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노동운동과 시민운동

김승호 |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1]이 글은 노동전선이 2019년 7월 20일(토) 주최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토론회 주제의 발제문을 보완한 글입니다.

1. 용어법

노동운동

노동운동을 노동자운동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은 과학적인가? 그러면 여성운동을 여자운동으로 바꾸는 것은 과학적인가?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그 가운데서도 특히 노동자 대중이 수행하는 사회운동이지만 노동자가 하는 모든 사회운동이 곧 노동운동은 아니다. 노동자가 여성운동을 할 수도 있고 민족운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을 굳이 노동자운동이라고 바꿔 불러야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또 노동계급이라고 부르든 노동자계급이라고 부르든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에드워드 톰슨 같은 저명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도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직역하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토론회에서 발제자에게 주어진 제목대로 노동자운동이 아니라 노동운동이라는 일반적이고 오래된 용어를 사용하려 한다. 이때 노동운동이란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모든 사회운동을 의미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자본과 대립·투쟁하면서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향상을 추구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물론 노동자의 지위향상을 추구하는 운동은 현실에 있어서는 자본으로부터의 계급적 해방을 최고목표로 할 수도 있고, 그런 근본적 목표는 포기하고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제한적인 지위향상을 최고목표로 할 수도 있다.

실천적으로 볼 때 이렇게 자본주의 안에 갇힌 노동운동과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동운동 사이의 내용적 구별이 노동자운동이냐 노동운동이냐 라는 용어상의 구별보다 훨씬 중요할 것이다.

시민운동

시민(市民)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도시에 사는 사람을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도시의 부르주아지들을 지칭했다. 이 도시민들 가운데 부유층이 봉건계급에 맞서 수행한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Bourgeois Revolution) 이라고 부르는데, 부르주아지를 시민이라고 번역해서 시민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프랑스의 1789년 대혁명, 7월혁명과 2월혁명 등등.

오늘날 시민사회니 시민운동이니 하는 말은 부르주아지들의 반봉건 자본주의 혁명운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말하자면 오늘날 시민이라고 불리는 말과 역사적으로 시민(부르주아)이라고 불린 말은 맥락이 전혀 다르다.

시민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시민사회니 시민운동이니 하는 용어들은 한 세대 전부터 많이 사용되어 왔다. 그 한 세대 전이란 민족·민중혁명운동의 세계적인 고양을 무력화하고자 미 제국주의가 추진한 ‘민주화 이행’ 프로젝트가 집행되던 1980년대 후반이다. 그리고 이런 ‘계급’(과 ‘민중’과 ‘민족’)을 대체하는 ‘시민’ 담론은 – 담론이라는 말도 이 시기에 등장해서 많이 사용되었다. – 소련과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급속히 확산되어 대세가 되었다. 이들은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을 시민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자본과 대립하면서 노동계급의 지위향상을 추구하는 것 즉 계급투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사회운동들, 자본주의 시민사회(경제사회나 정치사회와 대비된다) 안에서 제기되는 각종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거나 해결하려는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등장했다.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연환경을 보호하려는 사회운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 밖에 인권운동이라든지 소수자운동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근자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이 시민운동은 노동계급의 지위향상이나 해방을 직접적으로 자신의 목표로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노동운동과는 문제의식이 다르다. 노동인권 신장을 추구하는 운동이 있지만 이 운동은 노동문제를 일반적 여러 인권문제의 한 하위범주로 다룬다. 이 시민운동에는 노자간의 계급모순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이라는 인식이 없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는 노동운동과 친화적이지 않으며 특히 계급해방을 추구하는 혁명적 노동운동을 경원시한다. 심지어 구좌파라며 폄하한다.

2. 노동운동에 대하여

한국 노동운동은 국제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돼 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전투적 파업과 화려한 투쟁문화를 보고서 한국의 노동자들이 혁명운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붉은 머리띠, 힘찬 투쟁가요 및 격렬한 몸짓이 그런 오해를 빚었다. 10년 전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 경험에서 배우고자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특히 캐나다에서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또 미국의 킴 무디 같은 사람은 브라질, 남아공,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을 사회운동적 노동운동, 다시 말해서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고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이 붕괴하기 이전까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지금은 많이 해소되었다.

지금도 일본 노동운동 일각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도로치바 노조(국철 치바 동력차노동조합)이 그런 경우다. 도로치바 노조 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일본 노동조합들은 오래 전부터 아예 파업과 투쟁을 하지 않고 있는데 반해, 한국 노동조합은 파업과 투쟁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도노조 및 서울지하철노조와 교류하고 있는 일본 철도노조(JR총련)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일본 노동운동에 비하면 한국 노동운동이 운동을 잘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 노동운동에는 지금 파업과 시위를 찾아보기가 아예 어렵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한국에서도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퍼진 지 오래됐다. 2005년 경부터였다고 기억된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위기론도 잦아들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위기’가 아닌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위기가 극복되었기 때문인가? 위기는 계속되고 있고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위기에 무감각해 진 데는 노동운동 지도부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타성에 빠진 탓도 있고, 촛불혁명으로 자본과 정권의 노동탄압이 느슨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한국 노동운동에는 지금 위기의식이 없다.

한국 노동운동 안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주류에 대해 소수의 비판적인 조류(이른바 좌파)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러한 비판적 조류는 주변화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비판적 조류 자신이 비판의 방향을 잘 설정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비판적 논의는 매우 부족했다. 비판적인 조류가 주변화 된 데는 비판적인 조류 자체의 문제는 없었는지도 성찰해 봐야 할 시점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인정하고 혁신을 하고자 한다면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분노하거나 욕하기에 앞서 사태를 냉철하게 살펴보고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태일 동지의 수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태양은 마른 대지 위에 무엇이든지 태워버릴 것 같이 이글거린다. 열네 살의 소년이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부산진역에서 옛날 그가 살던 영도섬 다리 쪽으로 무거운 다리를 옮겨놓고 끌어놓으면서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국제시장 입구 어느 양화점 쇼윈도우 그늘진 곳에서 잠시 갈증나는 더위를 피하고 있다. 소년은 누구, 무엇에게 반항함이 없이 생각한다. 나는 왜 언제나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헌 때 뭉치인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어야 할까를. 누구 하나 그 소년의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은 없다.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좌우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힘없이 걷고 있다. 소년은 또 생각한다.

한국 노동운동은 위기 상태를 계속하고 있다. 말로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단결과 투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아서 그것을 전혀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 집권세력은 민주노총을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자본과 정권은 무기력한 노동운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롱한다. 노동자는 물론이고 노동운동 또한 명백히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0 최저임금 결정 과정을 보라! 노동운동이 사회적 약자가 아니어야만 노동자의 지위를 유지·개선할 수 있다! 노동운동은 사회적 강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바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권은 사실과 다르게 민주노총이 사회적 강자라고 우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강자이므로 자본의 축적에 자본과 책임을 함께 분담해야 한다고 억지주장을 한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합원 조직률이 낮고 – 2천 5백만 노동자에 백만 조합원이다. 한국노총과 합쳐도 2백만 명이다. 8%다 – 조합원이 공무원, 공기업 및 독점대기업의 정규직 등 특권적·특혜적인 노동자층에 집중돼 있어서 계급적 대표성도 매우 낮다. 산별노조도 만찬가지로 무늬만 산별이다. 교섭과 투쟁은 기업별이다. 총파업을 선포하지만 매번 무늬만 총파업에 머무르고 있다. 현 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두 번의 총파업이 전형적이다.

그러나 문제의 지점들이 이것만일까? 이런 문제들은 왜 발생하고 지속되고 있을까? 전태일 동지처럼 ‘왜’ 라는 물음을 계속 던져야 한다.

답을 잘 얻으려면 질문부터 잘 해야 한다. 전태일은 나는 왜 항상 ‘고생’해야 할까, 그렇게 고생해도 왜 항상 가난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사색을 시작했다. 그런 사색의 결과 사회가 빈한 자와 부한 자로 나누어져 있음을 간파했다. 그런 간파의 연장선에서 전태일은 또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빈한 자는 왜 부한 자의 비대한 배를 더 비대하게 하기 위한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명분상 전태일을 따르는 한국 노동운동은 지금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까? 우리 노동운동은 왜 항상 고공농성을 해야만 할까? 왜 항상 열사를 만들어내야만 할까? 왜 장기 단식과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같은 힘겨운 투쟁을 해야만 할까? 그렇게 힘들여 투쟁해도 왜 시원하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왜 이겨 봐야 본전밖에 못되는 싸움을 되풀이할까?

노동운동이 이렇게 ‘고전’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하면 노동운동이 단결과 투쟁을 ‘올바르게’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위사업장 수준에서건 총연합단체 수준에서건 ‘열심히’ 단결·투쟁한다고 했지만 ‘올바르게’ 단결·투쟁하지 못한 결과 단결도 힘 있게 되지 못하고 투쟁도 힘 있게 되지 못했다.

단결은 양적으로도 크게 확대되지 못했고 질적으로도 기업별로 파편화돼 있다. 그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있다. 투쟁은 어떤가? 개별노조 수준에서는 임·단협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투쟁하고 있기는 하다. 한국노총 개혁파가 투쟁보다 교섭을 중요시한다면 민주노총은 전반적으로 교섭보다 투쟁을 중요시한다.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이 순순히 양보하지 않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이 투쟁성이다. 그러나 지역별 또는 산업별 연대투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총파업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연대를 강조하지만 연대집회 수준이고, 그것도 간부와 열성조합원들의 연대 수준이다. 그게 ‘간부파업’이고 ‘희망버스’다. 또 한국 노동운동의 전통이 전투성인데 이 전투성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이렇게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전투적으로 투쟁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노동운동이 자본과 정권에 맞서서 고전할 수밖에 없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전투적으로 투쟁하는 조직력과 투쟁력을 만들어내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답은 조직력과 투쟁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생각하면 분명하다. 의식성이다. 의식성이 약하면 필연적으로 조직력과 투쟁력이 떨어진다.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목적의식적으로 높이지 않고 자연발생성에 내맡겨 두면서 조직력이 양적·질적으로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잡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투쟁력 또한 마찬가지다. 계급의식이 낮은 상태에서는 일시적으로 전투성이 표출될 수 있어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경제주의·실리주의 전투성은 자본과 정권의 당근과 채찍에 의해 어렵지 않게 다스려진다.(영화 ‘내부자’들을 참조!) 십수년 전 어느 사회학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특성을 ‘전투적 경제주의’라고 이름 붙였으나, 경제주의는 결국 전투성을 약화시켜서 지금은 비전투적 경제주의가 되었다. 악법과 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철조망을 넘지 않는”, 강성 실리주의로 후퇴하고 만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식성이 요구되는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인해 파편화되고 차별화된 노동자대중을 계급적으로 단결시키려면 추상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치는 것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눈앞의 현실에서는 노동자는 전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앞의 각자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전체의 그리고 현재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미래의 이해관계까지 통찰하고 그 이해관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아야만 비로소 계급적 단결로 나아갈 수 있다.

계급적 이해관계는 추상적으로는 개량과 개혁일 수도 있고 혁명과 변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장기적·구조적 위기의 시대인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개혁과 개량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그런 개량을 실행할 능력과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사회대개혁’ 운운하는 개혁주의 의식으로는 노동자 대중을 계급적으로 단결시키지 못한다. 민주든 진보든 개혁주의는 개량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양보만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오직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닌 세상을 지향하는 변혁주의·혁명주의 의식만이 계급적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투쟁력 또한 마찬가지다. 전투적 투쟁력 없이는 사회변혁은커녕 사회개량도 쟁취할 수 없다. 한국의 현 천민자본주의 체제는 특권적·특혜적 노동자층에게는 전투성 없이 온건·합리적 투쟁만 하더라도 개량을 제공한다. 계급지배의 안정화를 위해 이 노동귀족층을 체제내로 포섭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서는 전투성이 실종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하에서 낙수효과는 없다. 포섭대상에서 제외된 대다수 노동자에게는 개량이 주어지지 않았다. 비특권적인 대다수 노동자에게는 개량조차 전투성 없이는 이룰 수 없었다. 이것은 1987년 이후 신자유주의 한 세대를 거치면서 경험적으로 확인됐다. 노동운동에게 전투성은 언제나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러나 특권적·특혜적 노동자 층 중심의 현존 ‘정치적 경제주의’ 노동운동에서 전투성은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사라졌다.

그러면 사라진 전투성은 어떻게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경제주의 의식에서 나올 수 있는가? 경제주의 의식으로는 불만이 전투적 투쟁의지로 쉽게 전화하지 못한다. 당근과 채찍이 그런 전화를 봉쇄한다. 촛불혁명 이후 각자의 생존권 요구를 중심으로 전투적인 대중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탄압이 있던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혹시나’ 전투적 경제투쟁이 대대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경제주의적 요구를 가진 전투성은 몇몇 정리해고 반대 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국한되었다.

한편, 자본주의는 지금 신자유주의 착취·축적방식조차 약효가 떨어져서 자본축적이 멈추고 자본주의 자체가 위태로운 대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대위기의 시기에 개량과 개혁은 실현 가능성이 전무에 가깝다. 세계적으로 사회개량주의 정치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혁명과 변혁만이 대위기의 시대에 노동운동의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변혁·혁명주의 의식으로 무장하는 것만이 계급적 단결과 전투적 투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노동운동이 사회변혁·혁명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안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이제 ‘사회개혁’의 기치를 내려야 한다. 그 자리에 ‘사회혁명’의 기치를 대체해야 한다. 사회주의 기치를 드는 것보다 “세상을 바꾸자”는 사회혁명의 기치를 드는 것이 더 선차적으로 요구된다.

사회혁명 기치보다 사회주의 기치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혁명 기치가 없는 사회주의는 공허하다. 사회주의는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비로소 대중의 것이 된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환경의 변혁과 인간활동의 변혁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급진화가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급진화는 곧장 사회주의의 기치를 들기에 앞서 사회적인 것의 복구부터 추진해야 한다. “사회 따위는 없다”는 대처의 말처럼 신자유주의는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에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분단과 예속과 파시즘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변혁과 혁명으로써만 타파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민주민족 또는 민족민주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사회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사회혁명은 이런 민주민족 혁명과 긴밀하게 결합돼야 한다.

3. 시민운동과의 관계 설정에 대하여

시민운동은 노동운동이 직접적으로 계급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 직접적으로 계급적 문제가 아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지고 있거나 중요시하는 문제들을 포착하여 자신의 활동영역으로 삼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영역으로 두 가지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하나는 서구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나타났던 신사회운동의 의제들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운동이, 노조운동이나 노동자 정치운동이나 공히 집중해서 다루지 않는 사회·경제·정치 민주주의에 관련된 의제들이다.

전자에 관한 것들로는 페미니즘과 생태주의가 가장 주목을 받았다. 그밖에 성소수자 문제나 장애인 문제 같은 소수자 문제도 점차 활발해졌다. 한국사회도 점차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물질적 생존 문제 이외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기면서 서구에서처럼 이런 신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지배계급의 자유주의 분파에서는 이것을 적극 옹호하면서 구사회운동인 노동운동과 대립시켰다. 수구세력은 이 신사회운동도 탄압했지만 자유주의 분파는 이 신사회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써 자신들도 진보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시민운동의 다른 하나의 형태는 일반민주주의(실은 진보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다. 이런 유형의 시민운동으로는 경실련이 선구적이다. 경실련은 재벌의 초과착취와 수탈을 폭로·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우파 사회운동가들이 이것을 주도했고 민중당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김문수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회혁명에 대해 적대적인 이런 부분들이 경제민주화 활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후 극우정당이나 자유주의 정당으로 이전해 갔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일정하게 경제민주화에 개입함으로 인해 이런 유형의 시민운동은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그들은 최장집 교수가 주장했던 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다.

경실련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일반민주주의 운동으로는 참여연대를 들 수 있다. 참여연대는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 제반 문제에 개입했다. 참여연대 안에 경제개혁운동을 하는 경제개혁센터가 있었다. 이 기구는 이후 경제개혁연대로 분화·독립했다 그러나 참여연대는 경제문제만이 아니라 인권문제라든지 공직 후보자 낙선운동이라든지 등등 민주주의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자신의 영역으로 포괄했다. 이 단체는 천안함 사건 같은 안보문제에도 개입했다. 참여연대는 경제·사회·정치 의제를 모두 다루면서 다만 정당으로서 정치권력 획득을 자신의 목표로 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받았다. 정당이 해야 할 활동을 하면서 정당으로 활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선진자본주의 나라에도 이런 유형의 시민운동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운동 형태가 존재하는 것은 87년 체제에도 불구하고 경제·사회·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참여연대처럼 백화점식은 아니지만 특정 영역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운동단체들이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다. 인권운동단체들의 활동이나 민변의 활동들이 그런 부류에 해당한다.

신사회운동이나 일반민주주의 운동은 자신들이 계급적으로 특수하지 않고 보편적인 사회정의를 실천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특권의식을 가지고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특수이익을 대표할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노동운동과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일부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노동운동 가운데서도 혁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분명하게 전선을 친다. 경실련 이후의 시민운동가들은 다수가 자유주의 정당이나 개혁주의 진보정당으로 이전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사회운동이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으로 나누어진 다음 구사회운동과 신사회운동인 시민운동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의 일부도 자유주의 정당으로 포섭되어 갔지만 시민운동은 대부분이 시작부터 자유주의 정당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해 대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촛불혁명 과정에서도 그랬다. 그들은 연단을 지배하고 노동자의 특수한(?) 목소리나 급진적인 목소리를 통제했다. 그리고 박근혜가 탄핵되자 촛불집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문재인 당선운동에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수구 파쇼세력과 관련해서는 전술적으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제휴하지만 그 이외의 문제에 관해서는 경쟁하거나 대립하는 관계가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을 만들 때 노동운동·민중운동과 함께하지 않았다. 시민운동 단체들은 따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같은 연대기구를 가지고 있고(이 단체의 창립 목적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시국회의 형태로 사안별로 노동·민중운동과 제휴한다. 이렇게 되면서 노동운동 안에서도 시민운동을 부정적으로 대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리고 진영화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안에는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주목하지 않고 시민운동을 통틀어서 부정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렇게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이원화되는 것은 지배계급에게 아주 유리하다. 노동운동을 특수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운동을 매도하고 고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지배계급이 후원하는 이 구도에 파열구를 내야 한다. 신사회운동의 활동영역은 분명히 현존한다. 그 영역은 초계급적으로 보편적인 영역이 아니다. 자본이 지배하고 자본과 노동이 대립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적 이해관계 대립에서 초연한 영역은 없다. 페미니즘에서도 친자본주의적인 페미니즘이 있는가하면 반자본주의적 페미니즘이 있다. 하나는 여성해방을 사회주의와 결부시켜 추진한다면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면서 여성해방을 추진한다. 생태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이 자본주의에 있으므로 생태위기의 해결은 사회주의와 결부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사회주의적 생태주의가 있는가 하면(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다!) 자본주의 체제 내 개혁을 통해 해결하려는 조류가 있다. 이런 조류는 자유주의 정치운동이나 사회개량주의 진보정치운동과 손을 잡고 운동을 한다. 개량주의 진보정치는 여성·생태 등 신사회운동 의제를 적극 받아안고 이들과 손을 잡는다. 심지어 신사회운동 정당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은 더욱 고립된다. 신사회운동의 활동영역이든 일반민주주의 사회운동이든 그런 운동이 생겨나고 활성화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다. 그러므로 그 영역 자체가 노동계급의 근본적 이해관계에 대립하거나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이런 시민(사회)운동 영역에 대해 적극 참여하고 관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운동이 경제주의를 넘어서 사회운동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적극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예컨대 희망연대노조) 노동운동은 여성운동에도 참여하고 환경운동에도 참여하고 경제·사회·정치적 정의를 구현하는 일반민주주의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문제는 이 경우 제반 경제·사회·정치 문제에는 항상 계급적 이해관계가 개입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 시민사회운동 안에서 노동계급의 입장 및 관점과 자본계급의 입장과 관점이 충돌할 수밖에 없고, 충돌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적 입장과 관점이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위기가 오면 경제를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과 관점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가계급의 입장과 관점일 뿐이다. 경제위기가 왔을 때는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시민운동도 이런 변혁·혁명운동과 어깨걸고 함께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투쟁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수세적으로 시민운동과 멀리하고 경원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적으로 시민운동에 관여·참여하고 시민운동을 친노동계급의 사회혁명적인 시민운동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모든 노동운동이 금방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되기 어렵듯이 시민운동 또한 금방 혁명적인 시민운동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시민(사회)운동 영역을 자본가계급에게 고스란히 내맡겨 버린다면 혁명적 노동운동은 노동대중을 비롯한 광범한 대중에 대한 헤게모니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에게 가장 좋은 일이다. 레닌은 백여 년 전 어용적인 노동조합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들어가서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이라면 친자본적인 시민운동에 들어가서 활동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은 시민운동이 반드시 자신의 영도 아래 전개되도록 적극 참여해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4. 노동운동의 자기변혁을 위하여

노동운동이 계급적·전투적·혁명적 노동운동으로 거듭나고 나아가 시민운동을 자신의 헤게모니 아래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노동조합운동이 과연 혼자서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다. 노동운동 안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매우 중요한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조합 혼자서 노동계급의 사회·역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가장 후진적인 대중조차도 자신의 조합원으로, 조직의 주인으로 받들어야 하는 기초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동조합운동은 사회혁명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광범위한 노동대중이 자신의 일로 받아안고 떨쳐나서게 준비시키는 기본대중 운동으로서, 혁명의 학교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혁명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사회주의 혁명이든 진보적 민주주의 혁명이든 민족해방혁명이든 사회혁명을 이루려면 국가권력을 전취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사회경제 체제를 변혁하려면 정치권력을 전취하는 정치혁명부터 이루어야 한다. 이 명백한 명제가 그 동안 많이 망각되어 왔다.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운동 안에서 너무 과도하게 중요시된 후과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개량적 사회진보가 노동운동의 최고 목표가 되면서 혁명적 노동자 정치운동의 중요성이 망각되어 버렸다. 개량적인 진보정지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그 운동은 노동조합 운동만큼도 투쟁적이지 않다. 그 개량적 진보정치운동은 현장과 광장의 투쟁이 아니라 의회주의를 금과옥조로 하는데, 의회활동은 노동조합 투쟁에 비해 자본에게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개량주의 진보정치운동보다 노조운동을 우선시하게 되고, 그 결과 노동운동은 점차 조합주의와 경제주의로 후퇴하게 되었다.

전후 과정이 그러하므로 사회적 약자로 후퇴한 무력한 노동운동을 혁신하여 강위력한 노동운동 만들려면, 그럼으로써 노동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지 못하고 후퇴하거나 제자리걸음하는 상태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노동자의 혁명적 정치운동을 복원하는 일부터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혁명적 노동자 정치운동의 지도하에 노동조합운동을 경제주의·조합주의 운동으로부터 계급적·전투적·정치적 노조운동으로, 나아가 혁명적·변혁적 노조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와 더불어 노동운동과 분리되어 있는 시민(사회)운동을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노동계급인 운동의 한 영역으로 견인해 내야 한다. 19세기에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이 노동운동의 한 영역이었던 것처럼.

문제에 대한 답은 추상적인 사회주의 선전이 아니라 혁명적 정치운동의 복원이다. 그 혁명적 정치운동은 실패한 현실사회주의를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현재의 주객관적 조건에 부합하는 내용과 수준에서 전략과 노선을 수립해야 한다. 이분법적인 최대강령도 최소강령도 아닌 이행강령이 필요하다. 어떤 이행강령과 전략을 가지고 혁명적 정치운동을 전개할지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1 이 글은 노동전선이 2019년 7월 20일(토) 주최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토론회 주제의 발제문을 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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