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51호 2-1 맑스주의와 도덕

문국진 l 맑스사상연구소 소장

영원한 도덕적 가치나 규범이 있을까? 도덕(morals)은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옷을 입고서 나타났다. 충효라는 봉건적 도덕사상은 박정희 유신시대에 화려하게 다시 부활했다. 병영적 자본주의 생산논리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강화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도덕은 특정한 자기 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은 특정한 생산양식에 있어서 정치나 법, 종교 등과 함께 상부구조, 특히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서 역할한다. 때문에 사회의 하부구조의 1차적 중요성 못지 않게 상부구조로서의 도덕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여기서 주어진다. 즉 도덕은 주어진 생산관계에서 발생되면서 동시에 그 생산관계의 관철에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지배계급은 자기 계급의 도덕을 이데올로기적 지배도구로 활용한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적 도덕이 그에 대응한다. 자본주의는 낡은 봉건적 도덕윤리를 타파했다. 오늘날 국왕에 대한 충성심은 타파되고 그 대신 그 자리에 민주주의사상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일 뿐이다.)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대체하여 화폐교환관계가 전면화됨으로써 너나 할 것없이 모두가 다 화폐물신을 추구하도록 강제되었다. 상품에의 욕망, 부자에 대한 동경, 무한 소비욕구가 이 시대의 도덕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코자 하는, 노동에 대한 흡혈귀같은 거대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맑스주의는 이를 가리켜 조롱삼아 “부르주아적 도덕”이라고 부른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자. 이 시대에 ‘공정’이란 것이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과연 얼마나 ‘공정’할까? 역대 자본주의정권들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했었는가? 부정-조작선거로 영구집권을 획책하다가 4월 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 18년간 장기집권하면서 국민의 인권과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은 독재자 박정희, 그 뒤를 계승하여 국민을 총칼로 학살하며 등장했던 학살자 전두환, 또 그 뒤를 이어 군사파쇼정권을 연장한 노태우, 이들과 야합하여 권력을 쥔 김영삼, 신자유주의 개발논리로 노동자운동을 무참히 탄압한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권력을 개인적 부의 축적으로 악용하다 감옥 간 이명박, 밀실에서 국정을 농단하다 탄핵당하여 감옥 간 박근혜, 촛불항쟁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많은 점에서 이명박근혜를 온전히 계승한 문재인—그리고 지금 우리는 독점대부르주아와의 밀회 속에서 노동자운동을 탄압하는 윤석열, 부자를 지켜주기 위해서 가난한 자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지극히 ‘공정’한(?) 정부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배자들의 ‘정의’요, 그들의 ‘도덕’의 실체인 것이다. 지배자들의 도덕!! 지배자들의 ‘공정’!!

그러면 피지배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어떠한 도덕이 있는가?

자본주의는 각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 인민을 내몲으로써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고 적응하기를 강요한다. 인민은 사치와 향략이라는 부르주아 문화를 부러움과 동경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상대적 불평등감에 젖어들기도 한다. 화려한 상업광고는 인민을 허탈함에 빠지게 한다. 맑스주의공황론에서 말하는 ‘과소소비’는 다름 아니라 이 ‘상대적 빈곤’의 악화와 누적적 재생산을 경제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자본주의체제 속에 살고 있는 인민에게 어떠한 ‘도덕’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모든 시간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일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관한 것뿐이다. 그들에게 여가란 다음 노동을 위한 휴식과 재충전을 의미할 뿐이다. 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도덕도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현실에 순응하여 살아남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인민의 삶의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 즉 노예의 삶과 순응의 도덕.

그런데 이제 그 노예가 자기 문제를 걸고 싸움에 돌입하게 되면 문제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된다. ‘투사의 도덕’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예의 도덕에서 노예해방의 도덕으로 도약하게 된다. 자본주의체제 전체의 질곡을 짊어지고 살던 노예가 반란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이제 모든 지배의 논리, 모든 억압적 논리, 모든 기성의 논리가 반란한 노예의 머리 속에서 재인식되고,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고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하는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창출된다—‘투사의 도덕’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갈림길만이 남게 된다.–즉 ‘부르주아적 도덕’에의 안주냐, ‘투사의 도덕’으로의 도약이냐. 맑스주의 사회계급론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전자는 쁘띠부르주아적 노선이고, 후자는 노동자계급적 노선이다. 현실안주와 굴종과 허무주의의 길이냐, 과감한 투사로의 길이냐! 이것이 곧 맑스주의적 도덕론이 제기하는 존재론적 근본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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