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승 용ㅣ 현대사상연구소
1.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자명한 제일원리나 확고부동한 공식들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또한 복합적 연관 속에서 생성⋅소멸하는 대상들의 변화과정을 직시하고, 그 ‘살아 있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하면 사고의 틀을 바꾸기도 한다. 이런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적극적으로 가동한다면 어떤 만능열쇠 같은 공식들을 학습함으로써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인식을 얻을 수 있으라 기대할 수는 없다. 대상들의 가변적이고 무궁무진한 속성들과 관계들을 파악해가는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인식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갈 뿐이다. 이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각자에게 많은 지적 노동을 요구하며 따라서 불편하기도 하다. 이러한 불편함은 대상들을 구별하거나 그 대립관계를 파악하는 문제에서도 피할 수 없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 과학과 이데올로기, 전위와 대중 혹은 원인과 작용 등등의 긴밀하고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인식하는 것은 각 영역이나 대상들을 고립시키고 개별화하여 다루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불편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제반 영역들이나 대상들이 실제로 고립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한에서 그렇다.
이 점에서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을 수시로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현대 자연과학이 “화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 양극적 대립, 강제로 고정된 경계선과 부류 구별”로 인해 편협한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이러한 대립과 구별이 “상대적인 타당성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인식도 변증법적 자연 파악의 한 가지 핵심을 이룬다고 보았다. 엥겔스의 비판은 자연과학에 국한될 수 없다. 사회과학에서도 실제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못하는 제반 영역들 간의 고정된 경계선과 구별이 편협한 사고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천 문제와도 직접 연결된다.
예컨대 사회적 갈등들을 대증요법으로 표면차원에서 무마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대상들의 본질적 상호작용을 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를 회피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흐려놓음으로써 그러한 갈등에서 이익을 챙기는 지배자들의 요구에 부응한다. 지배자들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의적 분류방식에 따라 대상들을 부적절하게 구분하고, 차이를 이용해 차별을 만들어 적대관계를 유발하거나, 실질적 적대관계를 단순한 차이로 변조하여 적대관계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음으로써 실제 극복을 어렵게 만드는 것 등은 전형적인 지배수법이다. 예컨대 성적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차이 혹은 세대와 지역 차이 등을 통해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의 핑계로 악용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고 또 지금도 수시로 벌어진다. 종속민족 내부의 사소한 차이를 근거로 그들을 분열시켜 통치하기 쉽게 만드는 것은 식민지배자들의 고전적 지배방식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심각한 임금 격차로 구분하여 노동운동의 단결을 파괴하는 자본독재의 전략이 주효해 왔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근본적인 적대적 모순관계를 협력관계로 날조하여 사회적 합의와 협치를 입에 올리면서 실제로는 적대적 모순관계를 유지⋅강화하여 이익을 얻는 것도 자본독재가 포기하기 어려운 전략이다. 차이를 존중하자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행어는 차이를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지배 메커니즘이나, 노동과 자본 혹은 제국과 종속국 사이의 적대적 모순이 소멸한 상태에서 재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민중이 민족적 성적 세대별 직종별 차이에 따라 적대관계를 형성하여 끝없이 분열하고 갈등을 일으킬 때, 자본독재권력은 즐거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노동자민중 내부의 싸움을 부추기고 노동과 자본의 근본적 모순을 감추는 신종수법들을 다시 개발해 적절히 써먹을 것이다.
2. 구별과 대립의 상대적 타당성 문제와 관련해 엥겔스는 원인과 작용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사물들의 보편적 상호작용을 고려하면, “원인과 작용은 부단히 그 위치를 바꾸며, 지금 혹은 여기에서는 작용인 것이 거기 혹은 그때에는 원인이 되며 또 이와 반대로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의 노동자정치운동과 관련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국가, 즉 실질적 민주국가인 노동자국가 건설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최대 당면과제이자,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오늘날 이 과제의 실마리를 쉽게 풀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노동자민중이 이제 살만하다는 시한부 환각 속에서 노동자국가를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무엇보다 자본독재의 분할통치 전략과 경제성장을 토대로 한 상층부 노동자, 특히 이데올로그들의 매수 효과가 깔려 있다. 이로써 형성된 위계질서에 체념적으로 적응하며 각자도생을 꾀하는 노동자민중의 현재 욕구는 다시 노동자정치운동의 시야에서 노동자국가라는 목표를 지우며 자본독재를 강화시킨다. 자본독재가 만들어낸 결과가 현재 정치환경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울러 노동자정치나 노동자국가 등 폭발력 있는 개념들을 노동자민중의 의식에서 지워놓는 청산주의⋅다원주의⋅무정부주의⋅차이형이상학 등의 반-노동자중심주의 이데올로기들의 몫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들은 이 악순환을 이론적으로 확인하고 정당화하면서 부추기고 그것의 지배적 본질을 흐려놓음으로써 노동자정치운동의 현재적 난관을 불변의 자연조건으로 굳혀왔다.
이러한 절망의 악순환은 경제성장 내지 자본증식의 한계와 주기적 위기 앞에서, 살만하다는 환각과 함께 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기나 재앙이 닥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저절로 평등사회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노동자정치운동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자본독재가 주도하는 상태에서 위기는 새로운 야만과 노동자민중의 희생으로 귀결되기 쉽다. 희생을 막고 노동자국가와 평등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준비의 일환으로 기존의 악순환, 즉 자본독재가 만들어낸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조건을 핑계로 다시 자본독재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즉 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목적의식적으로 강조하고 이에 대한 공감대를 넓힘으로써,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에 비춰 오늘 노동자들이 당면하는 문제들의 근본적 타개책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도가 필요한 이유는, 현재의 문제나 과거의 경험을 건너뛸 수도 없지만 여기에 묶여 있는 한 자본독재가 구축해 놓은 총체적 지배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불신에서 지금까지 민주노동당과 의회주의 진보당운동이 보여준 한계에 기인하는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과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또 다른 실패가 예정된 바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실패를 이유로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운동의 장기목표 설정 문제와 비약적 발전을 위한 전략 논의를 기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평등사회 건설의 현실적 전망이 없으면 현재의 불평등구조를 극복하자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이 현실적 전망을 집약하는 개념이 노동자국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민중이 어느 한순간 동시에 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노동자정치운동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수의 노동자민중이 운동에 가담하기까지는 운동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운동에 헌신적으로 나서는 활동가들, 즉 전위의 역할이 불가피하다. 전위는 무엇보다 대중의 현재 의식상태를 근거로 운동의 발전을 막는 일을 경계하고, 새로운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의무가 있다. 또 이에 따르는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위와 대중의 구별은 절대적이지 않다. 전위와 대중이 현실적 변혁전망을 공유하고 그 실현 경로를 함께 만들어감으로써만 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 경우 이미 대중은 전위와 구별되기 어렵다. 대중의 전위화는 운동의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인 것이다. 또한 전위 역시 인식이나 실천 속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이때 대중과 전위의 역할은 뒤바뀔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자본독재의 힘이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조건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상태에서, 그러한 주체적 조건을 당면문제로서 직시하고 현실적 변혁 전망을 통해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전위의 역할은 운동의 발전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3. 노동자정치운동이 아직 자본독재의 현실적 대안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주요 원인은 운동의 주체들이 여러 갈래의 조직과 정파들로 분열되어 힘을 모으기 어렵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결은 노동자민중이 가진 최고의 무기다. 운동의 분열은 이 무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그 동안의 운동조건이 열악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운동의 분열은 다시 운동의 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고 있다. 그 열악한 조건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분열의 뿌리를 캐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묻어두었던 상처들만 다시 덧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장기간 누적된 불신과 갈등 혹은 무관심을 일거에 해결할 어떤 비책은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을 절대화하지 않는 변증법적 사유가 분열 극복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하고 싶다. 다른 조직이나 정파에 대한 경계선을 엄격히 고수하고 싶을 때마다 편협한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을 한 번쯤 상기하시라고 권하는 바다. 물론 자본독재권력 및 그 대리자들과 이에 맞서는 노동자민중 사이의 구별과 적대적 모순을 흐리는 것은 운동에 대한 범죄다. 그러나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인류사적 전쟁에 가담하는 조직⋅정파⋅세력이라면 어떤 수준이나 형식으로든 서로 간의 경계선을 넘어서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절박한 당면과제다. 이때 자본독재가 초래하는 범인류적 파국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함께 노동자국가 및 풍요로운 평등사회라는 공동의 목표가 운동 통일의 계기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을 통일해가는 방법은 현실적 조건을 바탕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으며 미리 확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한에서 그 실현을 위한 정책과 이론을 놓고 논쟁하고 검증하여 그 결과를 공유해가는 과정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검증을 견뎌낼 자신이 더 큰 쪽일수록 통일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를 설득할 무기가 충분하다면 논쟁을 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운동 통일의 역사적 사례로 1875년 고타 당대회를 통한 독일 사민당의 출발을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다수파인 라살주의자들은 비스마르크의 재정지원을 받는 온건파였다. 혁명적 맑스주의를 지향하는 아이제나흐파는 소수파였다. 맑스는 이 어처구니없는 통합에 반대하며, 라살주의의 영향 하에 작성된 고타강령초안을 첫 문장부터 조목조목 비판했다. 엥겔스도 이 강령이 채택된다면 “맑스와 나는 이러한 기초 위에 설립되는 새로운 당을 신봉한다고 밝힐 수가 절대로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사민당은 비스마르크 치하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한다. 통합 15년만인 1890년에는 제1당이 되며, 1878년 이래 탄압도구로 쓰인 사회주의자법을 무효화한다. 당의 지도이념도 수정주의를 거부하고 맑스주의를 지향한다. 이 시기에 엥겔스는 사민당이 “가장 강하고 잘 단련되고,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는 사회주의 정당으로 되었다”고 자부하며, 독일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이용하는 방법을 만국의 동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동지들에게 새로운 무기, 가장 날카로운 무기 하나를 제공하였다”고 주장한다. 엥겔스의 이러한 평가는 그의 사후 제국주의 시대 사민당의 우경화로 인해 무색해진다. 맑스와 엥겔스는 당이 성장하던 시기에도 당 내부에서 뒤링을 비롯한 여러 우파 이데올로그들과의 논쟁을 피하지 않았고, 좀더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노동자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독일 사민당의 사례에서 우리는 운동 통일의 폭발적 가능성과 함께 위험성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성은 운동의 통일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독일의 제국주의적 발전이 사민당 우경화의 근본원인 아니겠는가. 사민당의 길을 우리가 답습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달라진 조건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운동 통일의 효력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일을 주저할 이유도 없다.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을 절대화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불편함은 사실상 사유의 생산성을 높이는 밑거름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자연스럽게 규정하는 제반 구별들이 무엇을 감추고 어떻게 지배장치로 쓰이는지 묻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해방전쟁의 일환이다. 대립관계로 나타나는 대상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전도되기도 하는지 인식하는 것 역시 대상들의 ‘살아 있는 본질’에 다가가는 필수 경로다. 이러한 사유방식에서는 궁극적 전망을 현재 운동의 원동력으로 전화하는 노력도 비현실적이지 않다. 그로써 노동자정치운동의 통일과 도약이 가시화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망설이겠는가.
(2023. 4. 3.)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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