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풍요의 변증법(13): 역사적 사유방식과 진리의 시간적 핵심
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한국사회 도처에서 역사가 역주행하고 있다. 기득권세력의 총궐기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집권세력은 공권력을 사유재산처럼 주무르며, 군사독재 시절의 피 묻은 망나니 칼까지 폭력사박물관에서 다시 끄집어내 휘두르고 있다. 이들이 캐비닛과 법적 특권을 악용해 정적제거와 노동탄압과 언론조작으로 겨우 정권타도의 불길을 막는 와중에, 노동자민중의 살림살이는 날로 팍팍해지고 미-일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과 전쟁의 위험은 폭증하고 있다. 심리적 핵공유니 G8이니 가치동맹이니 안전한 후쿠시마 처리수니 하는 괴담들을 유포한다고 해서 경제위기와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더라도 인류 역사가 직선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고 ‘상승 국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강 국면도 있다는 점을’(고전37) 감안하며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고수할 수는 있다. 또 ‘전진적 또는 후퇴적 변화 사이의 보편적 상호작용에 끊임없이 주의를’(듀링25-26) 기울이라는 엥겔스의 원론적 조언을 새겨들을 수도 있다. 그러한 믿음과 원론을 실질적으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하강 국면이 상승 국면으로 바뀌기까지 노동자민중이 치러야 할 희생을 줄이기 위해, 또 재난 상태가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하여 역사의 흐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한 과제일 것이다.
최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자정치세력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 또한 절박한 위기의식의 소산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동자정치운동 내부의 반응은 아직 그다지 뜨겁지 못하다.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불신의 원인으로 흔히 노선 갈등을 출발점으로 하는 패권주의나 진보정당들 중심의 의회주의가 거론된다. 이보다 좀 더 뿌리 깊은 원인을 찾자면, 소련과 동구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변혁운동을 잠식해온 자본독재 극복의 전망 및 의지 상실을 생각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한 2천년대에도 자본독재는 그 이전과 다름없이, 외환위기를 핑계 삼아 오히려 분할통치와 서열체계를 일반화함으로써 더욱 노골적으로 노동자민중을 개돼지 취급할 수 있는 지배체제를 굳혀왔다. 그런데도 어떻게 자본독재 극복의 의지와 전망을 버릴 수 있었는지는 별도로 따져볼 문제다. 그러나 일단 변혁적 전망을 버리고 자본독재체제 속에서의 적응과 개선에 시야를 한정할 때, 의석수와 패권 확대를 주요 목표로 삼는 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한 운동의 분열과 쇠락은 노동자정치와 국가권력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기도 했다. 오늘의 정치세력화 논의도 자본독재 극복의 전망을 구체화하고 이를 위한 전략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보수양당의 틈새에서 의회권력의 일부로서 영향권을 넓히기 위한 정치공학 영역을 맴도는 한, 노동자민중의 변혁 의지를 모으고 이에 불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로써 노동자민중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지금의 하강 국면을 상승 국면으로 전환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자본독재가 승승장구하는 국면에서 변혁적 전망을 고수하는 데에는 자본독재의 역사적 본질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이 필수적이다. “변증법적 철학에는 종국적 의의를 가지는 것, 절대적인 것, 신성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전36) 자본독재 역시 그 영속성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그들의 선전과는 달리,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을 부정할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견고해 보이는 표면구조 아래에서 끊임없이 인류문명에 위기를 초래하면서 전세계 노동자민중의 피와 땀으로 위태롭게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독재의 위력이 우리의 일상을 압도하려 들 때면, 그것도 결코 ‘절대적인 것’이나 ‘신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즉각 환기할 필요가 있다. 사태의 변화를 따라잡는 개념의 노동은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에 머물 수 없고, 비가시적 본질 영역에도 파고든다. 이 점에서 자본독재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며 위기를 넘기고 있는지 예의주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근본 한계를 명시하고 공존과 공영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 노동자민중과 공유해감으로써 인류사의 진로 전환을 앞당길 필요도 있다. 이때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 건설이 핵심 당면과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우리는 흔히 진리가 영원한 것이라고 믿기 쉽다. 진리가 초역사적이라는 관념을 깨고 역사적 사유방식을 적극 가동한 것은 헤겔의 주요 업적이다. 엥겔스는 헤겔철학의 진정한 의의와 혁명적 성격이 “인간의 사유 및 활동의 결과가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종국적 의의를 가진다고 보는 온갖 견해를 영원히 청산해 버린 데 있다”고 지적한다.(고전35) 나아가 엥겔스는 헤겔 철학이 확립한 진리의 과정적 성격을 강조한다. “철학이 진리를 인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헤겔의 경우에 그 진리라는 것은 일단 발견된 후에는 그저 암송하기만 하면 되는 기성의 교조적 명제들의 무더기는 아니었다. 진리란 이제는 인식과정 자체에, 과학의 장구한 역사적 발전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전35)
알튀세르는 헤겔의 시간관이 동질적 연속성을 상정함으로써 상이한 심급들과 수준들의 공존을 고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는 각 분야에 대해 상호연관 속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는 독자적 시간을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L.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역, 도서출판두레 1991, 127쪽 참조. 이하 ‘읽기’로 약칭. 그는 “각각의 수준에 개별적으로 조응하는 상이한 역사들의 가능성과 필연성” 덕분에 정치사⋅경제사⋅철학사 등등을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읽기128) 더욱이 그는 일반적 생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반적 역사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읽기138) 이런 이유로 그는 헤겔이 말하는 시간은 “역사의 시간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읽기127) 헤겔이 프로이센을 역사의 종점으로 파악하는 관념론자였다는 점은 누구라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체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헤겔의 욕구에 기인하는 그러한 문제를 변증법적 방법과 대조하며 비판했다. 그렇다고 헤겔의 역사적 사유방식 자체를 버릴 이유는 없다. 알튀세르의 비판 자체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우선 맑스는 일반적 생산도 ‘합리적 추상’이라고 인정했다. 그런데 일반적 역사는 왜 ‘합리적 추상’으로서 인정받으면 안 되겠는가. 반면에 극단적 유명론의 입장에서는 알튀세르가 구제하려는 심급이나 수준이라는 추상도 거부하고 개별 존재자들에게 시간과 역사를 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분야별 역사들의 상대적 자율성이나 독자성을 부각하면서 그것들의 상호연관에 대한 구체적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루카치가 비판하는 사물화된 사유방식에 빠질 위험도 없지 않다. 헤겔의 역사적 사유방식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은 엥겔스의 평가와 달리 헤겔 철학의 혁명적 의의를 매장해 버리는 효과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듯하다.
알튀세르와 달리 아도르노는 헤겔에 이르러 완성된 역사적 차원의 발견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의미한다고 높이 평가한다.(입문31) 그에 따르면 흔히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진리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이며 사물화와 관습화를 통해 언제나 타당한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러한 사물화⋅관습화에 맞선 싸움이 변증법적 사유의 논쟁적 출발점이다.(입문33) 아도르노는 역사적 사유 방식과 관련해 ‘진리의 시간적 핵심’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사회를 넘어선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본래 진리 자체가 언제나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구체적 상황과 분리되거나 혹은 스스로가 그 구체적 상황을 넘어선다고 믿는 순간 이로써 바로 무력증과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요체다.(입문69)
3.
진리는 “일단 발견된 후에는 그저 암송하기만 하면 되는 기성의 교조적 명제들의 무더기가 아니”라는 헤겔과 엥겔스의 교훈은,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대안의 구체화 과정이 소수 전문가나 전위의 독점물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대안적 사상과 이론의 생산이 소수의 손에서 시작되더라도, 그것이 현실적 힘으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검증과 비판을 통해 부단히 발전해갈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전위의 의식성과 노동자민중의 자발성이 결합하여 의식적 자발성이 발전하고 대중의 전위화가 진전될수록 노동자민주주의도 확대⋅심화되고 평등사회도 앞당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비판과 검증을 위한 끝없는 논쟁이나 분파투쟁 따위가 절대 선이라는 것은 아니다. 논쟁을 중단하고 실천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을 놓치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지는 구체적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정치적 판단에서는 시간적 변수가 결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4월 테제], [국가와 혁명],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등에 이르는 레닌의 주요 정치문건들은 그러한 시간적 핵심을 떠나 진리를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레닌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점은 예컨대 볼셰비키의 풍부한 경험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1903에서 1917년까지의 15년간 볼셰비키는 “합법 형태와 비합법 형태, 평화적 형태와 폭풍적 형태, 지하 형태와 공개 형태, 서클적 형태와 대중적 형태, 의회적 형태와 테러적 형태” 등 갖가지 운동형태들을 급속하고 다양하게 교차해가며 활용하여 혁명적 경험을 쌓은 점에서 세계의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투쟁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가혹한 차리즘의 멍에 덕분에 아주 빠르게 성숙하였으며,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 경험의 합당한 ‘결론’을 아주 열렬하고 성공적으로 습득하였던 것이다.”(소아병20) 어떤 악조건에서든 그 구체적 상황에 합당한 최적의 실천 형태를 찾아내는 유연한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동하지 못했다면 볼셰비키는 그 세계사적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투쟁 형태를 구사하기 이전에 억압과 착취의 체제를 허물고 평등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의식이 계급타협이나 사회적 대화 속에 파묻혔다면 기회주의⋅절충주의와 함께 의회주의⋅패권주의⋅출세주의가 판치면서 러시아혁명은 임시정부에 이은 반동체제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지난 정권의 어느 핵심인사는 정권 초기부터 ‘이제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고 계급타협의 신조를 자랑스럽게 설교하며 오늘의 반동정권을 예고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대표했던 인사가 앞장서서 사회적 대화로 변혁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지금 좋아 보일 수 있는 지난 정권에서도 검찰⋅언론⋅교육⋅노동 등 쟁점분야 어디서도 개혁 같은 것은 없었고, 양극화는 속도를 높였으며, 가계부채는 폭발 직전 수준으로 차올랐다. 경제적 서열구조는 요지부동으로 굳어졌다. 노동자민중이 체감할 만한 촛불의 효능은 남북긴장이 조금 완화된 것뿐이었다. 그 와중에 노동자민중을 대변해야 할 진보정당들은 의석수 계산으로 바빴다. 반동정권의 탄생을 위해서는 보수언론들의 단기 공작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면 다음 정권에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피비린내 나는 망나니 칼춤은 자제할지도 모른다. 미일제국주의의 농간에 조금은 저항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나마 기대하고 싶다. 어쩌면 당내외의 기득권세력과 싸우며 비위 맞추느라 한 발짝도 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자본독재를 넘어서는 일은 꿈도 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노동자국가와 평등사회에 대한 전망을 버리고 자본독재 내부의 지분 확보에 목숨을 거는 정치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운동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 자본독재체제에 순응하며 보수정당에 어쩔 수 없이 의존하는 다수의 노동자민중을 노동자정치운동의 변혁적 자력장 속으로 끌어들여 동화하지 못하면 노동자국가 건설은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함께 갈 수 있으려면 볼셰비키가 구사한 다양한 전술의 21세기적 변형들을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 가장 적합한 형태들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때 합법이냐 아니냐, 선거냐 아니냐 등의 방법 문제는 노동자국가와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목적의식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오늘 소수파인 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세력이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에서의 열악한 조건을 뚫고 다수파로 성장하는 것은, 자본독재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얼마나 구체적 조건에 어울리는 효율적 방법을 찾아내고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독재정권 타도와 함께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노동자국가 건설의 전망 아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매진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진리의 시간적 핵심’을 움켜잡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세부적 이견으로 갈등할 시간을 최소화하는 노력도 그 속에 포함될 것이다.
(2023. 6. 5.)
주
↑1 | L.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역, 도서출판두레 1991, 127쪽 참조. 이하 ‘읽기’로 약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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