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일 경제전쟁−역사전쟁의 근원-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협정-

김동국 | 전(前) 전교조 부위원장

들어가며

일본과의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경제 전쟁으로 표현되는 반도체 관련 부품 수출 제한, 백색국가 제외 등의 일본의 공격에 대하여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 지소미아 종결 등 한국의 대응도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다. 수구 꼴통 야당은 ‘토착 왜구’라 불릴만한 언행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그러나 경제 전쟁의 본질은 ‘역사 전쟁’에 근원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의 체결로 정치적인 국교정상화를 이루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과거사 문제나 영토 문제에서 매년 충돌하고 있다. 정례화된 독도와 위안부 관련 망언과 강제 징용 문제로 서로를 경멸하고 있다. 가히 역사 전쟁이라 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은 2019년 현재의 문제를 넘어 전후 75년의 시간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고 체계화되었다. 현재의 한・일간의 경제전쟁과 역사전쟁의 근원을 찾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전후 냉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특히 한・미・일 삼국관계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출발선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 역사 전쟁의 서막

아시아 재건 계획과 대소련 정책에서 중국을 중심에 두고 있던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자 중국에 대한 기대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전략을 구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점령정책을 민주화와 비군사화에서 경제부흥으로 전면 수정했다. 이 궤도 수정을 ‘역코스’라고 한다. 한국 전쟁은 한국에게는 비극이지만 일본에게는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한국전쟁에 주일미군(미8군)이 한국으로 떠나게 되자 맥아더는 일본에 경찰예비대(자위대의 전신)를 조직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비군사화 정책과는 명백히 반대되는 처사였다. 나아가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일본이 더욱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미일경제협력’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일본 자본가 진영을 인적으로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이 장기화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자 추방해제를 더욱 확대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아예 추방령을 폐지하여 나머지 추방자도 자동으로 해제되었다. 그리고 추방해제와 더불어 그들에 대한 활동 제한도 완화되었다. 이 조치의 결과 일본에서는 전쟁 시기의 군국주의자나 제국주의자들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대일강화조약,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반성 없는 주권 국가 일본의 등장과 전쟁 책임자들의 전면 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으며 역사 전쟁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관대한 강화 – 식민지 문제를 외면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8일 일본과 48개국, 즉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전후 평화조약이다. 한국 전쟁 이후 급진전된 강화조약은 소련, 중국 등과의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이 제안한 의견에 찬성하는 국가들만이 강화조약 개최에 합의하면서 준비에 착수했다. 한국과 북한은 전승국이 아닌 ‘일본의 일부’로 규정되면서 초대받지 못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이전의 보복적인 성격이 강한 ‘엄격한 강화’에서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보루로 삼기 위한 ‘관대한 강화’로 궤도를 완전히 수정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동아시아에서 직접 전쟁에 동원되거나 희생되었던 국가들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때문에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 전후 처리를 둘러싼 갈등이 깊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과 관련된 핵심 조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2항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제4조 (a) 이 조항의 (b)의 규정에 따라, 일본의 재산 및 (제2조에 언급된 지역의) 일본 국민들의 재산의 처분과, 현재 그 지역과 (법인을 포함한) 거류민을 통치하고 있는 당국자에 대한 그들의 (채무를 포함한) 청구권은, 일본과 그 당국자 간에 별도 협정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그 당국자나 거류민의 재산의 처분과, 일본 및 그 국민을 상대로 하는 그 당국과 거류민의 (부채를 포함한) 청구권은, 일본과 그 당국자 간에 별도 협정의 주제가 될 것이다. 제2조에서 언급된 지역의 어떤 연합국이나 그 국민의 재산은, 현재까지 반환되지 않았다면, 현존하는 그 상태로 행정당국에 의해 반환될 것이다.(국민이란 용어를 현 조약에서 사용할 때는 법인을 포함한다.)제14조 (a) 일본이 전쟁 중 일본에 의해 발생된 피해와 고통에 대해 연합국에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생존 가능한 경제를 유지하면서, 그러한 피해와 고통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하는 동시에, 다른 의무들을 이행하기에는 일본의 자원이 현재 충분하지 않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따라서, 일본은 즉각 현재의 영토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 그리고 일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연합국들에게 그들의 생산, 복구 및 다른 작업에 일본의 역무를 제공하는등, 피해 복구 비용의 보상을 지원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 그러한 협상은 다른 연합국들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부과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원자재의 제조가 필요하게 되는 경우, 일본에게 어떤 외환 부담이 돌아가지 않도록 원자재는 해당 연합국들이 공급한다.

위 2항 (a)에서 처음에는 포함되었던 독도가 최종 문안에서 제외되면서 오늘날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일본이 전쟁 중 일본에 의해 발생된 피해와 고통에 대해 연합국에 배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생존 가능한 경제를 유지하면서 의무를 이행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과도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국가의 범위조차 ‘현재의 영역이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되고 일본군에 의해 손해를 입은 연합국’으로 제한하면서 한국과 북한은 제외되었다.

청구권과 관련해서는 일본은 한국에 대해 권리를 포기하고 한국과의 청구권 문제는 ‘당국 간의 특별협정’으로 처리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이후 한일협정이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원천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전승국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문제가 핵심이었다. 이해관계에서 식민지 문제, 즉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 문제가 우선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는 식민지배의 불법성 규정이 핵심 쟁점이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 규정은 대단히 중대한 것으로 불법성이 인정되어야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패전국의 식민지배를 국제법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면 전승국의 식민지배의 불법성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1910년 한일합병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게 식민지 배상에 대해 면죄부를 준 셈이다. 미국에 의해 일본의 식민 지배의 불법성 문제가 봉쇄되고 나아가 일본은 면죄부까지 받게 되었으니 현재의 일본의 태도에는 미국의 원죄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일합병’의 국제법적 불법성을 확인하고 주장하는 것은 한일협정, 나아가 한일관계의 모든 사안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그 출발점을 막아버렸다. 과거사 정리의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뼈아픈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엄청난 반전이 작용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과 연합국과의 평화협정이며 여기에 한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따라서 강화조약은 일본의 권리와 의무만 규정될 뿐 한국은 강화조약의 당사자가 아닌 관계로 조약의 결과를 따를 이유가 없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말하는 청구권의 개념은 전쟁 배상도 아니고 식민지 배상도 아니다. 단순한 채무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전쟁 배상과 식민지 배상이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은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 권한,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 어떤 청구도 한국에게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남은 것은 한국이 일본에게 따져 받아야 할 재산처리와 채무 문제뿐이다. 여기에 식민지 배상과 전쟁 배상까지 합해야 제대로 된 청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진정한 권리이다.

정리하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의 권리에 대한 제약을 명시하지 않았다. 명시되지 않은 내용은 다른 조약이나 협정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 빠진 한일협정은 불완전하고 미완의 협정일 뿐이다.

미국의 요구에 의한 한일협정 – 한일 과거사의 종지부가 아닌 갈등의 시작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고 반공 기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한・미・일 동맹체제 구축을 위해 한일관계의 개선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의지에 따라 한일회담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후 신속하게 시작되었지만, 진행 과정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조문 해석에 대한 한일 간의 차이와 한국의 국제적 지위 때문이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국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개별적으로 일본에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일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한일회담은 한국과 일본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일 양국은 미국에 종속된 체제였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양국 국민의 격한 반발을 초래했다.

한일협정 추진 과정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직후인 1951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외교국장 시볼트는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를 한국과 협상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1952년 한국 정부는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어기는 일본 선박을 나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계속된 협상에서 한일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하여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1952년에는 한국의 배상요구액이 클 것을 우려한 일본측이 오히려 한국이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해 보상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역청구권을 주장하였다. 이후 1953년 10월 열린 회담에서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으며 포츠담 선언은 연합국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이라고 발언함으로써 국교정상화 논의는 사실상 결렬되고 만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즉각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1961년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를 만나 경제건설의 위한 일본의 협조를 요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김종필의 메모>1. 청구권은 3억 달러(무상 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2. 장기 저리 차관도 3억 달러로 한다. 3. 한국의 대일 무역 청산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라의 메모>1. 청구권은 3억 달러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2. 무역 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한다. 3.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합의 사항>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천5백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2.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김종필과 오히라의 회동 이후에도 1962년 케네디와 요시다의 회담, 1963년 11월 존슨과 박정희의 회담 등을 통하여 한일 간의 외교 관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회담 타결이 막바지에 이른 1964년 미국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극동문제담당차관 등이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과 한국의 조속한 수교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일협정의 내용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1964년 1월부터 한국에서는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월에는 5·16 이후 없었던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하여 1965년 2월에는 기본조약이,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8월 14일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하였다. 그리고 12월 18일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1951년 10월 20일 한일 제1차 회담이 열린 이래 14년 1개월 28일간에 걸친 양국 간의 교섭을 거쳐 이날 양국대표는 비준서 교환 의식을 끝냄으로써 두 나라의 수교는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일협정은 한일 과거사의 종지부가 아닌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

논란의 쟁점 – 무상 3억, 유상 2억의 성격

일본은 한일협정 이후 한국에 지불한 5억 달러로 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949년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협상에 대비하여 ‘대일배상요구조서’를 작성했다. 여기에 의하면 현물부터 전쟁 배상에 이르기까지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최소 24억 달러(1달러=15엔)에서 최고 75억 달러(1달러=4.35엔)의 금액을 배상금액으로 제시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정리된 차관을 뺀 3억 달러와 비교하면 그 사이의 환율변동을 고려해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가히 굴욕적 외교라 비판받아 마땅하다.

또한 5억 달러 지불의 내용조차 협정문에 명기되어 있듯이 현금이 아니라 ‘3억 달러 가치에 해당하는 일본국의 생산물과 용역’의 무상제공이고 2억 달러는 ‘장기저리 차관’이다. 이자내고 빌려오는 빚인 것이다. 그것도 5억 달러 모두 무려 10년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일본은 당시 한국전쟁 이후 전쟁 특수로 성장한 경제의 구조 재편의 과정에 들어갔고 낡은 경제 시스템의 이전과 시장 확대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것을 한국에서 한일협정을 통해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처리하려 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방식도 한국이 일본에게 경제개발계획을 제출하고 협의과정을 통해 일본의 승인을 얻는 절차를 거친 후 생산물과 용역이 제공되는 것이어서 ‘내정간섭과 시장장악’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수직적 국제 분업 체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경제적 타격을 줄 가능성이 생긴 구조적 원인이 여기에서 발원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대외진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경제적 손익만 따져서 박정희 정권 시절의 1965년~1980년까지만 계산해봐도 일본은 13억 달러를 한국에 투입한 반면, 20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일본이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엄청난 자금을 지불하고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청산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언어도단에 불과한 것이다.

논란의 쟁점 – 청구권은 소멸되었는가?

한일협정의 ‘청구권,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1항에 ‘양국 국가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한일 양국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앞서 제기한 바와 같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의 청구권은 채무관계에 한정된 것이다. 식민지 문제, 다시 말해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과 전쟁 배상이 제외된 국가 간의 채무관계에 대해서만 규정한 것이다. 협정문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변제와 채무관계 사안뿐이다. 이마저도 엄청나게 부족한 액수이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기인한 피해는 이 조약 범위 밖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일협정은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로 대표되는 식민 지배로 인한 개인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대법원의 2012년과 2018년 강제 징용 관련 판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판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청구권 협정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 따라서 그 당시 협정을 통해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개인 청구권도 소멸하지 않았고 피해 국민에 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

일본은 위 판결에 강력히 반발했다. 오늘날 일본의 경제 도발은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대한 도발이며 한일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반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청구권이 한일협정으로 소멸했다는 입장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앞서 계속해서 언급한 바대로 일본이 한일협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식민지 배상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일본의 권리와 의무만 제시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후 진행된 한일협정의 청구권 문제에서도 식민지 배상은 빠진 채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배상 청구는 정당하며 일본은 지금이라도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배상에 즉각 돌입해야만 한다. 일본 정부가 이토록 반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리하며

탈냉전 이후 ‘역사전쟁’이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전쟁’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놓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눈’을 놓고, 어떤 ‘눈’이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가에 대해 전쟁으로 표현할 정도의 심각한 갈등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논쟁’ 정도에 그칠 것을 왜 ‘전쟁’까지 하게 되는 것일까? 다들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교감의 결과이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곡된 과거사는 제대로 된 청산의 과정을 꼭 밟아야 한다.

2019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 그 하위체제로서의 한일협정체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 한국은 100년 전, 50년 전처럼 더 이상 불법적인 조약, 불평등한 조약에 의거한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남북관계를 평화의 시대로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동북아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반면, 일본은 어떻게든 이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 위계질서를 재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나아가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전쟁 가능한 국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것이 아베의 생각이다.

따라서 현재의 한일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불매운동이나 개인 차원의 배상 문제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 시작으로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는 한일 과거사의 핵심적 과제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한일 간의 민감한 내용을 봉합한 상황에서 어정쩡한 합의를 하는 순간, 문제는 미래로 넘어가게 되고 그 미래는 끊임없이 과거의 반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한반도 주변 국가들과의 공동 해결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굴절된 한일관계의 출발선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있었듯이 한일 간의 문제는 양국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한일관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지금까지 미국 세계정책의 하위체계로 연동되어 있다는 점, 이걸 극복하지 않고서는 정상적 관계를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주변국들과의 긴밀한 외교를 통해 포스트-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예고하고 이를 현실화해야 한다. 한일 관계의 갈등을 해소하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평화체제구축을 위해서라도 시급히 요구되는 과제이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일본의 태도 변화이다. 일본은 하루빨리 한반도 전체에 대한 불법적 강점과 식민지 피해에 대해 근본적인 사죄와 함께 한일협정체제에서 철저히 외면한 청산의 실제적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며 정답이다. 반성과 배상을 외면한 일본의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길은 결코 없을 것이다.

참고 문헌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인물과사상사 2004
박태균 외 『쟁점 한국사』 창비 2017
하타노 스미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제와 역사문제(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ReadingJapan 15)』 제이앤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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