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재 l 대경 노동전선
1일. 2일. 3일. 4일. 5일. 6일. 7일. 8일. 9일 … 59일. 60일. 61일. 택배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지, 2월 26일 기준으로 61일이 지났다.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다. 일할 사람이 일할 수 없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보름달이 네 번 차오를 시간이 흘렀다. 시간만 흘렀다. 전이나 지금이나 일하다 죽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60 여일 전뿐만이 아니고, 택배노동자 뿐만이 아니다. 2021년 산재 사고사망자 공식통계는 882명이었다. 882명이라는 숫자는 인정받은 사례만을 포함한 수치이다. 인정받지 못한 사례를 고려하면 숫자는 더 커질 수 있다.
노동자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위험은 굶어 죽을 위험이며, 일하다 죽을 위험이다. 지금과 같은 경제 구조에서 노동자는 선택할 수 없다. 불리한 조건에서 일해야만 한다. 각각 사업장은 선택할 수 있더라도, 월급 받아 일한다는 임노동 일반은 피할 수 없다. 사장은 고를 수 있다. 사장 아래에서 일해야 한다는 구조는 고를 수 없다. 불리한 조건을 강요당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장은 적고 노동자는 많다. 노동자들이 한 사업장에서 불리한 조건으로 일한다. 실망한 노동자는 다른 사업장을 알아본다. 이내 알아보는 걸 포기한다. 이 사업장이나 저 사업장이나 다 똑같기 때문이다. 사업장은 고를 수 있어도 월급 받는 노동자 신세 자체는 고를 수 없다.
“보통 노동의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에서나 그 이해관계가 결코 다른 양 당사자들 간에 보통 맺어지는 계약에 의존한다. 직공들은 될 수 있는 한 많이 받으려고 하고, 마스터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주고 싶어 한다. 전자는 노동의 임금을 올리기 위해 단결하고자 하고 후자는 그것을 내리기 위해 단결하고자 한다. (…)어느 편이 상대방을 강제하여 자신들 조건에 따르게 할 것인가를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스터들은 비교적 수가 적으므로 훨씬 더 쉽게 단결할 수 있으며, 게다가 법률은 그들의 단결을 인정하거나, 적어도 금지하는 않으면서도, 직공들의 단결은 금지하고 있다. (…)마스터들의 단결은 직공들의 단결만큼 소문이 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마스터들은 거의 단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는 사람(…)”
애덤 스미스, 『국부론 1』, 을재클래식스, 2014, p160~161
생사가 걸렸다. 노동자는 단결해 행동을 개시한다. 사장, 자본가와 한판 싸움을 붙게 된다. 싸움은 쉽지 않지만, 희망은 있다. 자본가는 적다. 적다는 건 단결하기 좋다는 말도 된다만, 불리하다는 뜻도 된다. 노동자는 수가 많고, 자본가는 적다. 그런데도 노동자가 불리하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드는 국가 기구나, 자본가에게 유리한 평론을 내놓은 (자본가 소유의) 언론을 맞서는 건 어렵지만 해볼 만 한 싸움이다. 국가 기구와 언론에 포섭된 노동자 계급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싸움이다. 노동자 계급은 나뉜다. 지배 계급은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을 갈라놓고 지배한다. 자본이 행하는 분할 통치가 노동자 계급을 쪼개어버린다.
자본가 계급은 저명한 학자와 강력한 언론을 이용한다. 언론을 통해 지배 계급이 가진 관점, 이데올로기, 사상을 전파한다.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 자신이 가진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어렵게 된다. 지배 계급이 가진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자본가 계급은 그걸 유도하기 위해 격렬한 사상 투쟁을 벌인다. 자본가가 가진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동자를 인터넷 뉴스 댓글난에서,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SNS 메신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목숨을 위협받는 노동자는 택배노동자 뿐만이 아니다. 모든 노동자가 목숨을 위협받는다.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닐 텐데, 댓글난에서 그런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리어 노동조합을 분쇄할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지배 계급의 관점은 왜 문제일까.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를 살펴보면 지배 계급은 생산이 없고, 변화가 없고, 관계가 없고, (민족)배신자가 없다는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한다고 한다. 본 서평에서는 생산, 변화, 관계라는 세 부분을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건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 계급이다. 지배 계급만이 가진 이성과 품성만으로 세상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본가 계급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생산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변화 또한 없다. 지금 체제가 영원히 지속할 체제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모순을 일으키며 사회는 변화한다. 사람들이 사용할 여러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술과 설비 등을 총칭하는 생산력과 그 기술과 설비 따위를 사용하고 이익을 얻는 사람들끼리 관계인 생산 관계가 서로 조응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변화한다.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갈 때도 그랬고,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갈 때도 그랬다. 노예주를 영주가 대신했고, 영주를 시민 자본가가 대신했다. 기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 맺은 관계로는 넘쳐흐르는 생산력 발전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조선 후기에 농업 기술이나 도구 등 여러 면에서 농업 생산력이 발전했다. 그런데 유독 탈곡기류는 잘 발달되지 않았다. 까닭은 탈곡기류가 발달하여 가을에 나락을 정갈하게 거둬들이게 되면 지주가 빼앗아 가는 몫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박준성,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이후, 2009, p93
지배 계급은 생산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자신은 영원히 지배 계급으로 있으려 하고, 하인은 영원히 피지배 계급으로 묶어두고자 한다. 생산력은 계속 발전한다. 생산력은 낙후된 생산 관계에 잠시 억제되기도 한다. 결국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보이는 균열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 변화 때문에 죽어가는 계급이 생기고, 상승하는 계급이 생기며 서로 대립하게 된다. 노예주가 죽고 영주가 상승하고, 귀족이 죽고 자본가가 상승한 것처럼, 앞으로 사회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지배 계급 관점에는 생산과 변화라는 개념이 없다. 생산과 변화를 둘러싼 세상 전반의 관계 또한 지배 계급은 알 수가 없다. 알려 하지 않는다.
지배 계급이 가진 관점은 세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해석하지도 못한다. 생산도 없고, 변화도 없고, 그 관계도 파악하지 못하는데 세상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사회를 움직이는 건 실제로 부를 만들어내는 생산자 계급이고, 피지배 계급이고, 노동자 계급임을 알아야 한다. 생산을 둘러싼 관계가 사회를 움직이기 때문에 사회가 부단히 변화함을 알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산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까닭은 사회 요소요소 모두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한다.
CJ대한통운의 택배노동자들이 집단행동에 들어간 지 61일이 지났다. 과로로 죽을 위험에 시달린 노동자들이, 굳이 일을 마다하고 단결에 들어갔음에도 회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매서운 반응을 보이는 건 신문 방송이다. 대한민국에 법치가 존재하기는 하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있다. 어버이 같은 사장님 아래에서, 싸울 일 없이 평화롭고 화목한 회사를 가꾸어 가기는커녕, 아스팔트 위를 점령하고 있으니 쏘아붙일 만하다. 언론은 자본가 계급이 소유한 사기업에서 발행된다. 불리한 기사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언론이 무차별로 쏟아내는 정보로 인해, 제 관점을 잃어버린 대중들이다. 자본가 계급이 바라보는 시각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자본가 계급뿐만이 아니라 동료 노동자와도 맞서야 한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현재 어떤 처지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이 다르면 같은 현실도 다르게 본다. 그 사람이 현실에서 차지하는 이익과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뺴앗고 식민지 지배를 하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자들은 발전이 정체되었던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여 근대화시켜 주었다거나, 조선 사람들은 독립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민족성을 지녀 왔다고 선전하였다.”
박준성,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이후, 2009, p75
피지배 계급, 노동자 계급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배 계급이 가진 관점은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그들이 가진 관점으론 세상에 생산도 없고, 변화도 없고, 관계도 없고, 포섭되는 배신자도 없다. 역사가 움직이는 까닭은 실제 재화를 만들어내는 생산자 계급이 있기 때문이고, 생산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가 있기 때문이며, 그 생산을 포함한 여럿이 맺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 점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삶이라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 어디 반듯한 이론과 이성의 힘으로만 이루어졌겠는가 싶어서였다. (…)역사는 외롭고도 무모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그런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역사가 한 발자국씩 진보를 이룰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누군가는 반드시 치루어왔다.”
방현석, 『아름다운 저항』, 도서출판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1999, p5~6
피지배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 제 관점을 온전히 회복한다면 세상은 변화할 수 있다. 자본 계급과 벌이는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태까지 계속 패배했지만, 승리해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분뇨를 먹이는 가혹한 탄압에도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노동자 계급이 가진 소망을 꺾을 수 없었고, 군사정권이 아무리 엄혹한 통치를 가해도,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과 대결하기 위해서 지배층 안에서 야합을 벌이더라도, 노동 계급은 단결과 조직과 행동으로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를 만들어내 왔다.
앎과 행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말은 앎이 안 되거나 행동이 안 되거나 둘 중 하나라도 온전치 않으면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만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건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자신이라는 걸, 이태까지 사회는 생산을 둘러싼 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해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발전하는 생산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생산 관계로 모순이 생겨난다. 상승하는 계급과 쇠락하는 계급이 나타난다. 상승하는 계급이 실천을 시작할 때 세상이 변화를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승하는 계급은, 바로 우리 노동자 계급이다.
참고자료
https://www.korea.kr/news/policyBriefingView.do?newsId=156490848 권기섭 산업안전보건본부장,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2년 산재 사망사고 감축 추진 및 “중대재해처벌법”현장 안착 추진 방향」 2022.01.10
애덤 스미스, 『국부론 1』, 을재클래식스, 2014
박준성,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이후, 2009
방현석, 『아름다운 저항』, 도서출판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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