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ㅣ 농민
이젠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2018년 자한당 김성태가 국회에서 출산주도성장이라는 말을 했다. 그때 도대체 저것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헛웃음만 났다. 헌데 2020년에는 10살, 8살 형제가 당한 참상을 보며 언론들이 그 책임을 비정하고 무책임한 부모에게서 찾으려 하는 모습을 보며 허탈했다.
한국 사회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쩜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맹자가 뭐라고 했나? 자식을 버린 부모는 용서해도 자식을 버리게 한 사회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럼 교육에서의 돌봄과 진보 교육이라고 말하는 현실을 보자.
제일 먼저 중,고등 교육의 현실을 돌아보면, 한 반 35명 중에 20명이 수급자이고 나머지도 차상위계층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 성북구의 한 해 탈학교(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를 하는 학생이 7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학교를 그만두던 어디서 무엇을 하든 케어해 줄 사람도 없고, 사회적 안전망도 없다. 결국 이 학생들 나중에는 다 굶어 죽는다. 이 사회에서 중졸. 중퇴로 뭘 할 수 있냐? 최소한 고졸은 되어야 마트에서 알바라도 할 수 있다. 그래서 탈학교를 한 학생들은 이 현실의 문턱을 느끼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다시 제도권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그런데 중산층은 뭐라고 하나? 학교를 벗어나자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진보 교육감을 만들었다. 이런 공교육의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려는 것이 가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진보적인 가치관도 상당히 의미 있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저 700명, 서울 시내에서 버스나 지하철로 20 ~30분만 들어가면 분명 존재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이 사회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물론 명절날 특집으로 한번씩 나오기도 하지만. 주야장천 중산층 이상의 목소리만이 들린다는 것이 문제다. 왜 그럴까? 미디어나 교육제도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중산층이나 그 위에서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산층 이상에서 좌,우로 나뉘어서 싸우고 그 밑의 계층은 유령이 되어 배제되어 있다. 교육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수다. 그들의 진보적인 교육정책은 그들만의 리그내에서 진보적인 것이다.
그럼 유아와 어린이들의 양육과 노인 돌봄은 어떨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귀족인 여성이 농촌을 지나가다 농노의 딸인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은 자신의 아이를 묻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한다. 안나의 시누이인 귀족 여인이 물었다. ‘아이가 죽었는데 슬프지 않냐고…..어떻게 일을 하냐고..’ 그랬더니 이 여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슬프냐고요…아뇨 홀가분해요..우린 일을 해야 해요..아님 식구들이 다 굶어 죽어요…’ 읽은 지 오래되어 정확한 묘사는 아니지만 이런 대화였다.
가족은 추상적인 구조물이 아니다. 가족은 서로 부양하고자 나날이 분투하는 현실의 여성, 남성, 그들의 피부양자로 이뤄져 있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상식에 따르면, 여성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적합하고, 가정은 당연히 여성의 영역이며, 여성은 모든 집안일을 가장 잘 한다. 그러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자 일하는 남성이 여성을 부양한다는 핵기족 이데오르기와 현실 간의 간극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성인 여성의 대다수는 집 밖에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개별화된 재생산 노동이 대부분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낀다. 특히 육아휴직의 경우 대부분 여성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생각에 근거해 이뤄지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핵가족은 중요한 소비의 장소다. 워킹맘을 겨냥한 광고의 주된 포인트는 마치 저 제품을 사기만 하면 여성들은 모든 가사와 육아에서 해방되서 일도 하면서 좋은 엄마이면서 좋은 아내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은 저임금, 보육시절 부족, 사회적 지원 감축, 저소득층의 열악한 주거 환경, 높은 주거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왜냐면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필요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가족 이데오르기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가족 이데오르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게 만드며, 만약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고 주거 환경이 열악하다면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 부족 탓이라 믿게 만들었다.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께 ‘나는 당신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 악다구니를 쳤을 때 ‘니도 니 새끼 낳고 키워 보면 알끼다’ 에는 어떤 것이 숨겨져 있었는지를 나는 이제야 알았다.
늙은 부모든, 어린 자식이든 다른 사람을 24시간 책임진다는 것은 돈으로 사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연민의 마음에서 이뤄지는 것인데, 국가는 이런 매우 인간적인 감정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자꾸 나의 유년에 발목이 잡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족이 소중하다고 떠들어 대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신성하다고 가르치지만, 현대 산업의 형태는 ‘없는 사람’ 즉 노동자 계급의 모든 유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있다. 그들의 가족에 대한 입에 발린 소리는 역겹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나, 여성 노동자들이 양심적으로 열심히 일만 하면 한부모 가정의 8살, 10살 아이는 충분한 돌봄을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온 사회가 공모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여성해방의 가능성도 노농계급 남성들의 해방도 이 ‘낡고 답답한’ 제도 내에서 수행하도록 요구받는 책무들을 사회화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의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국가가 포괄적 복지를 제공해야 하며,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유급 육아휴직을 줘야 하고, 육아수당 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요구들은 노동계급 전체를 위한 요구다. 어떻게 아이와 노인과 병자를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성 문제’ 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최소한 존엄한 존재로서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세 가지가 주거, 의료, 교육이다.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우리가 가난한 나라이기’때문에 사회가 이것을 보장해 주지 못하나 보다 했고, 또 군사독재 기간에는 ‘박정희가 전두환’이 모든 악의 근원이었기에 즉 군사독재가 정경유착을 하고 이것이 사회적 불평등을 낳고 사회 부조리를 낳기 때문에 이 군사독재만 끝나면 좋은 사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민주화만 되면 좋은 사회가 되리라는 희망. 그래서 민주화 되었다. 사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삶이 더 나아졌나? 나빠졌나? 이게 정말 놀라운 이야기다. 이제 사람들은 별로 기대도 안 한다. 김대중 정부 때는 외환위기가 있었다. 조금만 더 참자. 노무현 정부…어 아직 미숙한가 보다…그리고 문재인 정부? 어떤가? 그래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이재명이 또는 윤석열로 나뉘어 이것만이 사회 정의구현의 최우선 과제인냥 떠뜨는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 차라리 이 사회 상층부를 저 먼먼 미래로 보내고 싶다.
이젠 깨달아야 한다. 미숙한 것이 아니라 이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3 Comments
vera bambola https://it.yourdoll.com
Thank you for your sharing. I am worried that I lack creative ideas. It is your article that makes me full of hope. Thank you. But, I have a question, can you help me?
Thank you for your sharing. I am worried that I lack creative ideas. It is your article that makes me full of hope. Thank you. But, I have a question, can you help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