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7호 7-3 홀로코스트의 공모

백창욱 ㅣ 목사

나는 책을 읽을 때 인상깊은 대목이 있는 페이지에 견출지를 붙인다. 말하자면 견출지가 많이 붙어 있으면 그만큼 중요대목도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은 어떨까? 견출지가 빼곡히 붙어 있다. 인상깊은 정도를 넘어서 충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어떤 책을 읽고 난 후, 그 분야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사실이나 지식이 매우 빈약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도 그렇다. 필요할 때마다 나치 범죄를 많이 회자(膾炙)했지만 이런 실상까지는 몰랐다.

우선 이 책의 핵심 단어인 홀로코스트가 무슨 뜻인지 보자.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뜻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나치 독일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사망자 중 유대인은 약 600만 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00만 명의 유대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위키백과 인용)

그리고 이 책은 기독교 국가 독일에서 도대체 왜 교회들과 대학들이 히틀러 체제의 파트너가 되어 홀로코스트에 공모했는지에 대해 그 배경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으잉? 교회들과 대학들이 공모했다고? 처음 이 글을 접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여? 하고 놀라움과 의문을 표할 것이다. 그런데 명백한 사실이다. 히틀러 때의 교회와 대학들은 한 치도 어긋남도 없이 나치와 공모하여 유대인 학살에 동참했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얼핏 생각하기를,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의 하부기관들이 주로 자행한 범죄로 안다. 물론 하부기관들이 실무로 움직인 것은 맞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나치 독일의 악명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대다수 활동은 그 조직 자체의 스파이 활동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독일 시민들의 고발에서 비롯했다. 평범한 독일인들이 스스로 감시하고, 유대인들을 돕거나, 그들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이웃들, 또는 히틀러에 대해 농담하거나 비판하는 이웃들을 밀고했다. 즉 나치의 경찰국가는 독일인 대다수가 스스로 초래했다. 독일인들은 나치 체제와 그 정책들을 승인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45쪽)구체적으로 어느 독일인인가? 의사, 변호사, 판사, 사회학자, 그들 대다수도 예외없이 히틀러의 정책에 동조했다. 얼마큼? 열렬하게. 저자는 개신교 신학자들을 연구했는데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 극적인 사례가 있다.

도리스 버겐이라는 연구자는 한 교사집단에게 “누가 안네 프랑크를 죽였는가?”라고 질문하는 워크숍을 했다. 각 사람에게 이름 하나, 또는 특정 개인에 대한 설명을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그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든 사람)이 줄 맨 앞에 서게 하고, 각자(그 인물) 그 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순서대로 서게 했다. 버겐은 아돌프 히틀러가 제일 앞에 서거나, 프랑크의 은신처를 밀고한 사람들이 앞에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일요일 아침에 유대인들의 악을 설교한 목사에 대한 설명지를 주었다. 그 사람은 맨 앞으로 걸어 나갔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49쪽)

이게 무슨 말인가? 독일에서 교회와 대학이 중요한 기관들이었으며, 목사들과 교수들은 대중의 태도와 행동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교회와 대학의 정체성에는 그들의 자명한 전제, 즉 자신들이 중요하며, 사회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전제가 포함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목사들과 교수들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 책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답은 그렇다 이다. 저자는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 혐오에 대한 나치 이데올로기를 열광적으로 찬양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과 신자들에게 ‘학살면허증’을 주었다고. 그 점에서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고 주장한다.

책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인용거리가 수두룩 할 정도로, 이 책 전체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우리의 순진한 선입견을 박살낸다. 루터 전문가 파울 알트하우스는 1933년에 이렇게 말했다.(참고로 말하자면 독일은 종교개혁의 효시 마르틴 루터 까닭에 루터교가 대세다.) “우리 개신교회는 1933년의 전환점을 하느님의 선물과 기적으로 환영했다”(1933. 1. 30 히틀러는 독일 수상이 된다) 투표에서 나치당을 찍은 사람이 특히 많았던 지역은 적극적인 개신교회들이 강했던 지역이다. 조만간 목사 비상동맹을 이끌게 된 마르틴 니묄러(고백교회를 이끈, 본회퍼만큼 비중있는 목사이다. 8년 감옥살이를 했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로 더 유명하다.)도 나치당을 찍었고 히틀러의 등장을 환영했다. 목사비상동맹은 독일기독교(DC)를 거부하여 그 다음해 고백교회(BK)로 발전한다. 고백교회 중 몇몇은 나치에 반대하여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 문제에서는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이 히틀러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한 1933년 그 해에 히틀러는 무슨 일을 했는가? “1933년에는 잔인한 나치의 태도가 모두 드러났다. 더 나아가, 반유대인의 첫 번째 조치, 좌파 정치인들 체포, 다카우에 첫 번째 수용소를 설치한 것이 모두 1933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은 흔히 우리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그런 말은 전혀 정확하지 않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쟁 이후에 대부분의 독일인이 인정하고 싶어 했던 것보다 훨씬 널리 알려졌다.”(86쪽)

개신교회만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을까? 가톨릭은?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톨릭의 어중간함, 어리석음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치당과 가톨릭 교회 사이 적대감은 매우 심했다. 독일 가톨릭 교회는 자체 정당을 갖고 있었다. 가톨릭 중앙당이다. 즉 가톨릭교회가 히틀러와 나치의 세계관을 반대한 데는 영적인 관심사뿐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 중앙당은 히틀러 권력장악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어떻게?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국회의원 608명 중 230명이 돼서 제1당이 됐다. 그리고 1933년 수상이 됨으로써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수권법을 요구했다. 수권법은 의회승인 없이 강력하고 신속하게 통치할 권력을 허락할 법이었다. 수권법을 요구하는 근거는 위기에 처한 독일이 논쟁과 지체를 참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법은 헌법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원 2/3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치당과 국가인민당(DNVP, 극보수성향, 매우 공격적인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당)의 연합으로도 부족했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수권법을 전혀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히틀러가 극적으로 권력을 확장할 희망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중앙당 의원들에게 달렸다. 그들은 히틀러가 원한 것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로부터 히틀러의 독재통치로 바뀐 것은 독일 가톨릭의 손에서 이루어졌다.”(93-94쪽)

도대체 왜 가톨릭교회와 중앙당 정치인들은 히틀러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나? 이런저런 설명이 있지만 핵심은 가톨릭은 우파의 혁명보다 좌파의 혁명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그 놈의 좌파콤프렉스!) 그런데 3월의 수권법 통과 이후 4월에는 유대인 상점 보이콧과 반유대인 입법인 공무원 정화법이 발표되었다. 더 나아가 6월 말과 7월 초에는 정당해산 조치에 들어가고, 이에 따라 가톨릭 중앙당은 7월 5일 해산됐다. 가톨릭 자신들이 좋자고 수권법을 통과시켰는데, 히틀러는 가톨릭 중앙당을 해산시킨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지위를 버린 것처럼, 가톨릭도 예수 따라 자신들의 지위를 버린 것인가? 가톨릭 최고 수장 교황 비오 11세는 히틀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총리 히틀러가 공산주의에 맞선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양했다.” 로마 교황대사 오르세니고는 히틀러의 권력장악에 대해 “솔직히 환호했다.”

리뷰가 길어지지만 가톨릭의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가지만 지적하자. 역자 김준우님도 밝혔듯이, 가톨릭은 전후에 악명높은 전쟁범죄자들의 탈출을 도왔다. 멩겔레, 아이히만, 로슈만, 프리프케, 슈탕글, 바그너, 라우프, 바르비, 파벨리치 등에게 새로운 신분증과 여행문서를 만들어줘서 스페인,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빼돌렸다.(이들의 범죄행각은 책을 직접 보라.) 도대체 왜? 이웃종교를 뭐라 하기 그렇지만 참 옳지 않다.

히틀러에 대해 대학들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흔히 대학은 좌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대학들은 독일 교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우파로서 기존 질서, 특권 계급, 보수적 민족주의를 대표했다. 나치운동에는 반지성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대학들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열광했다. 심지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부터 학생조직들은 흔히 나치로 돌아섰고, 1933년에는 상당수 교수가 히틀러의 권력장악을 환영했다. 대학들에서 반대한 증거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뮌헨대학의 ‘백장미단’이 있을 뿐이다.

진시황만 분서(焚書)를 한 게 아니다. “나치당은 1933년 5월 10일, 독일 전역 대학들에서 분서를 조직했다. 베를린 광장에서는 2만 권 이상을 불살랐다. 독일 전역의 학생들이 열광적으로 참여하여, 지정된 장소에 책들을 쌓았다. 학생들에게 “블랙리스트”가 배포되었는데, 유대인 저자나 나치 체제에 호의적이지 않은 저자의 책을 단죄한 것이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은 불길 속에 던져졌다. 공공도서관, 대여도서관, 개인 서가, 심지어 대학도서관에서 가져온 책들이었다. 불길이 치솟는 동안 학생 지도자들은 연설을 통해 정화 과정을 축하했다. 이런 분서 행위에 대해 교수들은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책을 내어주고,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환성을 지르며 불길을 바라보는 군중 속에 가담했다.“(144쪽)

히틀러 찬양에 앞장 선 두 대가만 소개한다.마르틴 하이데거.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 때 나치체제를 진심으로 승인했다. 그도 히틀러의 등장을 독일의 재탄생 순간으로 찬양했다. 게르하르트 키텔. 튀빙겐대학교 교수로 키텔 성서로 유명한 신학자이다. 키텔은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며, 1933년 5월에 나치당에 입당하여 자기 입장을 굳혔다.

이제는 좀 더 분명하게 독일 대학들의 범죄성을 규명하자. “홀로코스트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현대적이며 기술공학적으로 정교하다는 점이다. 대학에서 훈련받은 기술자, 엔지니어, 건축가, 의사, 법률가가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그처럼 효율적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하도록 도왔다. 첫째로 대학들은 필요한 전문가들이 그 작업을 하도록 훈련시켰다. 법률가들은 법, 규정, 정책을 만들어 희생자들을 구별하고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엔지니어들은 밀봉된 트럭을 만들어 그 속에서 유대인들을 일산화탄소 가스로 죽일 수 있게 했다. 의사들은 유대인들과 기타 인간을 실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홀로코스트의 구체적인 끔찍한 일들은 독일 대학들이 마련해 준 훈련과 전문가들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243-4쪽)

여기서 한 대학교를 꼭 집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괴팅겐대학교이다. 저자도 괴팅겐대학교의 나치활동이 워낙 유별난지라 ‘제7장 괴팅겐대학교의 탈나치화’ 제목으로 아예 따로 한 장을 할애했다. 괴팅겐대학교 교수들은 가장 악랄하고 교활하게 전문적으로 나치의 최선봉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의 탈나치화 작업 때 나치종사자인 교수들이 보인 뻔뻔함이다. 연합국 통제위원회는 각 개인을 범주 1에서 5까지로 분류했다. 범주 1과 2는 실제 범죄자들이다. 괴팅겐대학교 교수들 중 적극적으로 나치를 위해 일했던 교수는 범주 3이다. 범주 4는 나치를 지지했지만 덜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이고, 범주 5는 나치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던 개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범주 3에 속했는데, 나치혐의를 벗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예를 들면, 항소하고 또는 좋게 말해주는 동료교수들을 증인으로 포섭하고, 또는 변호사의 간교하지만 탁월한 능력 덕에, 또는 당사자의 끈질긴 해명 등으로 기어이 범주 5로 낙착받는 것이다.

이들의 뻔뻔한 처신에 대해 저자의 평가는 이렇다. “수만 명의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결코 나치가 아니었으며, 나치의 사상을 실제로 믿었던 적도 없었다고 선언했는데, 그들이 분명히 나치당원이었으며 나치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아무리 분명해도 그렇게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냥 어거지로 떼를 쓴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본회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당시 독일 전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히틀러를 거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독일사람들의 반응은 뜻밖이다. 1952년 본회퍼의 친구들이 그가 처형된 플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 그를 기념하는 명판을 세우려 했다. 뮌헨의 감독을 초대했는데, 돌아온 반응은 본회퍼가 교회의 순교자가 아니었고 국가의 반역자였다는 분노였다. 본회퍼가 히틀러에 치열하게 저항한 이유가 특이하다. “그가 어려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던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히틀러를 멋지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178-9쪽) 어릴 때 교회를 다니지 않은 까닭에 히틀러 선전에 세뇌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교회가 얼마나 히틀러를 찬양했는지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교회조차도 히틀러 찬양일색인 시대에서 외롭게 투쟁한 본회퍼마저 없었다면… 독일교회는 본회퍼 덕분에 간신히 체면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보다시피 히틀러 나치라는 거대한 광풍이 독일 교회와 대학을 통째로 휘감았다. 한 시대를 뒤덮은 광기가 얼마나 거셌으면, 쟁쟁한 목사들도, 신학대가들도 하늘의 경륜을 분별하기는커녕, 같이 장단을 맞추었다. 일제청산도 제대로 못하고, 미제에 예속돼서, 나라의 주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한국이 독일 히틀러 나치와 그 부역자들을 평가할 깜냥은 없다. 솔직히. 그렇지만 할 말은 하자. 저자는 결론에서 강조하기를, 우리가 역경에 직면할 때, 인권, 시민권, 국제법과 같은 우리의 기본가치들을 타협하지 않기를 경고한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서, 예를 들면 침략적인 사드배치에 대해서, 사드를 철회하라고 계속 저항하고 투쟁하고 투쟁의지를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국이 옳게 나아가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실천이다. 어째서? 독일 대학들과 교수들이 확고하게 히틀러 편이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평가 기준이 있다. 저항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저항은 살아 있음의 생생한 증거다. 또 정의의 표시다. 저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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