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1) : 위기시대와 변증법

변증법 연재를 시작하며 – 편집자 주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소장님이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홍승용 소장님의 연재물이 노동전선 동지뿐만 아니라 변혁을 지향하는 많은 동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 연재 글 <위기 시대와 변증법>은 <울산 함성>에 실렸음을 밝힙니다.

홍승용 ㅣ 현대사상연구소

1. 위기의 시대가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임금은 제자리인데 매일 치솟는 물가와 이자 폭탄으로 잠을 설치는 노동자민중에게 경제전문가들은 한동안 어금니 꽉 깨문 채 버텨보시라는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부동산폭탄 신용폭탄이 곧 크게 터진다는 이야기도 그냥 유언비어는 아닌 듯하다. 흔히 떠도는 ‘양털깎기’라는 말은 흡혈귀들이나 좋아할 기만적인 표현이다. 털 좀 깎인다고 아프지는 않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은 평소에도 고혈을 빨려 왔지만, 주기적 경제위기 때마다 뼈와 살을 떼어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로써 유서 깊은 경제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은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경제위기가 직접적으로 노동자민중의 일상을 옥죄고 있다면, 전쟁의 파괴력은 차원을 달리한다. 러-우전쟁은 끊임없이 인명을 살상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여 이미 천만이 넘는 난민을 만들어냈다. 핵전쟁이나 생화학전으로 짧은 기간 안에 인류문명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오늘날 허무맹랑한 망상으로 치부될 수 없다. 환경재앙은 또 어떤가. 지구의 총체적 오염과 온난화 혹은 대규모 식량난만 밀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2, 제3의 후쿠시마가 다시는 어디서도 터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 마당에 핵발전을 더 늘이겠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린가. 


게다가 한국 사회 기득권층의 총궐기로 집권한 극우세력은 ‘노동자 없는 세상’, 즉 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국가권력을 사유재산처럼 주무르고 있다. 법을 앞세운 이들의 파쇼폭력은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갈아 넣으며 자본독재에 복무한다. 반면에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이들의 굴종에는 한계가 없다. 이들이 미-일에 바치는 이권과 국민적 자존심의 대가로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될수록 전쟁위기는 고조될 것이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문제에 부딪칠 때 우리는 해결을 위해 그 원인을 찾는다. 원인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해결책이나 해결의 수준도 달라진다. 문제 해결을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말이면 거리로 쏟아져나와 윤석렬 탄핵⋅퇴진⋅타도를 외치고 있다. 오늘의 경제위기⋅전쟁위험⋅환경재앙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폭증시키며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현정권에 나라를 맡겨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1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오만함과 뻔뻔함, 대책 없는 무능, 반복적 외교 참사, 민주주의 파괴 등을 감안하면, 언제 타도되든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아쉬움도 남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정권이 교체되어 이른바 ‘친노동’ ‘진보’ ‘좌파’라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오늘의 위기가 해소될까? 아마 대놓고 노조 사무실을 털거나 없는 죄를 덮어씌워 정적을 제거할 만큼 눈치 없는 짓을 벌이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굴욕외교를 답습하지 않으려 무슨 일이라도 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남북긴장을 완화하고, 미-일-중-러 등과의 균형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 전쟁위험을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획기적으로 줄여놓을지도 모른다. 기본소득이나 기본대출 등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팍팍한 삶을 조금은 견딜 만하게 바꿔놓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오늘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제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두 산업국들이 성장률 둔화⋅정체의 늪에 빠진지는 오래 되었다. 공황은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한국도 성장률 둔화나 주기적 공황에서 벗어나 있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기업들이 목을 매고 추진하는 생산성 증대는 노동력 절약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본독재 하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자유시간 확대가 아니라 대량해고와 절대빈곤의 양산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크다. 거대 독점자본들과 결합한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에 저렴한 원료⋅노동력⋅지대, 그리고 시장과 영향력 등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과 투쟁은 경제전쟁의 수준을 넘어서 언제라도 무력 분쟁과 대량살상전으로까지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끝날 수 없는 것이다. 핵재앙을 포함한 전지구적 환경재앙 역시 어느 민주정권이 들어서도 해결사 역할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자본증식의 원리를 절대자로 신봉하는 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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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론 정권교체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탄압을 대놓고 노동개혁이라고 우기는 정권을 용납하고 묵인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윤리적 타락의 한 극단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권교체에 머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촛불의 에너지로 탄생한 민주당 정권이 어떻게 개혁의 열망을 깔아뭉개고 기득권세력과 한 몸이 되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G7이 어쩌고 선진국이 저쩌고 했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온갖 차별과 위계는 고스란히 남은 채 고착되었고, OECD 최고의 산재사망률과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노동후진국의 늪은 변함없이 노동자민중의 삶을 결정했다. 이제 도약을 위한 근본적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발상 전환의 첫걸음은 자본증식의 원리를 고정불변의 절대자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경제활동의 목적을 이윤추구라고 보는 자본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문제를 냉정히 직시하는 것이다. 냉정히 돌아볼 때 지금의 무도한 정권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민주주의가 언제 실질적으로 구현된 적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란 본질적으로 국민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국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입법⋅사법⋅행정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입장과 권익을 대변하는지 따지면, 눈을 씻고 찾아도 답을 얻을 수 없다. 노동자정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현실적으로 존재감조차 없다. 이처럼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정치권력에서 배제되고 있는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속임수인가. 단순명료하게 그런 나라는 극소수 자본가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자본독재 국가라고 칭해야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해 발을 뗄 수 있지 않겠는가. ‘삼성공화국’은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닌 것이다. 


제대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자본독재로부터 노동자민중이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국가, 즉 노동자국가로 질적 전환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전환 없이 어떻게 인류공멸도 불사하는 자본독재 권력의 무한증식⋅착취⋅독식 욕구를 합리적으로 제어하고, 인류가 이룩해낸 찬란한 생산력을 공존과 공영의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겠는가. 대량실업⋅대량살상전⋅환경재앙의 위기를 불러내며 공멸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독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이성적 존재들은 근본적 전환을 통해 대안사회로 나아갈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 필요성이 현실성은 아니다. 자본독재를 넘어서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본은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임금인상 요구를 상대로도 무자비한 전쟁을 벌인다. 지금의 위기상황에서 자본독재를 넘어서자는 제안은 그래도 상당히 이성적이므로 환영할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움직임이 눈에 띄면 그 싹부터 자르려 들 것이다. 자본독재의 극복은 특히 자본독재로 고통을 겪고 자본의 출발부터 종말까지 자본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는 노동자민중의 지난한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극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식하며 범인류적 파멸을 초래하기 위한 패권전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누고 누리기 위한 인류사적 해방전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동자민중은 매일 매순간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느라, 또 자본독재 하의 총체적 지배장치들에 얽매여 정작 의식적으로 해방전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저주들도 그러한 지배장치의 한 부분이다. 노동자⋅노동자계급⋅노동자정치⋅노동자국가 등을 금기어로 묻어 버린 학교⋅언론⋅문화물 전체가 자본독재의 지배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이로써 규정되는 주체적 조건도 위기의 주요 요소다. 노동자민중의 삶 속에 스며든 평등 감각의 상실, 위계질서에 대한 무비판적 순응, 고립분산과 각자도생의 체질화 등이 자본독재가 그동안 거둔 성과물들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동자정치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남의 일로 보는 오늘의 일상적 풍경을 불변의 자연조건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자본독재가 경제성장을 무기 삼아 주도해온 계급전쟁의 중간결산물이자, 해방전쟁에 적극 나서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문제다.


성공적인 인류사적 해방전쟁을 통해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건설하게 될 대안사회는 그 누구도 사회구성원들 위에서 멋대로 갑질할 수 없는 평등사회가 될 것이다. 또 누구라도 소외된 노동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류가 이룩해낸 무궁무진한 문화유산과 자연의 혜택을 공유하고 누리며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생산력은 이미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는가.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국가 건설은 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 관문이다. 노동자정치운동의 당면과제는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해 자본독재권력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민중의 의지와 지혜를 효과적으로 모으는 것이다. 

5. 자본독재로 인한 오늘의 위기를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기회로 전환하는 데에는 변증법적 사유방법이 필수무기가 될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방법을 통해 우리는 현존 지배질서를 절대화하자는 유혹을 경계할 수 있다. 자본독재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는 오기도 기를 수 있다. 만물의 변화를 당연시하면서 자본독재가 만들어놓은 지배장치와 그 부산물들만은 영구불변의 천륜처럼 떠받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떨쳐버릴 길 없는 본성처럼 우리의 사고방식과 감각과 욕구 혹은 무의식과 초자아에 달라붙어 있는 습관들에 대해서도 그 형성의 조건을 따지고 변화가능성을 타진하며 해방전쟁의 주요 전쟁터로 바꿔놓는 데에는 변증법적 감각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지배적 고정관념이나 사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당면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근본적 해답을 찾아가는 실천적 사유의 노동이야말로 변증법의 요체라는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방법의 훈련 없이는 노동자정치의 성공도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도 요원할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변화와 함께 현실을 파악하는 사유방법의 변화에도 주목한다. 양 측면을 결합하여,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맑스)이라는 점에서, 헤겔을 건너뛰고 변증법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관념론적으로 ‘신비화된 껍질’까지 삼킬 이유는 없다. 오히려 헤겔에게서 ‘합리적 알맹이’를 받아들여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그 세포단위에서부터 총체적 발전과정과 귀결에 이르기까지 들춰내는 맑스의 유물변증법에 주목하는 것이 좀 더 생산적일 것이다. 사실 󰡔자본론󰡕은 유물변증법의 현장이다. 그래서 레닌은 헤겔의 논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 실은 레닌의 저술들 전체가 또한 유물변증법의 현장이며, 자본독재와의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무기고이기도 하다. 


이들 위대한 변증법 이론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또 필요하면 아도르노⋅루카치⋅마오쩌둥⋅지젝 등의 조언도 참조하고, 가끔은 알튀세르나 들뢰즈 등의 성가신 훼방에도 대응하면서 인류사적 해방전쟁의 전쟁터 한 모퉁이에 뛰어들고자 한다. 함께할 전사들도 없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우리의 전투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미리 예단하기 어렵다. 독재자들도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시대니 변증법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자. 그러나 방향을 잃지는 말자. 우리의 일차목적지는 노동자국가이며, 최종목적지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다. 물론 평등과 풍요도 자명한 실체가 아니다. 그 의미에 대한 시비도 소홀히 하지 말자. 변증법은 목적의식 앞에서도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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