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28호 계급 문제에 관한 불편한 논쟁들-이재유의 <계급>을 읽고

은영지 ㅣ 사드저지 평화활동가

학창시절 반공교육에 환멸을 느껴온 내가 청년이 되어 마르크스 계급투쟁의 역사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글귀를 처음 접했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고 가슴 떨렸는지……

생산의 주역인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그 열매를 빼앗아 자본과 부를 독식해야 굴러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계급과 억압적인 국가가 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이행기에서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다수의 노동자 계급이 대체하고 지배하는 방식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걸 알았다.

산업혁명을 맨 먼저 진행하여 자본주의 국가가 된 영국이 여성과 4살짜리 어린아이들조차 생산현장에 내몰아 착취한 비인간적인 현실을 목격한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붕괴시켜야만 노동해방,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 선언을 접하고 나서야 역사인식의 무지에서 깨어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계급의식’이 ‘변혁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한 감동도 잠시였다. 자본주의 불평등이야 사방에 널려 있건 말건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 ‘혁명’이라는 화두도 잊고 살았다. 그래도 노동자 민중의 한 사람으로 저항의식은 품고 있었다.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장갑차에 안타깝게 압살당했을 때도 아이 데리고 나와 촛불을 들었고, 한미 FTA 반대와 미국산 쇠고기와 쌀 수입반대, 이라크 파병반대 등의 시위물결에도 꼽사리 끼었다. 의회 정치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진보정당운동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반동적인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은 퇴출된 지 오래 되었지만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자본가의 하수인 노릇하며 이 나라 권좌를 독식해온 행태는 여전했다.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다 한통속인 부르주아 통치자들이었고 이땅을 헬조선으로 전락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존경할 만한 대통령 한 명 가져본 적이 없는 서러운 이 땅의 민중들이다.)

안타까운 건, 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생존권을 외치고 투쟁해야 할 노동 계급이 투쟁의 전망도 갖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을 이끌고 있는 민주노총조차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고 노동해방의 완성인 사회주의로 가자는 외침보다는 눈앞의 임금투쟁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하면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들어가느니 마느니 기운 빠지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가와 부르주아 정권이 막가파식으로 미쳐 날뛰는 이 판을 바꾸려면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인식과 투쟁밖에 없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지는 요즘이고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제목부터가 구미에 당기는 이재유의 <계급>을 집어들었지만 변혁이 멀게만 느껴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진단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저자는 마르크스 계급이론을 주요 줄기로 다루는 한편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비판하거나 틀렸다고 보는 베버나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 등의 주장을 비중있게 배열, 계급 논쟁에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베버’를 괄호밖에 내놓고 무시해버린다 치더라도 다른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면서도 마르크스 계급론에 찬물을 끼얹는 개량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없다고 우기고 있었다.

저자는 ‘계급의 역사’와 ‘오늘날의 계급론’을 정리하면서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계급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지만 원시공동체사회는 계급이 없었으며 생산력 증가와 사유재산제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원시 모계혈통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로 전환하면서 전쟁과 약탈이 일상화되고 전리품으로 데려온 포로들을 착취하면서 ‘고대노예제 사회’가 발전하였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이 계급사회에서 노예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은 왕과 지배계급이 독점했다. 아울러 노예 봉기를 막기 위해 군대와 법정, 감옥 및 여러 제도를 만들어 억압했는데 이것이 국가의 기원이었다.

‘중세 봉건제 사회’도 노예 소유주와 노예의 생산관계에서 봉건영주(귀족)와 농노의 관계로 바뀌었을 뿐 억압적인 면은 이전 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영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았던 농노들이 ‘지대’로 영주에게 바치고 난 약간의 생산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긴 했지만 착취당하는 현실은 노예와 마찬가지였다. 해서 농노들은 봉기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영주의 억압에 못 이겨 도시로 탈출, 수공업 노동자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봉건제를 붕괴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면서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계급’이 등장했으며 저자는 그당시 중요한 담론으로 회자되었던 마르크스 계급론과 베버의 계급론을 소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억압하는 계급(자본가)과 억압받는 계급(노동자)으로 적대 관계가 형성, 그들간의 계급 투쟁이 일어나면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잉여가치)을 직접 생산하는 주체이지만 자본가들에게 다 빼앗겼기 때문에 자본에 봉사하는 노예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를 ‘소외’현상이라고 했다.

베버는 마르크스와 관점이 달랐다. 서로 다른 계급간에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불평등이 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경제적 계급, 사회적 지위, 정치적 영향력(정당)에서 찾았다. 계급 뿐만 아니라 지위나 정당 문제도 생산구조, 생산방식과 연결해서 생각한 마르크스와는 달리 베버는 “아무리 경제적 계급이 높아도 지위나 권력이 낮을 수 있다고 보고 계급문제를 경제와 연결해서 볼 필요는 없다” 라고 했다. 저자 이재유는 “베버의 시도는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하는 마르크스의 추상적인 계급 모델과 대비되는, 즉 계급, 지위, 정당을 통한 신계급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고 하며 베버의 관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했다.

경제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추상적’이라고 한 베버의 비판에 동의가 되지 않았고 베버야말로 마르크스가 주장한 계급문제의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는 먹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개인의 ‘경제적 조건’이 그의 정치, 사회의 위상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전제조건이라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고 그게 바로 계급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착취 구조를 바꾸기 위한 과학적이고 변증법적인 접근방식인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추상적’이라는 비난하는 것은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 이재유도 언급했듯이, 베버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주요한 모순인 빈부격차의 문제를 외면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서 가장 혼란스럽게 와닿은 부분은 계급을 둘러싼 논쟁을 다룬 4장이었다. 저자는 “계급에 관한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고, 역사발전에서 ‘노동자 계급의 주체성’을 빼놓고는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과 경제적 부가 자본가에게 집중되고 소외된 노동자들이 불만을 품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 투쟁이 시작되고 투쟁을 바탕으로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노동자 계급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단일한 집단이 아닐 뿐더러 마르크스주의의 양대 계급론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반론을 폈다.

독일 출신의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 ‘카우츠키’는 ‘경제결정론’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론화화 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에 고통과 불만이 커진 노동자 계급이 투쟁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역사의 필연 법칙을 역설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서유럽 혁명이 실패하면서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에 기반을 둔 역사법칙은 불투명해지고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이른바 물신주의, 배금주의라는 자본화된 의식에 오염돼 버린다. 이후 마르크스 경제결정론에 반대하고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등장하는 어이없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며 문학사가인 ‘루카치’가 대표적인 인물. 그는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급의식은 물질 영역인 경제 영역이 아니라 법, 정치 등의 정신 영역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자연 법칙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자본 법칙에 따라서 붕괴하고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데 어려움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울려 인간답게 잘 살아야겠다는 ‘계급 의식’이 노동자 계급에겐 없다고 했다. 노동자에겐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물화’된 의식만이 존재하는데 이를 극복하려면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올바른 의식인 ‘귀속 의식’, 즉 계급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먹고사는데 급급한 노동자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루카치는 정신 영역에 속한 집단인 ‘지식인’이나 ‘공산당’에게서 전수받아야 한다고 하여 노동자 계급을 의식화 대상이라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켜 버렸다. 물론 그 당시 서유럽 노동자의 한계를 냉정하게 본 진단일 수 있으나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을 지식인 집단이 가르쳐야 한다고 한 것은 엘리트주의 발상에 다름 아니다. ‘선각자’인 이 지식인들이 어디서 어떻게 등장하는지 루카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공산당의 지도에 대해선 별개의 문제이다.

20년 전 진보정당에서 정치운동을 한 적이 있다. 내 입장에서 가장 의구심이 들었던 점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 노동자 정당의 대표들이 노동현장의 경험이라곤 없는 엘리트 출신 지식인들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변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개량적인 정치인 모습을 노출시켰고 그것이 싫어 손 털고 나왔는데 지금 있는 진보정당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듯했다.

‘그람시’ 역시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면서 헤게모니(지배 권력) 이론과 시민사회 이론을 제시했다. 그람시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경제적 모순이 곧바로 사회혁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면서 정신적 영역, 즉 역사 상황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세력 관계(상부 구조)에 주목했다. 계급 집단의 헤게모니 영향 아래에서 지도를 받거나 종속된 보조 세력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가 노동자 계급간의 투쟁과 균형으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생계에 급급한 노동자들은 이데올로기 투쟁을 직접 할 수 없고 대신 ‘유기적 지식인’을 ‘대리자’로 내세워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 그람시 역시 노동자 계급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주변인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학교수든 당(공산당)이든 그 지식인 역시 노동자와 똑같은 무산자이고 ‘혁명’이라는 공동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분리시켜 계급투쟁이론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노동자를 주체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불순한 의도마저 엿보였다.

프랑스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경제결정론과 루카치, 그람시 등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문제는 자본가 계급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정신노동(자본가 계급)과 육체노동(노동자 계급)의 분리를 당연하게 여겨 정신적인 것이 주체가 되고 육체적인 것은 주체의 대상,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두 노동이 동등할 수 없는데도 노동자 계급이 ‘나도 열심히 일하면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자본가는 노동자 계급에게 당신은 ‘이 나라를 살리는 산업 역군이다. 이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주입시켜 봉사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이분법적 도식 자체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산물이므로 마르크스를 구하려면 이데올로기와 대립되는 과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 작업이 이론적 실천이고 정치적 실천이라고 했지만 그 역시 경제 영역보다는 정신 영역에 의미를 두는 한계를 보였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투쟁이라는 역학 관계는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음을 시사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에서 과학과는 거리가 먼 운명론이 엿보였다. 그 속에서 구조와 계급, 계급투쟁은 혁명적이고 변혁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즉자적이고 개량적인 시민 운동으로 변질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저자도 이를 우려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적 도식을 벗어나 다수자와 소수자라는 새로운 계급 패러다임을 열었다.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려는 ‘계급투쟁’보다는 자본주의를 인정한 가운데 더 큰 이익을 위해 ‘임금투쟁’에 몰입하는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적 존재, 즉 다수자일 수밖에 없다고 하며 소수자 중심의 계급 투쟁, 소수자 중심의 정치학을 주장했다. 소수자는 새롭게 도전하고 변화와 창조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이들이라고 하면서도 그에 대한 대안적인 제시는 부족했다. 또한 그의 의견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거대한 자본 체제에 맞서기 위해선 각성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것은 순리다.

신베버주의자들은 한 술 더 뜬다. 마르크스주의의 양대계급론을 수정해 다양한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외면해 버렸다. 마르크스주의와 베버의 입장을 절충한 이들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인정하면서도 두 계급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중간 계급들이 있다고 했다. ‘모순적 계급 위치’에 속하는 화이트 칼라(사무직 노동자)와 전문직 종사자인 그들은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접하고 하위 계층에 있는 이들을 무시하거나 상대하지 않으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신베버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으로 드러나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양대 계급의 갈등과 변혁이 아닌, ‘유연한 변화와 계층 이동을 통한 사회 안정’에만 관심을 둘 뿐 노동자의 삶이 피폐해지는 원인과 해소 방안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저자 역시 비판했다.

마지막 장인 5장에서 저자 이재유는 모든 피지배 계급을 아우르는 노동자들이 계급 의식이 없고 계급 의식을 보편화하지 못해 사회주의로 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개인의 생존권 문제에 집중된 노동조합조차 고립된 섬처럼 자본가에게 포위되어 있어 ‘산별노조’나 ‘업종노조’ 형태로 전국단위 노조연맹으로 묶으려 하지만 자본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개별화된 노동자의 이중성도 한계로 들었다. 말하자면, 노동자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점과, 자본가의 이익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을 ‘계급’으로 형성하고 ‘계급의식’을 가지게 하는 토대는 전자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계급투쟁은 이중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모순의 갈등과 투쟁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책임을 적대적 경쟁 관계에 있는 개별적 개인에게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우애, 협력관계에 있는 ‘사회적’ 개인이 되기 위한 투쟁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살고자 하는 측면이 ‘노동자의 자기 생산’이며 이는 곧 사회적 개인을 지향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조직화하는 실천 활동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또한,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호 모순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경제 영역의 두 계기는, 자본가가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는 계기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계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서 전자의 장소를 공장 안, 후자는 공장 밖이라고 했다. 억압과 착취, 강제가 이루어지고 자본의 이익 창출이 최고의 가치인 ‘공장 안’에서는 계급 의식이 형성될 수 없고 공장 밖에서 우애와 협력, 동의와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규정했다.

나로선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공장 안’이야말로 구조적 모순이 응집되어 있어 투쟁과 함께 노동해방을 열망하는 지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서 시작되는 갈등과 치열한 계급 의식을 공장 밖으로 가져가지 않을 경우 노동 계급 자신도 ‘자본주의 최고’라고 노래나 부르는 아무 생각없는 소시민으로 변질, 개량화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렇게 되면 혁명은 물건너 가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정체성을 잊게 할 유혹들이 얼마나 많은지 열거하려면 입이 아플 지경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 가족’이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의 기본 장소’라는 저자의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방어 시스템’이라는 주장엔 과연 그럴까 회의가 든다. 가족이 계급 투쟁의 걸림돌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본계급과 그 하수인인 정치권력이 개별 가족에게 주입해 온 ‘행복’과 ‘안정’이라는 기만적인 환상이 계급의식을 좀 먹고 있다는 우려에서 하는 말이다. ‘가족 수당제’를 미끼로 여성을 산업예비군으로 가정에 묶어두는 수법으로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하고 억압하는 자본의 음흉한 속내를 목격해오지 않았는가?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저자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노동자 계급이 자기 생산을 통한 계급 의식의 공간을 확보하고 계급 투쟁의 진지를 마련하는 출발점은 여성의 가사 노동 해방이라고 하면서 가사 노동의 사회화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페미니즘과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 제기와 투쟁을 계급 투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방점을 찍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 제시없이 선언에 그쳐 아쉬움으로 남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상품화 하고야 마는 사악한 자본주의 체제이다 보니 페미니즘이나 가사 노동 해방도 시장에 나온 상품으로 박제화돼 버린 세상이다. 그래놓고 기업이 여성을 위하는 것처럼 사기를 쳐서 얼마나 많은 자동화 시스템을 각 가정에 팔아먹으며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해 왔던가 말이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피땀인 생산결과를 움켜쥐고 노동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체제가 유지된다는 건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포장될 수 없는 폭력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이념적 무기는 마르크스주의 계급론밖에 없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동자 계급 운동의 과학성과 혁명성을 갖추는 일이 시급하다.

역사의 매순간마다 착취당하는 이들이 ‘봉기’와 ‘저항’이라는 형태로 투쟁하여 세상을 갈아치웠다. 고대엔 노예, 중세엔 농노(농민)가 그 역할을 담당했고 지금은 억압받는 우리 노동자 민중이 바통을 이어받을 변혁의 주체라는데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론과 유물론적 변증법이 서사적 휴머니즘과 실천철학으로 생명력을 뿜어낼 날이 멀지 않았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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