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노동운동과 페미니즘

천연옥 | 노동전선

1. 글을 시작하며

문재인 정권이 집권하고 인천공항을 방문하여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선언’을 한 이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조직화가 민주노총의 주요과제로 떠올랐다. 실제로 민주노총 100만 시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조직화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철도공사 신규입사자들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성명을 비롯하여 곳곳에 민주노총 사업장내의 젊은 신규조합원들의 정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아주 거세게 반대한다고 한다. 국민연금처럼 콜센터 노동자들을 직고용으로 전환하고 하나의 노조로 조직하거나, 부산지하철처럼 청소용역 노동자를 서비스지부로 편재하여 직접고용투쟁에 연대하고 있다든가 하는 모범사례도 없지 않지만, 그 안에서도 젊은 신규자들은 노조 집행부의 이런 입장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민주노총을 넘어서 한국노총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부산시설공단 정규직 노조는 시설공단을 점거하여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를 주장했다. 왜 이렇게 젊은이들이 더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노동자적이고 반동적이기 까지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일베와 메갈리아의 공박을 알게 되었다. 사실 몇 년 전에 이미 언론과 SNS를 뜨겁게 달구었다고 하는데, 교섭과 회의, 집회와 세미나를 쫓아다닌 필자는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일베와 메갈리아는 아주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요즘 2,30대 청년들을 사로잡는 다양한 담론들 특히 페미니즘의 다양한 조류들은 노동운동의 대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주체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점점 노령화 되어가는 활동가들의 후진양성은 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왜곡된 페미니즘 담론에 사로잡힌 젊은 노동자들을 노동자계급 해방사상으로 의식화 하는 것이 정말로 시급한 과제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우리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바쁘지만 공부하자.

페미니즘은 여성해방론과 동의어가 아니다. 남성에 대립하는 여성을 전제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에 대립하는 여·남노동자의 단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성억압의 기원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 기인한 남성의 지배가 아니라 사적소유의 발생·발전에 따른 사회의 경제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문제는 선배혁명가들의 이론과 실천에서 증명되었듯이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위해서 이 글은 페미니즘과 여성해방론의 개념에 대해 정리하고, 페미니즘의 역사와 갈래를 살펴보고, 주요 이론가와 그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고, 노동자계급 해방사상으로서의 여성해방론을 역사에서 제시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를 살펴본 뒤에 위대한 여성혁명가들인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생애와 사상을 훑어보려고 한다.

2. 페미니즘은 여성해방론과 동의어가 아니다.

여러 백과사전이나 여러 저술들에서 페미니즘이 여성해방론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여러 페미니즘이 곧바로 여성해방론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맑스주의 페미니즘, 유물론적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주장과 논리들을 살펴보면 페미니즘 앞에 붙은 용어들은 기존의 용어들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사상으로서 맑스주의, 사적 유물론,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현재 페미니즘의 여러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현실 운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혼란들을 제거하고 여·남노동자의 단결로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198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이 잠시 불타올랐던 시기에 뒤이어 곧바로 닥친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이후 역사적 반동이 시작되었고, 계급적 노동운동의 발전이 지체되면서 올바른 맑스주의적 관점에 선 여성해방론이 제대로 소개되고 학습되기도 전에 페미니즘의 물결이 운동사회와 시민사회, 그리고 일반 대중을 뒤덮었다. 물론 성차별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많은 진보가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3. 페미니즘의 역사와 갈래

백과사전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면, 1830년대에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가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여성의 권리를 주창’한다는 뜻으로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언론에서 자주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영어권으로도 건너갔다. 제1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것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고, 제2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것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이고 제3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반쏘·반북·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맑스주의자들에 의한,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같은 위대한 여성혁명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여성운동과 여성의 지위의 향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리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1) 자유주의 페미니즘

세계적으로는 여성참정권 운동으로 시작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당(독점자본좌파)정권의 파트너로 성실히 현재의 국가권력에 복무하면서, 아직도 여성정치인이 부족하니, 여성이 직접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부르주아 여성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미국에서는 1920년 여성투표권이 도입되자 이 운동은 퇴조하게 된다. 여성투표권의 획득은 이들의 투쟁의 성과라기보다는 이들보다 더 치열하게 여성투표권투쟁을 했던 사회주의자들과 그 투쟁의 성과인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쏘련에서 여성투표권이 도입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조차 여성투표권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2차세계전쟁이 끝난 후였다.

 18세기19세기20세기
주요 인물메리 울스턴크래프트주디스 사전트 머레이프랜시스 라이트존 스튜어트 밀해리엇 테일러해리엇 터브먼수잔 B 앤서니베티 프리댄글로리아 스타이넘리베카 워커네이오미 울프마사 누스바움
주요 사업정치적이고 법적인 개혁을 통해 성적 평등 추구, 법·제도 개선
여성참정권 운동동성결혼 법적 인정 등

<표1>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요인물과 주요사업

2) 급진주의 페미니즘(래디컬 페미니즘)

프랑스 68혁명 시기에 함께 운동했던 여성활동가들이 남성중심적인 운동권 문화에 반발하여 기존의 조직에서 독립하여 여성들만의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흑인민권운동에서 여성활동가들이 같은 이유로 독립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핵심개념은 ‘가부장제’인데, ‘개별가족 구성원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연소자와 여성에 대한 남성지배를 지지하고 구조화하는 체제’로 정의한다. 인류역사 전체를 통틀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 왔으며, 이것이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하여 남성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상호교차성을 주장한 흑인페미니즘, 레드스타킹 선언이나 남성거세결사단 선언에 영향을 받은 레즈비언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지만 내용은 가족해체와 이성애를 반대한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으로 분화된다. 문화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페미니즘도 분화의 한 갈래이다.

한국에서는 2015년 8월에 ‘메갈리아’라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자생적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여성혐오를 그대로 남성에게도 반사하여 적용하는 ‘미러링’을 사회운동 전략으로 삼아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한남충’(한국남성을 벌레에 비유한 표현), ‘숨쉴한’(일베 등에서 사용하는 여성은 삼일에 한번 씩 맞아야 한다는 ‘삼일한’에 맞서 남성은 숨쉴 때 마다 맞아야 한다고 뒤집어 공격), ‘갓치’(온라인 공간에서 최상급으로 쓰는 ‘God’에 한국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를 더해 뒤집은 말), ‘갓양남’(서양남자들은 신과 같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메갈리아에서 분화된 ‘워마드’는 비정규직 남성을 ‘번식탈락충’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들은 일베와 같은 수구보수꼴통 남성중심주의자들에 맞서 여성혐오를 남성혐오로 되갚아주는데,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에 열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녀 노동자의 단결이란 것이,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시스템에서 최하위층에 속한 실업자, 불안정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로써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군지 모르고 서로 공격하고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표2>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주요인물, 주요저작, 주요주장

주요 인물주요 저작(연도)주요 주장
캐서린 머리 케이트 밀렛(1934~2017)『성 정치학』(1969)미국의 여성활동가,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많은 영향을 준 작가, 교육자, 화가.『성 정치학』은 여성의 종속과 착취가 문화담론과 사회제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가 파헤쳐졌다고 평가받는다. 오랫동안 찬사를 받아온 문학작품 안에서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을 모욕하고 공격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술라미스 파이어스톤 1945~2012)『성의 변증법』 (1970)캐나다 출신 여성활동가, 레드스타킹스 창립회원. 1969년에 발표된 ‘레드스타킹 선언’에서는“여성은 (억압받는) 하나의 계급이다”라는 성계급론을 주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여성계급 의식화를 통한 집단행동을 주장했다. ‘레드스타킹 선언’ 은 이후‘드센년 선언’, ‘강간 반대 선언’, ‘미스아메리카를 멈춰라 선언’ 등으로 구체화 되었다. 『성의 변증법』에서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는 가부장제의 기원과 토대를 여성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생물학적 결정론)
밸러리 솔래너스‘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  생물학적 성(임신, 출산)이 여성을 억압하는 주요 기제이므로 생물학적 가족은 해체 되어야 하고, 과학기술에 의해 여성이 출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남자의 도움없이 아이를 낳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므로 남자는 필요없다. 남자는 없어져야 한다. 남자는 생물학적 재앙이라고 주장, 정신분열증을 앓으면서 앤디 워홀에게 총구를 겨눈다.(영화 :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안드레이 드워킨『포르노그래피』(1981)희생자, 생존자 라는 개념을 대중화 시킴, 유대인과 여성을 동일한 피해자, 생존자로 보고 홀로코스트를 내세워 팔레스타인 인민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하면 반유대주의로 매장시키는 ‘피해자 권력 만들기 전략’을 페미니즘 운동방법론으로 받아들임

문화주의 페미니즘이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반격으로 1975년에는 미국에서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해결보다 개인의 ‘남성중심문화에 반대하는 여성적 가치를 양성하는 새로운 공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새로운 공간’은 행동의 공간이 아니라 회피의 공간이었고, 사회변혁은 개인변혁으로 변질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생태주의 페미니즘(에코 페미니즘)은 1970년대 프랑수아 도본느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로, 양성차별과 생태파괴는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사회가 생태계를 무분별하게 착취하고 무시하듯이, 여성은 남성들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되는 것은 같은 사회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과 자연을 통합시켜 똑같은 권리를 누릴 존재로 인식했다. 문화적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생태낭만주의의 분파로써 감성적으로 자연과 여성은 합일되기 때문에 환경문제를 확실하게 풀어나갈 주체는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사회적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인간과 자연의 지배관계와 남성과 여성의 지배관계를 동일시하여,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동시에 풀어나간다는 관점이다. 녹색 정치를 주장한다.

3) 유물론적 페미니즘/맑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지금 한국에서 대단히 잘 알려진 여성활동가가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메이데이)라는 책의 서평을 쓰면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방안이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현실적 기획이고 이들의 21세기 여성해방 기획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처방전”(이황현아)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시키기 위해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을 받아들여 자본주의와 나란히 병렬시켰다. 자본주의가 생산양식이라면 ‘가부장제’는 ‘재생산’양식이고, 전자가 계급억압의 장소라면 후자는 여성억압의 장소이므로,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혁명이 둘 다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두 개의 독립된 서로 다른 억압구조를 이론화했기 때문에 ‘이원론’이라고 불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원론은 한계를 드러내어 두 개의 결합은 기계적 결합에 머물러 이론과 실천이 전개되어 갈수록 양자가 서로 분리되는 역설이 발생했다. 여러 억압에 대한 총체적·통일적 설명을 꺼리며 ‘모든 억압이 다 중요하다’는 식에 머무르는 것은 이론에서 뿐 아니라 실천에서도 한계가 나타났다. 여러 억압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총체적 이론틀을 모색해야 올바르고 효과적인 실천을 할 수 있으며, 그 이론틀은 맑스주의이다.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사용하는 핵심용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가져온 ‘가부장제’와 ‘교차성’, 그리고 ‘재생산’ 개념이다. ‘교차성’에 대해서 이황현아는 “억압체제의 상호연관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확장하는 작업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새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1989년 킴벌리 크렌쇼라는 흑인 페미니스트 법학자가 법적인 차별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처음 쓴 ‘상호교차성’은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같은 억압을 겪는 것이 아니며, 여성억압, 인종적 억압, 계급적 억압 등 여러 억압의 교차점에 놓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여러 억압들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킬 뿐 억압을 인식하는 총체적 틀을 제시하지 못하고 억압들에 대한 기계적 병렬과 다원론으로 귀결된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동시에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통합하는 단일이론을 제공한다. 상호교차성이론에서 설명했던 대로 이들이 이원론을 선택한 이유는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급문제는 맑스주의로, 여성억압은 페미니즘으로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가부장제, 생산양식/재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가내생산양식, 계급체제/젠더체제 등의 다양한 이원론이 등장했다. 과거의 이원론을 극복했다는 최신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맑스주의가 ‘상품생산’, ‘자본주의생산’ 혹은 ‘생산’이나 ‘시장’에 대해서만 다루고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들이 어떻게 ‘재생산’ 되는 지는 공백으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초기 사회재생산 이론과 달라진 것도 없으면서 맑스주의를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억압을 노동력 재생산과 관련지어 설명함으로써 노동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에서 일어나는 여성억압과 자본주의 이외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성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 엥겔스 이후 인류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인류역사에서 계급의 등장뿐 아니라 여성억압의 등장도 생산의 변천 속에서 설명될 수 있고, 이 점이 설명된 후에야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의 특수한 성격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다.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서독의 여성이론가들 사이에 나타난 유물론적 페미니즘 흐름은 동독의 여성이론가들에 의해 비판되었다. 이 내용은 1984년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출판 100주년을 맞이해서 출판된 『가부장권과 사회』를 한국에서는 1990년 중원문화에서 『사적 유물론과 여성해방』 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표3> 유물론적 페니미즘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

(『사적유물론과 여성해방론』 중에서)

주요인물주요저서주요주장
마리아 미즈『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1986)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약탈이며, 남성의 폭력과 약탈이 여성억압의 기원이다. 노동자계급 남성이 여성을 ‘가정주부화’함으로써 첫 번째로 일자리를 독점할 수 있고 두 번째로 “가족 내 모든 현금소득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으므로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한다. 미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이 겪는 물질적 억압에 집중하면서 유물론적 분석을 시도하지만, 물질적 생산이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원동력임을 부정하다보니 착취가 아니라 ‘약탈’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남성이 여성과 식민지를 ‘약탈’할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잘못된 분석을 한다. 그 귀결은 변혁 전략에서 서구 여성의 역할을 소비자운동으로 제한하고, 제3세계 여성에 대해서도 여남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아닌 토지 및 자급적 생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불분명한 방식을 제시하게 된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전망을 사회주의가 아닌 자급자족 경제를 제시하는데,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했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유사해 보인다.
실비아 페데리치『캘리번과 마녀』시초축적을 “봉건적 반동”이나 “재판농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형성되기 위한 전제로서 생산수단과 직접생산자의 분리과정, 즉 토지로부터 농민을 분리하여 생존하기 위해서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과정을 시초축적이라고 설명한다. 페데리치의 자의적 용어확장은 중세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존재했으며, 자본주의는 중세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봉건투쟁에 대한 중세 지배계급의 반혁명이었고, 여성의 종속도 이런 반혁명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노동의 성적 분업,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는 여성을 출산기계 취급하고, 임금노동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이 가정에서 부불노동을 하는 그들의 기능적 상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고, 이로써 새로운 가부장제 질서인 ‘임금 가부장제’가 수립되었다. 남성은 이 과정에서 공모자인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한다. 페데리치의 이런 주장의 이론적 뿌리는 자신이 속한 이탈리아 자율주의 그룹이다. 페데리치와 몇몇 사람들은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페데리치는 여성의 종속을 설명하면서 봉건제를 미화하고 자본주의 여성종속을 과장하면서 ‘봉건귀족없는 봉건제’를 이상적인 사회로 본다. 이것은 맑스가 프루동에 대해서 “교황없는 가톨릭”을 꿈꾼다고 비판했는데, 페데리치도 같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사이보그 선언’페미니즘 운동의 순수성 및 그와 결부된 피해자됨을 유일한 통찰근거로 생겨난 피해를 반성하고, 『사이보그 선언문-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반려종 선언-개, 사람, 그리고 소중한 타자성』을 발표하며, “피해자됨”의 페미니즘 운동을 넘어설 것을 제안한다. 이성애를 넘어서서 사이보그(나는 여신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가 되거나, 다종 가족을 구성하는 전략으로 이성애를 넘어설 것(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을 제안하였다

<표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주요인물, 주요저서, 주요주장

아직도 언급하지 못한 몇 가지 쟁점이 있다.

첫째로 성별임금격차와 성별 직종분리라는 자본주의적 현상에 대해 가족임금과 보호입법, 숙련노조에서의 여성배제로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가 제한되고,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이 확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보호입법이 여성노동자를 일터에서 쫓아내고, 숙련노조는 여성을 배제하고, 아내의 가사노동이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줄여 자본가에게 이득을 준다. 즉 자본가와 남성노동자가 공모하여 여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최저임금이 가족임금이 아니라 1인 가구 임금으로 책정하는 것을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바라보며, 여성가장의 부양가족생계비 문제는 오히려 더 해결하기 어려운 반동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둘째로 가사노동에도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자본론 1장 1절을 제대로 학습하면 된다. 가치란 상품의 두 요소의 하나로서 사용가치와 가치로 설명되는 개념이다. 즉 상품을 상품이게 하는 것은 사용가치(유용성)가 있어야 하고, 상품으로서 교환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다른 질을 가진 사용가치들이 동질의 단위로 환원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동질의 인간의 노동생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이란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가치의 실체는 인간의 노동이고, 가치의 크기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측정되는 노동량이다. 가사노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부의 가사노동이 아닌 가사도우미의 가사노동은 당연히 상품이므로 가치가 있다.

셋째로 성매매 여성은 성노동자이고, 성매매를 비범죄화하고 성노동자운동에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계문제에 현실주의로 접근한 여성활동가들이 생겨났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말했듯이 가족의 변천사에서 군혼에서 대우혼으로, 대우혼에서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일처제로 발전해 왔다. 모계제가 부계제로 전환되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는 여전히 남성은 현대에도 군혼생활을 하게하고, 여성에게만 상속을 할 수 있는 확실한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정조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매춘이다. 매춘은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을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이며,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채무노예에 가까운 처지에 있다. 위대한 여성혁명가들은 모두 매춘에 반대했으며, 러시아혁명이후 쏘련이나 중국혁명 직후 중국에서 성매매 여성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사회주의 여성으로 변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 사회주의 여성해방론

1)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884

혈연가족(가족의 첫째단계)혼인 집단이 세대별로 되어 있다. 선대와 후대 간에서만, 즉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서는 서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배제된다. 친형제와 친자매, 종형제와 종자매, 재종형제와 재종자매는 모두 형제자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부부이다. 현재는 전멸한 이러한 가족형태로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은 하와이식 친족제도와 이후의 가족의 전체적인 발전이 이러한 가족형태를 필연적인 선행단계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푸날루아 가족(군혼의 최고형태)가족의 조직에서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 제1의 진보라면, 제 2의 진보는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푸날리아 가족(원시상태에서 집단결혼이 허용된 가족형태)은 일정한 수의 친자매 또는 방계의 자매는 그들의 공동남편들의 공동아내였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그들의 공동남편 중에서 제외되었다. 이 남편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푸날루아(친근한 동료, 동반자)라고 불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계열의 친형제 또는 촌수가 먼 형제들도 자기의 자매를 제외한 일정한 수의 아내와 공동결혼생활을 했으며, 이 아내들도 서로 푸날루아라고 불렀다. 이 가족의 주된 특징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아내 쪽의 친형제, 나중에는 촌수가 먼 형제가 배제되었으며, 그리하여 다른 쪽에서도 남편의 자매가 배제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가족제도에서 전연 무의미하던 조카와 조카딸, 종형제와 종자매라는 촌수가 필요하게 된다. 씨족이라는 제도는 대부분 푸날루아 가족에서 직접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군혼 가족제도에서는 형태에 상관없이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어도 누가 아이의 어머니인지는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전체 가족의 모든 자녀를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며, 또 그들의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진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는 역시 자기의 친자녀들을 다른 아이들과 구별한다. 군혼이 존재하는 한, 혈통은 다만 모계만이 인정된다. (바흐펜은 모권이라고 부르지만 원시공산제사회는 평등했기 때문에 모계가 모권은 아니다). 모든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가 금지되고, 나아가 어머니 쪽의 가장 먼 촌수의 방계 친족끼리의 성교까지 금지되자 한 집단의 친자매들과 방계자매들은 씨족으로 전화했다. 즉 서로 결혼해서는 안되는 모계 혈족자들의 공고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푸날루아 가족으로부터 씨족으로 발전한 것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고 인정한다면, 씨족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종족 즉 거의 모든 미개인과 문명인이 과거에 이러한 가족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대우혼결혼 금지가 더욱 복잡하게 되자 군혼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어 대우혼 가족으로 대체되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한 남자는 한 여자와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계속해서 일부다처제의 권리와 때로는 정조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었다. 반면에 여자에게는 같이 사는 동안 정조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으며, 그들의 간통은 잔인한 처벌을 받았다. 이전의 가족형태에서는 여자의 부족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여자가 부족하여 약탈과 매매가 시작되었다. 대우혼 가족은 그 자체가 아직 극히 미약하고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대를 요구한다거나, 심지어 그렇게 할 생각조차 못했다. 따라서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원시공산주의적 세대를 결코 해체시키지 못했다. 원시공산제 사회는 가정에서 여성의 지배를 의미한다. 여자가 대부분 또는 모두 같은 한 씨족에 속하는 한편 남자는 여러 씨족에 분속되어 있는 원시공산주의적 세대는 원시시대의 어디에서나 일반적이었던 여성지배의 현실적 토대이다.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부의 원천이 조성되었고, 전혀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선진적인 목축민들은 말, 낙타, 나귀, 소, 양, 산양 및 돼지 등의 가축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시나 하고 웬만큼 거두어만 주면 끊임없이 대량 번식하여 젖과 고기를 아주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재부는 일단 개별 가족의 사유재산으로 넘어 가서 번식이 빨라지자 대우혼과 모권 씨족에 입각한 사회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대우혼은 친어머니와 함께 친아버지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가족 내에서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해 남편은 자녀들을 위해 기존의 상속순위를 폐지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 혈통을 따졌던 시기에는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고 폐지되었다. 실로 이 혁명(이것은 인류가 체험한 가장 근본적인 혁명 중의 하나이다)은 살아있는 씨족 성원 단 한사람도 건드리지 않고 이전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앞으로는 남자 성원의 자손이 씨족에 남아있어야 하고, 여자 성원의 자손은 자기 아버지 쪽 씨족으로 넘아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결정을 하였다. 이것으로써 모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모권 상속은 폐지되고, 부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상속이 도입되었다. 엥겔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도구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이렇게 확립된 남성독재의 최초의 산물은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가족이라는 중간형태이다. 모건의 『고대사회』는 이렇게 묘사한다. “토지를 소유하고 가축 떼를 돌보기 위해서 일정수의 자유민과 비자유민(노예)을 가장의 권력 하에 하나의 가족으로 조직하는 것이다······이 가장은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비자유민은 한 명의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일정한 구역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 비자유민이 가족의 성원이 된 것(파물루스는 가내노예를 의미했고, 파밀리아는 한 사람에게 종속된 노예의 총체를 의미했다)과 가장의 권력이 핵심인데, 이런 가족 형태의 완성된 유형은 로마의 가족이다.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는 지역에서는 가부장적 세대공동체가 있었다.
일부일처제이것은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에서 대우혼 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만이 이 유대를 끊고 아내를 버릴 수 있으며, 이 단계에서도 남편은 정조를 지키지 않을 권리를 관습상 보장받고 있다.(나폴레옹법전)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

<표5> 가족의 발달(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중에서)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결혼에는 대체로 인류 발전의 3개의 주요 단계에 상응하는 3개의 주요 형태가 있었다. 야만시대에는 군혼, 미개시대에는 대우혼, 문명시대에는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일처제가 있었다. 이 진행과정의 특징은 군혼시대의 성적 자유를 여자는 점차 박탈당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고, 사실상 남자는 오늘날까지도 실질적으로는 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일처제의 경제적 기초가 다가올 사회적 변혁에 의해 사라진다면 일부일처제는 제대로 실현될 것이고, 남자에 대해서도 현실이 될 것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결혼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이에 기초한 소유관계가 지양됨으로써, 오늘 날 아직도 배우자의 선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는 그 모든 부차적인 경제적 고려가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일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미 상호간의 애정 이외의 다른 아무런 동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한 후에 자리 잡을 양성 관계의 형태는 남녀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남자는 일생을 두고 금전이나 기타 사회적 권력수단으로 여자를 사는 일이 없고, 여자는 진정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기로도 결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며,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거부하지 않을 때 확정될 것이다.

2)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 『여성과 사회주의』

초판 1877, 이후 엥겔스의 영향으로 대폭 수정함

베벨은 사회주의탄압법으로 감옥에서 여성들의 열등한 지위가 불변의 자연적인 상태라고 하는 기존의 부르주아 이론에 도전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여성들의 정신적·감정적 형성과 그녀들의 관심, 목표, 그리고 그녀들의 활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미치는 영향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그 이론을 반박했다. 오직 부르주아 사회의 몰락을 통해서만 노동계급과 여성들은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베벨의 저작은 이후 사회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구분제목내용
제1부1장원시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원시사회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역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 인류의 영원한 고전인 이 책은 가족 및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사회경제적 토대를 중심으로 하여 분석함으로써 그 역할이 역사진행에 따라 변화되어 왔고, 그 지위는 사회구성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집중적 표현이 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여성해방이 곧 인간해방의 전제이자 토대라는 것을 사회학적, 경제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다. (이순예의 역자후기 중에서)
2장모권과 부권의 투쟁
3장기독교
4장중세의 여성
5장종교개혁
6장18세기
제2부
7장성적 존재로서의 여성
8장현대의 결혼
9장가족의 붕괴
10장생활수단으로서의 결혼
11장결혼의 기회
12징매춘 : 시민사회의 필수적인 사회제도
13장여성의 직업적 지위
14장교육을 위한 여성의 투쟁
15장여성의 법률적 지위
제3부16장계급국가와 현대 프롤레타리아
17장자본주의적 공업의 집중화 과정
18장공황과 경쟁
19장농업혁명
제4부20장사회혁명
21장사회주의 사회의 기본법칙들
22장사회주의와 농업
23장국가의 소멸
24장종교의 앞날
25장사회주의 교육제도
26장사회주의 사회의 예술과 문화
27장개성의 자유로운 신장
28장미래의 여성
29장국제관계
30장인구문제와 사회주의

<표6>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 목차

28장 ‘미래의 여성’에서 베벨은 다음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의 여성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기만적 지배와 착취에 예속되지 않으며 남성에 대해서 자유롭고 남성과 동등하다. 이제 여성은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다. 교육도 남성과 똑같이 받는다. 단 성과 성적 기능의 차이에 따라 분리교육이 꼭 필요한 경우 예외를 둘 수 있다. 제반 생활조건이 자연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직되어 있으므로 여성도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마음껏 계발하고 발휘할 수 있다. 자신의 희망과 소질 성향을 고려해 선택한 활동분야에서 남성과 동일한 조건에서 일한다…..사랑의 문제에서도 남녀는 똑같이 자유로우며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다. 애정이외의 다른 조건으로 상대방과 결합하는 일은 없다.또 이러한 결합은 전적으로 사적인 계약으로 관계공무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여성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평등권 획득은 우리 문화가 목표로 하는 발전과제 중 하나이다. 자상의 어떤 권력도 이의 실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자본가의 노동자 지배-를 종결지을 일대 변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면 드디어 인류는 최고의 자기 발전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인간이 수천 년 전부터 꿈꾸고 갈망해왔던 ”황금시대“가 마침내 도래하는 것이다. 계급지배가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이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3) 클라라 체트킨(1857~1933)

클라라 아이스너 체트킨(1857~1933)은 독일의 소농민들과 섬유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 뷔데라우에서 1857년 7월 15일 태어났다. 당시 독일에서 최상급이었던 라이프찌히의 반 슈타이버대학 사범학교에 무료입학허가를 받았다. 그곳에서 4년 학습하는 동안 문학, 역사,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국어를 배웠다. 재학시절 여성평등에 대한 관심은 여성교육협회와 전독일여성연합과 관계를 맺게 하였다. 그녀는 오데사에서 온 러시아 망명자 오십 체트킨을 새로운 교사로 만났다.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체트킨의 도움으로 클라라는 1878년 중반 경 완전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여자였기 때문에 당원이 되는 것이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클라라는 독일사회민주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 조직과 철저히 행동을 같이 했다. 1878년 10월 21일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통과시켰고, 곧바로 독일 사회민주당과 그 출판물들은 비합법적인 것으로 선언되고 지도자들은 추방당했다. 독일에 남아있는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클라라는 비합법화된 당과 추방당한 지도자들을 위해 자금을 모으면서 비합법적인 활동에 가담했다. 오십 체트킨이 살고 있는 파리로 옮겼다. 파리에서 오십 체트킨과 함께 살면서 그의 성을 따랐으며 2년 동안에 두 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가부장적인 결혼법 하에서 자신의 독일시민권을 잃지 않기 위해 결혼신고를 하지 않았다.

오십 체트킨은 척추결핵으로 1889년 1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충격에서 벗어나자 1889년 7월 14일 바스티유감옥 함락 100주년에 열린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조직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베를린 노동여성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도록 선출되었고, 19개국 대표 400여 명 중 8명의 여성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대회 6일째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해방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대회는 클라라 체트킨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성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을 동일한 권리 하에서 노동계급속에 포함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민족의 차별 없이 남녀 노동자의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요구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독일대표들에 의해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집행부가 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당과 노동조합에 대한 선동을 계획하고 지도하는 여성선동위원회를 세울 것이 제안되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의 실각이후 반사회주의법의 연장이 거부되어 독일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클라라 체트킨도 독일로 돌아와 슈투트가르트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잡지 <<평등>>의 편집자가 되어 25년 가까이 활동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날의 두 번째 여성협의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사회주의 여성의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였고, 여성협의회는 매년 3월 8일을 모든 나라에서 <세계여성의 날>로 지정하고, 여성참정권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11년부터 최초의 <세계여성의 날>이 시작되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1892년부터 독일사회민주당의 당원으로 활동했고, 1895년 즈음 최상위 지도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 해에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부에 선출됨으로써 독일사회민주당 집행부에서 일하는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모든 점에서 독일 사회주의여성들의 대변자였지만, 당 지도부와의 관계는 조화롭지 못했다. 1917년 3월 사회민주당 실행위원회는 클라라 체트킨을 <<평등>>의 편집진에서 제명하였다. 1917년 반전사회주의자 그룹이 창당한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하기 위해 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들은 1918년 스파르타쿠스연맹을 조직하고 1918년 독일공산당을 창당했는데,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클라라 체트킨도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우익사회주의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움직이는 반동적인 의용단에 의해 칼 피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후,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중앙위원회의 멤버로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였고, 쏘련과 독일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쏘련에 정착하였다. 1919년 3월에 열린 제3인터내셔날(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결의가 포함되었다. 그녀는 1920년 봄, 국제공산주의 여성서기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62세였다. 레닌과 여성문제에 대해 나눈 대화를 팜플렛으로 만들어 배포했으며, 국제노동계급운동과 인종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는 동안 자주 아파서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해야 했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했고, 쏘련으로 돌아간 클라라 체트킨은 6월 22일 사망했다.

<표 7> 클라라 체트킨 주요 연설 및 문서

년도제목내용
1889여성해방을 위하여(국제노동자대회에서의 연설, 7/19, 파리)여성노동이 남성노동과 경쟁함으로써 임금을 떨어뜨리므로 여성노동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반동적 관점 비판,
1893여성노동과 노동조합조직저임금,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는 여성노동의 현실과 낮은 조직화 지적, 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계급노예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동지로, 계급투쟁에 있어 필요불가결하고 동등한 전우로서 고려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1895여성권리 청원에 관하여부르주아 여권주의를 지지한 독일사회민주당에 대한 비판
1896오직 프롤레타리아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고타의 독일사회민주당대회에서의 연설, 10/16
1902우리들의 아이들을 보호하자착취당하는 아동노동에 대한 글
1903여성들이 칼 맑스에게 빚지고 있는 것맑스 사후 20년을 맞이하여, 맑스의 사적유물론이 여성해방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했음을 강조함
1907여성선거권우리 사회주의자가 여성선거권에 대해 가지는 의미는 부르주아여성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로서 여성선거권을 쟁취하고자 한다.
1910<국제여성의 날>에 부쳐모든 나라의 사회주의 여성들은 해마다 여성의 날을 개최할 것이다.
1914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준비하자프롤레타리아들끼리 총을 겨누는 전쟁을 반대
1914모든 나라의 사회주의 여성들에게제 2인터 바젤 결의에 따라 전쟁 반대
1919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반혁명분자에게 암살당한 두 혁명가에 대해 애도와 분노, 결의
1932스코츠보로의 흑인 청년들을 구하자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8명의 흑인 청년들이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음을 호소
1933전쟁을 중지하라고조되는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위기에 대한 비판

4)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의 자모슈리치라는 작은 도시에서 1871년 3월 5일 유대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1873년부터 바르샤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바르샤바의 제2여자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폴란드의 ‘프롤레타이아 당’에 가입하여 활동중 당국의 탄압을 받아 학교를 그만두고 1889년에 취리히로 망명하였다. 취리히 대학에서 자연과학, 수학,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폴란드사회당과 폴란드의 독립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하였고, 1894년 폴란드왕국사회당을 결성하였고, 박사학위 논문 <폴란드의 산업발전(1898)>으로 당 주장을 이론화 하였다. 1898년 독일국적을 위해 독일인과 형식적으로 결혼하여 1898년 5월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다.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대립하면서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를 1898년에서 1899년까지 <라이프치히 인민신문>에 연재하였다.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령 폴란드인 바르샤라로 가서 혁명투쟁에 함께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사회민주당의 대다수는 전쟁공채에 찬성표를 던지며 애국주의로 돌아섰으나,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크, 클라라 체트킨 등의 혁명가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스타르타쿠스단>을 거쳐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1918년 독일혁명은 실패하고 변절한 독일사회민주당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주인이 된다. 1919년 1월 15일 밤 반혁명군에게 체포된 로자 룩셈부르크는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탈출하려다 두 사람은 암살당했다.

년도제목내용
1902전술적 질문벨기에의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이 부르주아정당과 동맹을 하기 위해 여성참정권에 대한 요구를 포기한 것에 대한 문제제기
1907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의 연설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국제 사회주의 여성 사무국을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이 있는 브뤼셀로 옮겨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비판, 여성 조직의 독자성 강조.
1912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여성의 정치적 무권리로 이득을 보는 이는 자본이다
1914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여,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가운데서 가장 힘없는 자들이여, 자본주의 지배라는 공포로부터 여성과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에 어서 합류하라!

<표8>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요 연설 및 저서

5)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

1872년 3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895년부터 운동에 뛰어들어 1915년에 볼셰비키가 되었고, 1922년까지 여성노동자 운동을 했다. 10월 혁명때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유일한 여성위원이었다. 1923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의 외교를 담당했고, 세계 최초의 여성대사가 되었다. 혁명적 콜론타이는 1909년에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출간했다. 그녀는 거기에서 페미니즘을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 분명하게 정의하고 모든 계급의 여성이여 단결하라!는 그들의 구호를 비판하였다. 1910년에 클라라 체트킨과 함께 매년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하였다. 여성의 날에 대해 혁명전인 1913년에, 혁명 후인 1920년에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한 여성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를 일깨워 주었다. 1922년 3월 8일은 소련에서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콜론타이는 한 때 ‘노동자반대파’로 레닌과 대립하고 당에서 숙청당하기도 하였으나 짧은 시간에 자기반성하고 1922년 노르웨이 공사로 임명되었다. 1923년 소설 『붉은 사랑』과 『위대한 사랑』을 통해 신경제정책으로 불거진 모순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소설에서 형상화 했다. 1924년 노르웨이 소련대사가 되었고, 이후 멕시코와의 무역, 스웨덴 대사, 소련과 핀란드와의 평화조약 체결 등 1945년까지는 현직에 1946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는 고문으로서 소련의 외교업무에 헌신했다. 1952년 3월 9일 80회 생일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년도제목내용
1909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역사적 유물론의 지지자들은 우리 시대의 일반적 사회 문제와 분리된 어떤 특별한 여성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종속 그 이면에 특정한 경제적 요소들이 있다, 경제적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즉 과거 어느 시점에 여성에 대한 지배를 가져온 그 힘들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비로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근본적인 영향과 변화를 줄 수 있다.페미니스트(부르주아 여성운동론자) 비판.
1920공산주의와 가족러시아 혁명이 가져온 변화, 자본주의 멍에로 여성은 비틀거린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해체되었다.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의 여성의 ‘금손’, 가내노동과 경제, 자본주의가 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가족은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여성을 가내노예제로분터 해방시킨다. 아이들의 양육은 국가가 책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혼이 진정 슬픔의 연속이었다고 해서 결혼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애정과 동지애로 이루어진,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자인 그들의 결합, 성매매라는 끔찍한 저주는 끝날 것이다. 노동자 어머니에게는 나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이 있다.

<표9> 콜론타이의 주요 저서

5. 글을 마치며

남성에 대항해서 모든 계급의 여성이여 단결하라고 외치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에게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에 대항하여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가 단결해야 함을 강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부르주아 남성이 기생충이라면 부르주아 여성은 기생충의 기생충이라고 했다. 이 위대한 여성혁명가가 반동 폭력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지 올해가 이제 100년이 지났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주와 이주,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등 자본이 만들어 놓은 온갖 차별의 전시장이 되어 있다. 2019년 11월 27일에 발표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 이사장의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에 나와 있는 ‘남녀 고용형태별 임금격차(시간당 임금기준)’를 보면, 남자노동자의 임금이 100이라면 여자 노동자의 임금은 70.7%,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100이라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62.9%이고, 남자 정규직 임금이 100일 때 남자 비정규직 임금은 62.1%, 여자 정규직 임금은 74.1%, 여자 비정규직 임금은 52.3%에 불과하다. 해마다 격차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간제, 시간제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대부분 여성들의 일자리는 거기에서 늘어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으로 자본에게 무한한 이윤의 확대와 경기변동에 맞추어 고용을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풍부한 산업예비군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성노동자는 가사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현실을 바꾸고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가사노동이 사회화되고, 줄어들면서 세탁기, 전기밥솥, 청소기 등의 과학기술의 발달로 미숙련 가사노동자인 남성도 가사노동에 편입시키고, 여성도 사회적 노동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물적토대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계급지배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물적토대는 가능성으로만 남을 것이다. 결국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단결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베벨이 말했던 ‘미래의 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러시아혁명으로 이룬 여성의 평등과 해방을 향한 여러 조치들을 부정하고, 기존 사회주의가 여성문제에서 실패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사회주의가 되고 나서도 남녀간의 격차는 완전히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이후 남녀간의 격차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법으로 제정되고 나서 점차 줄어들고 있었으며, 오히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난후 격차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독일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고, 통일 후 동독의 여성들의 처지가 더 열악해 졌음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보육과 모성보호에서 한국보다 훨씬 더 못산다는 북이 훨씬 앞서 있음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엥겔스, 김대웅 번역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쉬바르츠 외 지음 『사적 유물론과 여성해방』 중원문화

김민재, 이지완, 황정규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 해방

한우리 <Rethink:페미니즘 선언문을 다시 사유하다, 1960-1970s 래디컬페미니즘 선언문들의 전복적 의미> 이화여성주의학회

정호영 <알렉산드리아 콜론타이의 『공산주의와 가족』해제, 『정세와노동』157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로자 룩셈부르크, 서의윤 번역 <로자룩셈부르크의 여성론> 『정세와노동』152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서의윤 번역 『콜론타이의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세계여성의 날』 좁쌀한알

채만수 <‘성노동자운동’이라는 현실주의> 『정세와 노동』4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필립 S 포너, 조금안 옮김, 『클라라 체트킨 선집』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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