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8호 11-6 좌파는 폭력적이다. 과연 그런가?

전우재 l 대구경북 노동전선

널리 알려진 통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좌파는 잔인하다. 좌파는 권력에 미쳐 있다. 좌파가 권력투쟁을 하면 많은 희생자가 생긴다. 교과서, 교양 서적, 텔레비전 프로그램, 유투브는 역사 사건을 들여다본다. 그 매체들은 나름대로 좌파라는 집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선정한다. 그들이 선정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8월종파사건이고, 대숙청이다. 대중은 매체가 남겨준 배경지식을 통해 좌파를 본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자기들끼리 분열하고 뭉치는 집단을 본다. 대중이 인식하는 좌파는 커뮤니티 안에서 우위에 서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분열하고, 권력투쟁을 일삼는다.

자본가계급과 국가기구는 좌파보다 배는 폭력적이다. 활동가는 국가 기구가 가진 폭력성을 알려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대중은 좌파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고, 그를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도 마다한다고 생각한다. 활동가는 역사 사건만을 제시해서는 대중들이 가진 인식에 대응할 수 없다. 이런 인식을 가진 대중을 상대로 자본가계급이 가진 폭력성을 단지 폭로하기만 한다면, 폭로는 변명이 된다. 대중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를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대응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 어디서부터 온 건지를 알아야 바람직한 대응이 된다.

좌파가 벌인 투쟁은 과연 좌파를 대상으로 하는가

세계노동운동사 53장은 미국 내 노동조합이 어떻게 분열하고, 투쟁했는지를 다룬다.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된다. 미국 독점자본계급은 세계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침략적인 방향으로 적극 나아간다.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자본가계급이라도 혼자서 할 수는 없다. 미국 국민들이 보내는 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장악하기 위해 온갖 수를 쓴다.

“700만의 조합원을 가진 AFL은 문제가 없었다. (…)AFL을 지배하는 노동제국주의자들인 극보수세력 그린 관료들은 당시 막 탄생한 WFTU와 마찰을 빚고 있었다. 그후로 내내 그들은 전쟁준비의 무력을 전면에 내세워 왔다. 그러나 CIO는 사정이 다소 달랐다. 이 조직은 미국과 캐나다에 약 600만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으며, 확실히 진보적인 색채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조합에는 튼튼하게 다져진 (AFL에는 없는) 좌익이 었었으며, 이들이 조직의 20%를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W.Z.포스터, 『세계노동조합운동사 2』, 백산서당, 1987, p. 297

AFL은 미국노동연맹, WFTU는 세계노동조합연맹을 말하고, CIO는 산별노조회의를 말한다. AFL는 새뮤얼 곰퍼스가 지도하는 노동 단체이다. 서울경제는 새뮤얼 곰퍼스를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휼륭한 까닭은 “실질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만이 유일한 노동운동의 목표”라고 믿어서다. 새뮤얼 곰퍼스는 “경제적 조합주의에 근거를” 두고, “정치적 또는 사회개혁적 운동이나 경영참여를” 일절 하지 않은 노동운동가이다. 경제지가 극찬을 주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미국의 담배공장 노동자였던 새뮤얼 곰퍼스는 지난 1886년에 현재까지 존재하는 미국노동총동맹(AFL)을 창설, 무려 37년 동안 위원장직을 역임했다. 그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사회개량과 계급투쟁적 노동운동을 다 배척하고 경제적 조합주의에 근거를 둔 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을 일관성 있게 주장했다. 곰퍼스는 노동자의 실질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만이 유일한 노동운동의 목표라고 믿고 정치적 또는 사회개혁적 운동이나 경영참여를 일절 하지 않았다.”
김승옥, 「[기고] 한국의 곰퍼스를 기대한다」, 서울경제, 2005. 09. 06, https://www.sedaily.com/NewsView/1HOVKMMLCX

노동운동이 가지는 의의는 임금 인상과 복지 향상만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 향상은 중요한 과제이고, 달성해야 할 목표이다. 저 목표가 덜 중요한 목표라는 뜻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이 갈수록 저하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에 있다. 자본주의체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은 공황과 전쟁이다. 무정부적 생산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경제공황과, 그 공황으로 비롯되어 나타나는 전쟁과 같은 극단 상황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노동자계급은 전쟁을 막고, 공황을 막아야 생활수준이 퇴보하는 걸 막을 수 있다.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막고 공황을 막아야 한다.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리주의적 노동운동”을 하게 된다면, 절반의 목표밖에 성취하지 못한다. 나머지 반을 모두 성취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또는 사회개혁적 운동”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곰퍼스를 포함한 미국 내 우익 노동운동가들은 그러지 않았다.

곰퍼스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 향상을 토론한다면 곧장 벽에 부닥치게 된다. 곰퍼스가 주장하는 논리를 따라가면 공황과 전쟁은 재난이 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지진이 되고 해일이 된다. 무정부적 생산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만성적인 수요공급 불균형은 곰퍼스주의가 비중을 두는 임금투쟁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곰퍼스주의가 가진 한계는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데 있고, 향상시키지 못하는 데 있다. 임금을 올리고 복지 수준을 높여 생활 수준을 높이자는 주장은 바람직하다. 자본가계급과 맞서는 전쟁에서 노동자계급이 힘을 합쳐 우세를 점한다면 더 많은 임금과 복지를 요구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임금 인상이란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힘들게 공략한 임금 인상이란 요새는 기대와는 다르게 해변가에 지어진 모래성이다. 자본가계급은 불환지폐를 찍어대거나 찍어대지 않거나 하는 방법을 동원한다. 자본가계급은 국가기구와 결탁해 노동자계급이 받아가는 임금을 삭감한다.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은 물가 장난질에만 있지 않다. 자본주의라면 응당 발생하는 공황은 대규모 실업을 동반한다. 서로 다른 두 자본가집단이 국가 단위로 대립하며 일으키는 전쟁은 수많은 노동자계급의 목숨을 앗아간다.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생활 수준은 다시 떨어진다. 밀려오는 파도에 해변가가 잠긴다. 공들여 공략한 요새의 모래벽은 무너지고 만다. 곰퍼스주의는 생활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 행동하는 까닭에, 생활 수준을 끌어올릴 수가 없다.

임금투쟁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임금투쟁은 중요하다. 살아야 투쟁이고 무엇이고 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가장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다.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통해 조직을 경험하고 승리를 경험한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벌이는 전투에서는 어느 경험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축적된 경험은 다음 전장에서 강력한 신무기로 작용한다. 노동자계급은 조직되며 단결하고, 고취된 계급 의식으로 무장한다. 자본가계급이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는 강고한 성이 된다. 이제 생활 수준을 진정으로 끌어올릴 준비가 끝났다. 노동자계급은 공황과 전쟁을 멈추어, 생존만이 아니라 높은 생활 수준을 요구하고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위 문단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일반론적이고, 추상적일 수 있다. 상황과 정세에 따라 당면한 과제, 설정해야 할 목표는 달라진다.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움직임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의욕을 갖고 조직되어 행동했을 때 가능하다. 자발적인 참여는 충분한 토론과 설득을 통해 이끌어 낼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덮어놓고 같은 길을 가자고 할 수는 없다. 본문은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겠다는 진영과,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진영이 대립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곰퍼스가 지도하는 노동조합은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좌파들은 평화애호 운동을 벌이며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곰퍼스와 좌파들이 대립한 이 사건은 좌파 내 대립이 아니다. 이 사건은 ‘좌’ ‘우’파가 대립한 사건이다. 자본주의가 지속될 때 이익을 얻는 계급과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을 때 이익을 얻는 계급은 다르다. 명백히 계급적 이익이 대립하는 세력이 서로 투쟁하는데, 이를 내부 분열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좌파 분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좌우파 분열

자본가계급은 어디가 틈새인지를 잘 알고 있다. 자본가계급은 지배계급의 자리를 놓고 노동자계급과 전쟁 중이다. 사랑과 전쟁에는 반칙이 없다. 그래서 자본가계급은 모든 수단을 쓴다. 자본가계급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되도록 일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계급으로 위장한 누군가를 침투시키거나, 기존 활동가를 회유하거나, 뜻있는 청년으로 하여금 “이 길이 진정 노동자계급을 위하는 길이다”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의도를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자본가계급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활동가는 나타나고야 만다. 좌파 분열처럼 보이는 역사 사건은 좌우파가 대립한 역사 사건이 된다. 위 문단에서는 미국에서 나타난 한 사건만을 다루었지만, 위와 흡사한 사례는 『세계노동조합운동사』나 『세계사회주의운동사』를 비롯한 역사책을 통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좌파의 분열처럼 보이는 사건은 그 겉껍데기와 내용물이 다를 수 있다. 현상과 본질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역사 사건 또한 예외가 아니다. 대중이 생각했을 때 좌파들이 벌이는 권력투쟁이 실제로는 좌우파가 대립한 사건일 수 있으며, 표리일체하게도, 실제로 좌파들이 벌인 권력투쟁일 수 있다. 선배 활동가들이 벌인 대립이 과연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는 후배 활동가들이 감당해야 할 숙제다. 선배 활동가들이 토론을 벌인 그 당시에는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후대 활동가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 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면, 건설적인 토론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후배 활동가들이 짊어질 숙제는 하나 더 있다. 선배 활동가들이 벌인 대립이, 좌파 내에서 발생한 토론인지, 좌우파가 벌인 대립인지도 분석해야 한다.

모든 대립이 부정적이라고 여기게끔 하는 자본가 계급

대중은 모든 대립이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가계급은 그런 인식을 조장한다. 자본가계급은 모든 대립과 투쟁이 혐오받기를 원한다. 구체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을 향한 투쟁과 대립이 부정적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대중은 이런 환경에서 숨쉬며 좌파를 바라본다. 자본가계급을 향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투쟁인 까닭에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사상과 이념을 논하는 토론은 대립인 까닭에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대중은 좌파들이 권력에 목말라 폭력성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자본가계급은 성공했다. 그 성공은, 활동가들에게는 다행히도, 절반의 성공이다. 대중은 좌파, 노동자계급 활동가들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본가계급이 표출하는 폭력성이 무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목발을 짚고 꽃가게를 경영하는 총상 피해자 이세영 씨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그 사태에 대한 인식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나는 구둣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두들겨 맞고 나서, 총을 맞고 나서, 총에 맞고 나서, 이 사태가 무슨 사태인지를 알았다. (…)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를 지금도 알 수 없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목발에 대해서 묻지 않는가?”(…) “군인과 총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말하지 않았다. 내 아이들이 군대 전체와 국가 권력 전체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김훈, 「망월동의 봄」,『자전거여행 1』, 생각의 나무, 2007, p. 53-54

상황이 활동가들에게 불리하기만 한 건 아니다. 대중은 국가기구가 왜 존재하는지, 군대가 왜 존재하는지 잘 알고 있다. 폭력을 혐오토록 만드는 자본가계급의 교육은 자본가계급 스스로가 너무나도 폭력적인 까닭에 장기적으로는 자본가계급에게 불리한 교육이다. 대중이 가진 인식은 정교하거나 구체적인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활동가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 나온다. 활동가들이 자본가계급이 가진 폭력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는, 단지 역사적 사실만을 언급하는 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대중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막연한 수준의 인식을, 좀 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하게끔 유도하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

진실을 폭로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러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대중에게 밝혀야 하다. 중요한 지점이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제시해야 국가기구와 자본가계급이 가진 잔혹성을 폭로할 수 있다. 이 선에서 만족하게 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폭로는 변명이 된다. 대중은 좌파가 가진 폭력성을 무언가 구체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은 좌파가 폭력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자본가계급이 무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중은 자본가계급이 폭력적이고, 국가 기구가 잔인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나 막연하다.

활동가들은 자본가계급이 가진 폭력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좌파가 폭력적이라는 누명을 벗겨야 하는 임무가 있다. 자본가계급이 폭력적이라는 점을 단지 지적해서는 대중을 설득하기 어렵다. 왜 대중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이를테면 좌파 독재자로 언급되는 인물들이 “유별나게” 권력욕이 강했기 때문에 권력투쟁을 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좌파 활동가로 언급되는 인물들이 “특수하게” 남들 위에서 대장놀이를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중들은 자본가계급이 잔인하다는 폭로를 “피장파장”으로 인식할 수 있다.

활동가 조직 내에서 발생한 분열이 좌파 내 분열이 아니라 좌우파의 대립인 경우가 있었다. 자본가계급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안이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자본가계급은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자본가계급은 좌파를 폭력적이라고 매도하고, 대중이 좌파와 폭력을 함께 혐오토록 만들었다. 자본가계급은 좌파를 매도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좌파는 자본가계급이 무해함을 입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자본가계급 제 자신이 대단히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행할 작업, 즉 자본가계급이 가진 폭력성을 알리는 작업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대중들이 좌파에 가지는 인식은, 그 인식이 타당한 경우도 있겠으나, 타당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가진 오개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먼저 탐구해야 한다. 대중들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 사상가, 교과서, 철학이 주장하는 논리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논리가 어느 지점에서 제 풀에 쓰러지는지를 깊이 사유해야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정교한 모델이 탄생할 수 있다.

좌파가 내부중상을 일삼고 폭력적이라는 인식은 부정확하고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인식하게끔 하는 모종의 근거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탐구하고,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상가, 대중매체, 철학이 주장하는 논리를 따라가 대응해야 한다. 대중을 진정으로 설득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탄생한다.

참고자료
W.Z.포스터, 『세계노동조합운동사 2』, 백산서당, 1987
김승옥, 「[기고] 한국의 곰퍼스를 기대한다」, 서울경제, 2005.09.06, https://www.sedaily.com/NewsView/1HOVKMMLCX
김훈, 「망월동의 봄」,『자전거여행 1』, 생각의 나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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