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2호 2-8 통일적 변혁전망과 혁명적 조직노선, 대중노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강은수 ㅣ 현장과 광장 구독자

격변의 시기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그렇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름으로 구축된 미국 일극 지배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것이 전쟁으로, 또는 전쟁위기로 촉발되고 있으며 자본의 경제위기로 나타나고도 있다. 거대하고도 전방위적이며 확실한 격변 속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다. 남과 북이 아닌 두 개의 적대적인 국가관계로 전락한 한반도 내의 한국사회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 일극 지배 유지 전략에 더욱 깊이 빨려들어감에 따라 정치, 경제, 군사적 위기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고 있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패악질을 보여주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지배 속에서 한국사회에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삶은 그야말로 절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총선을 맞이한다. 노동자계급이 이번 총선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나, 윤석열 정권에 대한 증오, 불신, 거부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총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대선까지 염두에 둔 확고한 거대야당 확보와 외연확대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에 대한 공포 조장으로 자신들이 주도하는 위성정당으로 진보, 시민사회진영까지 끌어모으는 중이다. 국힘당은 혐오와 증오의 선거전략으로 극우 및 보수 집결을 획책하고 있다. 소위 진보정당들은 분열로 이합집산하여 이번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진보세력의 단결단합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을 때, 진보당은 종국에는 비례위성정당에 결합했고, 정의당은 진보연합정당을 사실상 거부로 일관했으며, 노동당의 입장은 모호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과 총선방침 – 특히 총선방침 –은 진보정당들 내에서는 결정적으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마다 이번 총선에서 윤석열 퇴진이란 구호 속에서 의석수 확보에 나름의 타산만 하지 않았나 싶다. 현재 민주노총 차원의 총선방침은 문서에나 존재할 뿐 그 어떤 현장 장악력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절망적인 정세에서 도무지 희망의 단초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답답한 심정이다. <현장과 광장>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인데, 이전처럼 확연히 떠오르는 상상이나 생각의 단초가 그려지지 않아 글쓰기도 민망하고 망설여졌다. 그러나 어쩌랴. 쓰겠다고 한 것을.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몇 번이고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상을 부여잡고, 느낀 점이 소실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면서 배출되는 생각을 몇 가지 적으며 마무리 할까 한다.

우선, <현장과광장>을 읽으며 항쟁과 전선, 그리고 혁명을 상상해 보았다. 답답한 심정임에도 그래도 계속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은 <현장> 단락에 실린 <시>와 <글>들이었다. 4.3항쟁과 여순항쟁, 남민전과 열사투쟁, 노동자들의 현장투쟁, 그리고 최종에 가서는 <신공산당선언>이란 혁명시로 마무리 된다. 결국, 항쟁과 대중투쟁, 당과 전선, 그리고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사회변혁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대중투쟁을 조직하고 발화점을 계기로 항쟁은 시작된다.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되기도 하지만, 혁명은 그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실패의 확률을 줄여나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성찰과 반성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주체의 의지, 조직적 대안 마련이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는 유명무명의 선배 열사들의 피와 한이 서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은 무엇보다 필요하다.

지금 시점에서 예를 들면, 상식있는 구성원 누구나 외치는 윤석열 퇴진이지만 노동자계급에게 윤석열 퇴진은 故 양회동, 방영환 열사의 핏값이 서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퇴진구호 드는 것을 주저하던 민주노총은 故 양회동 열사의 노조탄압에 맞선 희생과 유언을 발판으로 퇴진구호를 들었다. 노동자 계급에게 윤석열 퇴진이란 단순히 정치공학적으로 개량적인 의회 전술의 일환으로 내세우는 구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먹으며 다시 <현장과 광장>을 읽으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뚫리는 듯하다.

사회변혁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종국적 목표는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일이다. 폭압적이고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길은 매우 고단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보안법과 각종 법,제도로 자본주의 외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 자체가 봉쇄당하는 현실이다. 노동자 계급의 사상, 이론, 방법 등을 어느 정도 – 또는 자유롭게 –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되묻는 동지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한 행위가 사회변혁을 향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일정 정도 사회 영향력을 끼친다고 판단했을 때. 저들은 주저없이 왕조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폭압적 행위를 행사한다. 역사적 경험이다.

수없이 많은 선전홍보, 언론매체들은 현실사 회주의 국가들을 악마화하고, 자본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 나라들의 상황은 일절 다루지 않는다. 오로지 경제적 빈곤, 또는 문화적 이질감과 상대적 낙후성만을 부각시킬 뿐이다. 이런 내용은 고사하고 절망의 노동을 이어가는 한국사회 노동자들의 삶 조차 거의 배제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부르주아 정치만을 주되게 다룬다. 이들이 허용하는 최대치는 오로지 자본주의를 인정, 유지하는 내에서만이다.

쏘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일차적 패배와 극복하지 못한 분단과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변혁역량이 약화되며 더욱 심화된 악조건이다. 소위 진보진영이 추진해온 선거를 통한 집권전략, 의회주의는 부르주아 정치내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 사실상 그러하며 – 이는 오히려 반작용을 키워 혐오와 증오를 기반으로 하는 극우보수세력의 확장을 만들었다.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세력에게 진보의 이름조차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뚫고 노동자의 정치운동을 고민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현장과 광장> 특집 ‘노동자 정치운동!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에 실린 글들은 많은 사색을 하며 계속 곱씹어봐야 할 듯하다. 모든 글의 공통점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으로 변혁성을 되찾아야한다 – 정립해야 한다 – 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선진적 노동자계급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을 전제로 정치권력 획득과, 획득과정을 이야기하고, 이를 위한 방법론도 이야기한다. 이것을 전제로 현실의 대중조직, 진보정당, 이론가들의 이론도 분석하며 원칙적 기준과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노동전선 하종문님이 작성한 ‘잃(잊)어버린 전망을 찾아서’를 읽으며 전망의 부재라는 것을 몇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전망은 있으나 통일된 전망의 부재가 문제이지 않을까?

이런 저런 전망은 있으나 변혁적 전망의 부재가 문제이지 않을까?

이런 전런 전망은 있으나 방법론적 전망의 부재가 문제이지 않을까?

결국, 글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전망의 부재란 통일적 변혁전망과 그 방법론적 부재라고 읽혔다. 어차피 역량 싸움이다. 통일적인 변혁전망을 내오는 길은 그런 역량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선진적인 노동자계급 역량의 역할을 제고해야 할 부분이다. 이를 통해 대중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

한 사람의 동지를 얻기 위해, 또는 만들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지는 모두가 잘 알 것이다. 그만큼 한 사람의 동지는 소중하다. 그만큼 동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가 열, 열이 백, 백이 천이 되는’ 조직노선과 과정은 우리에게 있어 과학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라는 구호는 대중노선을 강조하는 것일텐데 이는 실천에서 일정 염두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자유기고가 이현숙님의 ‘혁명적 정치인가, 개량적 정치인가’는 노동자계급이 정치를 논할 때 기준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역사적, 현실적 개념 정리를 통해 제시하여 속이 시원했다.

핵심은 변혁적 관점과 의지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발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련 사회주의 패배 이후 한국사회 노동운동은 개량적 운동으로 전환했고 양적성장은 이뤘지만 변혁성은 약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정치운동도 마찬가지다.

생각해 볼 지점은 개량주의 운동조차 자본과 정치권력의 지속적인 유화 책동과 물리적 탄압이 자행된다는 점이다. 일례로 통합진보당은 내부문제도 있었으나 정권의 폭압으로 해산되었다. 개량주의적 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증명되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정치권력의 탄압의 기준선을 넘지 않고 맞춰갈수록 운동은 더욱 개량화될 뿐이다. 대중의 혁명적 상상력은 자본주의 체제로 갇히게 되며, 반대급부적으로 극우보수는 더 공고해지고 확대된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간의 개량적 운동에 대한 오류, 한계, 실패를 인정하고 이제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상은 폭발적인 대중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대중투쟁을 조직하고 전개하는 과정에서 계급적 각성, 변혁 의지를 세워가자는 거다. 결심한 조직부터 실천했으면 한다. 현재 민주노총은 총선에 모든 것이 맞춰져 있고 실질적 대중투쟁 조직을 위한 구체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총선방침 조차도 현실구도에서 통일적인 방침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윤석열 퇴진 구도를 만드는 것을 총선 승리의 지표로 삼는데, 실제 윤석열 퇴진을 위한 폭발력 있는 실천투쟁은 조직하지 않는다. 창조적인 투쟁 전술 고민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결심한 단위, 조직부터 투쟁을 만들어내고, 제기하며 이런 힘으로 민주노총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과정속에서 희망의 단초는 마련되지 않을까 한다.

예를들어 실질임금을 보장, 또는 인상하라는 투쟁을 통해 전체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민주노총이 앞장서며, 자본과 윤정권을 정면 타격하는 방향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겠다. 최저임금 투쟁을 자본과 정권에 대한 전면전으로 규정하고, 타격 거점을 그에 맞게 상정하고, 대규모 농성 조직을 통해 결기 있게 전개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자본과 정권은 혈안이 되어 반노동 이데올로기 공세와 탄압을 가할 것이다. 그것을 이겨내고, 전선 구축,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기간 자본과 정권이 조성한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갈등, 분열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어도 큰 성과라 생각한다. 향후 정치 및 투쟁역량 강화의 단단한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당면 총선기간은 조직된 노동자들 스스로 변혁적 관점을 수립하는 계기로 삼도록 노력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인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주기적으로 치루어지는 선거는 바로 자본체제를 유지하고, 노동자, 민중을 지배할 새로운 세력을 선출하는 형식적인 민주절차라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선거국면은 변혁적 운동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전술적으로 중요하게 활용할수 있는 기회라는 점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선거 자체가 목적이고 전략이 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이후의 발판은 마련되지 않을까 한다.

대중투쟁의 조직이던, 총선대응을 통한 변혁적 정치세력화 과제이던 핵심은 정세인식의 통일, 이에 따른 기간 운동의 평가, 이 속에서 전망과제를 도출하는 것이라 본다. 국제적 정세변화, 한반도의 정세와 그 속에서 한국사회 정세는 전망의 통일성을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 통일적 변혁전망의 속도를 정세가 추동하는 형국이다. 이를 바탕으로 혁명적 조직노선이라 불리는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며, 백이 천을 만드는’ 씨줄과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대중노선이라는 날줄을 엮어낸다면!

결심한 이들부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유리병 다루듯 조심스럽게 접근, 실천하면 우리의 변혁 역량은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빠르게 전진하리라 본다.

<현장과광장> 특집편 뒤에 나오는 팔레스타인 현황에 대한 글에서는 제국주의의 잔인함과 팔레스타인의 투쟁노선의 정당성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당면 전쟁위기 정세에서 팔레스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도 읽혔다.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이후 변화된 삶에 대한 번역글도 인상깊었다. 후퇴한 상황에서 가해지는 반작용이 얼마나 처참한지 생생히 느끼게 했다. 홍승용 소장님의 변증법에 대한 글은 당면 현실을 반영하여 항상 성찰을 부르게 한다. 자본과 이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 변증법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생산에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이병창 선생님의 북친의 사회적 생태이론에 대한 글도 시사점이 있었다. 자본의 발전에 따라 탈-가난 시대가 도래했다고 규정하고, 근본문제를 생태위기로 제기하되, 그 원인과 극복대상을 자본으로 명확히 한 북친의 사유 발전과정은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불교 성어가 떠올랐다. 결국 문제는 자본이다. 극복해야 할 대상도 자본이다.

명확하지만 복잡한 정세 속에, 너무도 답답한 마음속에서 읽었던 <현장과광장> 9호였다.

곁에 두고 지속적으로 보고, 곱씹고 사색해야 할 듯하다. 향후 스스로 학습과 실천에 여러 단서와 방향을 제시하는 <현장과광장> 9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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