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8호 11-2 설득과 이데올로기 투쟁

한동백 ㅣ 예비 노동자

현재 운동 발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는 대중 설득의 문제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실제적인 대응 능력을 갖출 것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두 문제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이룹니다. 《현장과 광장》 제6호에 실린 모든 글과 서평 역시 각각 이러한 맥락에 따라 읽히고, 작성되어야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글을 다루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면 지면에 한계가 있을 터, 운동 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와 연계될 수 있는 글만 추려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다루고자 하는 글은 김장민 선생님의 『주체 없는 연대 없다』입니다. 이 글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운동 발전과 대중 설득의 문제를 추상적으로나마 제기합니다. 김장민 선생님은 서두에서 “민주노조 세대는 퇴장하고 신세대는 노동해방과 사회민주화에 관심이 적다”는 것, 그리고 “노동해방과 사회민주화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사회주의/진보 정당들이 힘 있는 활동이나 득표가 곤란한 조건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부담 없이 중도보수 심지어 수구보수 정당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급운동이 신세대에게는 물론이고, 운동 진영 내부에서조차 외면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강구(講求)하는 것은 운동 발전에서 필수 과제입니다.

글은 노동정치에 대한 노동자의 평가는 ‘분열’이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민중경선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글은 민중경선의 의의를 “전체 노동정치가 최소한 대선에서 하나의 요구, 하나의 투쟁, 하나의 노동자후보를 선출하여 연대연합을 강화”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글은 민중경선의 성과과 한계를 모두 명시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한계를 다룬 부분이 성과를 다룬 부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중경선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은 ‘일부 성과’를 냈다고 하더라도, 민중경선이라는 틀이 그 자체로 일정한 한계를 내포한 방식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 한계는 매우 뿌리 깊은 한계이기도 하며, 현재 운동 전반의 침체 원인을 자체 내로 지양해내지 못한 내용을 반영한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에서 지적하는 가장 유의미한 것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한계란, “주체적으로 민주노총 지도부부터 현장 간부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총의 단결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글에 따르면, 이렇게 된 이유는 “객관적으로 경제발전으로 인해 과거 조합원들이 개량화되고 신규 조합원들은 경제투쟁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조건은 운동 주체의 성격을 결정짓는 제일 변수이지만, 주체 역량은 객관적 조건에 대해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지니며, 변혁에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해낼 힘을 담지한 것이기도 합니다. 즉, ‘경제 발전’을 통하여, 조합원이 개량화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량이 부족하여 이에 대응하지 못하면 전반적인 개량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적 역량이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져 있다면, 전반적인 개량화를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모든 ‘객관적 조건’은 양면성을 지닙니다. 공황은 혁명적 정세를 창출할 가능성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프로파간다와 그에 따른 부정적 효과를 가일층 심화하는 요인으로 되어, 사회의 전반적 파쇼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실천 상에서 제기될 수 있는 객관과 주관 간 상관의 문제는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불리해진 객관적 조건에 타성적으로 대응하면, 역시 운동 전체의 상황은 나빠질 것이고, 또 우리가 유리해진 객관적 조건을, 즉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역량이 없다면 역시 운동 전체의 상황은 나빠질 것입니다. 반대로, 불리해진 객관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 그 내적 원인을 구체적인 수준으로까지 분석하고 종합하여, 그에 조응되는 전략과 전술을 짠다면 운동은 투쟁에서 유리한 국면을 확보해낼 수 있습니다.

민중경선은 운동 상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객관과 주체의 문제를 선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민중경선’이라는 형식 자체가 그러한 내용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 민중경선은 글에서 언급하는 것과 같은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민중경선을 통해 실천 상에서 인식 상승 추동인으로서의 경험자료를 획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반동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처방을 제시합니다: “조직노동자의 지지도 못 받는데, 미조직노동자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냥 구호일 뿐이다. 굳이 “사회주의자가 되라”고 강변할 필요 없이 사회주의자가 노동자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맞는 정책과 행동을 보여주면 된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언술된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서평의 서두에서 제가 밝힌 바와 같은, ‘대중 설득’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운동의 부활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추상적인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고장난 라디오식 반복, 남발이 아니라, 대중이 지닌 단초적인 인식에 조응된, 동시에 계급운동이 궁극적으로 목적하고 있는 보편적 내용을 반영한 설득 방식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이루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적 병리 현상을 대부분 극복할 수 있으며, 모든 민중이 그 물질적 조건에서 인간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대중에게 매우 진부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에는, 그 말이 목적하는 당위의 논리적 필연성, 그리고 설득 대상이 갖추고 있는 인식 범주―각 대중이 살아오며 겪은 경험에 따라 형성된 직접적인 인식―와 긴밀한 연계를 이룰 수 있는 논리적 필연성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최소한의 수준에서 언급될 수 있는 ‘어떻게?’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대중은 위와 같은 당위적 언술에 ‘충분히 대응‘―이것이 아무리 부르주아적이고 반동적일지라도―할 수 있을 정도의, 단초적인 인식을 이미 대부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인식에 조응된, 그리고 동시에 생동하는 보편이 스며든 내용을 내세울 수 있는 그 ’능력‘은 결국 ’주체적 역량‘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이를 통해서 참된 의미를 함유한 연대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 없는 연대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다룰 글은 이현숙 선생님의 『여성해방, 노동해방, 그리고 인간해방』입니다.

글은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의 핵심 내용을 쉽게 요약한 글입니다.

글을 읽으며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은, 우리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실제적인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글의 인용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가축 떼와 기타 새로운 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에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 획득은 언제나 남자의 일이었다. 생계획득 수단은 남자가 생산하였고, 남자의 소유였다. 가축 떼를 길들이는 것이, 다음에는 그것을 보살피는 것이 남자의 일이었다.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으며, 가축과 교환하여 얻은 상품과 노예들도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이제 생업에 의해 얻은 일체의 잉여는 남자의 것이 되었다; 여자는 그것을 소비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소유권은 조금도 없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자리에 만족하였다;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부를 뽐내면서 첫 번째 자리에 올라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비판하는 대다수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엥겔스가 동어반복이 빠졌다고 지적합니다. 즉 가축 떼와 ‘기타 새로운 부의 출현’의 질료적 내용을 이루는 전 요소는 남성의 생물학적 능력에 기인한 ‘자연분업’을 근거로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생계획득 수단은 남자가 생산”하였다는 것부터, 이미 ‘여성 억압’은, 사적소유가 아니라 어떠한 생물학적 차이로부터 기인한 ‘분업’에서 나타났으며, 만약 이러한 분업이 없었다면 사적소유가 나타났어도 여성 억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자연적인 범주와 사회적인 범주 간 통일, 연관, 그리고 상호 간 외재의 문제에서 부르주아 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사회적 구성주의’의 일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시공산제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고, 모권제와 모계제를 구분하며, “엥겔스적 의미에서의 ‘모계제’는 존재한 적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매우 아쉬운 현상이지만, 부르주아 인류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대중적인 영향력을 획득한 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인류학에 별반 관심이 없는 대중, 특히 변화하는 학술적 내용에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청년 세대는 이러한 부르주아 학계의 ‘분석’을 더욱 쉽게 접하며, 마르크스주의 인류학과 쉴새 없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원시공산제의 역사, 그 실증 과학―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표현한 그대로―적 근거가 부정되면, 당연하지만, 사적 유물론의 전 체계도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적 유물론의 전 체계가 부정되면 계급운동의 과학적 당위도 모두 부정됩니다.

이러한 전반적 상황은 우리 계급운동이 이데올로기 투쟁에 박차를 가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하자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계급운동의 일반적 대응 능력은 매우 처참한 수준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입니다. 20세기 사회주의권에서 연구된 추가적인 인류학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인류학 성과를 적극적으로 번역하여 내놓거나, 또는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에게 알맞게 소개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노동자계급 진영에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다룰 글은 김파란 선생님의 『여성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보라』입니다.

글은 현재 여성이 당면한 현실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작업은 여성이 겪는 현실, 즉 구체적인 개별 내용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글은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의 기반 내용으로서 가족을 다루고, 가족 내에서는 학력 증진과 관련된 교육 문제를 중점으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가족 내에 침투되고, 침투된 모순이 가족 내에서 성역할을 고착화하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재생산함을 지적합니다.

나열된 문제를 총괄하며, 김파란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본질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여성해방의 가능성도 노농계급 남성들의 해방도 이 ‘낡고 답답한’ 제도 내에서 수행하도록 요구받는 책무들을 사회화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의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국가가 포괄적 복지를 제공해야 하며,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유급 육아휴직을 줘야 하고, 육아수당 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요구들은 노동계급 전체를 위한 요구다. 어떻게 아이와 노인과 병자를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성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문제가 자본주의의 내적 운동 법칙과 여전히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자본주의를 지양함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음을 대중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다룰 글은 홍승용 선생님의 『풍요롭고 평등한 사회』입니다.

글은 제가 서평의 도입부에서 중요한 문제로 설정하였던 대중 설득 및 그에 관계된 요소를 모두 거론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지형과 관련해 꼭 피해야 할 태도는, 오늘의 불리한 상황을 불변조건으로 받아들여 자본독재체제를 절대화하고 노동자국가 건설의 비현실성 내지 불가능성 혹은 불필요성을 선전하는 패배주의입니다. 현재의 지형은 엄연히 계급전쟁의 중간산물인지라 가변적이며, 노동자정치 운동을 포기해도 좋게 해주는 알리바이가 아니라 노동자정치 운동이 감당하고 해결해 가야 할 주요 문제의 일부입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근본 메커니즘 자체에 그 극복 운동의 에너지가 내장되어 있어 오늘의 불리한 조건 때문에 위축되어야 할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첫 번째로 다룬 글에서 지적하였던 객관과 주체 간의 상관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내용입니다. 객관적 조건이 어떠한 새로운 현실성을 창출하는 계기로서, 이후에 이어질 사태의 필연적 원인이 되는 것이지만, 현 정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통해 우리는 자기 운동하는 객관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의 현실성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객관적 조건의 불리함을 이유로 하여, ‘패배’의 ‘필연성’을 ‘결정’짓는 것은 몰주체적인 태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대중 설득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 관계에 대한 홍승용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매우 뛰어납니다:

”이 경우 우선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을 서로 대등한 여러 반자본주의적 부문운동들 가운데 하나(1/n)로 취급하고 각 운동들 사이에 넘나들기 어려운 칸막이를 치려고 한다면 전략적 사고가 활성화되기 어렵습니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이라는 기본적인 객관적 조건에 근거해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노동운동이 떠맡을 수 있는 중심적 역할, 곧 노동중심성을 인정하는 것이 여러 부문운동들과의 전략적 결합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각 부문운동들은 그 내적 필요성과 절박성을 이유로 나름 절대적 지위를 요구하기 쉽습니다. 이로 인한 분열과 갈등을 피하는 손쉬운 방법을 각 부문운동들에 대등한 정치적 비중을 인정해주고 이를 민주적인 관계라고 자부하는 데에서 찾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부문운동들 간의 긴밀한 상호결합은 물론이고 사안별 느슨한 연대조차 쉽지 않으며, 자본독재체제에 맞서는 전쟁의 효율을 높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결국 각 부문운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에 각 부문운동들의 요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자본권력에 대응하는 것은 부문운동들의 자체요구를 해결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부문운동들이 이러한 판단을 공유하고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반자본주의운동에 자발적으로 적극 동참할 경우, 부문운동들의 자발성과 노동중심성 내지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대립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은 부문운동들을 위해 이 동참의 구체적 경로를 명확히 밝히고 그 유효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의무를 지닙니다.“

부문 상 제기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는 그 본질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의 실현태이자, 개별자이고, 또 외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러한 개별자들이 갖는, 체계상에서의 독립성을 전면 부정하고 오로지 그 내면 관계만을 따져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진 못합니다. 모든 개별자, 즉 여기서 ”부문운동의 주제“라 일컫는 것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래서 상이한 규정성을 갖는 것이고, 그에 맞는 해결법이 강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을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문의 여러 주제는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가 그 스스로를 필연적으로 실현시키는 방식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재고찰될 수밖에 없습니다. 갈수록 생태 파괴가 대규모로 진행되어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심화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심화를 극렬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여성인권에 대한 파쇼들의 노골적 공격도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심화와 대응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종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철학자인 G. W. F. 헤겔은 내면만을 강조하려는 것, 또는 외면만을 강조하려는 것을 모두 추상적인 사유, 고찰 방식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유(이론), 구체적인 실천은 내면과 외면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계급운동과 부문운동 간의 관계도 내면과 외면의 통일이라는 시각에서 분석되고 종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승용 선생님의 글을 더 깊은 수준에서 다루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서평이라는 형식과 비조응되는 글이 나올 것이기에, 아쉽지만, 이 정도만 다루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룰 글은 『친미주의자들이 외면하는 미국 현대사』라는 책에 대한 소개문입니다. 이 책은 미제국주의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내용으로, 김남기 선생님은 소개되는 책의 내용을 아주 대중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은 이 나라의 공식적인 교육의 장(場)에서 일관되게 관철하고 있는 그것이지만, 실제로는 공식적인 영역보다는, 비공식적인 영역에서의 영향력이 그것의 효과를 아득히 뛰어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 대표적 예로, 특히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띠는 미제 영화는, 청년 대중 사이에서 현재까지도 매우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프로파간다 영상물들은 모두 미국을 ‘세계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로 탈바꿈시켜 친미주의를 조장합니다. 저 또한 이 세대에 속해 있기에, 주위 친구들로부터 들어오는 ‘영화 소식’이라는 것도 모두 이러한 영화를 소개하는 것뿐입니다.

미국에 대한 찬양을 그 내용으로 하는 수많은 창작물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증폭하는 원인으로 됩니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호감’은 곧 자본주의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대중은 미국은 ‘선(善)’이고, 따라서 미국이 과거 냉전기 때부터 지키고자 하였고 또 현재에도 지키고자 하는 자본주의는 ‘선‘이며, 따라서 그에 대립하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현실사회주의는 ’악(惡)‘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이남 사회가 국제정치에서 미국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현실과 연관되어,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것으로 됩니다. 때문에 계급운동 진영은, 미제국주의의 역사적 실상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미국의 실상, 더 구체적으로 미제국주의의 실상은, 김남기 선생님의 글에서 보여주는바 그대로입니다.

미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은 계급운동 진영이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일부 동지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운동 법칙을 대중에게 알리기만 하면 대중이 알아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인간증오의 역사, 즉 인류 대학살과 기만의 역사를 구체적인 수준에서 거론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비판의식을 견고하게 형성할 수 없습니다.

레닌도 지적하였듯이,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인간 적대의 가장 파괴적인 내용은 제국주의 전쟁과 그 만행입니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정규화된 국가테러리즘’은 현대제국주의 만행의 가장 구체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남기 선생님이 소개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내용은 오늘날 계급운동의 부활이라는 목적성에 매우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장과 광장》 제6호는 설득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는 ‘운동 전반의 통일에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로서의 대중 설득‘이라는 과제가 우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현장과 광장》 제6호의 글을 통해 저는 우리 운동의 상승에서 대중에 대한 설득,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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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 맨 밑 책 소개 서평에서 언급된 책 제목은 《친미주의자들이 모르는 미국 현대사》이 아니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입니다.

    • 글쓸 때 모르고 헷갈려서 제목을 정확히 기입하지 못 했습니다. 위에 제가 원래 제목을 써 놨으니 읽고 싶으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Thank you for your sharing. I am worried that I lack creative ideas. It is your article that makes me full of hope. Thank you. But, I have a question, can you help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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