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세상 보기〉 주어진 가족과 선택한 가족 – 영화 <이장>과 <어느 가족>을 중심으로

이영주 l 전교조 해고자

엄마, 나 태어났을 때 그냥 바로 죽이고 싶었겠다. 그치 ?

내 나이 마흔을 넘은 어느 날, 웃으며 던진 질문에 엄마는 웃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침묵은 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부정하지 못 한 걸 거다.

영숙, 영순, 영화에 이어 남동생을 데려오라고 남자이름까지 붙여진 넷째 딸 영남. 그 아래 아버지가 데려온 외아들. 그 아들을 데려오는 데 공모한 큰 고모. 그런 상황에서 임신한 아이가 나였다. 뱃속에서 하도 발길질을 해대서, 모두가 축구선수가 되려나 보다고, ‘아들’이 분명하다고 격려했고, 나는 그렇게 엄마한테 열 달을 ‘희망고문’ 하고 태어났다. 그런데, 또 딸이라니!

나를 처음 마주한 순간의 엄마를 생각하면, 모든 게 미안하고 안쓰럽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여자로 태어난 게 내 잘못도 아니지만, 엄마에게는 자신의 삶이, 자존감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느 새 당시의 엄마 나이를 훌쩍 넘어선 나는, 나를 낳고 절망했을 마흔 살 엄마의 증오가 아무 서운함 없이 오롯이 이해가 된다.

내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병원에 늦게 도착한 애 아빠를 붙잡고 통곡을 했다. 아이 아빠가 놀라서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목이 메어 “또 아들”이라고만 겨우 말하고 다시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데, 왜 우세요??” 엄마는 우느라 답하지 못했다. 설명하기엔 너무 긴 이야기다. 엄마의 역사, history가 아닌 Her-Story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딸들의 시댁에서 들었던 ‘친정엄마 닮아서 딸 낳았다’는 말이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있던 엄마는, 내가 첫 아이를 아들로 낳았을 때 자존감이 회복되고, 둘째 아이를 아들로 낳았을 때 ‘인생의 한’이 풀렸다. 단지 아들 둘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갑자기 엄마에게 효녀가 되었다.

페미니즘을 접하는 순간, 여성들이 너무 과도하고 예민하다고 평가하는 남성 동지들을 보곤 한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과도하다고 반응하는 사측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 사회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자본주의의 문제이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오늘은 자본가와 정권에 맞서듯. 태어나면서부터 무수히 차별을 경험한 여성들은 가부장제를 끝장내기 위해, 오늘은 가부장제에 안주하고 있는 남성들과 맞설 수밖에 없다.

정승오 감독의 독립영화 <이장>의 포스터 카피는 어마어마하다.

[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한다 ]

나는 이 한줄 카피에 끌려서 영화를 보았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이런 카피를 포스터 전면에 내세운 걸까?

그러나 영화 <이장>은 너무나 평범하다. 살아오며 언제나 보고 들었던 익숙한 장면들이다. ‘KBS 인간극장’을 보는 느낌이랄까? 남성들에게는 어느 날 새삼 발견한 놀라운 차별과 몰랐던 불편함일지 몰라도, ‘아들’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부산물로 만들어진 ‘딸’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 정도 이야기로 장편영화를 만들지?’ 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범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은 궁금증을 끌어낸다. 그는 왜 이런 ‘카피’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을까? ‘무비스트’에 실린 정승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며 그 의문이 풀렸다.

어머니도 일찍부터 경제활동을 하셨는데 늘 “똑같이 돈 벌면서 왜 나만 밥 차리고 설거지를 하냐”고 주장하셨다. 당신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왜 남자 둘(남편, 아들) 뒤치다꺼리만 해야 하냐고. 결국 내가 수능을 끝내는 날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셨다. 시험을 치르고 돌아와 보니 집이 정말 비어 있더라. – 무비스트 / 글 박꽃기자 2020.03.30.

<이장>은 가부장제와 이별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의 가부장제 작별 선언이다. 노예 없는 노예제가 불가능하듯이, 지배할 여성이 떠난 가부장제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이미 떠나버린 가부장제라는 집에 아직도 미련을 갖고 남아있는, 이제 남겨진 남성이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작별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찌질함 뿐이라고 영화는 경고하고 있다.

[가부장제] 가장인 남성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가족을 통솔하는 가족형태. 여성학에서는 가족 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영역 전반에서 여성의 성·출산·노동 등을 통제하는 남성지배구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 다음백과

영화 <이장>은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떠나는 오남매의 1박2일 로드무비이다. 큰딸인 혜영(장리우 분). 둘째 금옥(이선희 분), 셋째 금희(공민정 분), 넷째 혜연(윤금선아 분)은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큰아버지 댁으로 간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장남 승락(곽민규 분) 없이는 이장을 할 수 없다고 버틴다. 누나들은 이장을 하기 위해 승락과 승락의 여자친구를 찾아 데려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정 하나 하나는 현재의 가부장제가 얼마나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큰아버지 가정은 막상 지배할 ‘연소자 가족’ 한명 없다. 동거인이라고는 같이 늙어가는 부인과 함께 늙어가는 개 한 마리뿐인데, 그럼에도 그 속에서 가부장제 위계를 지켜야 한다니 이 얼마나 코메디인가!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혜영은 회사에서 ‘육아휴직 후 퇴사’ 권고를 받는다. 그냥 퇴사가 아닌 ‘육아휴직 후 퇴사’를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자신을 위로한다. 초등학생 동민(강민준 분)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증상을 보인다. 담임교사는 교실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연락을 하나, 엄마인 혜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알약을 먹이는 것 말고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돌봄과 장애는 가족의 몫이고, 무엇보다 엄마의 책임이다.

금옥은 남편 몰래 이혼을 준비 중이고, 금희는 남자 뒤치다꺼리가 뻔해 보이는 결혼을 준비 중이다. 혜연은 대학 게시판에 여성 인권 문제로 대자보를 붙이며 페미니즘 운동을 이어가고, 승락의 여자친구 윤화(송희준 분)는 낙태와 이별을 선언한다. 막내이자 장남인 승락은 마지막 황제처럼, 가부장제의 권리는 누리지 못하고 장남의 의무만을 지니고 있다. ‘어려서부터 편히 살았다’고 누나들은 말하지만, 막상 그는 힘들었다고 주장한다. 남성인 그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다. 그래서 마지막 결단으로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해야 할 자는 바로 승락이기도 하다.

영화 <이장>은 철 지난 가부장제의 권력행사에 시종일관 유우머와 연대로 맞선다. 그렇다고 일사분란하게 문제를 해결하거나 일치단결하는 것도 아니다. 섣부른 화합이나 관념적인 가족 감동 따위는 끝까지 요구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영화 <이장>은 새로운 가족의 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끼리 위계를 따지고 지지고 볶으며 상처를 주고받는 내내 유일하게 화기애애한 관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린 동민과 윤화뿐이다. 때론 ‘주어진’ 가족은 그냥 가구이다. ‘주어진’ 가족은 남에게는 못 할 말로, 가장 편하게 상처를 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영화 <이장>은 ‘주어진 가족’들이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고, 어찌될지 모를 미래를 향해 함께 출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도 떠나자, 가부장제의 끝은 또 새로운 가족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과연 무엇일까?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가족은 성적 관계로 이어진 부부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혈연 중심의 핵가족을 기초로 하거나 그 관계와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가족은 사회 구성원을 재생산하고, 가족 구성원의 양육과 보호를 담당해 왔다. 또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1차적 사회화를 담당하고,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

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의 영향으로 결혼, 출산, 이혼, 독신과 만혼, 보육과 교육, 노인부양, 빈곤과 장애, 탈가족화 등에 대한 개인의 선택에 따라 가족은 일생동안 고정되지 않고 다원적으로 복잡하게 형성된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화되고 역할은 빠르게 변화되고 있으나, 가족의 가치 및 가족에 대한 태도는 그 변화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고 있다.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가족과 가족 구성원을 향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정상가족’이라는 허구의 가족상이 계속 요구되고, 그 과정에서 갈등과 차별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 이데올로기는 가정을 불평등과 다양한 폭력의 배양지로 만들기도 한다.

‘정상가족’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영화 중 하나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다. 사실, <좀도둑 가족>이라는 원제목이 영화의 내용과 화두를 더 잘 설명해준다.

영화는 도쿄에서 좀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 세탁업체에서 일하는 아내 노부요, 유사 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는 아키, 가족에게서 버려진 아이 쇼타, 집주인이자 죽은 남편의 연금으로 가족을 지탱하는 노부인 하츠에. 어느 날, 오사무는 부모에게 아동학대를 당하고 있던 다섯 살 유리를 데려온다. 유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가족을 선택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겠어? 유대감? 정 같은거.. / 노부요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점도 있잖아. 괜한 기대를 안하게 되는 건 좋지. / 하츠에

<어느 가족>은 시시 때때로 물건을 훔쳐서 생활을 유지하지만, 본인들은 아직 주인이 없는 것, 누군가가 버린 것을 주워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빵을 훔친 장발장을 비난하지 않는 수준에서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으려 할 뿐, 근본적으로 빈곤층의 가족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는 않는다. 양육과 교육과 노인부양과 외로움까지가 모두 가족 단위 책임인 현실에서, 진짜 가족도 아닌 <어느 가족>은 가게주인이 망하지 않을 만큼 좀도둑질을 하여 가족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해 간다.

생전에 남편과 함께 살지도 않았지만 하츠에는 법적으로 남편의 사망연금을 받고 있고, 반면 일하다 다친 오사무는 비정규직이라 산재도 인정되지 않는다. 노부요는 가정에서 아동학대를 당하던 유리를 지키기 위해 해고까지 감수하고, 쇼타는 도둑질하는 여동생을 보호하려 자신이 일부러 잡혔으며, 늙은 하츠에를 봉양했던 오사무는 그의 연금을 이어 받아 가족을 부양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범죄가 된다.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정상가족’들은 혈연이 아닌 <어느 가족>의 관계는 유괴이고, 사기이고, 가짜라고 비난하지만, <어느 가족>은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다고,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영화 <어느 가족>은 우리에게 ‘진짜가족’은 과연 무엇이냐고 아프게 되묻는다.

피가 이어져있지 않으면 가족이 될 수 없는가? 혈연관계는 무조건 가족이 되어야 하나? 결혼을 해야만 누군가와 가족이 될 수 있나? 이에 답하기 전에, 지금 내가 가족이고 싶은 사람, 나에게 소중한 관계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자. 가족구성원이 행복한 가족은 과연 어떤 형태인가 고민해보자.

국민은 누구나 ‘삶을 함께할 특별한 사람’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이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에 해당한다. ‘특별한 한 사람’을 법률적으로 꼭 ‘결혼한 배우자’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 2014년 진선미 국회의원 한겨레인터뷰 중에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결혼이나 혈연이어야만 획득되는 권리들이 있다. 이러한 권리들은 혈연이 아닌 동거인은 철저히 제외한다. 병원의 수술동의서에서부터 함께 사는 친구와의 공공주택 입주나 전세자금대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 자동차 보험의 공동계약, 출산·육아휴가나 돌봄휴가도 불가능하다. 실제의 동거인은 각종 행정처리나 금융업무에서 서로 무관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결혼-출산-양육으로 이어지는 ‘기능적 가족’만을 정상가족으로 인정하고, 국가는 결혼과 혈연이 아닌 다양한 동거는 가족에서 배제시킨다.

최초의 시민결합제도는 1989년 덴마크의 파트너십 등록제이다. 성과 무관하게 성인 2인이 파트너로 등록하면 결혼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 프랑스는 1999년 시민연대협약을 도입했는데, 연인뿐 아니라 친밀한 관계의 결합도 보장한다. 한국의 <생활동반자법>은 2014년 진선미 의원이 발의하려다 무산된 후, 2017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대선후보 공약으로 내놓았다. 최근까지도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꾸준히 올라오고 있으며, 지난 2020년 415총선에서도 여러 진보 정당들이 공약으로 제시했다.

생활동반자법은.. 혈연이나 혼인으로 이뤄진 민법상의 가족이 아닌 두 성인이 합의하에 함께 살며 서로 돌보자고 약속했을 때, 필요한 사회복지 혜택과 제도적 권리를 보장하고, 동거 생활을 시작하고 해소할 때 필요한 공정한 절차를 규정하는 법 / 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

가족구성권.. 특정한 가족 규범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논의에서 나아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 / 가족구성권연구소 (2019년 개소)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며, 가족은 사회의 가치를 학습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가족 안의 각 관계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규범이기도 하다. 하나하나의 가족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가족 규범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착취와 경쟁으로 만들어지는 불평등과 양극화 속에서 인간 소외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미 폐가가 되어버린 가부장제와 봄꽃처럼 번져가는 페미니즘이 어우러져 가부장제 가족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평등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부터 바꾸자. 가족에 새로운 희망을 담자. 시간이 흐르면 당연하게 다가오는 계절의 봄과 달리, 새로운 가족은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혈연으로 걸어 잠근 가족의 문을 열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러기 위해 오늘은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확실한 작별을 고하자.

가족이 사회의 기본조직이라면, 새로운 가족은 사회적 연대의 기본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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