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134호 9-2 우리의 부끄러운 인권현실 들여다보기

김련희의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를 읽고

은영지ㅣ평화활동가

1.기획탈북에 속아 고통을 겪다

엊그제가 추석이었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고공에서 서러운 명절을 보내야 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전형적인 수입 갈취에 해당하는 사납금을 폐지하고 ‘택시발전법 11조2’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한지 100일이 넘은 택시노동자들, 계획적 노조파괴를 해온 SPC자본에 맞선 화물연대의 파업 투쟁, 부당해고에 맞서 장기 투쟁에 돌입한 지 오래된 아시아나케이오의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한 우리의 이웃들은 명절을 누릴 권리마저 없었다. 재벌 비호에 정신팔린 문재인 정권은 추석 직전 몇몇 농성장에 경찰력을 보내 폭력 진압에다 조합원을 구속하는 작태까지 보였다. 정권의 탄압속에서도 직접고용 쟁취와 자회사 저지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제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농성장에서 차례를 지냈다.

민중의 고통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미제의 점령과 강요로 지속돼온 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의 횡포로 헌법에 명시된 민주적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빼앗긴 채 절망하며 살아온 우리들이었다. 하여, 비상식이 상식을 짓누르고 악취마저 풍겨온 우리 사회의 모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철이 들 무렵부터 나는 지금까지 이 땅이 불편하고 역겹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소성리 얘기도 안 할 수가 없다. ‘사드병참기지화 작전’이라고 하면서 지난 5월14일부터 1주일에 두 번씩 국방부와 경찰병력 수천명이 미제의 대리인으로 들어와 주민을 짓밟았다. 얼마 전 인도ㆍ태평양 사령관 아퀼리노가 ‘사드기지 지상접근권’이라는 요상한 이름을 들먹이며 매일 밀고 들어가라고 압박을 가했다는 얘기가 있었고 소성리는 폭풍전야가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충북지역 3명의 활동가에게 실체도 없는 <간첩사건>을 만들어 인신을 구속하는 국가보안법 탄압이 촛불대통령이라는 문재인 시대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여기 올가미에 걸린 가엾은 새처럼 국가보안법 사슬에 매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여성이 있다. 탈북여성 김련희씨.

“나는 결단코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독방에 갇혀 억지로 서약서를 쓴 것이다.(중략) 나는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절규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탈북여성이 아니라 친척을 만나러 중국에 나왔다가 탈북브로커에게 속아 강제로 한국에 끌려온 사람이었다. 그 탈북브로커는 납치범이고 김련희씨는 납치당했다는 게 팩트다. 2011년 9월16일 한국에 왔으니 올해 11년째 억류돼 있는 셈이다. 다행히 야수의 얼굴을 한 대한민국에도 그녀를 북한으로 송환하고자 애를 쓴 변호사, 기자를 비롯한 정의로운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양주민 김련희 송환준비모임을 꾸려 언론보도와 기자회견으로 억울한 사연을 알리거나 정부기관에 호소해왔고 그 활동내용을 정리, 2017년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라는 책을 펴냈다.

올해 52세인 김련희씨는 간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 죽기 전에 꼭 북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싶어한다. 자칭 ‘민주국가’라고 떠벌리는 이 나라 위정자들이 조국 조선(북한)으로 보내달라는 그녀의 피맺힌 호소를 외면하고 억류하고 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세상의 어떤 일이든 돈벌이로 인식, 착취하고야 마는 자본주의 체제가 그녀를 비롯한 북한 동포들을 재물로 삼아왔다. 이른바 황금알을 낳는 탈북사업이 성업 중이다. 우리가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이들을 ‘탈남’이라고 하지 않듯이 ‘탈북’이라는 용어도 부적절하지만 어쨌든 탈북인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생계형으로 중국에 나왔다가 일거리 찾아 남한으로 오거나, 북에서 죄를 짓고 도망온 사람들도 있고, 브로커에게 속아서 온 사람들도 있다. 이들 모두의 입국과정에는 브로커들이 개입된다.

배후에는 대한민국 정권과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관여하기 마련이고 탈북민들을 꾀어 데리고 와서 뒷돈을 챙기는 브로커들이 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며 보도하는 탈북자 뉴스가 이런 기획탈북, 사기탈북의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정원이 국민의 피같은 세금을 물쓰듯 낭비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북한주민을 남쪽으로 끌고 오게 하는 건 그들의 출세욕이 한몫 한다. 탈북자들이야 죽든 말든 족쳐서 간첩 하나 더 만들어 감옥 보내고 자신들은 승진하면 장땡이었으니 이보다 더 죽이 잘 맞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그 간첩만들기 프로젝트에 거물이 하나 둘쯤 섞여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멋진 안보 장사가 되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과 탈북자 입국 보도를 대대적으로 하며 ‘북한의 악마화’에 대해 입을 모아 비난하는 모습은 보수든 진보든 다를 바 없었다. 엉덩이 뿔난 위정자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신종 북풍’이라는 의심마저 드는 탈북의 진면목과 전모를 이 책이 잘 드러내 주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양복사 일을 하며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단란하게 살아온 김련희씨가 이남으로 오게 된 건 지병인 간복수 때문이었다. 사촌언니를 만나러 중국에 나왔다가 병이 재발하자 얼마간 일을 하며 병을 고치려고 눌러앉아 있을 때 조선족 전문브로커가 접근한다. 그 브로커는 한국에 2달만 갔다 오면 떼돈을 벌고 건강해져서 조선에 돌아갈 수 있다고 속여 한국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속았다는 걸 알아차린 그녀는 “여권을 돌려달라,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해도 이미 두 겹으로 된 철문 안에 감금된 상태였다. 탈출한다 하더라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국을 떠도는 것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에 가서 조선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겠다고 생각해 태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간 곳은 국정원 독방이었다.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한달 동안 그녀는 북한에 보내달라고 20일간 단식투쟁을 한다. 국정원은 그녀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하고 쓰지 않으면 국정원에서 나갈 수 없고 그녀가 거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협박을 했고 횡포에 못 견뎌 서약서를 쓰고 말았다.

이후 ‘하나원’으로 이송된 그녀는 3개월 교육을 거쳐 600만원의 정착금을 받고 세상에 나오게 되지만 그 정착금도 기만적이기 짝이 없었다. 선지급된 300만 원 중 250만원을 브로커에게 주어야 했다. 거리에 따라 브로커비용이 1500만 원까지 물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탈북자이거나 기독교 목사인 이 브로커들에게 제때 돈을 갚지 않으면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야 했다. 돈을 주고 나면 수중에 50만원밖에 없어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했지만 나머지 정착금 300만 원은 3개월 단위로 끊어 100만 원씩 9개월에 걸쳐 받게 된다.

탈북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건 국정원이 그들을 죄인 취급한다는 점이다. 한국 실정을 모르는 그들이 변호사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독방에서의 가혹한 조사와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하기 일쑤였다. 조사 중 폭행을 당해 죽은 탈북자도 있지만 아무도 죽음의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살했다고 거짓서류를 꾸미곤 한다.

간첩 만드는 역할을 하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는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합신센터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탈북자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로 유우성씨와 홍강철씨가 있다. 2004년 탈북 후 서울시에서 탈북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하고 있던 유씨는 어머니상을 당해 합법적으로 ‘재입북’하게 된다. 혼자 남은 여동생을 설득해 2012년 한국으로 오게 했을 때 합신센터가 오빠가 간첩 아니냐고 여동생 유기려씨 머리를 때리고 발로 차는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 허위진술을 하게 했다. 결국 유우성씨는 간첩이 되었지만 대법원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홍강철씨의 경우 북한 보위사령부가 직파한 간첩으로, 브로커를 납치하고 탈북자들의 정보를 캐내려 했다고 국정원이 조작했다. 국정원 직원이 그에게 담배를 주면서 “담배값을 해야지”라는 말에 “보위사 정보원이라고 합시다”라고 허위자백을 해 셀프간첩이 되었지만 1, 2심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합신센터의 잔인하고 황당한 작업은 끝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탈북브로커는 사기꾼이라고 보면 돼요. 한 사람당 최소 2~300만원씩 받는데 눈에 불을 켜고 탈북시키지 않겠습니까? 중국에서 그 돈이면 큰 액수죠… 그래서 북쪽 사람들을 속여 한국으로 보내고 정착금 일부를 브로커비로 받아 생활합니다. 결국 탈북자 브로커비는 한국 사람들이 정부에서 내는 세금으로 나온다고 보시면 돼요” 

어느 탈북자의 증언이었다. 2002년에는 정착금이 3000만원 나왔지만 그 돈으로 집을 구하고 브로커 비용을 줘야 했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북한이다 보니 탈북민들은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노동강도도 셌고 뻣골이 삭을 정도로 일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여서 탈북자들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했다. 그도 너무 힘들고 답답해 한국을 비판했다가 여권이 안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상 찬양ㆍ고무죄’로 경찰과 국정원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집이든 회사든 수시로 전화를 해서 회사에서 잘린 적도 있었다.

김련희씨는 조국과 가족들이 그리웠고 돌아갈 방법만 생각했다. 여권신청을 했지만 그녀에겐 나오지 않았고 어딜 가나 담당형사의 감시와 관리를 받았고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감옥밖에 있어도 여전히 자유를 박탈당한,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위조여권 제작, 밀항 등의 방법이 실패하자 몇 차례 손목을 긋는 자살도 실행하지만 죽지도 못했다. 최후 수단으로 간첩이 되어 몇 년 감옥살이 하다가 이인모 선생같은 비전향장기수처럼 북송되기를 바라며 “북의 공작금을 받았으니 잡아가라”고 셀프간첩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2014년 7월19일 대구구치소의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독방에 수감된다. 김련희라는 이름이 아닌 ’51번’으로 불리며 간수에게 무시당하는가 하면 거짓진술한다고 쇠사슬과 수갑에 묶인 채 6명의 남성 교도관에 의해 날마다 구타를 당해 온몸이 멍과 상처투성이었다. 5개월간의 경찰, 검찰의 강압조사와 구치소에서의 야만적인 폭력, 4번의 재판 끝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로 이송되었지만 간첩이란 이유로 송환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그때서야 깨닫게 된다. 면회오는 사람 하나 없이 좁은 독방에 갇혀있던 그녀는 성명호 국선변호사의 도움으로 이듬해 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그녀의 감옥행은 강제추방당해 조국으로 돌아가려 했던 간절함과 간첩잡기에 혈안이 된 보안수사대 형사들의 욕심이 결합된 결과였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민변의 장경욱 변호사를 통해 한겨레 허재연 기자와 연결돼 <나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설프고 아귀 안 맞는 간첩 김련희의 행적>이 최초로 보도되었고 뉴스타파가 <나를 북으로 보내주오>를 후속 게재하면서 김련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적 목사를 포함한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이 힘을 실어주면서 본격적인 송환운동도 펼치게 되고 해외언론까지 앞다투어 보도, 그녀의 억류 소식이 전세계로 퍼져 나간다. 그러나 청와대는 “그녀의 의사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으니 그에 따른 법률이 적용된다”며 송환불가 입장을 냈다. 김련희씨는 항변했다.

“나는 질문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적용되는 법률이 나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면 무엇 때문에 누구나 응당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인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고 4년 세월 여권을 내주지 않는지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이북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다. 비록 실수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중략)… 아무런 죄도 없이 정당한 이유도 없이 한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권리를 짓밟고 오도 가도 못하게 한국이라는 커다란 철창 없는 감옥에 가두어둔다는 것은 철저한 국제법 위반이고 인권유린이며 범죄행위다.” (99~100쪽)

2015년 10월20일~26일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도 배제된 김련희씨는 통일부 장관 면담요청도 묵살됐다. “김련희를 보내면 북에서 체제선전에 이용해 먹을까봐 보내지 못한다. 또 김련희를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보내어 선례를 남기게 되면 남쪽에 있는 2만여 명의 탈북자들이 서로 가겠다고 했을 때 막을 수가 없다”는 속내를 통일부가 드러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었다. 진짜 뭣이 중하냐고 되묻고 싶다. 어리석은 체제경쟁하느라 한 개인의 ‘목숨같은 행복’을 빼앗아도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는 기획탈북, 사기탈북이 있었다는 걸 실토한 꼴이었다. 통일부가 아니라 ‘통일거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련희는 목사단과 함께 유엔인권사무소에 호소문을 전달하려 간 적이 있었다. 유엔관계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수십 명의 경찰들이 경찰벽을 쌓아놓고 구속하겠다는 협박과 끌려나오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게 이 땅의 인권을 위해 세워졌다는 유엔인권사무소의 모습이었다. 결국 제3국 대사관으로 들어가 망명을 요청,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김련희씨는 2016년 3월, 호치민의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 대사관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베트남 대사관 역시 한국 정부 및 경찰과 내통하여 그녀를 끌어냈고 그 일 때문에 ‘잠입 탈출’과 ‘공동 퇴거불응 혐의’라는 국가보안법 죄명이 그녀에게 덧씌워졌다. 그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으로 감옥에 가고 촛불의 염원을 담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김련희씨는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히려 주한 베트남 대사관 잠입ㆍ탈출건과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이적표현물을 제작했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 찬양ㆍ고무죄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재판조차 무기한 연장돼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은 이렇게 한 평범한 여성을 엄청난 범죄자로 만들어 핍박하고 있었다. 악법 중에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철폐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김련희 개인의 조국과 가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싣고 있지만 결코 개인의 고통으로 넘길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녀는, 돈에 눈 먼 탈북브로커에게 속아 남으로 와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 나라 정부는 그녀를 돌려보내기는 커녕 감시하고 짓밟고 있었다.

2. 반쪽 조국 북한을 알게 되다


북한에 대한 진실을 이 책에서 접한 것도 의미있는 수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혈육에 대한 정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글을 읽으면서 ‘북한 공산주의는 부모, 가족도 몰라보고 수령만 섬기는 체제’라고 들었던 어릴 때의 교육이 완전 날조라는 걸 알았다. 오히려 돈과 재산 다툼으로 혈육간 칼부림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는 우리 대한민국이 아닌가?

북한의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거 시스템도 감동이었다. 우리의 경우, 전교조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빨갱이라는 비난을 듣고 감옥살이 하며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최근에야 겨우 고등학교까지 ‘무상급식, 무상교육’을 쟁취했는데 북한은 처음부터 국가가 책임지는 교육시스템이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가 파고들어 출세를 위한 입시공부, 학부모의 치맛바람과 촌지 문화, 수시로 시험쳐서 성적순대로 학생들 줄세우기로 인한 차별과 소외 현상은 늘 있는 일이었다. 악기든 뭐든 부모의 부의 정도에 따라 비싼 사교육에 의존하는 우리와 달리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예체능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국가(교육)에서 지도하고 재능을 키워주는 북한의 교육이 신선하게 와 닿았다.

1970년대 학창시절 한 학급당 학생들이 70명에 이르는 열악한 콩나물 교실에서 수업했던 불쾌한 기억이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있다. 북한엔 학급정원이 25명이었다니 수업의 질은 안 봐도 상상이 되었고 모든 학교에 수영장을 갖추어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수업을 하는 것도 놀라웠다. 무엇보다 생활에 필요한 가구와 시설을 갖춘 주거공간을 국가에서 주어 생계비가 거의 들지 않는 북한이었다. 평생 등꼴 빠지게 노동을 해도 집 한 칸 장만하기 힘든 우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의료제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예방의학, 무상치료제인 북한의 의료시스템은 누구나 담당의사가 있어 아이가 성장하는 전 기간을 책임진다. 의사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각 세대를 돌며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다. 자녀 출산의 경우 산전산후 150일(산전 60일, 산후 90일) 유급휴일이 법적으로 보장돼 있어 ( 2015년 법개정으로 출산 전 60일, 출산후 180일, 합해서 240일로 기간이 연장되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긴 출산휴가다.) 눈치코치 보며 출산휴가를 갖는 우리로선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우리의 경우, “자녀 출산후 법이 보장하는 휴가를 보내고 복귀해보니 자기 책상이 없어졌더라”는 경험담도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북한의 이혼과 시집살이, 휴가 등 소소한 일상과 거주이전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숙청문제 등 무거운 문제에 대해 궁금해하는 우리 대학생들의 질문과 김련희씨의 답변도 흥미롭게 읽었다. 반공교육을 받아온 우리 젊은이들에게 사회주의 체제를 살아온 공민답게 그녀는 또박또박 자기의견을 피력했다. 어떤 공동체이건 자기 잇속만 살피면 얼마나 불행하고 힘들까 반문하면서 무상 주거, 무상 보건, 무상 교육이 보장되고 세금을 내지 않으니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일당독재 아니냐?”는 공격에 “여러 개의 당이 모두 인민을 위한 정책을 펼 거라는 보장이 있냐?”고 하면서 “국가의 주인은 인민이고 인민을 위한 기구여야 하고 이를 잘 할 수 있는 정당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착취구조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진정한 인민의 나라라는 뜻으로 읽혔다. 북한은 다수의 노동당 당원들이 의사를 수렴하는 인민지배체제다. 여러 개의 정당이 있지만 사실상 자본가 계급에 힘을 실어주고 복무하는 보수 정당인 ‘국민의 힘’과 ‘민주당’이 주거니 받거니 권력 나눠 먹는 식으로 이전투구하는 남한 사회가 북한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북한을 비방하는 단골 주제인 ‘숙청’이라는 부분도 김련희씨는 부패한 고급관료들을 처벌하는 ‘혁명적인 실천 행위’라고 했다. 공감이 갔다. 관료주의에 물들거나 부정부패로 얼룩진 간부들을 일반 노동자가 되게 하여 노동자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만드는 혁명교육의 일환이었다. 최룡해 비서가 광산 노동자로 강등되어 고생을 한 바 있고 김련희 부친도 혁명화 대상이 되어 1년 어부생활을 한 적이 있다. 장성택처럼 자본주의 물이 들어 반당반혁명 종파행위, 국가전복행위를 하다가 사형당하는 케이스는 드물다고 한다.

고급 관료의 자식들은 반드시 군 복무를 해야 하고 연대장급 이상은 1년에 20일씩 하급병사생활을 의무적으로 하기로 되어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우쭐해지는 것을 막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인데 우리 사회와 비교해보면 이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상류층이나 행세하는 정치인, 고위공무원 자식들은 군에 안 가고 서민의 자식들만 끌려가 고생하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대한민국 아닌가. 그래서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건 바보짓이라는 의식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팽배한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본다.

대다수 사람들은 북한을 못 살고 굶주리는 비정상적인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와의 갈등 속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 한때 잘 나가던 북한이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기에 시작된 ‘고난의 행군’이었다. 극심한 자연재해,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식량생산의 감소도 한 이유였지만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국가들끼리 교류하던 시장이 사라졌다. 게다가 미국이 북한을 붕괴시키려고 대북경제봉쇄정책을 펴 북한으로 들어가는 에너지와 식량을 차단시켰다. 북한을 무너뜨리려고 핵공격을 포함한 한미군사훈련이 계속되자 자구책 차원에서 핵개발을 하고 선군정치를 하며 어려움을 극복해왔다고 적고 있다. 동의하는 대목이다.

3. 악마성을 지닌 국가보안법 철폐돼야

노동계급 착취를 통해 발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대안을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 김련희씨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북한의 여러 제도와 모습을 알게 되어 유익했다. 북한사람은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아닌 이 땅의 평화와 통일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우리 민족이라는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철폐가 가장 시급하다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같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남북이 함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국가보안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

우선은 조건없이 김련희씨를 가족이 있는 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혹은 탈북브로커의 사기행각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간암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그녀의 고통을 나몰라라 해서 부모와 가족도 못 보고 여기서 죽게 한다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김련희의씨 딱한 사정과 고통을 차곡차곡 담아낸 이 책은 야만적인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부끄러운 자화상’으로 읽혀졌다. 국정원의 횡포 때문에 읽는 내내 분노했고 안타까웠으며 그녀가 당하는 고통이 마음 아파 눈물이 났다. 지긋지긋한 반공교육의 껍질을 깨고 북한을 제대로 바라보는 값진 시간도 되었다. 이런 나도 김련희씨처럼 국가보안법 찬양ㆍ고무죄로 쇠고랑을 차게 되려나 몹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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