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26호 혁명가들에게 바치는 진혼곡 –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읽고-

은영지 ㅣ 사드저지 평화활동가

학창시절에 접한 ‘한국사’라는 과목이 어찌 그리 따분하고 재미없던지 화석을 보는 듯했다. 담당 교사의 테크닉 문제는 아니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이런 식으로 별 영양가도 없는 왕의 이름을 달달 외우게 하거나, 조선이 언제 건국되었는지, 임진왜란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그런 것만 기억하게 하고 평가하는 기계적인 수업이 전부였다. 게다가 이민족의 침략과 핍박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외침을 987번 받았다” 라는 식으로 (나중에 보니 완전 엉터리 집계이고 실제론 90회라고 한다) 쓸데없는 숫자만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각인시켜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다.

우리 것을 알아갈수록 자부심보다는 열등의식만 키우게 되는, 천하에 재미없는 공부가 역사라고 생각했다. 역사교육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건 한쪽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이른바 반공이데올르기가 덧칠된 반쪽짜리 공부를 강요당했다는 사실이다. 단군왕검이 어떻고 삼한사회가 저떻고 하면서도 실상 지금의 우리 민중들의 삶과 고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반공 민족주의자 김구가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 중의 영웅인 줄 알고 자랐다. 제도교육을 마치고 역사책을 ‘거꾸로 읽기’ 시작하면서 국가가 순진한 10대들에게 거짓교육을 시켰다는 걸 알았다. 역사인물 중에 영웅서열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이 놈의 교육은 세종대왕 이순신 김구 강감찬 이런 식으로 훌륭한(?) 인물 줄세우기를 하는 희한한 작태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천연덕스럽게 벌였던 것이다.

내가 ‘무지’에서 눈을 뜨고 광명을 찾은 것은 20대에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읽고 나서였다. 반민중적이고 수구적인 행태를 일삼아 나라와 백성을 고통에 빠뜨린 봉건왕조의 왕이 아닌, 민중인 ‘나’라는 인간이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발전을 추동해내는 계급의 주체라는 인식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가와 혁명가에 대한 기록은 더러 접하지만 우리의 저항을 담은 기록과 우리 혁명가들에 대해선 여전히 무지에 가까웠고 깜깜이었다.

역사학자인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을 알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시차를 두고 <역사비평>에 실었던 혁명가들의 기록을 2008년에 단행본으로 펴냈다.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날 스러진 사람들이 흘린 피와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의무가 있다”라고 책을 펴낸 이유를 적고 있다. 이 책은 ‘그들의 영혼앞에 진설한 제사상’이며 ‘그들에 대한 진혼곡’, ‘그들의 무덤앞에 놓인 추념의 꽃송이’라고 밝힌 서문에서 얼마나 공감을 했는지.

윤자영,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 강달영, 김철수, 고광수, 남도부, 안병렬…빛나는 혁명가들의 이름을 속으로 부를 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그들의 투쟁기록과 회상속에 차곡차곡 접혀있는 더 많은 투쟁가들을 발견하는 기쁨도 덤으로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일제 식민지의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에 걸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아야 했다. 불령선인, 불온한 조선인들로 도망다녀야 했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어야 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을 견뎌내며 빨치산 투쟁을 해야 했다. 고문으로 죽고 감옥살이로 불치병에 걸리거나 정신이상자로 떠돌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했고, 총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결연한 저항과 삶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기 짝이 없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조급증이 났고 목이 말랐다. 조선총독부 경찰 수사보고서에 ‘죄수’의 신분으로 나와있는 기록이 전부였다.

식민지 조선이 낳은 걸출한 혁명가 중의 한 사람인 윤자영은 일본경찰에게 ‘수뇌’ 혹은 ‘거두’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전문학교 재학중 3.1운동에 앞장섰다가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윤자영 자신도 다른 항일운동가들이 겪어낸 “사자같은 간수배들에게 육체의 속박과 정신의 고통을 당하며 개 돼지도 받지 못할 대우를 받는 중 날마다 콩밥 한 줌으로 생명을 보전” 하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감옥문을 나서자마자 청년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어 사회혁명당에 합류하고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 공산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같은 시기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구별하기 위해 ‘상해파 공산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 당대회에 의장으로 뽑혀 코민테른에 파견되기도 했고 1926년 만주 길림성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될 때 집행위원 겸 선전부장을 하면서 재만주 조선인 사회에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개시되던 1929년에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운동 3대 세력, 즉 엠엘파, 화요파, 서울 상해 합동파 가운데 상해 합동파 소속으로 복무했다. 서울 상해파 사람들은 식민지 공업화가 진행중이던 함흥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의 근간으로 삼고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자 1930년 북간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흥에 터를 마련했다.

“조선혁명은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공산당이 해야 한다…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적달성에 매진하자.”

약소민족 혁명운동의 독자성을 무시하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맞서 조선혁명의 주권을 쥐고자 했던 윤자영은 경찰 취조에서도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 상해파 사회주의자들의 반일지하운동은 중앙기관 산하에 4개 지방기관을 둘 정도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를 알아차린 일본고등경찰이 대검거 작전을 펼쳐 수백 명이 체포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66명이 검찰에 넘겨지는 시련을 당한다. 이때 간신히 체포를 면한 윤자영은 이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사회주의자로서 해외활동을 하던 중 스탈린 대숙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1938년 10월14일 반혁명 혐의자로 총살당하게 된다.

공산주의 운동을 한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 트로이카 얘기도 흥미롭게 읽었다. 그들은 모두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인 후 ‘직업혁명가’라는 고단한 길을 걷게 된다. 서울배재고등에 재학 중 반일서클에 가담했다가 서울과 고향 김천에서 3.1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김단야는 태형 90대를 맞고 풀려나 상해로 망명한다. 세 사람은 똑같이 1921년 재상해 한인공산당과 고려공청 상해지방회에 가담했고 이듬해 봄 중앙위원에 나란히 오른다. 셋 다 사회주의 운동 거점을 국내로 옮기려고 상해에서 출발, 중국령 안동을 거쳐 오려다가 붙잡히고 만다. 평양형무소에서 1년10개월을 살다 1924년1월19일 평양형무소를 나온 이 ‘트로이카’는 1년10개월 뒤 또다시 체포되는 비운을 겪는다.

1925년 신의주 한 음식점에서 신만청년회 회원들이 친일분자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폭행사건이 터졌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일본 형사가 구타를 당하게 된다. 형사가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일제 경찰이 수사를 하던 중 청년회원 김경서의 집에서 상해로 가는 박헌영의 비밀문서를 발견하고 대규모 비밀결사 사건으로 낙인찍어,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기획한다. 일본 경찰의 손으로 이뤄진 이 최초의 대규모 사회주의자 탄압사건으로 인해 1925년 4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주요 간부 및 당원들이 체포되는가 하면 박헌영과 그의 아내 주세죽, 임원근도 붙들려 또다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당한 고통을 박헌영은 <죽음의 집, 한국의 감옥에서>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에서 발간되는 국제혁명가후원회 기관지 <모프로의 길>에 실은 바 있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 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들이 축구공 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박헌영은 조직을 보위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동료와의 인간적인 의리를 지키고자 그 모진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그 와중에 1926년 6.10만세운동 조사 과정에서 또다시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면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이 터진다. 1차 검거사건이 터졌을 때 간신히 체포를 피한 김단야는 조직을 보위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한다. 고려공청 상해 임시특별연락부 책임자가 된 김단야는 6.10만세운동을 지원하며 국내와 상해를 오가며 조직활동을 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 유학을 하기도 한다.

한편, 박헌영은 옥중에서 자신들의 행위는 ‘한국의 민족해방과 정의의 실현’을 위한 것으로 ‘무죄’라고 주장하며 고문에 못 이겨 사망한 박순병, 백광흠, 박길양, 권오상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계속된 재판 도중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박헌영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의 산송장이 된 채 병보석으로 옥문을 나서게 된다. 정신병원과 전국을 떠돌며 요양을 하던 그는 아내 주세죽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몰래 건너가 상해로 망명을 한다. 얼마 후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국제레닌대학을 다니면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최상위급 지도자로 혁명운동의 최일선에서 투쟁하던 박헌영은 1933년 7월 5일 세 번째로 체포된다. 상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지휘해오던 김단야를 체포하려던 일본경찰이 ‘호랑이를 잡으려다 사자를 잡는 식’으로 박헌영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고 박헌영은 또다시 살인적인 고문을 당한다.

트로이카 중의 한 사람인 임원근은 어떻게 됐을까?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돼 5년 2개월의 형기를 치르고 나서 언론인의 길이나 기업활동에 종사하는 등 비합법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한다.

모스크바로 망명한 김단야에게도 1937년 위기가 닥쳐온다. 스탈린 대숙청이 일어났을 때 한국인 사회주의자 김춘성의 모함을 받아 일제 밀정이라는 제1급 범죄자로 몰려 사형을 당하게 된다. 박헌영은 해방 후 한국전쟁 때 미제국주의 간첩으로 몰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구속되고, 1956년 7월19일에 사형이 집행된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빛나는 역할을 한 두 사람이 똑같이 ‘적’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얄궂은 운명을 보면서 그들을 허망하게 보낸 역사와 세상에 대해 안타까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1929년 함경남도 이원군 한 석탄 광산에서 탄광다이너마이트 도난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경찰에게 쫓기다가 면도칼로 목을 자해하는 자살 소동을 일으킨 청년혁명가 고광수. 체포되고 구금됐다가 폐병에 걸려 넉 달 보름만에 출옥했고 나온 지 5일만에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고광수만큼 짧은 생애동안 비중있는 투쟁을 한 혁명가도 드물었다. 강원도 횡성군 출신의 고광수는 18세 되던 1920년 서울 중동학교에 다닐 때 3.1운동에 참가한 바 있고, 2년 후 3.1독립혁명운동 기념 선전물을 제작, 살포하다가 3개월 복역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국에서 청년기를 보낸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안온한 삶을 버리고 온통 고뇌와 아픔뿐이었던 가시밭길을 자처해서 걸었다 . 북간도로 건너가 무장투쟁에 합류한 고광수는, 일제가 국경지대 반란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반일 게릴라와 민간인 가리지 않고 죽이는 ‘간도 출병(경신참변)’ 이라는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자행한 후 무장투쟁단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나 서간도로 근거지를 옮긴다. 그곳에서 러시아 내전에 뛰어들어 적색 빨치산 활동을 하기도 한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국외로 탈출한 지 4년 6개월만인 1925년 10월16일 고급 혁명간부 자격을 갖추고 서울로 돌아온다. 조선공산당 조직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거듭 시련을 겪을 때 고광수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에 이어 책임비서에 오르는 등 승진을 하면서 대립과 파벌로 얼룩진 국내외 공산당 조직을 통합시키려고 노력을 해오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해방 후인 1946년 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특집으로 다룬 기사에서 고광수를 가리켜 “민족해방운동의 영웅이요, 조선공산당의 초석인 전사한 동지를 추억하자”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경남동부지구와 경북지역에서 활약한 조선노동당과 최고위급 빨치산 지도자였던 남도부 역시 대단한 혁명가로 기록되고 있다. 본명이 하준수인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잡지 <신천지>에 <신판 임꺽정>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유학생인 하준수 자신이 입산자들을 규합하여 보광당이라는 항일단체를 결성하는 과정을 묘사한 글을 실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나중에 소설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때 잘 훈련된 빨치산부대인 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이었던 그는 혁명의 최종승리를 상징하는 ‘남쪽으로 부산까지 다다른다’는 의미로 남도부라는 가명을 썼다고 한다. 1950년 6월 24일 빨치산 3백여 명을 이끌고 부산쪽으로 떠난 그는 경상남북도 1천 미터 이상의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측 기록으로 그의 활약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군경과의 교전 횟수가 7백여 회, 군경 사살 1천 8백여 명, 각종 무기 약탈 8백여 정, 각종 실탄 약탈 2만여 발, 민가 방화 1백여 호, 민가 습격 5백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차량, 군용 트럭 소각 및 파괴가 2백여 대’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1953년 7월27일 유엔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정전협정을 맺은 후 보름밖에 지나지 않아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이 빨치산에 대한 대토벌작전을 선언하고 빨치산이 도시를 거점으로 한 선전, 선동 사업으로 투쟁방향을 바꾸면서 유격대원들의 사기도 저하되었다. 당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이 하산하는 과정에 뿔뿔이 흩어지거나 고립무원이 되고 발각, 혹은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하면서 혁명투쟁도 소강상태를 맞게 된다. 생포돼 법정에 선 남도부는 법정선서마저 거부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형구형을 받고 나니 내가 변절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듯하여 만족한다”고 하면서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결심과 신념에서 지조를 지켜왔을 따름이다”라고 최후 진술을 한다. 1954년 10월 16일 유응재, 지춘란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은 남도부는 이듬해 8월에 총살되었다. “그처럼 꿋꿋하게 품위를 지킨 사형수는 처음 보았다.” 라고 처형장에 입회한 수사관이 전했다. 눈가리개도 거부하고 두 눈 똑바로 뜬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응시했고, 죽기 전에 ‘인민공화국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는 남도부의 모습을 글로 대하면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지키고자 한 인간의 숭고한 가치와 철학이라는 무게와 깊이를 헤아려 보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 현대사에서 잊힌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고뇌와 투쟁과 희생이 있어왔기에 지금의 모습이라도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잊힌 혁명가들의 발굴작업이라 하지만 논리전개가 산만하고 공산당 조직과 활동에 대한 사족같은 서술이 반복되어 읽기에 지루한 부분이 많았고 거슬리기도 했다. 그것 역시 저자의 한계라기보다는 혁명가들의 기록이 불충분한 가운데서 나타난 문제라고 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라는 관점에 방점을 찍은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부분도 동의가 되지 않았다. 역사학자라면 한국전쟁의 원인과 책임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전후 맥락을 따져보고 균형잡힌 평가와 해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분하고 절망적인 우리 역사에서 그래도 민란과 갑오농민전쟁 및 전봉준의 저항이 있었기에 위안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치하에서 혁명가들을 비롯한 노동자, 민중의 목숨을 건 생존권 투쟁과 항일운동이 있어왔기에 절망속에서도 신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자본주의 모순이 벼랑으로 치닫고 가진 자의 횡포가 더욱 교묘해진 지금 먼저 간 역사속 선배열사들의 투쟁정신을 교본으로 삼아 쉼없이 자맥질을 하는 것만이 살아남은 우리 무산자들의 몫이 아닐까. 이래저래 머리 속은 복잡하지만 생각이 깊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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