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39호 2-2 2000년 전과 2022년

전우재 ㅣ 대경 노동전선

실업. 실업. 실업! 온통 일자리 이야기뿐이다. 유명 대선후보들은 앞다투어 일자리 공약을 발표한다. 한 후보는 디지털 산업 생태계를 새로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또 다른 후보는 국가가 아니라 민간에 역할을 더 주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유력 후보들은 수많은 공약을 내세운다. 약속은 파도가 되어 유권자를 덮친다. 자본가 계급이 소유한 언론은 해류이고, 대류이며, 대선후보의 공약을 실어 나르는 짐꾼이다. 정책이란 바닷물에 흠뻑 젖은 노동자 계급은, 이내 투표장을 향한다. 관내 동사무소 2층이나, 특별히 꾸며진 초등학교 교실로 향하는 백성은 귀에 물이 가득 찬 채다. 그 물은 이름이 공약이다. 물에 귀가 먹은 민초는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저들이 말하는 대책은 대책이 아니다. 대책이 아닌 대책은 지면을 거쳐 대책이 된다. 인터넷 뉴스에서, 공공장소에 배치된 텔레비전에서, 자동차 라디오에서 대책은 묘책이 된다. 전쟁은 국경선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신문 지면에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교전이 일어난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한다. 이 해결책은 자본가 계급에게 대단히 껄끄럽다. 자본가 계급은 이 폭로를 덮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다. 자본가 계급이 싸우는 전장은 신문 방송이다. 자본가 계급은 체제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지금 체제가 유지되어야만 계급 지배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은 자본주의가 마치 영원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재생력이 있는 체제인 양 선전한다. 선전이 파도가 되어 피지배 계급에게 몰아친다.

자본가 계급이 소유한 언론은 자본가 계급의 눈으로 본 세상을 전달하고, 자본가 계급의 이익이 되는 방향만을 이야기한다. 예외가 없다. 출발은 그러지 않았을 수 있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언론이 있을 수 있다. 변하고 만다. 운영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본주의에 알맞게 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본 일반이 소유하기 때문에, 자본 일반을 대변하는 언론은, 자본 일반을 위한 기구인, 국가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 현 체제를 옹호하고 대변하고 수호하게 된다. 실업 문제는 지금의 경제 구조와 정체 체제라는 낡은 집을 부숴버리되, 그 기초 위에 새로이 기둥을 세워야만 해결할 수 있다. 언론을 통해, 나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소,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정책으로는 실업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 성질상 공황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수요보다 많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물건을 팔지 못해 폐업하는 자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폐업으로 인해 일어난 연쇄 반응으로 공황이 일어난다. 시장 전체가 소화해낼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다. 소통하지 못하는 수많은 경제주체가 맹목적으로 생산 과정을 진행한다면, 수요에 맞게 생산해 낼 수가 없다. 생산의 무정부성 문제이다. 한쪽에서는 상품이 어마어마하게 만들어지는데, 한쪽에서는 그 상품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계속 사라진다. 기술 발전을 통한 생산력 증대는 실업을 동반한다. 기술이 발전한다. 세 명 만들어야 하는 상품을 두 명으로 만든다. 임금과 같은 생산 비용이 주는데 마다할 자본가는 없다. 필요 없어진 한 명은 실업자가 된다. 실업자는 돈이 없다. 돈이 없으면 상품을 살 수가 없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문제이다. 이렇게 상품은 많아지고 상품을 구매할 노동자는 줄어든다. 자본주의는 저 스스로 위기를 불러온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국민들이 생활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물자가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생산하는 즉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하여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생산 즉 ‘이윤을 위한 생산’입니다. 그리하여 …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가 일어납니다.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과의 모순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동녘, 197p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소유는 배타적으로 결정된다. 생산력은 계속 발전하고, 실업자는 계속 늘어나고, 살 사람은 계속 줄어든다. 결국 몇몇 자본이 버티지 못하고 파괴된다. 공황이 발생한다. 공황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실업이다. 실업 문제는 통계상으로는 심각하지 않다. 20년 OECD 평균이 7.3%나 되는 데에 반해,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3.5%로, 절반 수준이다. 실업률이 고작 3.5%인데 대선후보들이 앞다투어 일자리 공약을 발표하는 건 왜 그럴까. 일주일에 한 시간 이상 일하면 취업한 것으로 통계상 처리하기 때문이다. 2022년 최저임금은 9,160원이다. 일주일을 시급 9,160원으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모순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자본주의 자신이 저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생산력은 극도로 발달하는데, 사회 체제가 그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프랑스 혁명과, 영국 명예혁명이 예시가 된다. 16세기가 되자 시민 자본가 계급이 나타난다. 자본가 계급은 임노동자가 필요했다. 피지배 계급이 땅과 신분에 묶여 있어서는 사업을 벌일 수 없다. 거대한 공장과 막대한 자금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존재할 때만 자본이 된다. 자본가 계급은 발달하려는 생산력을 제한하는 요소인 구체제를 뒤엎어버린다. 시민 혁명을 간략하게 보면 이렇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넘어가는 과정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넘어갈 때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을까. 1984년 동녘에서 펴낸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자.

“…노예제사회는 노예로 인해 서고 노예로 인해 점차 망해 갔읍니다. 그리이스인들은 노예제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노예를 좀 더 많이 잡기 위하여 전쟁을 일삼았읍니다. … 전쟁을 할 때마다 나라는 황폐해지고 노예는 불었어도 자유민은 줄어들었읍니다. 자유민을 고용하는 것보다 노예를 사는 것이 쌌으므로 노예가 새로 생길 때마다 자유민은 일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는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없어 거리를 방황할 뿐이었읍니다. … 국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업자들을 건설공사에 취업시켰으나 이것만으로는 실업자 전부에게 일자리를 줄 수가 없었읍니다.”
『인간의 역사』, p66-67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은 노예를 통해 생산을 했다. 농민 한 명이 노예 두서넛을 데리고 농사를 짓기도 했고, 많은 수의 노예를 데리고 대토지를 경작하기도 했다. 이 시기 노예들은 가족을 이룰 수 없었다. 노예를 새로이 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전쟁과 영토 확장이 필요했다. 전쟁은 자유민의 몫이다. 전쟁으로 인한 과실은 자유민이 가져갈 몫이 아니다. 자유민이 전쟁을 치르면, 귀족들이 땅을 챙겨 이득을 누렸다. 전쟁은 계속되고, 자유민은 죽고, 귀족은 부유해진다. 체제가 무너진다. 노예가 만들어내는 생산물은 많아지는데 그 생산물을 사줄 자유민이 계속 사라진다. 그리스 국가들은 이 문제를 체제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실직한 자유민을 건설공사에 불러내고, 추첨을 통해 재판관으로 배석시켜 수당을 주었다. 우리는 그리스 폴리스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안다. 로마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노예는 늘어나는데 자유민은 줄어든다. 땅은 늘어나는데 자유민이 일할 땅은 줄어든다. 피지배 계급은 실업에 분노한다. 로마는 검투 경기를 열고 십자가를 이용한 공개 처형을 했다. 실업으로 인한 분노를 속여보려 했다. 성공하지 못했다.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넘어갈 때도 똑같다. 노예제와 봉건제 사이에서도 발전한 생산력과 미진한 생산관계가 엇갈렸다.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찾아왔었다. 지금은 어떤 상황일까. 한국 땅에서 가장 강력한 (자본가) 계급 정당에 복무하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가 어떠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는지, 저서 『공정한 경쟁』을 살펴보자.

“문 : 이준석 최고위원께서 리더라면 청년 실업자 혹은 중장년 실업자들에게 어떤 일자리를 주시겠습니까?

답 : SOC 사업을 하겠습니다. 특히, 저는 교통 인프라를 조성하겠습니다. 비용 편익 조사를 해보면 무조건 1이 넘는 사업이거든요. 속어로 ‘공구리’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자리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요. … 저는 청년 일자리를 따로 만들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일자리를 구분해 취업 대책을 마련하겠어요. …”
이준석, 『공정한 경쟁』, 나무옆의자, 2019, p163

자본주의 또한 생산력 발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생산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동으로 돌아가는 공작 기계는 늘고 생산물은 많아지는데 그걸 사줄 노동자가 사라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체제 안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실업자들을 건설공사에 불러내고, 추첨을 통해 수당을 주는 일자리를 주고…. 이천 년 전과 흡사한 사건이 일어나, 이천 년 전과 흡사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결말 또한, 이천 년 전과 흡사하지 않을까.

참고자료
조우화, 『인간의 역사』, 동녘, 1984
이준석,『공정한 경쟁』, 나무옆의자, 2019
https://dashboard.jobs.go.kr/index/summary?pg_id=PSCT010300&data2=SCT010300&ct_type=run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일자리상황판, 「일자리 주요지표」 2022년 2월 12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1486#home 배재성, 중앙일보, 「이재명, 일자리 6대 공약 발표 “사회서비스 대전환으로 300만명 일자리 창출」 2022년 1월 18일
https://dashboard.jobs.go.kr/index/summary?pg_id=PSCT010300&data2=SCT010300&ct_type=run 양범수, 조선비즈, 「윤석열 “‘공정 혁신 경제’로 성장 잠재력·일자리 창출 두 배로 높이겠다”」 2022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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