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51호 2-6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만큼 당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파란 ㅣ 농민

어떤 분이 지금 시대는 혁명은 안 되고 개량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그럴까? 개량만으로 사회가 바뀔까?

그럼 한 가지 예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교육문제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것은 다 공동체 얘기를 해도 특히 한국 중산층은 다른 것들은 다 사회적으로 내가 양보하거나 세금을 조금 더 내거나 이렇게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도 자기 자식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가 안 된다. 그건 현실에서 너무도 많이 볼 수 있다. 자기가 아주 부자인데도 진보신당 찍어줄 마음의 준비까지 되어 있지만 자기 자식 교육 만큼은 남들과 똑같이 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공교육 자체를 바꿔서 모든 어린이들, 청년들이 똑같은 이상적인 교육을 받게 하겠다 이런데 까지는 잘 나가지 못한다. 또 말은 그렇게 해도 일단 급하니까 내 아이는 유학을 보내거나 아주 훌륭한 대안학교를 보내는 것으로 자기 가족내의 해결방식 차원에서 그친다. 이 문제는 아무리 진보적인 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도 해결이 안 된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라는 ‘틀’에 의해서 결정되는 생활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육에서 볼 수 있지만 내 아이 특히 핵가족 단위라는 것이 아주 확고한 사회적 단위라는 인식이 ‘틀’에 잡힌 것이다. 공동체가 아닌 ‘핵가족’이 사회적 단위가 되었을 때 내 아이는 내 물질적 정신적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그 집 아이는 어느 대학 갔어’ ‘그 집 아이는 어디에 취직했어’ 라는 말은 이런 의식의 단면적 표현인 것이다.

이것이 상층으로 올라가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자식을 명문대를 보내지 못하면 그 성공은 반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대단한 수양이 되지 않고는 내 아이를 남의 아이와 똑같이 심지어 남의 아이를 더 귀하게 여기는 이 정도 인식을 가지기는 정말로 불가능하다. 왜? 자기 삶의 단위가 ‘가족’이고 이것이 자신을 들어내는 가장 본질적인 사회적 단위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물질적 모습인 가족이라는 것과 사회 의식이라는 것이 괴리를 이루니까 힘든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단순하게 제도의 개선이나 개량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런 문제들이 쌓이면 이런 ‘틀’ 깨고 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 ‘틀’을 깨고 전 사회와의 단절이 필요한 시기를 혁명이라고 하고 그 이후 새로운 사회의 ‘틀’이 잡힐 때까지 점진적 개량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분리해 ‘너 폭력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혁명할래 평화적인 개혁할래..’ 라고 묻는 것은 아주 틀린 질문이다. 혁명을 이런 협소한 폭력으로 말하는 것은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이다.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 그 다음날이다’

이걸 다르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첫 단계이고 그 다음 단계가 권력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 일상 자체를 변혁해야 한다. 최소한 두 번째 단계로까지 나아가야만이 진정한 사회변혁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 지식인들이 뭐라고 하고 있나? 지금은 ‘혁명’이 필요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들은 이 사회를 바꾸지 않고 지금 이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이기심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이론과 개념을 계속 만들어 낸다. 이론이나 개념이나 지식을 동원해서 이 체제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자신들이 실체가 노출되지 않게 에워싸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 자본주의만이 우리의 삶을 보증한다고. 허나 그런 확신은 현실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비명을 지우는 환타지일 뿐이다

물론 오늘날 저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이 체제는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들 또한 자본주의를 떠나 살 수는 없다. 내 삶의 터, 내 삶 자체가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다. 며칠 전 나는 명절 알바 때 다른 매장보다 내가 더 많이 팔았다 자랑했다. 물론 우스갯소리였지만 난 그곳에서 너무 끔찍한 현실을 체험했다. 내가 아무리 비판적인 글을 써도 현실로 돌아가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닌, 노동과 노동이(약자와 약자가) 경쟁하게 되고 서로를 죽이는 이 야만적인 현실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자본과 권력은 현대로 오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착취(살해)를 하지 않는다. 약자들을 한우리에 집어넣고 ‘공정한 경쟁’이라고 명명된 야만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다. 자본이 만든 상/하, 위/아래 비대칭 관계는 철처하게 은폐하고, 생존만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사람들만을 수평적으로 세워놓고 경쟁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평등’ 또는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자본 앞에 줄 세워진 너희들의 불행은 너희들의 불성실과 능력 부족일 뿐이라고….

이 야만을 자각하는 순간 분노나 절망이 아닌 어떤 오싹함이 느꺼졌다. 즉 우리가 사는 현재에서 자본은 그 야만적인 얼굴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고, 그 야만을 인간 개개인 내부에 모두 주입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너의 가난은 너의 것이다….라는 메아리만 울리는 사회…..

여름산 / 이성복

나는 속으로 욕했다 /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만큼 당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까….. (… )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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