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용 ㅣ 현대사상연구소
2. 변증법은 ‘정-반-합’이 아니다
1. “만물은 유전한다(panta rhei)”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변증법의 한 가지 본질적 특성을 나타낸다. 맑스는 이 특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합리적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지 및 그 이론적 대변인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안겨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불가피한 파멸’ 내지 ‘일시적 측면’을 파악하며,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가 계절 변화나 자본독재 하의 형식적 정권교체 따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불변의 자연상태로 전제하는 것과 달리, 맑스는 그것의 ‘일시적 측면’을 직시함으로써 인류사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론적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맑스의 이러한 전제 전환은 알튀세르가 청년기 맑스의 주요 저술들을 과학의 영역에서 몰아낼 심보로 써먹은 ‘인식론적 단절’ 따위의 구호로 퇴색될 수 없다. 그것은 실로 ‘인류사적 전제 전환’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맑스가 헤겔로부터 받아들인 ‘합리적 형태의 변증법’을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어쩌면 당연해 보일 이야기를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 생존투쟁과 욕망회로에 갇혀 있는 한 대개 현존하는 자본독재를 불멸의 질서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 따위는 꿈도 꾸지 않기 때문이다. 현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아직도 30%를 넘는 것으로 나오는데, 지지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개혁 즉 노동탄압이다. 그만큼 노동자민중에 대한 자본독재의 분할통치 전략이 악성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즉 노동자민중 자신이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양산 등을 통해 고착된 불평등과 서열구조를 체질화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제도교육과 보수언론 혹은 노동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문화물들만 아니라, 가격으로 차등화된 상품들 자체가 노동자민중의 의식과 감각과 욕구를 불평등의 감옥에 가두고 길들이는 자본독재의 무기다. 서열의 사다리에 매달려 남들보다 한 칸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무의식적 충동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에게, 서열관계를 허물어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말은 ‘멋있기는 하나 현실성 없는’ 남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이처럼 불평등구조에 대한 순응적 태도가 널리 퍼져 있는 주체적 조건은 자본독재 하의 역사적 산물이지만, 역으로 그런 주체적 조건이 강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한 자본독재도 허물어지기 어렵다.
자본독재를 떠받치고 있는 오늘의 주체적 조건 조성에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죽이고 파묻어온 지적 풍토도 한몫 거들었다. 현실사회주의의 패배 이후 진보 학계 일각에서 총애를 받아온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노골적 반-헤겔주의는 변증법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보다 오히려 변증법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서 청산하는 일에 기여했다. 그 부수효과로는 예비노동자인 학생들에게 헤겔⋅맑스의 원전과 씨름하는 노고를 피하도록 부추긴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반-헤겔주의 유행병이 퍼지기 이전부터도 변증법을 몇가지 공식으로 묶어 박제화하는 교과서식 논의방식이 이미 변증법의 생명력을 고갈시키기는 했다. 즉 ‘대립물의 통일’, ‘양질전환’, ‘부정의 부정’ 등의 공식을 습득하여 현실 문제들에 적당히 적용할 줄 알면 변증법에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게으른 태도가 ‘어떤 것으로도 제약을 받지 않는’ 변증법의 비판적 혁명적 본질을 고사시켜온 것이다. 변증법은 단순한 공식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정-반-합’으로도 요약되지 않는다.
2. 변증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헤겔과 ‘정-반-합’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헤겔 자신은 ‘변증법의 탄생 현장’이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정신현상학에서 정-반-합이라는 공식을 피했으며, 도식적 형식주의적 사유방법을 신랄하게 야유한다. 그는 형식주의적 사유방법과 관련해, “모든 천상의 것과 현세의 것, 모든 자연적 형태와 정신적 형태들에 몇 가지 보편적 도식의 규정들을 갖다 붙이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분류하는 이 방법이 산출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조직에 대한 뻔한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또 그는 그러한 방법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을 생략하거나 감춰버린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헤겔은 그러한 방법을 “써먹기 손쉬운 것인 만큼이나 금방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이 알려지면 그것을 반복하는 일은 이미 들통 난 마술을 반복하는 것처럼 참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물론 현실의 복잡하고 풍부한 문제들을 고정된 몇 가지 도식에 맞춰 단순히 파악하는 태도는 맑스나 레닌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것의 ‘불가피한 파멸’과 ‘일시적 측면’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도식이나 공식들의 불변적 타당성을 고집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짓 아니겠는가. 엥겔스는 궁극적인 과학에 도달했다고 자랑하는 뒤링을 무자비하게 조롱하며 변증법적 인식의 무한한 과정적 성격을 강조한다.
도식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인식의 과정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추상적 개념을 버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때그때의 개별적 인상이나 직접적 경험에만 의존해서는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사물들의 변화를 일일이 따라가며 어떤 의미 있는 말을 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헤겔은 이처럼 “우연적 속성들이나 술어들을 계속 따라다니는”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표상적 사유의 본성’이라고 규정한다. 또 그는 본질을 구분하고 추상하는 오성의 활동, 즉 개념적 사유를 “가장 경탄할만하고 가장 위대한, 또는 절대적인 권능의 힘이자 노동”이라고 평가한다. 맑스 역시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한다. 그가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시적 측면’ 및 ‘불가피한 파멸’을 논증하는 데에 활용하는 추상적 인간노동, 가치, 잉여가치, 가변자본, 불변자본, 잉여가치율, 이윤율, 유기적 구성 증대, 물신주의, 전형, 평균이윤율 저하 경향, 과잉생산과 공황 등등의 핵심어들은 자본주의 경제영역의 표면에서 누구나 직접 직관할 수 있는 현상들이 아니라, 개념적 추상과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질적 문제들이다. 이 점에서 추상과 개념을 통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다가갈 중요성을 예컨대 ‘경험주의’라고 비하하고 직관이나 ‘징후독해’ 따위를 추켜세우는 반-헤겔주의 인식론들의 효능에는 심각한 문제가 따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협소한 도식주의만 아니라 끝없는 표상적 사유의 늪을 피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이때 추상과 개념은 필수적인 무기다. 그러나 개념이 사태와 거리가 먼 도식으로 굳어질 위험도 인정하며, 따라서 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필수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변증법에 대한 아도르노의 규정은 참조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은 “개념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를 통해 개념질서를 수정하는 기술을 수행하는” 사유방법이다. 또 그것은 “사유방법이지만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방법의 단순한 자의를 극복하고 개념 속에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선적인 것은 ‘대상들의 존재’ 혹은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이다. 반면에 사유⋅개념⋅개념질서⋅사유방법 등은 대상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대상에 근거해 수정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수정의 가능성 및 필요성을 전제할 때, 어떤 개별 인식이든 고정불변의 절대 진리로 확정될 수 없고, 더 나은 인식으로 나아가는 부단한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경우 비판적 혁명적 사유에 대한 제약으로 기능하는 직접적 검열이나 이해관계만 아니라 사유방법 내지 사유도구 자체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을 끌어들이면서 ‘대상에 다가갈 자유’를 강조한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개념틀에 의지하지 않고는 사고하지 못하는 정신박약 상태를 극복하는 것도 변증법적 사유의 자유에 필요한 것이다.
3. 대상들의 ‘살아 있는 본질’에 자유로이 다가가는 변증법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가동할 경우, 기존의 어떤 지식이든 정보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자본독재가 무한반복으로 주입하는 고정관념들, 예컨대 ‘경쟁력을 갖추어야 살아남는다’, ‘남보다 한발 앞서가야 잘 살 수 있다’, ‘이웃과 동료들은 경쟁상대 혹은 적이다’, ‘평등은 인간의 본성과 어긋난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등등 삭막하고 살벌한 교리들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 지배적 본질을 비판하며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이론들에 대해서도 한줄 한줄 그 현실적 타당성을 검증하면서 읽고 소화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를 총체적으로 밝혀내는 점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결함 없는 절대적 진리들만으로 완결된 것은 아니며, 오늘의 조건에 근거해 새로이 채워야 할 공백과 수많은 논쟁점들을 포함한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자본독재를 극복해가는 인류사적 전쟁을 의식적으로 벌이는 전사들이라면 우선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든 각자의 위치에서 전쟁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 전투방식일지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는 주체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어떤 권위에 의존해 누가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은 금물이다. 반대로 대상의 ‘살아 있는 본질’을 놓고 계급장 뗀 채 논쟁하는 민주적 운동문화는 필수다.
과학적 인식을 강조하는 알튀세르에 맞서 랑시에르는 ‘감각의 재분할’을 정치구호로 내세운다. 인식의 변화만으로는 사회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경험에 근거해 감각의 변화 쪽에 강세를 옮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독재권력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현재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조건을 바꾸는 과정에서 인식이 우선이냐 감각이 더 급하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툴 일은 아니다. 사고방식과 감각만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과 초자아 등도 모두 전쟁터다. 그리고 어디서 시작되든 이 주체적 요인들의 변화는 모두 자본독재의 극복과정에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미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삶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우리는 멋있는 것을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쏟아붓기도 한다. 따라서 무엇을 멋있다고 느끼느냐 하는 미감의 문제는 결정적으로 정치적이다. 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욕구 문제와 직결되며, 여기서 행동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자본독재를 극복하는 데에는, 그 극복의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인식과 함께 그 극복 운동이 좋다 혹은 멋있다고 여기는 감각과, 극복을 원하는 강렬한 욕구, 나아가 극복을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려 드는 행위까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이 주체적 요인들의 변화 가운데 불필요한 것은 없다. 그렇더라도 견고한 자본독재의 벽을 허무는 출발단계에서는 인식 혹은 사고방식의 변화가 비교적 효과적일 듯하다. 인식의 변화 없이는 감각이나 욕구의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적 운동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을 폭넓게 공유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고방식부터 공유해가는 것이 자본독재의 종말을 앞당기는 데에 특히 바람직한가? 아마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차별을 당연시한다면 자본독재를 거부할 이유도 별로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측면에서 같아지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아니라, 사회적 지배관계를 극복하자는 것이 평등의 요체다. 엥겔스는 평등 문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평등에 대한 현대적 요구는 봉건적 제약들에 맞선 부르주아지의 평등한 상업적 권리를 위한 것으로 등장하지만, 곧 계급철폐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로 발전한다. 엥겔스와 맑스는 계급철폐만 아니라 민족해방과 분업에 따른 차별의 극복도 추구했다. 평등은 그들의 실천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평등의 궁극적인 단계는 지배관계 자체가 사라진 사회다. 그 실현 가능성을 그들은 파리코뮌에서 확인했다. 그들은 파리코뮌이 “사회의 심부름꾼이 사회의 주인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절대적으로 확실한 조치들을 취했다”고 강조한다. 모든 주요 공직을 위한 보통선거, 주민소환, 공직자의 특권 배제, 나아가 코뮌정부의 오류를 포함한 모든 정보의 공개, 서열체계 거부 등이 그러한 조치들이다. 파리코뮌의 정신을 현대사회에 살려내는 노동자민중의 민주국가를 통해서만 자본독재 권력의 폭주를 제어하고 지배관계가 사라진 평등사회로 도약해 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의 편협하고 딱딱한 위계적 사고방식⋅감각⋅욕망에 근거해 평등사회의 가능성을 철지난 망상으로 취급하는 자본독재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변증법적 사유의 비판적 혁명적 본성을 자유롭게 발현해야 할 것이다. 변증법을 ‘정-반-합’ 따위의 공식에 묶어놓지 않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