이 선동에 매료되는 사람인들 왜 없겠는가. 한줌의 자본가와 그 대리자!

게다가 이 선동은 인식론적 존재론적 심오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어디서든 차이의 깊이가 일차적이다.”(차이133) “차이는 모순으로 환원되거나 소급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은 깊이가 얕고 차이만큼 깊지 않기 때문이다.”(차이134)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차이145) 이렇게 들뢰즈는 차이를 제일원리로 삼는 형이상학을 구축한다. 그는 추상과 동일성에 근거한 개념적 재현 자체를 집요하게 비난한다. 그러면서 차이 그 자체를 이념, 미분, 다양체, 분화, 개별화, 주름운동 등의 개념들로 심오하고 장황하게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인식론을 부정한다. 어떻게 설명하든 엄연히 차이는 그 자체로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의 차이라는 관계를 말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차이가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기 위해서는 차이와 동시에 혹은 그 이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런데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이 ‘깊이가 얕은’ 모순과 적대에 집착할 뿐 아니라,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제일원리 따위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추상과 동일성에 근거한 개념적 재현을 통해 필요시에는 차이들을 무지막지하게 억눌러 놓는 짓도 피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내놓는 정치적 개념은 “유목적 분배들, 왕관 쓴 무정부 상태들”이다.(차이145) 이에 도달하는 방법과 관련해 그가 말하는 바는 별로 없지만, 다음 주장이 그의 희귀한 실천론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부정을 통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의 규정을 통해, 차이들의 긍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역사는 그 어떤 경우 못지않게 피비린내 나고 잔혹하다.”(차이564) 우리는 차이의 긍정 때문에 역사가 피비린내 나고 잔혹하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사이의 차별 때문에, 이를 유지하려는 지배자들의 교활함과 집요함과 잔인성 때문에, 이에 맞서는 부정과 저항에 대한 지배자들의 무차별 폭력 때문에 역사가 피로 얼룩져왔다고 믿는다. 들뢰즈는 모순을 “프롤레타리아의 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르주아가 자신을 방어하고 보존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짓까지도 한다.(차이565) 이런 주장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를 무장해제하려는 부르주아와 자본독재의 무기로 쓰이지 않겠는가.

3.

들뢰즈는 차이와 분화가 부정과 대립에 비해 일차적이라는 자신의 원리에 따라 맑스를 왜곡한다. “맑스와 헤겔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론] 안에서 사회적 다양체의 중심부에 있는 분화의 범주(노동 분업)는 대립, 모순, 소외 등과 같은 헤겔의 개념들을 대체하고 있다−이 개념들이 형성하는 것은 단지 어떤 외양의 운동에 불과하고, 이 개념들의 가치는 오로지 추상적인 효과들에 대해 타당하지만, 이 효과들은 이미 자신을 생산하는 원리나 진정한 운동과는 분리되어 있다.”(차이447) [자본론]을 어떻게 읽어야 노동 분업이 대립과 모순 혹은 소외와 같은 헤겔의 개념을 대체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이 모순들로 꽉 차 있다’고 단언한다.(자본1,20) 시초축적기부터 맑스의 시대까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본은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곧 적대관계로 일관했다. 그것은 추상적 효과들이 아니다. 이 적대와 분리된 어떤 ‘진정한 운동’이 별도로 있는지는 수수께끼다. 맑스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를 수차례 명쾌하게 정식화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추진하는 동기,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는 목적은 자본을 가능한 최대한도로 증식시키는 것,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최대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협업하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본의 지배에 대한 그들의 반항도 증대하며, 또한 이 반항을 억누르기 위한 자본의 압력도 필연적으로 증대한다. 자본가에 의한 통제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특수기능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대상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자본1,450-451) 이 적대관계는 자본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자본1,1041) 맑스와 엥겔스는 계급간의 모순을 은폐하고 무마하려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운동노선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들은 농민전쟁과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독일 3월 혁명에서 혁명을 배반하는 소시민 내지 중간층의 행태를 각별히 혐오한다.[2] K. 맑스: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 이종훈 역, 소나무 1990, F. 엥겔스: [엥겔스의 독일 혁명사 연구], 박홍진 역, 아침 1988 참조 맑스는 기본적으로 적대를 의식하고 드러내며 이를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적대의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것을 ‘차이와 분화’로 대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순의 변증법으로 돌아간다. 물론 모순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차이를 아예 부정한다거나 세상의 모든 것을 모순에 근거해 인식하고 설명하여 모순의 형이상학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이 단지 환원적 사유일 뿐이어서 차이들 모두를 모순의 공식 아래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을 어쩌면 하나의 원칙에 근거해 설명하려는 시도와도 같은 어떤 것인 셈인데, 본래 변증법은 이러한 것에 반대했다.”(입문105)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모순이 자본독재와의 전쟁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지만, 미일 제국주의에 맞선 대립이나, 성차별을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서 등장하는 불평등 문제를 모두 계급모순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것들은 계급모순과 맺는 긴밀한 관계를 떠나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도 아니다. 변증법은 제반 모순들의 현실적 비중과 상호관계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통해 최적의 해결방안을 찾고자 한다. 이때 엥겔스가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파악하는 모순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주요 당면과제로 남아 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물의 개인적 전유 사이의 모순, 이로 인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대립, 개별 공장 내에서의 사회적 조직화와 전체 생산 내에서의 사회적 무정부 상태 사이의 모순, 특히 공황기에 나타나는 생산수단 및 생산물 과잉과 일자리 및 생존수단이 없는 노동자 과잉 사이의 모순 등이 그것이다. 엥겔스는 자기 시대에 그 극복을 위한 물적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점, 그 극복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점을 역설한다.(듀링300-302) 지금이야말로 그러한 조건이 제대로 무르익은 시대 아닌가.

인류는 아직 들뢰즈가 표방하는 ‘왕관 쓴 무정부주의’ 상태와 거리가 멀다. 노동자민중이, 사회적 약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폭력과 모멸의 응어리들은 아무리 무의식의 밑바닥에 눌러 놓아도 언제나 폭발의 기회를 노린다. 지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불평등한 서열체계는 부정의 논리와 극복의 전략을 요구한다. 자본과 노동, 제국과 종속국,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를 긍정하자는 말은 역사적 고통과 투쟁에 대한 조롱이 될 것이다. 현실과 사유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충실히 감당해내는 사유방법, 즉 변증법적 사유는 그 투쟁의 추상적 배후라는 차이의 이념 따위가 아니라, 가시적 ‘표면영역’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구체적 국면들과 씨름하는 데에서 자신의 본분을 찾을 것이다. 실은 그 표면영역도 우리의 내밀한 욕망 깊숙한 곳에까지 파고들어와 있는 온갖 지배적 이미지와 관념들과 뒤섞여 있어, 그 지배기제를 알 만큼 알고 해방전쟁을 영악하게 수행하려면 부단히 개념의 노고를 바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어떤 형이상학이 아니라 변증법적 사유가 필요하다.

(2023. 6. 26.)

1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140쪽 참조. 이하 ‘차이’로 약칭.
2 K. 맑스: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 이종훈 역, 소나무 1990, F. 엥겔스: [엥겔스의 독일 혁명사 연구], 박홍진 역, 아침 19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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