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154호5-4.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백도경 (노동전선 회원)

천태만상이어도 원리는 하나에 각양각색으로 표출, 표현된다. 이 원리는 시대를 초월하기에 늘 현재같은 느낌이 있다. 《현장과 광장》 7호를 살펴보았다. 길라잡이가 된 참고 서적들은 소중한 자산임과 동시에 전체적으로 부족한 내겐 공부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선 의식과 인식의 오류가 보이기도 했다. 가야 할 우리의 방향도 나와 있었다.

제국주의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으며 제국주의들이 사멸되길 바랐지만, 오히려 제국 간의 상생으로 부활하고 있음과 경각에 대한 대안 제시도 엿보였다. 또 책 제목에서 가늠한 것은 일관되게 맑스, 레닌, 엥겔스의 이름이 어느 파트에서든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들의 통찰력으로 분석하는 시대 역사 흐름은 늘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동반되는 계급은 시종 해결과제로도 나타나는 것을 보며 시대 읽기의 강한 기준으로 오히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의 한 사람에 놓인 역사적 흐름을 단정 짓는 한계가 보인다. 아니 모순으로 말하고 싶다.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가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고 교육, 의료에 무상과 공공 주택을 실시하며 노동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전체 사회에 필요한 부분을 공제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다. 이런 사회가 점점 발전하여 국가도 민주주의도 계급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가 온다는 맑스의 국가론에서 일부분 모순이 보인다. 계급 타파를 외치면서 계급으로 결론짓기에 당연한 모순 아닌가?

영토전쟁이 아닌 원시시대가 지나는 순간부터 작동한 자본은 괴물이 되고 말았다. 왜 그럴까? 모두에게 필요한 자본이 분배가 아닌 극소수의 독점이기에 그렇다고 본다. 독점자본주의로 말살되는 도구화하는 인간의 정체성과 자본 기준의 계급 전쟁은 늘 노동자에게 불리했고, 미력했고, 그래서 운동, 투쟁은 축이 변하지 않는 이상 살아 있는 것이다. 급성장의 대한민국이다 보니 노동의 역사도 길지 않다. 그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속도도 방향도 잃은 채 소모되고 만 것 같다. 즉 계급을 외치고 투쟁을 선포하는 노동자마저 자본에 잠겨있음을 부인해선 안 될 것 같다. 수용과 인정에서만이 개선의 방향이 보이는 것이다.

어느 정권에서든 노동자의 행진과 휘날리는 깃발에 전율을 느끼며 동참하곤 했었다. 지치고, 쉬고 싶고, 빠지고 싶은 나약함과 수동적 자세가 투쟁의 가열참을 좀먹고 있는 것 같다. 자본가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의 인식마저도 간격이 큰 것 같다.

난 노동자 아닌 노동자다. 조직성과 운동 서적에 길들여 지지 않았기에 노동자의 매트릭스가 보이는 것이다. 구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는 과도기는 분명한데 중심이 될 집단이나 개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제자리 맴돌고 있는 것이라면, 투쟁하면서도 운동의 구심을 만드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즉, 노동운동의 대중화다. 직업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십 오년 가까운 시간 속에서 노동자, 노조의 기대와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자, 그럼 어떻게 대중화할까? 우선은 노동자 속 활동가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전환된 인식이 향기 되어 퍼지도록 해야 한다. 대중 속으로 들어갈 준비 태세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제국주의의 노예 이전에 우리 스스로 제도의 노예가 만연해지진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즉, 노동자가 아닌 선거라는 것을 통해 제도를 바꾸겠다는 결심도 이해는 되지만, 노동자는 민중이고 이미 노조 출신이 입법부에 들어가 어떤 결과를 냈었는지 보란 말이다.

진보 보수 좌파 우파 우리를 가두어 두는 용어들은 민중의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것도 아니다. 우린 이 속임수 같은 용어들을 버려야 한다. 그 속에 담긴 이분법적 술수에 휘말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계급이 사라진다. 사멸될 계급이라는 단어도 대중화로 접근하지 말고 상식 보편성으로 쉽게 신뢰있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시간 속에 담기는 속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목표와 방향 설정과 따르는 방법에 있어서 우린 다시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 새 시대가 온다. 맑스의 국가론대로 가는 것 아니다. 소련도 중국도 자본주의인 세상인데 공산주의에 높고 낮음이 어디 있나? 말장난은 우리 스스로 수렁에 빠지게 한다. 평등과 자애로운 세상이 오는데 우리가 맞이할 준비가 안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성찰로 어진 인간이 되면 갈망하는 계급, 국가가 사멸되고 공정한 분배 등이 이뤄지는 세상에 동화하지 않을까? 이 과도기에 맑스와 레닌에 기준하지 말고 우리 선조들의 사상인 홍익인간 정신을 배우는 것은 어떨까?

높은 공산주의가 아닌 우리 선조들의 사상 홍익인간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시스템 속에 넣으면 바라던 세상이 올 것 같다.

여성의 성차별도 마찬가지다. 계급적인 성차별로 임금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쉽다. 사회에서 성의 노리개로 인식하는 이들은 아직도 사회 전반 곳곳에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인식이 변하면 차별이 아닌 유별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유별은 역할의 다름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인 남녀의 역할이 다른데 지배하고픈 계급의식이 성차별을 더 키우는 것 같다.

교육은 무거우면서도 무겁지 않은 분야다. 사교육장에서 10년 이상을 업으로 살았었다.

그 이전에 내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 과정 돌아봤을 때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 지를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많이 유연해진 교육이라지만, 교육의 기본 개념부터 방법까지 아직도 뜬구름 같은 현실이다. 형식적 교육의 질(?)의 향상은 자본주의에 걸맞게 양극화하고 내용적 교육은 아직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도는듯하다. 더하여 출생률의 급감은 교사의 퇴직으로 이어진다. 교육법에 홍익인간 이념이 사라지고 시험 종류가 늘어나는 대한민국의 교육에 탈출구는 있을까? 있다. 원스톱으로 시스템이 이뤄지고 그 안에 홍익인간 이념을 심으면 교육의 뿌리와 틀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요즘 수도권 초등학교 한 반에 20명 전후의 학생들이 있다. 책임 담임제를 도입하여서 한 교사에 10명의 학생으로 틀을 잡고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놀이 수업, 즐기는 수업으로 진행하면 아이들이 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해소될 것이다. 노동에 대한 개념도 그 방식으로 교육하면 삶 속의 노동이 되고 정체성 바로잡는 시기에 풍부한 교육의 길은 있다.

문제는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인식의 전환, 실천적 결의 등 우린 지난 40년 동안 속도에 길들여진 것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방향 설정하고 실천하면 우리가 원하는 아이들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반드시 온다고 본다. 근본이 사라진 시대. 근본을 목표로 설정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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