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공동체적으로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질문

조한진희(반다)[1]젠더, 질병, 장애, 팔레스타인 이슈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 페미니스트. 다른몸들, J성폭력공대위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iingmodo@gmail.com

성폭력은 심각한 문제이며, 단호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문제는 언제나 성폭력에 대한 해석이다. 미투를 둘러싸고 진짜 미투인가를 먼저 의심하고, 피해자의 주장을 어떻게 믿냐는 말을 먼저 한다. 가해자의 주장을 어떻게 믿냐는 말보다!

성폭력이 나쁜 것은 분명한데, 성폭력 피해자의 말보다 가해자의 말에 더욱 빠르게 감정이입하기도 한다. 가해자의 주장이 더욱 ‘상식적’ 이고 ‘합리적’ 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2차가해’라고 지적 받을까봐 두렵다.

# 왜 이제와서 말하는가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는 “왜 이제와서 말하는가” 일 것이다. 왜 13년 전, 5년 전, 1년 전인 ‘사건 당시’가 아닌 이제서야 말하냐는 의구심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정파적 이유부터 다양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2]90년 대 중반 대학 내 운동사회 성폭력을 고발하는 문제제기를 했을 때, 한 간부가 우리에게 운동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한 프락치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 Continue reading 이런 의구심이 자신 안에서 일어 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피해자는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말한다.’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성폭력 피해를 말한다는 것은 다양한 2차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성폭력 피해를 말하자 일터에서 따돌림과 해고를 겪고,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성폭력 사건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2차 피해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를 말하기 전에는 한명의 가해자가 있었는데, 피해를 말했더니 얼굴도 모르는 수 많은 가해자가 생겨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즉시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게 어찌보면 더 자연스럽다. 우리 조직에서 누군가 성폭력 사건이 발생 한 뒤 한참 뒤에 피해를 말하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의구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사건 당시 성폭력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신뢰 할 만한 동지가 우리 조직에 없었던 것일까. 우리 조직 문화가 피해자가 피해를 말했을 때, 2차 피해 없이 안전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를 주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 조직에서 피해를 고발하면 자신의 고통이 존중받고 가해자가 징계 될 것이라는 ‘정의’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즉 피해자가 사건 당시 피해를 말할 수 없었던 현실을 그 피해자가 아닌, 그 피해자를 둘러싼 환경에 먼저 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또 하나, 성폭력은 ‘행위’ 발생 직후에 곧바로 성폭력으로 인지되지 못할 수도 있다. 성폭력은 여러 맥락 속에서 의미화 되기 때문이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어떤 경험이라고 명명하지 못했다가 자신 이외에도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이 여럿 있을 경우 비로소 그게 성폭력 피해였다고 명명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 남성과 반복적으로 불쾌한 신체 접촉이 있었다. 뒷풀이 자리 비좁은 화장실 복도를 지나다가 신체가 스쳤고, 사람 많은 지하철을 함께 타고 가다가 다시 민감한 신체 부위 접촉이 있었다. 반갑다며 악수를 하고서는 손을 놓지 않고 오래 붙잡고 어깨동무를 한다.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우연이거나 자신이 과도하게 예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지우려고 했는데, 유사한 경험을 자신 뿐 아니라 여러명의 여성이 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들 불쾌했지만 너무 애매한 상황이라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심지어 해당 남성이 뒤풀이 자리에서 자신은 보드라운 손이 아니면 악수하지 않는다며 남성과는 악수는커녕 지하철에서 옆에 있는 것도 싫다거나, 지하철에서 여자들과 부딪치면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존엄이 침해받고 대상화되었음을 느끼며, ‘피해’라고 명명하게 된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말하기(speak out)와 성폭력을 둘러싼 정치성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가부장제, 성별억압체계 언어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새로운 세계관이며,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라고 교과서처럼 말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체화한 사람은 많지 않다. 앞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해보자. 딱 맞는 예는 아니지만, 노조가 생기고 나자 비로소 조합원을 중심으로 회사의 부당행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나오는 사례를 떠올려 보자. 사측은 조용하던 회사에 노조가 분열과 잡음을 조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아무 말 없더니 노조가 생기니까 이제와서 수년 전 일을 문제제기 한다며 노조가 사주한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합원은 부당한 현실에 문제제기 했을 때, 자신 혼자 깨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노조가 함께 할거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혹은 당시는 그것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다가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기면서,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노조나 부당함을 주장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에 있다. 노조 그리고 노동자의 각성과 주체성을 인정할 의지도 해석할 능력도 없는 사측의 눈에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노조가 문제’로 보일 뿐이다.[3]성폭력 문제의 양상이나 성별억압체계의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노자관계에 빗대었다. 이는 노자관계를 곧 여남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 Continue reading

# 이거 성폭력 사건인 거야?

페미니스트로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 ‘이거 성폭력 사건인 거야?’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스트로 각성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특히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오래전 동지들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침묵을 깨고 나오는 여성들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들은 조직 안에서 미투가 있었는데, 조직 안에서 질문하기 조심스럽다며 이것을 성폭력 사건으로 볼 수 있냐는 질문을 자주했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경우 성폭력이라는 것은 여기부터는 성폭력이고 저기부터는 성폭력이 아닌 것으로 구분되기 어렵다.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성폭력 사건의 절대다수[4]성폭력 피해 중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87.6%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 상담소 <2019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현황 >, 2020. … Continue reading

는 아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고, 관계와 상황을 떼어 놓고 행위의 단면만을 보고 성폭력인지 여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성폭력을 판단할 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조건이나 관계, 여러 맥락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이고 여성단체에서 성폭력 상담을 했고, 대책위 활동 경험이 있다고 해서 ‘판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결국 그래서 이게 성폭력사건인지, 아닌지 정답을 요청받는다.

반복적으로 이런 상황에 놓이면서 다시금 생각했다. 특정 행위가 성폭력인지 아닌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 행위가 성폭력이 아니라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까. 성폭력이라고 호명되면 ‘엄청난 사건’이 되지만, 그게 문제적 행동이긴 하지만 성폭력은 아니라고 규정되면 그나마 조직도 가해자도 ‘안심’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이 현상 앞에서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갖게 된 무게감이 낯설고 반가운 반면, 성폭력이라는 명명을 경유하지 않으면 부정의와 고통을 인정받기 어려운 여성들의 현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이라는 명명이 적극적으로 진행된 것은 20여 년에 불과하다. 법적으로는 1994년 시행된 성폭력 특별법 이후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성폭력 피해자 권리 보호를 위한 각종 법 제도가 마련되었고, 이와 동시에 성폭력 가해자 처벌을 위한 각종 법 제도 또한 마련되었다. 주지하다시피 90년대만 하더라도 성폭력은 사소한 일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조직 안에서 성폭력 사건으로 문제제기하면, 겨우 그 정도 일로 조직의 큰일을 그르치려 하냐는 근엄한 말에 부딪쳐야 했다. 90년대 중반부터 대학 내 ‘운동권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운동사회 내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이는 2000년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백인위원회[5]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는 2000년 7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활동한 모임이다. 이 모임은 여러 대학 총학생회, 노동조합, 사회운동 … Continue reading 활동으로 이어진다. 백인위의 폭로는 운동사회 안팎에 충격을 주었다. 이후 운동사회 단체들 안에서 반성폭력 내규를 제정하는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여성위원회나 반성폭력 위원회를 갖춰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통해 최소한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은 다른 ‘지위’를 갖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2015년 #00계_성폭력을 시작으로 미투 운동으로 확장되고부터는 성폭력을 사소하게 다뤄서는 안되고, 성폭력을 잘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은 사소하지 않다는 주장을 반복해야 했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물론 여전히 여성의 전화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폭력의 무게감이 완전히 자리잡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소한 진보 좌파 진영은 성폭력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는 자기 고백을 할지언정, 성폭력을 사소하게 다뤄서는 안 되며 조직의 우선순위에서 미뤄서는 안 된다는 당위의식은 명확해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반성폭력 운동은 일정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폭력이라고 명명되지 않는 젠더폭력 이나 성차별 등은 그 부당함과 고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조직 안에서 성 평등 교육이나 반성폭력 교육을 하다 보면 성폭력 개념이나 사례를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그리고 성폭력 제소가 들어왔을 때 성폭력 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성폭력이 아니라고 해서 그 행위가 부당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폭력인가 아닌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떤 고통과 부당함을 겪고 있는가라는 초점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성폭력 이슈를 다룰 때 놓쳐서는 안 되는 질문이 있다. 특정 행위가 성폭력인가 아닌가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성폭력이 아닌 젠더폭력이나 젠더차별에 대해서 우리 조직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적극적인 토론이 필요한 지점이다.

# 공동체적으로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질문

성폭력 사건을 공동체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 반성폭력 교육에서 이 질문을 하면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조직적 징계라는 답변을 한다. 과거에는 성폭력 가해자를 징계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가해자 징계에 전략적으로 많은 힘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이 지향하는 게 가해자 징계 자체는 아니다. 물론 징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반성폭력 운동은 가해자를 색출하고 징계하는 운동이라는 식의 관점은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탈정치화하는 대표적인 관점 중 하나다.

그 영향 때문인지 많이 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조직에서 가해자 징계 이후 피해자의 회복과 복귀를 위한 적극적 조치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피해자에게 치유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일정한 휴가 기간을 부여하는 사례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조직에서 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는 복귀하지 못/않하고 떠난다. 성폭력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가 치유와 회복을 통해 성폭력 이전과 같은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많은 곳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천은 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직이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말하고, 가해자에게 변화를 요구하지만 정작 조직은 피해자가 복귀해서 이전처럼 활동 할 수 있는 ‘변화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성폭력의 개념부터 다시 이야기해보자.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합의된 성폭력에 대한 개념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설명이다.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은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이 ‘정조’에 관한 것이 아님을 인식시키고,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이 합리적이며 자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법학의 한계를 갖는다. 개인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문제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자유주의적 태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담론은 성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간의 권리충돌 문제로 축소시키고, 피해자가 판단능력이 있거나 없음(항거불능)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을 구성함으로서 피해자다움의 논리를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성적자기결정권 침해의 개념은 그 놀라운 발상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의 구조적 관점을 유실시킬 수 있다는 한계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폭력을 정조가 아닌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규정하면서도, 성폭력의 구조적 한계를 누락시키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수 많은 지점에서 역사적 진전이 필요한데, 성폭력의 개념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성폭력 개념 구성에 성별 억압적인 구조, 성별화된 섹슈얼리티, 피해자의 경험 등이 포함되면서 좀 더 다각적인 현실을 반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우리가 성찰하고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나와 조직의 태도일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N번방과 같은 끔찍한 성폭력 사건에 분노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논리에 감정이입하는 자아분열을 겪는 것 같다. 피해자의 말을 경청해 보려고 하지만, 가해자의 논리는 명확한데 피해자의 주장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들도 있다. 피해자의 논리보다 가해자의 논리가 더욱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이런 분열과 혼란이 비난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이것이 ‘자연스럽다’라고 본다.

이를테면 가해자가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나는 그의 ‘진심’을 신뢰한다. 많은 이들이 성폭력인 줄 알면서 성폭력을 행하기도 하지만, 성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성폭력을 하기도 한다. 다양한 데이트 성폭력이나 스텔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강간의 경우도 상당하다. 동의를 구한적 있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말하지만, 강간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그렇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냐거나, 왜 더 빨리 피해를 호소하지 않았냐고 묻는 게 ‘자연스럽고’ 익숙하지만, 가해자에게 왜 그게 성폭력인지 몰랐냐고 묻는 경우는 드물다.[6]성별관계와 자연스러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원고 참조
워커스, 2017년 3월호. “자연스러움을 의심할 때”, 반다(조한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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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착한여자 아이, 씩씩한 남자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고, 성에 대한 공격적 태도가 남성성으로 격려되는 문화 혹은 폭력적인 남성의 성이 정상이라는 태도를 아직도 공기처럼 마셔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성역할, 성차별, 젠더위계 등은 몸(의식)에 너무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아직도 남성 위치에서 구성된 성경험이나 입장에 더 익숙하다. 이게 바로 성폭력은 구조의 문제라는 것의 한 반영이기도 하며, 성폭력이 구조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 자신 또한 그 구조를 재생산하고 떠받치는 일부일 수 있다는 의미다.

성폭력이 가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구조의 결과라면, 성폭력을 사건화 한 이후의 공동체는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와 함께 변화하고 재구성 되어야 한다. 우선 피해자에게 집중 되었던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왜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음주를 비난하는 것에 익숙해졌을까. 피해자에게 왜 이제야 말하냐고 비난하면서, 가해자에게는 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냐고 묻지 않는가. 많은 남성들이 왜 가해자가 되며, 그런 행위를 왜 성폭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가. 왜 우리 사회는 남성에게 그런 행위를 용인해 왔는가.[7]성폭력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향한 질문의 방향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원고 참조.워커스, 2017년 12월호. “가해자의 진심은 왜 … Continue reading)

성폭력은 구조의 문제라고 하면서 피해자에게 왜 그런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냐고 추궁하고, 가해자에게 왜 성폭력을 행했냐고 비난하면서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서사를 비판하지 않을까.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의 효과는 무엇이며, 그것이 비가시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성폭력이 가능했으며, 어떤 조직 문화가 피해자로 하여금 성폭력 피해를 말하기 어렵게 했는가. 우리는 왜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말에 쉽게 공감하고, 익숙한 것을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조직과 공동체가 함께 토론하며 답변해 나가는게, 피해자에게 변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시작일 것이다.

1 젠더, 질병, 장애, 팔레스타인 이슈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 페미니스트. 다른몸들, J성폭력공대위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iingmodo@gmail.com
2 90년 대 중반 대학 내 운동사회 성폭력을 고발하는 문제제기를 했을 때, 한 간부가 우리에게 운동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한 프락치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 들었다. 2000년대 초반 여성노동상담을 하던 시절 생산라인의 중년 여성 노동자가 작업 반장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했을 때, 피해자가 반장이 되기 위한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사측으로부터 들었다.
3 성폭력 문제의 양상이나 성별억압체계의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노자관계에 빗대었다. 이는 노자관계를 곧 여남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성폭력이나 성별관계의 권력성에 대한 효과적 이해를 위함이다.
4 성폭력 피해 중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87.6%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 상담소 <2019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현황 >, 2020. 9.25.
http://www.sisters.or.kr/load.asp?sub_p=board/board&b_code=7&page=1&f_cate=&idx=5453&board_md=view
5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는 2000년 7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활동한 모임이다. 이 모임은 여러 대학 총학생회, 노동조합, 사회운동 단체에서 벌어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 사건을 조사해 16명의 성폭력 가해 혐의자를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 명단’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한다.
6 성별관계와 자연스러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원고 참조
워커스, 2017년 3월호. “자연스러움을 의심할 때”, 반다(조한진희
7 성폭력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향한 질문의 방향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원고 참조.
워커스, 2017년 12월호. “가해자의 진심은 왜 당신에게 중요한가”, 반다(조한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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