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4호7-1.낙인이 찍힌 사람들 – 그래 ‘자유’ 좋다, 근데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지 않느냐!

김파란 l 농민

공산주의는 맑스나, 레닌, 스탈린이 만든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의 등장은 노동자 계급의 성장을 배경으로 한다. 맑스도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공산당 선언》을 한 것이다.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은 진보적 부르주아의 노선인 민주적 공화정을 넘어선 사회적 변화를 요구했다.

언젠가 정치적 공산주의의 기원이라는 게시물에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자세하게 올렸다. 이것을 짧게 설명하면 프랑스 혁명 후 ‘혁명’이라는 혼란기를 겪게 되니까 농업 생산이 급감한다. 특히 파리같은 대도시는 농촌에서 식량을 공급 받으니까 식량 문제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식량 공급이 줄어들자 시장에서 곡물가격이 폭등하고, 이 폭등을 부추켜 매점매석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로 인해 죽어가는 도시 빈민들이 속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 아는 쟈코뱅의 지도적 인물인 로베스피에르가 ‘최고가격제’라는 것을 실시한다. 곡물가격이 일정수준까지만 올라갈 수 있도록 가격 ‘상한선’을 정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부자들이었다. ‘우리가 내가 번 돈으로 곡물 매점매석해서 한탕 하려고 하는데 이걸 왜 법으로 금지하느냐’며 엄청난 저항이 일어났다. 혁명의 주체였던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브루주아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자유’를 ‘최고가격제’로 제한하는 것이 된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돈으로 사서 팔 자유를 얻으려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는데 혁명으로 바뀐 세상에서 바로 이것을 제한하는 게 말이 되냐는 논리의 저항이 강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굶어 죽어가는 빈민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유’ 다 좋다, 좋은데 사람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저런 소유의 자유는 일정 정도 제한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가 들고 나온 것이 ‘생존권’이라는 권리다. 그 당시 ‘소유권”이라는 것은 정말 곤란해서 소유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소유권’에 대해 논쟁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로베스피에르는 ‘생존권’이라는 제한을 두자라는 입장이었다. 이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소유권’자체는 절대로 건들릴 수 없다는 것이었고, 왼쪽에 있었던 사람들이 오늘날에서 보면 공산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평등을 위해서 ‘소유권’을 강하게 제한해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 왼쪽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서 급진 자코뱅이 결성되는데 이 지도자가 부르주아 민주적 공화주의를 넘어선 사회적 변화를 요구했던 프랑수아 바뵈프였다.
19세기 초, 공산주의는 바뵈프의 주장을 계승한 정치 노선을 의미했다. 바뵈프는 1796년 평등주의자 음모 사건으로 처형되었지만 1828년 이후 바뵈프 노선을 계승한 필라포 부오나로티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비밀결사가 잇달아 등장했다. 맑스주의를 강의하는 한형식씨가 이번에 출간한 책에 의하면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라는 제목도 바뵈프의 <평등한 자들의 선언>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맑스는 바뵈프의 두 계승자인 부오나로티와 테오도그 데자미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영국에서도 노동자 운동이 나타났다. 1840년대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고, 3년간의 흉년이 겹쳤다. 그 유명한 아이랜드 대기근이 발생해 수백만 명이 죽거나 외국으로 이주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급속하게 발전했는데도 한편에서는 빈곤이 만연하고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풍요에서 오는 빈곤’이었다. 프랑스, 영국에 이어 독일도 급속하게 산업화하면서 노동자계급이 빠르게 늘어났다. 노동자계급이 빠르게 늘어났다는 것은 자본가들의 착취가 그만큼 확대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적 상황은 급진적 성향의 사회 변혁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들었고 기존 체제는 이들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이들을 추방했다.

인혁당 사건을 보면서 과연 이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맑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권력을 가진 사람(집단)이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 모두를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어 학살했다.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는 2022년 현실에서도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정치적 적수들에게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공산주의자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권력이 반대파를 없애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에서 몰아내는 방법으로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젠 우리 사회도 공산주의자가 싫든 좋든, 권력자의 칼이 아닌, 진짜 공산주의자들의 견해, 목적 의도를 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남한에서 자유주의 즉 ‘자유’는 신성불가침이다. 특히 4’19혁명을 겪은 세대의 지식인들에게는 자유는 이념이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자유와 다르다.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는 위의 프랑스처럼 ‘소유’가 가장 중요한 토대다. 소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보다 가진 것이 많으면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럼, 공산주의자는 누구인가? 역사적으로 보면 공산주의자들은 권력과 부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노동자계급이 절대 다수인데 이념적으로는 대부분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 이념이 빈곤한 것의 제일 큰 원인은 전쟁과 분단의 영향이겠지만 사회 밑바닥 계층의 삶과 고통이 제대로 분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득권의 “안정’과 ‘성장’ 이데올로기가 ‘자유'(소유)라는 이름으로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도 인민의 해방, 즉 자유다. 종교도 자유를 부르짖는다. 예컨대 불교의 해탈은 중생의 자유를 말하고 성서에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로 세상 모두의 ‘자유’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껏 자유주의자들이 외친 자유로 만들어진 세상은 ‘각자도생’의 이기주의가 미화된 세상일 뿐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 김건희씨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뭐 어때 지가 번 돈으로 명품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신발을 사는 게 무슨 흠이야…아니 자랑이지…
이렇게 이기적이고 권력을 쥐고 있는 부자라면 오늘날 최고의 자랑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돈과 권력 외에는 그 어떤 자부심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도처에 영혼은 없는 ‘돈’ 과 ‘권력’의 괴물만이 미화된 사회가 한국이다. 이것이 지식인들이 그렇게 외친 ‘자유’가 만든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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