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를 위한 이론적 주제들

신명호 |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 소장

[1]본 논문은 2012년 과학기술 공공성 포럼과 2015년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일부를 발췌하였다. 논문에서 주장되는 내용은 … Continue reading

들어가는 글

지금은 변화의 시기이다. 매트릭스처럼 꽉 짜여져 있던 자본주의적 질서 체계가 스스로의 모순으로 붕괴해가고 있는 시대이고, ‘역사의 종말’과 ‘포스트모던의 폭풍’이 지나간 후 노동도 자본도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조망하는 데 필요한 가치 체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혼돈의 과도기이다. 우리는 마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고 있는 부표들 위에 앉아 물결에 부침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서로의 움직이는 부표들을 통해서 자기 위치를 찾는데 급급한 이들처럼, 가야할 방향을 잃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물살에 몸을 맡긴 채 그때그때의 실용주의적 대책으로 위기를 모면해가고 있다. 정보통신기술과 신경인지과학의 발달은 과학과 기술, 사회의 가장 깊은 부분에 큰 충격을 가했다. 생산력이 지식과 정보를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있고,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발견들은 과학의 객관성과 실재성의 근거를 뒤흔들어 놓았다. 아직까지도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지각과 사유, 문화에 가한 충격과 여파는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분기점 (bifurcation)이자 창조와 종합의 시대, 행위자들의 실천이 그 정치적․사회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때이다. 레닌이 “혁명이론 없이 혁명은 없다”라고 갈파했던 것처럼, 긍정적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집합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돌파하고 도래할 미래를 각인하는 하나의 관점, 이론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점에 과학과 기술에 대한 관점과 방향성을 모색한다는 것은 바람직할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디지털 전환과 환경문제,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노동과 자본에 강력한 충격과 지속되는 진동을 가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노동계급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3종의 인식”을 획득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정치적⸱사회적 실천은 무망한 것이 되고 자본과 국가가 만들어내고 있는 전쟁과 야만은 “인간재료”들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빅 데이터’로 무장한 기술 파시즘의 위협을 분쇄하고 또 다른 전쟁과 야만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길은,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 한 길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정치적 투쟁의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집합적 실천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벌여야 할 정치적 투쟁의 구체적인 내용과 주체, 범위와 수준, 역사와 방향, 범주와 개념, 대립과 통일, 실천과 기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가 리센코주의나 사회구성주의와 같은 어설픈 희극이 아니라는 것, 더군다나 과학과 기술을 포함하는 정치사회적 영역에서의 주요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나 권력의 행사도 아니며, 과학과 기술에 대한 법, 권력, 공동체의 원리를 규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는 ‘정상적’ 질서의 논리로부터 단절하면서, 사회질서의 틈을 현시하여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는 고유의 공통 공간을 창출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들고, 그저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서 듣게 만들며, 선호도와 감상의 표현으로 나타났을 뿐인 것을 선악에 대한 감각으로서 드러나게 만들며, 범주와 개념을 구성하고 대립과 통일을 식별하여 정치적 투쟁을 위한 집합적 실천과 주체를 기획하고 형성해 내야 한다 ([37]). 더할 나위 없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며 평범하게 보이나 실제로는 “형이상학적 미묘함과 신학적인 기이함으로 가득찬”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약하고 때로는 소수집단일 뿐이더라도 오직 노동계급만이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정치적 투쟁을 끝까지 담당할 수 있다.

본 논문은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에 필요한 구체적인 요소와 내용, 적합한 개념과 범주, 관계 등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학사회학, 과학철학, 과학사, 정치학, 사회학, 인지과학, 철학 등 과학과 기술, 사회가 연관된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이론적 주제들을 적합한 범주와 개념들로 종합해서 일관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저자의 역량을 벗어난다. 이는 이후의 집단적 연구로 돌리고 본 논문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구체적인 이론적 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문 – 이론적 주제들

(주제 1) 과학과 기술은 물리적기술적 문제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적을 위해 과학적 실천을 수행하는 분야별 과학 공동체로 구성된다. 과학과 기술의 핵심 범주는 문제이며, 그 주체는 과학 공동체 (Scientific Community)이다.

과학 공동체는 과학과 기술,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구조적 결합과 상호작용을 하는 지 파악하고 규정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개념은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의 경험적 연구를 통해 규정되고 사용되어 왔을 뿐 총체적인 사회이론의 차원에서 체계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만의 시스템 이론 ([25])은 과학을 사회라는 전체 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하위 시스템으로 모델링함으로써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분석이 가능하게 하였다.

시스템 이론에 의하면, 사회는 비서열적이고 수평적인 기능으로 구분되는 정치, 경제, 종교, 과학, 법, 교육 등과 같은 여러 개의 하위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하위 시스템들은 다른 하위 시스템들이 포함된 환경으로부터의 경계를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자기준거적이고 자기생산적인 열린 시스템이다. 각각의 하위 시스템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하위 시스템이 이해할 수도 없고 번역할 수도 없는 자체의 ‘언어’와 의미 영역을 보유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하위 시스템들 사이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상위의 공통 언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하위 시스템은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입력에 반응하여 자체적인 언어로 다시 번역하며, 그 자극과 입력에 대해 내적인 논리나 의미 체계를 통해 반응하고 적응한다. 이는 여러 하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전체 사회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방법도 다양한 하위 시스템들을 의도적인 행동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방법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과학이라는 개념과 기존의 과학 공동체라는 개념은, 전자가 커뮤니케이션 체계이고 후자가 행위자들의 집합체라는 의미에서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과학 공동체가 과학 지식으로 구성된 공통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최근의 시스템 이론에서 추가적인 분석 단위로 각종 사회조직, 공공기구, 집합체 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 공동체 자체를 과학이라는 개념을 대신하는 하위 시스템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과학 공동체에 대해, 사회적 기능, 내적 논리와 의미체계, 동적 메커니즘, 사회와의 상호작용과 적응 등의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생산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직접 생산에 투입되는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기능을 생산과 재생산으로 나누는 맑스의 구분을 적용하여 본다면 재생산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재생산 영역에 속하는 과학과 기술은 생산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때 과학지식을 생산하는 행위자들의 집합을 과학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 공동체의 내적 논리와 의미체계, 동적 메커니즘, 모 사회와의 구조적 결합이나 상호작용 등은 모두 이러한 지식 생산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규정된다. 글래서 (Jochen Gläser)를 따라 과학 공동체를 보다 엄밀하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40]).

“해결해야할 문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문제 해결 결과를 누구에게 어떻게 제공해야할 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행위자 집합체”

과학 공동체는 분과 학문별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구성원들은 공통의 ‘지식 데이터베이스’ (학문과 지식의 총체)를 참조한다. 각 개인은 규범이 아니라 자기인식, 즉 스스로가 과학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함에 의해서 구성원이 되며, 몇 개의 분과 학문별 과학 공동체에 동시에 소속될 수도 있다. 과학 공동체는 비공식적이고 유동적이며 기술하기 어려운 사회적 집합체로 강하게 분산되어 있으며,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공통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면서 문제해결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과학 공동체의 자발적 사회 질서와 생산 방식은 과학 지식의 생산에서 자주 직면하게 되는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탁월하게 작동한다. 지식 생산은, 많은 경우 다음과 같은 정보들이 불확실한 상황 하에서 문제해결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①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정확하게 무엇인가? 문제는 어떻게 공식화되어야 하는가? (정의)

② 현 단계의 지식 수준에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있는가? (해결가능성)

③ 그 문제는 어떻게 풀려질 수 있는가? (해결 방법)

④ 어떤 지식이 유효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문제 해결에 적용될 수 있는가? (지식의 유효성과 신뢰성)

⑤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해결 주체)

이와 같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과학 공동체처럼 분산적이고 자율적인 접근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접근법을 적용할 때,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문제를 공식화하고 해결하기 위한 독립적인 시도들이 동시에 가능한 많이 시작될 수 있다. 이 중 많은 시도들이 실패하거나 중복된다 하더라도, 분산적인 접근법은 가능한 빨리 문제를 해결할 확률을 높인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 방법을 공식화 할 줄 아는 행위자가, 스스로 일을 선택하고 수행하므로 해결해야할 문제와 행위자의 최적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과학 공동체의 자발적 사회 질서와 생산 방식이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신속한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 공동체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온 방법이며, 지식과 사회적 환경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며 지식 생산 메커니즘을 발달시켜 온 방식이다.

그런데 과학 공동체의 자발적 사회 질서와 생산 방식에는 조직적인 거버넌스의 부재라는 단점이 있다. 과학 공동체에는 집합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구조나 과정이 없을뿐더러, 많은 구성원들을 조정해서 주어진 시간 내에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과학 공동체가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식적인 방향성을 갖는 활동이라기보다는 ‘표류 (drift)’하는 것과 같다. 과학 공동체는 내부적인 의사결정, 소통, 협업 등을 조직하기 위해 전문가 조직, 저널, 학회, 제도화된 동료평가 (peer review) 절차 등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 역시 자율적이고 국지적 차원에서 작동하므로, 전체 구성원들을 구속하여 특정한 형태의 집합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과학 공동체와 근대 사회는 특정한 형태의 구조적 결합과 상호작용을 발전시켰다. 과학 공동체는 지식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으므로 사회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공급받아야 한다. 사회는 과학 공동체가 지적/물질적 복리에 기여하기 때문에 자원을 제공한다. 사회와 과학 공동체 간의 사회적 계약이 바로 과학 공동체의 존재론적 필수 조건이자 근거가 된다. 그런데 과학 공동체는 비공식적이고 유동적인 집합체이므로, 사회로부터 지원을 유지하고 공공복리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수용하고 관리하는 사회와 과학 공동체 간의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이 인터페이스는 크게 과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대학을 포함한 연구조직과, 펀딩 에이전시와 같이 자원 배분을 담당하기도 하고 연구와 연구 정책에 대한 의사 결정을 담당하기도 하는 매개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에 대한 사회적 기대, 연구를 위해 제공되는 자원, 연구를 통한 공공복리에의 기여 등은 이러한 조직과 그 조직을 지배하는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조직과 제도를 통칭하여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 한다. 사회와 과학 공동체는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구조적으로 결합하고, 필요 자원과 지적/물질적 복리를 교환하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과학 공동체와 사회와의 구조적 결합과 상호작용으로서의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은, 각 국가별로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제 2) 과학기술노동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역사성을 가질 뿐 아니라 과학기술노동을 수행하는 연구자와 분리되기 어렵다. , 과학기술노동은 본질적으로 과학 공동체 내에서 수행됨을 전제로 하는 직접적인 사회적 노동이다. 따라서, 과학기술노동은 가치로서 추상적 인간노동을 통해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화되기 어렵다.

“노동이 공동적인 행태로 행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비공동적인 형태로 행해지고 있는지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열쇠이며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이다. 노동이 사실상 공동적인 형태로 행해지고 있는 곳에서 개별적 노동은 어떠한 매개 없이도 사회적 노동 전체의 일부이며 한 분절이다. 양자 사이의 관계는 손가락들의 손과의 관계와 유사하며, 개인들은 사회에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유대는 개인들로부터 독립한 실존을 갖지 않는다. 통일이 서로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다양성인 것처럼, 개인들과 그들의 제 활동도 공통적인 사회적 활동의 제기능과 제분절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노동이 공동적으로 행해지지 않고 개별적 노동이 사적인 노동인 경우에, 즉 각 개인이 얼마나 생산하고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를 공동체의 계획이나 프로그램으로부터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노동일 경우에는 생산자들 상호 간의 분열과 원자화와 상응하여 사회적 통일은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며 그것이 매개해야 하는 실체들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정립하는 역설적인 관계가 된다. … 첫 번째 경우에 있어서 개인적 노동은 어떠한 매개 없이도 전체적인 사회적 노동의 일부이며, 그것 자신의 자연적 형태에 있어서 구체적 또는 유용한 노동이다. 즉 사회적 노동이 여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노동의 전체적인 연관인 것처럼, 사회적 또는 보편적 생산물도 생산된 ’사용가치들‘의 총액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는 이와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각 개인들에게 각자가 할 일을 할당하고 전체가 생산한 것을 각자에게 배당하는 공동체라는 전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계획‘이 결여되고 있다. … 개인적인 인간활동들이 서로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들은 그것들의 각자가 ’추상적인 무차별한 인간노동‘으로 즉 그것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주체로부터 분리된 노동으로 환원될 경우에만 전체적인 사회적인 노동의 일부로서 서로 연관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노동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노동은 자신을 부정하여 자신의 대립자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 즉 개인적 노동으로서가 아니라 어떠한 개인의 노동도 아닌 추상적인 노동으로서 나타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5], pp. 273 – 275)

과학기술노동은 물리적으로는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라는 체계 내에서 연구조직과 매개조직에서 이루어지나 그 실제적인 노동의 목표, 기획, 수행, 검증, 평가는 과학 공동체 내에서만 가능하다. 문제해결을 중심으로 구성된 행위자 공동체인 과학 공동체가 개별 연구자나 연구집단의 사회적 노동을 직간접적으로 조직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 공동체는 과학기술노동의 물적 기반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연구자와 연구집단은 임금과 인센티브, 특허료, 연구장비와 연구비, 예산배분권한과 인사권 등의 방법을 통해 자본과 국가의 통제 하에 놓임으로써 상당한 정도로 자율성을 잠식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노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노동으로, 과학과 기술의 생산력을 정체시키거나 후퇴시키지 않고서는 ’추상적인 무차별 인간노동‘을 통해 조직화하기 어렵다.

(주제 3) 과학적 실천의 집합체로서 과학은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보편적이고 일반적 방법과 체계,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과학과 과학의 방법이 보편적이고 불변적이라는 주장은 몰역사적인 관념적 과학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역사를 통해 출현한 각각의 개별 과학들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과학과 과학의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각 분과별로 다양한 방법과 기준들이 있으며, 그 방법들과 기준들은 한 과학에서 다른 과학으로 가면 변할 수도 있고, 한 분과 안에서도 변할 수 있다. 성공적인 과학과 그 과학의 방법과 기준들은 어떤 필연성 없이 역사적으로 우연하게 정립된 것이다. 과학을 고정적이고 보편적인 표준적 절차를 통해 수행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 이데올로기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유해하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물리적역사적 조건들을 무시하게 할 뿐 아니라 과학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조적인 종교와 같은 것으로 만든다.

“과학은 고정적이고 보편적인 규칙들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고 해롭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의 발전을 고무하거나 야기하는 인간의 재능과 환경에 대해서 너무나 단순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해로운데, 왜냐하면 그러한 규칙을 강요하는 시도는 인간성을 희생시켜서 직업상의 자격을 늘려나가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생각은 과학에 손해를 끼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물리적 및 역사적 조건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과학을 보다 적응력이 없는 것으로 만들고, 또한 보다 교조적인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모든 방법론적 규칙은 우주론적 가정과 결합되어 있고, 따라서 그 규칙을 이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가정이 옳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18], pp. 335)

파이어아벤트가 모든 과학이 따라야 하는 표준을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과학의 방법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옳았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등과 같은 과학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리스 시대, 중세시대, 근대, 현대의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유아적이다. 파이어아벤트가 말하고 있듯이, ”과학은 고정되고 보편적인 규칙에 따라 작동할 수 있고 작동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고 해로우며“, ”과학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에 손상을 주며“, ”과학의 융통성을 더 손상하고 독단을 더 강화한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자 개인이 주관적인 소망에 따라 어떻게 해도 좋다는 식으로 결론이 내려질 수는 없다. 표준적 방법과 방법의 부재라는 양극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필요는 없다. 차머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에는 여러 방법과 여러 기준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은 성공적인 과학들이 특정한 시기에 우연히 등장했으며 역시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방법들과 기준들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은 과학 발전의 모든 역사적 단계의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과학과 과학의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과학 지식을 생산하고 과학기술노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 표준이라는 환상보다는 다양한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난 다양한 과학의 특징에 대한 공통성과 차이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제 4) 인간은 물론 모든 생물 현상은 자율조직화 내지 자율생성적인 열린 체계이다. 자율생성은 자기조직화, 자기산출, 자기보존, 자기참조 등의 활동을 포함한다. 이 때 신경체계는 직접 환경에 접근하지 않는 자기지시적으로 닫힌 체계를 이룬다. 따라서 인지과정과 지각과정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림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에 의해 촉발된 체계내부적 구성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와 역사를 통해 이러한 선험적 자기발생을 통해 구성된 세계, 선험적 장으로서의 공통의 기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객관적 실재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객관적 실재에 적합해야 한다. 이 적합성은 관찰의 지배나 이론의 지배와 같은 환원주의적이고 위계적인 단일성의 관점보다는 이론실험도구 간의 비환원적이고 비위계적인 비단일성의 관점에 의해 더 잘 검증될 수 있다.

닫힌 체계는 항상성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내적으로 안전되게 유지되며 균형 상태에 도달한 후에는 변하지 않는다. 환경과 어떤 교환관계도 맺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시간 흐름과 무관한 균형 상태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조직된 복잡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각 구성요소는 균형 상태 속에서 수학적으로 일대일로 대응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다. 열린 체계는 그 안에서 유입과 유출 그리고 구성하는 요소들의 교체가 일어나는 체계이다. 체계와 그 환경 사이의 교환 과정은 물론이고 요소들 서로 간의 내적 관계를 변화시킬 능력 또한 상태변화와 요소들의 탈락 및 갱신에도 불구하고 열린 체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체계에 속하는 요소들의 층위에서는 물론이고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의 층위에서도 관찰될 수 있는 동적 메커니즘 (동적 균형)을 구성한다. 따라서 열린 체계들은 환경과의 교환 과정을 통해 동적 메커니즘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환경의 조건이 바뀔 때 체계 구조를 완전히 변경하지 않고도 그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체계이다.

자기생산적 체계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고 유지하는 살아있는 체계이다. 체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와 구성부분을 스스로 생산하고 산출함으로써 그리고 작동을 통해 체계 자신의 조직을 계속해서 만들어냄으로써 이런 일이 가능하다. 구성요소들이 일련의 순환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해 반응하고 그리고 여기서 체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구성요소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기생산적 체계들은 자기를 산출하고 자기를 유지하는 단위들이다. 자기생산적 체계는 재귀적 (생산 과정의 작동 산물과 결과를 그 다음 작동들의 토대로 계속 사용하는 재생산 과정)으로 작동한다. 자기생산적 체계들은 상호작용하는 구성요소들의 재귀적 그물망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구성요소들이 그 상호작용을 통해 다시금 동일한 그물망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자기생산적 체계는 동시에 열린체계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명체는 영양분의 형태로 계속 어떤 물체들을 받아들인다. 생명체계들이 이용하는 환경접촉(개방성)은 자기생산적 조직방식(폐쇄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매우 특별하고 선택적인 환경접촉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세포는 세포를 둘러싼 환경과 접촉하면서 이를 통해 에너지와 물질을 교환한다. 그러나 이 때 세포는 그 구성부분과 구성요소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것, 즉 그 자신의 자기산출과 자기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세포 스스로 세포를 둘러싼 환경과의 교환을 규제한다. 자기생산적 체계들의 폐쇄성(계속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자기산출과 자기유지)과 개방성(환경과의 에너지 및 물질 교환)은 서로를 조건지우는 관계 속에 있다. 체계와 환경 사이의 교환 형식은 환경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생산적 체계의 닫혀있는 조직방식에 의해 확정된다. 자기생산조직의 폐쇄성은 그 개방성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폐쇄성과 개방성은 반드시 서로 짝을 이룬다. 자기생산적 체계들은 자율적이지만 자족적이지 않다. 자기생산적 체계들은 특정한 환경 속에서, 어떤 생활권 속에서 살아가며 그 생활권의 물질과 에너지 수송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자족적이지 않다. 하지만 에너지와 물질을 받아들이거나 내어놓는 것은 고유한 법칙에 따라 체계의 작동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에서는 자율적이다.

신경체계는 상호반응하는 뉴런들의 자기관계적 그물망을 이루고 있으며, 신경세포 각각의 상태변화는 항상 다른 신경세포의 상태변화를 야기한다. 따라서 신경체계는 그 활동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만 재귀적으로 관계를 맺는 작동상 닫힌 체계이다. 각 신경의 활동 상태는 앞선 신경 활동 상태들에 대한 반응일 뿐이기 때문에, 신경체계는 그 체계 작동과 관련해 어떤 입력과 출력도 이용하지 않는다. 환경의 자극과 고무는 어떤 감각으로부터 처리되어 신경체계 고유의 작동으로 반영될 뿐이다. 신경체계는 환경에 대한 어떤 모사물도 제작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경체계는 그 자신의 작동들을 통해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그 나름의 상을 구성해낸다. 인간의 뇌는 환경에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 닫힌 자기지시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뇌와 대응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도 뇌는 외부세계와 접촉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외부 사건들을 신경의 활동으로 변형하는데, 여기서 외부와 내부 사이에는 일대일 상관관계가 제시되지 않는다. 변형은 자극 특성에 따라 진행되는 데, 서로 다른 환경 사건들은 그 특성을 잃어버리며 예외 없이 전기적 신경 에너지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기적 신경에너지는 신경체계 작동의 기본 단위로서 생체전기적 사건들 또는 신경 활동의 단위언어가 된다. 신경체계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과 같은 상이한 감각 지각들을 위해 매번 동일한 체계 고유의 언어를 이용한다. 우리의 신경 자극을 주시할 때, 그 자극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신호 중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 각 감각에 상응하는 차이는 감각기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기적 신경 충동 일반에 비로소 그 의미를 할당하는 신경체계의 일부인 뇌에 의해 만들어진다. 뇌는 신경 충동의 자극 특성을 근거로 신호를 가공하고 평가하는 고유한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것에 의지한다. 인간 신체와 환경의 접촉 지점에 십여만 개의 체계 내적 접촉지점이 있고, 감각을 가공하기 위한 약 5백만 개의 신경세포들과, 자극의 가공과 평가를 전문적으로 하는 최소한 5천억 개의 신경세포들이 있다. 이 극단적인 양적 차이 또한 이를 입증한다. 감각기관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지각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론적으로 지각은 외부세계를 적합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지각이 뜻하는 바는 체계 외부의 세계를 체계 내부적으로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25,30]).

“생물학적으로 보아 사람다움의 독특함이란 오직 ‘언어 (기호로 해석할 수 있음) 안에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구조접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을 통해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적 역동성에 고유한 규칙성들, 예컨대 개인의 정체와 자기의식이 산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의 재귀적인 사회적 역동성이 산출된다. 이 역동성의 일부인 성찰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가 사람다운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세계란 타인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임을 알게 된다. … 곧 우리가 가진 세계 (세계에 대한 인식) 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 (공통의 기호계) 뿐이다.” ([30], pp. 276)

(주제 5) 과학의 이론과 법칙들은 서로 통약불가능할 수 있다. 이론과 법칙은 초월적으로 참이 아니라 특정한조건 아래서만 참이다. 이론 법칙은 실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상화된 실재의 모형에 대한 것이며, 현상 법칙은 실험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기술하는 법칙이다. 보편적이고 광역적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수준에서 이론의 참과 거짓 문제를 논의할 수 있으며, 일정한 제약 속에서 이론적 존재자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과 법칙의 국소화 (localization)와 더불어 실재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점점 더 밝혀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은 실재론적이다. 그 과정에서 표상은 대치되거나 전도될 수 있으나 수학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세련화되어 간다. 그러므로 인식론적으로 과학을 비표상적 실재론 (unrepresentative realism, 차머스)’ 혹은 구조적 실재론 (structural realism, 존 워럴)’으로 명명할 수 있다.

“세련된 실재론과 세련된 반실재론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론자는 과학 이론의 성공적인 예측을 지적하고, 만일 이론이 단순히 계산을 위한 고안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반실재론자들은 비록 실재론자들이 과거의 과학 이론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론들도 성공적인 예측을 하였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론의 이 같은 극적인 전환도 반실재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두 이론의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 있을 수 있을까? … 과학은 그것이 실재의 구조를 밝히려 하였고, 실재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점점 더 정확하게 밝혔다면 점차적으로 진보한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실재론적이다. 과거의 과학 이론은 적어도 그 이론들이 실재의 구조를 근사적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예측에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그 이론들이 예측한 것의 성공은 설명되지 않은 기적이 아니다) 반실재론이 않고 있는 중요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 실재에 부여한 구조가 끊임없이 개량된 경우에 한해서 과학은 점차 진보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구조를 수반하는 표상은 때때로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다. 표상에서 전도가 일어나지만 수학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세련화된다. 그래서 ‘비표상적 실재론’과 ‘구조적 실재론’이라는 용어 모두는 그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13], pp. 331-333)

(주제 6) (주제 2 ~ 5)는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위성과 과학적 실천과 인식의 적합성의 관계를 설명한다. 반영은 거울이 없으며능동적 실천이고, 과학적 인식의 절대적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사고의 근본적 특징은 지속적인 운동이다. 관념적 철학은 과학적 인식에 개입함으로써 과학적 인식들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생산조건들을 은폐하고 과학적 실천 앞에 인식론적 장애를 놓는다. 실천적이론적 이데올로기는 관념론적 철학을 통해 지식과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공간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과학을 제한하고 소멸시키려 한다. 계급 모순들이 실천적이론적 이데올로기를 관통하고 있으므로, 사회구성체 속으로의 과학의 침입과 새로운 담론적 실천은, 실천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 계급적 모순과의 투쟁을 동반해야 한다.

과학적 실천은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 관한 물음과 인식의 정확성에 관한 물음을 반드시 포함한다. 레닌의 반영론은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위성의 테제에 인식의 정확성 테제를 종속시키는 것이다. 앞의 (주제 2 ~ 5)는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위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으며, 이는 레닌의 반영론 테제와도 일치한다. 의식이 존재의 반영임이 확인된다면, 이제 우리는 그 반영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며 인식의 정확성은 어떤 객관적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가를 물어야 한다. 반영론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거울의 이미지인데, 거울은 대상과 마주서자마자 분리되어 있는 상으로부터 즉각적으로 하나의 복사를 완료한다. 반면에 레닌의 반영은 “거울이 없는 반영”이며 능동적인 과학적 실천을 경유하며 반영하는 대상에 점근적으로 접근해 간다. 칸트의 ‘물자체’와 달리 객관적 대상은 과학적 실천을 통해 보다 더 정확해지고 언제나 더 접근해 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형성한 표상은 최종적이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한 객관적 대상을 향한 반영, 즉 거울없는 능동적 과학적 실천은 운동으로서 계속된다. 이것이 인식의 정확성에 대해 레닌의 주장이 뜻하는 바이다 ([17]).

철학은 이념적 영역에서 계급 투쟁의 공간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은 과학적 인식과 실천에 대해 극단적으로 구분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과학적 인식과 실천은 그 존재론적 본질상 운동이다. 따라서 과학적 인식을 다루기 위해서는 항상 새롭게 예기치 못하게 등장하는 과학적 인식과 실천을 존중하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철학이 필요하다. 유물론에 기반한 변증법적 논리학이 바로 그러하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역사적 탐구를 통해 범주체계로 이해되는 논리학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과학적 탐구를 통해 논리적 체계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철학은 홀로 이 ‘최종적 성과’를 성취할 수 없다. 그것은 변증법과 구체적인 과학적 탐구와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3]).

“논리학은 개별과학의 노예는 물론 최고 감독관도 아니고, 또 다른 종류의 ‘절대적 진리’를 자임하면서 개별과학의 체계로서 군림하는 ‘과학의 과학’도 아니며, 오직 개별과학과 동등한 협력자인 것이 분명해진다. 철학적 변증법은 논리학이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의 필수적 구성요소일 뿐, 세계관을 구체화하는 문제와 ‘전체로서의 세계’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더는 요구하지 않는다. 과학적 세계관은 오직 현대과학의 전체적 체계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체계에는 철학적 변증법도 포함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체계가 충실하다거나 혹은 과학적 체계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과학 전체가 복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제를 홀로 떠맡고 있는 세계관인 체하는 ‘순수’철학과 꼭 마찬가지로, 철학⸱논리학⸱인식론을 포괄하지 않는 과학적 세계관이란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23], pp. 319-320)

반면에 관념론은 과학적 실천의 총체가 동일한 하나의 실재로서 취급될 수 있으며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차별화되지 않는 전체를 구성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과학의 차별성(각 분과 과학은 자기 자신의 대상과 이론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과 불균등발전(각 분과 과학은 자신의 특수한 우연적인 역사를 갖는다)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과학적 실천들의 현실을 무시하고 상상적으로 통합시킨다. 관념론적 철학은 과학자의 활동 속에 초과학적 가치들을 도입하고 과학적 인식들 위에 초과학적 가치들을 부과함으로써, 과학적 실천들의 현실과 과학들의 실제적 역사, 과학적 인식들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생산조건, 과학적 인식에 대한 철학적 개입이 가져오는 메커니즘과 효과들을 은폐한다. 이러한 철학의 이데올로기적 작업은 바슐라르가 과학적 실천에 대한 ‘인식론적 장애’라고 이름 붙인 것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관념론적 철학은 ‘과학의 과학’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유사하게 목적론을 숨은 배경으로 깔고 실증주의와 진화주의의 쌍을 과학에 덧 씌운다.

“과학적 이데올로기란 (관념론적) 자연탐구자철학에 의해 인도되고 하나의 새로운 과학적 개념을 방패로 삼고 있는 학설로서, 바로 이 개념을 그것의 적용범위를 넘어서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용어의 형태로까지 팽창시키며 하나의 특정 과학의 통일성을, 특정 순간에 상상적으로 재구축한다. 에너지론의 경우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이 과학적 이데올로기들은 과학적 개념들의 실제적인 생산과정에 대한 부정을 바탕으로 해서 구축되며, 이 과정상에서 가상해결책들을 내놓음으로써 오히려 명백하게 장애들을 생산해낸다.” ([17], pp. 135)

이처럼 철학에서의 당파성은 과학에 대한 상이한 입장과 효과를 가져온다. 관념론적 철학은 과학적 실천에 대해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정합성을 갖고 있는 물질적⸱제도적 존재이고 사회구성체에서 현실적인 기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과학의 전도가 아니고 과학이 출현했다는 것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바슐라르가 언급하는 바 대로의 과학에 앞서 존재하는 ‘인식론적 장애’만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 전체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구성, 작용, 기능이 역사적으로 결정된 하나의 심급이다. 이데올로기는 실천적 이데올로기와 이론적 이데올로기로 구분되는데, 알튀세르는 잠정적으로 실천적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6]).

“실천적 이데올로기들로 한편으로는 개념-표상-이미지의 몽타주와 다른 한편으로 행동-행위-태도-몸짓의 몽타주의 복잡한 구성을 의미한다. 그 전체는 인간의 사회적, 개인적 존재와 그들의 역사의 실제적 대상들과 실제적 문제들에 관한 그들의 태도와 구체적인 입장 선택을 지배하는 실천적 규범들로 기능한다.”

푸코는 이론적 이데올로기로서 ‘역사적 선험과 문서고’라는 개념을 제시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법칙이며, 독특한 사건들로서의 언표의 출현을 지배하는 체계”로, “언표들의 형성과 변환의 일반적 체계”를 의미한다 ([16,19]). 이러한 담론적 체계의 작용은 비담론적 실천들의 규칙성에 의해 제한된다. 실천적 이데올로기와 이론적 이데올로기의 ‘접합’은, 실천적 이데올로기들이 이론적 이데올로기들에 형태와 한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론적 이데올로기들은 실천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종속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실천과 인식이 실천적⸱이론적 이데올로기의 체계를 침입하고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 체계를 관통하고 있는 계급적 모순들에 대한 투쟁을 동반해야만 한다. 리카도와 맑스가 동일한 ‘담론적 형성체’인 고전 정치경제학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제한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한계들에 잡혀 있는 이론적 이데올로기)을 대상으로 다루었음에도, 맑스가 이론적 이데올로기에 머무르지 않고 가치이론으로 ‘새로운 담론적 실천’을 개시하게 된 것은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체계로 과학이 침입한 극적인 사례이다 ([16]).

(주제 7)[2](주제 7)의 설명은 Arie Rip의 최근 논문 [8]의 pp. 203 – 206의 내용을 요약해서 번역한 것이다. Arie Rip은 근대과학의 지식생산 양식의 역사를 압축하여 … Continue reading 과학은 불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성해가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만이 확실한 지식이 아니며, 확실한 지식을 생산하는 다양한 지식 생산양식들이 존재한다. 과학적 지식은 유효한 지식으로서 지식이 생산된 후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지역적으로 생산된 경험과 발견들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편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즉, 생산된 과학 지식은 지역적인 차원에서 확실한 결과를 보장해야 하고,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으로 확장된 지식은 다시 구체적인 상황에서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 지식 생산 양식은 14 ~ 16세기의 르네상스라는 용광로에서 시작되어 과학혁명이 본격화되는 17세기 후반이 되면서는 국제적 수준에서의 분과별 과학 공동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을 지나면서 부르주아 산업사회의 등장과 함께 대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 지식 생산의 제도화와 과학의 전문화, 과학의 주된 후원자로서 국가의 역할 확립, 중립적이고 순수한 과학의 이미지 구축 등이 진행된다. 19세기 말에 확립된 제도화되고 전문화된 과학 지식 생산양식은 현재까지 지배적인 방식으로 존속하고 있다.

서구 과학은 14 ~ 16세기의 유럽의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다양한 지식들은 서로의 명확한 경계나 규범을 찾기 어려웠고 혼란스럽게 얽혀 있었다. 중세의 대학이 있었고 인문학자와 예술가, 공학자들은 여행을 했다. 또한 연금술사와 점성술사, 협잡꾼, 돌팔이 약장수 들도 있었다. 왕자와 부유한 상인들은 그들의 후원자였고 학자들과 장인들은 후원자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작업을 했다. 르네상스 때부터 지식 생산의 다양한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일 (Boyle)에 의한 실험이 수행될 수 있는 실험실과 같은 미시적 보호 공간이 도입되었고, 각국의 왕들에 의한 거시적 차원의 보호 공간도 구축되기 시작했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적합한 과학적 절차들이 도입되고 기계공학과 장인들 간의 경계가 확정되기 시작했다. ‘고급 과학’과 ‘저급 과학’의 구분이 점점 더 심화되면서 물리학은 분과 과학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과학이 되었다. 이러한 각 분과 과학들의 합리적인 지식 생산 양식은 르네상스라는 비옥한 땅에서 만들어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 생산이 갖는 풍부함, 다양성, 개방성은 과학혁명을 위한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고급 과학이 출현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서 학자와 예술가들의 후원자들은 현대 과학에서 핵심적인 제도인 “동료평가 (peer review)”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후원자들이 그림, 조각, 공학적 사업 등을 후원할 때 인문학자나 르네상스의 학자 등 다른 지식 그룹에게 조언을 받았는데,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다른 후원자들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후원과 조언의 순환은 현재 우리가 “동료”라고 부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어 냈고 후원자들에게 조언을 하는 “동료평가”라고 하는 실천적 제도를 확립했다. 이 때 확립된 동료평가는 현재에도 학술지의 편집자와 발행자들 혹은 펀딩 에이전시에서 수행하고 있는 방법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상호작용이 지역적 맥락과 이해관계들과 연계되기 시작하면서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내용을 순환하면서 연계되는 가상의 공동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서간의 형식으로 학술지가 등장하면서 과학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도록 했다. 18세기의 과학 사회는 연구보고서를 출간하고 후원자들과 소속 구성원들을 연결시키는 역할도 수행했다. 계몽주의 운동을 거치면서 각 나라는 특정한 후원자로부터 독립적으로 과학 지식 생산에 대한 후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총체적 정당성을 확립했다. 18세기에는 광업, 야금학, 의학, 천문학 데이터 수집 등의 특정 분야들이 발전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연계되며 일반 이론화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화학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분과 과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분과 과학과 전문가들이 18세기 후반에 등장하고 19세기 후반에는 고등교육과 과학의 전문화가 촉진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분과 과학은 제도화되었고 대학의 학과와 도서관에서 분류 체계로 확립되었다. 과학의 전문화가 분과 학문을 통해 제도적 인프라 구조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지역적으로 생산된 지식들은 보다 과학 논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더 국제적인 지식 생산 체계로 구성되었다. 연구 분야, 전문가, 분과 과학 등은 국제적인 과학적 실천을 위한 중범위 수준의 보호 공간이 되었다.

과학적 실천은 학계, 사적 후원자들, 국가, 전문가 집단 등으로부터 다양하고 분산적으로 후원을 받음으로써 후원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 갔다. 1870년대에 과학의 대변인들은 과학은 국가로부터 지원받아야 한다고 요구했고 국가는 즉각 반응해서 과학의 보편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동시에 대학은 연구를 수행하고 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역할이 점점 증가하자 국가적 과학 공동체라는 개념이 강화되었고, 각 국가의 과학 공동체는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국가에 로비와 조언을 하는 제도화된 채널을 구축한 과학 조직들이 설립되었다. 2차 대전 후 각 정부에서 펀딩 에이전시를 설립하면서 이러한 과학 조직의 기능이 완결성을 갖게 되었다. 과학을 후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펀딩 에이전시는 국가 과학 공동체에 의해 포획되었고 “과학, 끝없는 개척지”라는 이데올로기로 과학에 대한 자원 제공을 합리화했다. 펀딩 에이전시는 분과 과학들을 지원하는 보루 역할을 한다 ([8]).

(주제 8)[3](주제 8)은 Arie Rip이 최근 논문 [7]의 pp. 624 – 628에서 제안한 과학의 지역적-국제적 체제 (local-cosmopolitan regime)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번역한 것이다. … Continue reading 사회적이고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과학은 지역적-국제적 체제이다. 지역적 단위는 “연구” (researching)를 수행하고 국제적 수준에서는 “과학화” (sciencing)를 수행한다. 실험실과 연구소, 워크샵 등에서 수행되는 지역 단위의 활동을 “탐구적 실천” (search practices)이라 하고, 국제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분석과 유효화, 지식의 구조화 등의 활동을 “인식론적 실천” (epistemic practices)이라고 한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과학 지식의 저장고라 부를 수 있는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장이 구성되며, 지역적인 과학적 실천들은 확립된 경험과 규칙들의 규범을 따른다. 지역적 단위와 국제적 수준 간의 상호작용과 그 상호작용의 조정은 지역적 단위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이루어진다. 자원을 유동적으로 배분하고 과학을 정당화하는 세 번째 활동을 “정치작업” (politicking)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국가는 과학의 자기조직화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과학은 “유도된 자기조직화” (induced self-organization)로 간주될 수 있다.

지역적인 활동은 경험과 규칙과 같은 규범들을 통해 과학적 장과 연계된다. 국제적 수준의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장과 연결된 지역 단위가 과학적 실천의 시작점이 된다. 전통적으로 과학 연구에서 일반 법칙 혹은 보편적 지식이라고 불리는 것을 국제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국제적 지식은 명시적이고 체계화되어 있으며, 유동적이고 전환가능하며 교환가능하고 패키지화되어 있다. 과학적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지역적 단위와 국제적 수준을 연결하는 체제의 한 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역 단위에서 국제적 수준으로 가는 프로세스는 지역적-국제적 체제의 핵심적인 운동으로 인식론적이고 사회적이다. 그 과정에는 국제적 수준의 규칙에 의해 규정된 지역 단위들 간의 과학적 실천의 교환과 순환, 포럼과 매개조직 등을 통한 축적 등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과학적 실천의 순환과 축적을 위한 하부구조가 존재한다. 지역적-국제적 체제에서 각 패러다임은 예시적인 사례와 패러다임을 정교화하는 경험적인 연구지침, 기대할 수 있는 가능한 것의 범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지역적 단위와 국제적 수준의 상호작용은 지역적 단위의 과학적 실천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조정된다.

아직 공유되지 못한 코드 혹은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 새로운 상황에서는 관련된 지역 단위의 연구소와 연구그룹 간의 교환, 상호조정, 다양한 규칙의 생성 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다차원적인 상황 속에서 체계 혹은 패러다임이 될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는 국제적 수준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행위자들은 의식적으로 국제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확장하기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제적 수준은 자동적으로나 저절로 출현하지 않는다. 전제 조건으로 순환과 하부구조를 필요로 하며, 그러한 전제 조건이 만족되지 못하면, 국제적 수준은 형성되지 못하고 붕괴하고 만다. 새로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국제적 수준이 확립되면 지역적 발견들이 새롭게 확립된 모델, 이론, 개념들로 비판되고 검증된다. 국제적 수준에서의 패러다임과 요소들의 힘은 전제적이지 않을뿐더러 각 분과 과학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다. 물리학과 같은 분과에서는 국제적 수준이 지역 단위에 대해 지배적이지만, 화학의 경우에는 지역적 단위가 많은 부분 재량권과 자율성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것은, 지역적 단위와 국제적 수준의 조합이 전체로서 운동하며 지역적-국제적 체제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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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논문은 2012년 과학기술 공공성 포럼과 2015년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일부를 발췌하였다. 논문에서 주장되는 내용은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논문의 분량이 많아 <현장과 광장 2호>, <현장과 광장 3호>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싣는다.
2 (주제 7)의 설명은 Arie Rip의 최근 논문 [8]의 pp. 203 – 206의 내용을 요약해서 번역한 것이다. Arie Rip은 근대과학의 지식생산 양식의 역사를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3 (주제 8)은 Arie Rip이 최근 논문 [7]의 pp. 624 – 628에서 제안한 과학의 지역적-국제적 체제 (local-cosmopolitan regime)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번역한 것이다. Arie Rip이 사회적이고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제시한 과학의 지역적-국제적 체제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모델에 비해서 연구자와 연구집단 간의 상호작용과 조정, 다양한 분과 과학의 존재를 고려한 포괄성, 과학 지식으로 구성된 담론 구성체와 인식론적 장, 과학적 실천과 인식의 동적 운동과 행위자들을 규정하는 규범들의 존재, 지역 단위 연구와 인식론적 장과의 유연하고 가변적인 관계, 패러다임 변동을 위한 순환과 축적의 조건과 하부구조 등을 다루는 데 있어 더 큰 장점들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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