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35호 10-2 프롤레타리아 혁명 역사를 만든 특별한 우정

H 겜코브의 마르크스ㆍ 엥겔스 공동전기 <두사람>을 읽고

은영지 ㅣ 평화활동가

1. 들어가는 글

지난 10월 20일, 이 땅의 노동계급의 희망인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실행, 자본계급과 그에 기생하는 문재인 부르주아 정권에 타격을 주고자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착취자인 자본가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상황을 기대했건만 저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사그라들 줄 모르는 코로나 19 전염병이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파업권을 옥죄었다고 하지만 더 치떨리는 이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단체행동권을 하위법률로 제한해 초장부터 파업을 원천봉쇄하려는 정부의 노동탄압이 이번에도 먹혀들었다. 비정규직이 1천만명이고 최저임금, 근로기준법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400만명, 매일 7명의 노동자가 자본에게 살해당해도 자본가가 처벌받지 않는 부르주아 만세 국가인데 어련하겠나. 어디 그 뿐인가. OECD국가 중 두 번째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파업할 때 공장점거도, 상급단체 종사자 공장 출입도 불가능하고 자본의 손배ㆍ가압류 청구가 무한으로 보장돼 노동자를 자살하게 만드는 몹쓸 나라다. 법이 보장하는 집회를 주도한 노동자계급 대표는 구속하고,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악질 자본가를 행형규정까지 고쳐 풀어 주는가 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노동자를 간첩으로 만드는 부끄러운 노동탄압국 한국이다. 그럼에도 노동계급은 이 반동 자본가와 정권을 심판하거나 처단할 힘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코 앞에 다가온 부르주아 선거판에 비판적 지지니 차선이니 차악이니 배알도 없는 말만 내뱉고 있다.

구제불능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되는 이 자본가 천국에서 밥그릇을 지키려고 간, 쓸개 다 빼주며 ‘자본의 노예’로 구차하게 사는 건 이율배반적인 계급의식이 아닌가? 이를 거부하고 싸워 노동자 해방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노동자계급에겐 마르크스ㆍ엥겔스 혁명 이론이 투쟁 전략이지만 그 이론서들은 어렵게 다가온다. 그러나 독일 작가 H 겜코브가 쓰고 김대웅ㆍ주양석이 공역한 마르크스ㆍ엥겔스 공동전기 《두사람》은 읽기 쉬웠다. 그 두 친구가 평생 진한 우정을 나누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면서 혁명에 투신, 고난을 겪는 모습이 쉬운 언어로 생생하게 기록돼 있어 긴장감과 감동도 더해졌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 헌책방에서 겨우 구했는데 펴낸 지 30년 된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누리끼리하게 색이 바랜 모습이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두 사람의 테제와 이론이 살아 펄떡이고 있었다. <독일이데올르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고타강령비판> 등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의 집필 동기와 내용이 조목조목 소개돼 있어 배경지식을 놓치지 않고 감동으로 읽었다. <인터내셔널>이나 <파리콤뮌>의 혁명적 기록과 긴박했던 투쟁을 대하는 것도 희열이었다.

2. 운명적인 만남과 평생 투쟁한 두 사람

“그 누구도 애초부터 혁명가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반대였다! 한 사람은 명망있는 변호사이자 법률고문관의 셋째로, 다른 사람은 부유한 상인이자 공장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25살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출신계급에 등을 돌리고 미래를 이끌어갈 계급, 즉 노동자 계급 편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 계급의 세계사적 역할과 미래를 인식하게 되었다.”

머리말에 묘사된 두 사람의 투쟁기에 마음이 울컥했다. 19세기 중ㆍ후반 두 사람은 특별한 우정을 교환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숨가쁘게 살았으며 실제로 유럽과 러시아 혁명투쟁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노동자계급 최초의 국제적인 혁명대중조직의 선봉에 선 이 두 사람을 역사는 최고의 협력자로 꼽았다.

두 사람은 독일출신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트리어,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바르멘으로, 180km 떨어진 도시에서 각각 나고 자랐지만 대학에서 공부하던 20대 초반까지는 서로 알지 못했다. (엥겔스는 포병장교로 1년 복무하느라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청강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은 변혁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변혁과정에 참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은 두 사람이라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내재돼 있었다.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수용, 과학적 공산주의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을 삼았지만 이후 프로이센 입헌 군주제 국가를 인정한 헤겔의 ‘절대이념’과 종교 및 관념론을 비판한 <기독교의 본질>의 저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는다.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마르크스는 일상적 정치투쟁에 헌신하면서 반정부주의자들의 대변지 <라인신문>의 편집장이 되어 정치적ㆍ사회적 무산대중의 비참한 상황을 폭로하는 글을 쓴다. 이것 때문에 융커가 지배하는 프로이센 국가와 관료주의, 끝없는 검열에 맞서야 했고 고국에서 추방되는 비운을 겪는다. 청년 엥겔스 역시 <역사철학 강의>를 포함한 헤겔의 저서를 독파했지만 생활과 철학, 정치와 철학의 결합을 추구하며 봉건적 반동에 맞선 투쟁을 했고 모든 희망을 혁명적 사고와 혁명적 행동의 통일에 걸었다. 그 둘은 진보적인 신문과 잡지에 논설문과 시를 기고하면서 서로의 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전에도 자본주의와 그것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비판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인간다운 사회로 가는 길에 대한 이념들이 과학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공상적이었다. 프랑스인 퓨리에, 생시몽, 영국인 로버트 오웬이 대표적인 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고통받는 계급으로 보았지만 도덕적 인간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지배계급과 권력자들의 통찰에 호소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선도적으로 투쟁하는 계급으로 보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는 사회적 진보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해 과학적 공산주의를 선언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들이 겪었던 경험과 맨체스터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토대로 1843년 <국민경제학비판개요>와 <영국의 상태>라는 논문을 썼고 ‘모든 악의 원인은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을 폈다. 사유재산으로부터 계급의 존재와 노동대중의 착취,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모든 본질이 설명된다고 하면서 노동자계급만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계급없는 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과학적인 공산주의의 입장을 갖고 실천활동을 했다. 각자 다른 공간에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같은 과학적인 인식에 도달한 두 사람은 1842년 <라인신문>에서 잠시 만난 이후 1844년 8월 후반에 재회, 본격적인 우정을 나눈다.

“그들은 자신의 혁명적 이념 속에 홀로 서 있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이론적 분야와 정치적 분야에서 전우를 가진 셈이다. 왜냐하면 낡은 것의 보호자이며, 공공연한 또는 숨어있는 적들의 우세한 힘에 맞선 투쟁이 분명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

차아티즘과 공상주의, 균분적 공산주의와 반란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필연적인 자기해방을 위해서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노동자계급 자신의 투쟁을 위해 과학적인 이론이 절실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후 40년간 치열한 투쟁과 함께 공동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들의 공동저작들 중 <독일 이데올르기>가 돋보인다. 철학적ㆍ역사적 그리고 다른 이념들과 법률적ㆍ정치적 상황 혹은 국가형태는 그 자체로는 설명될 수 없고, 결국 인간이 살고 있는 ‘경제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면서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정치권력을 탈취해야만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를 처음으로 내세우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변증법적ㆍ사적 유물론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세계사적 사명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이 계급의 근본적인 이해를 정식화했으며 세계의 보편적ㆍ실제적 변혁으로의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철학을 창조했다. 그것은 기존의 세계를 해석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실천과의 결합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는 도구가 되는 철학이자 역사관이다.” (P. 92)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표현이다. 마르크스ㆍ엥겔스 이론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해 유일하게 과학적 근거를 가진 이론이지만 당시 진보적인 노동자들조차 공상적 사회주의와 관념, 혹은 계급적 화해라는 소시민적인 꿈에 지배되고 있어서 이에 맞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를 설립, 서신 형태로 공산주의 사상과 운동의 필요성을 알리고 노동자들과의 접촉을 강화했다. 한편 독일노동자 조직인 <의인동맹>은 1847년 반봉건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지배권을 넘겨받을 상황이 되자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당’ 창설에 몰두한다.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의인동맹>을 소집하고 긴밀히 토론,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명칭을 바꾸고 엥겔스의 제안으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의 구호가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빛나는 성과물로 1848년 2월 <공산당선언>이 출판된다.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당인 <공산주의자동맹>의 행동강령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공산주의와 국제 노동자 혁명운동의 출생증명서로 자리매김 되는 이 선언은 변증법적ㆍ사적 유물론, 정치경제학, 계급투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또한, 인간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한 착취와 억압, 기아와 전쟁이 사라지고 인류를 위한 평화와 사회보장,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고 보장되는 방법에 관한 답안이 나와 있다. 노동자혁명으로 실현되는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이 소수의 이익이 아닌 모든 사람의 복지를 증가시키기 위해 복무해야 달성될 수 있고 그러한 노동은 괴로운 강제가 아니라 해방된 삶을 밑받침하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 될 거라고 <공산당선언>에서 두 사람은 예언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무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무기를 사용할 사람들ㅡ현대의 노동자들, 즉 프롤레타리아트ㅡ역시 창출했다.”

”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족쇄 이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그들은 세계를 획득할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감동과 역동성이 전해오는 힘찬 <공산당선언>이다. 1848~49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유럽 곳곳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들은 낡은 화승총이나 칼 대신 정신적인 무기인 <공산당선언>과 역시 마르크스가 초안한 ‘독일 혁명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행동강령’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유럽혁명 실패 후 영국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극심한 가난과 혁명의 희망이 사라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기도 했지만 노동자계급에 대한 믿음으로 그 모든 역경을 견뎌내며 엥겔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을 재결속시키고 망명자들을 원조하는 활동을 펼친다. 그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1848년부터 1850년까지>라는 연재물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자신의 다른 저작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하에서 국가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의 도움을 받아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공산주의 이행을 성취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경찰등 반동세력들의 계속되는 공산주의자 탄압과 체포작전으로 인한 활동의 위축 때문에 <공산주의자동맹>과 <신라인신문>, <선언>도 해체와 폐간의 위기를 맞게 된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가난과 영양실조, 질병으로 세 아이가 죽자 더욱 힘들어했고 매번 엥겔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마르크스 가족을 돕기 위해 아버지 사업체에 복귀한 엥겔스는 생계비를 지원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마르크스는 집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뛰어난 공동작업은 뭐니뭐니해도 10여 년에 걸쳐 준비한 <자본론>이었다. 1848년~49년 실패한 혁명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은 두 사람은, “노동자계급은 철저히 학습받은 프롤레타리아 당을 필요로 하며 노동자계급의 과제를 위해 과학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하며 과학이론 창출에 매진하게 된다. 과학적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와 역사에서 한 단계 나아가 자본주의의 생성, 발전, 몰락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합법칙성을 밝혀내고자 했다. 1867년 3월말 1권이 완성된 이 책을 두고 엥겔스는 “지구상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존재하는 마지막 날까지 노동자들에게 여기 있는 이 책만큼 중요한 책은 발행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극찬을 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숨구멍에서 비롯되어, 피와 고통에 짓무르게 하면서 세계에 등장했으며, 이미 성장해 있고 쉴새없이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라고 표현해, 자본의 본질적 악마성을 드러냈다.

<자본론>에서 처음 공개한 ‘잉여가치설’은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 착취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생산 및 생활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는 달리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돼 지불받는 노동력을 초과하여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한다. 자본가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잉여가치는 그 과정이 계속되면서 자본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토지임대료, 이윤, 자본 축적에서 비롯된 모든 것은 노동하지 않는 계급에 의해 탕진되거나 재산축적의 원인을 제공하고, 노예소유자나 봉건 영주나 다름없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을 획득함으로써 성취된다.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인 결과는 착취하는 자본가와 착취받는 노동자계급 사이의 격렬한 계급투쟁이었다.

” 자본독점은 그와 병존하여 또는 그에 종속되어 개화(開化)해 온 생산양식을 묶어놓게 될 것이다. 생산수단의 집중화와 노동의 사회화는 자본주의의 껍데기와는 양립할 수 없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껍데기는 파열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착취자들이 착취당하게 될 것이다.” (자본론)

마르크스는 이 책에서 자본가계급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착취로부터 해방된 사회는 항구적으로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우월함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생산성의 항구적인 증대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50년이 지난 지금도 <자본론>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과 미래지향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의 대안으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864년 9월28일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 약칭 <인터내셔널> 창설이었다고 이 책이 회상하고 있다. 20여 년간 노동자계급에 복무해온 투쟁의 결실인 <인터내셔널>의 창립선언문에서 마르크스는 “연대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에 승리할 수 없다”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민족적 편견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책동을 부추기고, 약탈전쟁을 일으켜 인민의 고혈과 재산을 탕진하는 지배계급의 파행적 대외정책에 맞서 투쟁” 할 것을 촉구했다. <인터내셔널>의 지휘아래 국가별 노동자당 창건을 독려하는 가운데 독일에서는 <독일노동자단체연맹>과 <전독일노동자협회>가 아이제하나에서 대회를 열어, 아이제하나 당(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을 결성했다.

1870년 유럽은 또 한 번 혁명의 불길이 번져나간다.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전쟁 패배후 항복함으로써 군국주의가 파멸하게 되었고 파리 민중들은 9월4일 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 공화국이었고 프로이센은 1871년 프랑스에 침입, 베르사이유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자 민중들이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며 3월26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시 행정기구를 창설, ‘파리코뮌’을 공표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이 세계 최초로 가장 큰 도시의 한복판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전복시키고 정치권력을 획득,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창조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도주하는 티에르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콤뮈나르의 방어자세, 그 정부가 남겨둔 예비금을 압수하여 부르주아지들을 궁지에 몰아넣지 못한 점, 점증하는 반혁명에 대한 무방비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프로이센 융커와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의 무자비한 반격과 보복으로 콤뮌전사들이 학살되고 파리는 노동자의 피로 붉게 물들이며 혁명은 실패하게 되었다. 파리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근로자인 농민과 긴밀한 동맹을 맺어야 하고 ‘혁명적이고 과학적인 강령에 따라 행동하는 정당 없이는 진정한 노동자계급 해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보여주었지만 혁명 당시 프랑스엔 안타깝게도 정당이 없었다.

“파리의 순교자들은 노동자계급의 마음 속에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이다.”

유럽의 반동주의자들과 착취자는 환호성을 질렀고 반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박해가 대륙 전체에 퍼져나갔지만 마르크스의 칭송처럼 수십 년후에 있을 러시아의 붉은 10월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노동자계급과 동맹자들의 권력 쟁취는 콤뮈나르의 유산임이 입증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이론서를 만들고 각 나라 노동조합에 정치투쟁할 것을 선동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파리콤뮌을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은 착취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고 일생동안 비방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 반동 경찰들에게 추적당하고 테러 위험에 처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을 힘들게 했던 것은 개량주의 의식에 젖어든 노동계급과 혁명을 방해하는 내부의 적들이었다. 대표적인 세력들이 콤뮌의 후계자인 양 떠벌리고 다니는 미하일 바쿠닌을 비롯한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인터내셔널>에 의도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바쿠닌은 무정부주의 강령을 강요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의 건설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바쿠닌은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이 대중을 이끈다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른바 혁명과 폭동도 구분하지 못하는 논리를 들이댔다. 쁘띠부르주아적이고 관념적이고 반노동자적 입장에 서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 모순되는 주장을 펼친 이들은 결국 <인터내셔널>에서 쫓겨나게 된다. 수십년 후 건설된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반노동자적이고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무정부주의는 자본주의 패악이 극에 이르러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조직적인 투쟁과 혁명성이 거세된 모호한 주장을 하고 있다.

<공산당선언> <자본론>과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요한 이론적 연구서로 <고타강령비판>을 꼽을 수 있다. 1875년 5월말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을 위한 두 기구(라살레의 ‘전독일 노동자협회’와 아이제나하 당이라고도 하는 ‘독일사회 민주노동자당’)의 통합을 이룬 ‘고타회의’의 강령초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내용이다. 새로운 정당의 강령은 1869년의 아이제나하 당 강령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관념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라살레의 표어들을 수용한 내용이라고 마르크스ㆍ엥겔스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강령초안은 ‘임금철칙’이라는 라살레의 테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착취자들에 대항하는 파업이 무의미하다고 믿게 했다. 두 사람이 이미 <공산당선언>에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고 특징지웠지만 고타강령 초안은 자유국가를 향한 관념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인 요구를 공표했다. 마르크스가 <독일노동자당 강령주석>이라는 제목으로 비평하고 1891년 엥겔스에 의해 간행된 <주석>은 <고타강령 비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혁명적인 변혁시기가 있는데 그 과도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라고 적고 있다. 공산주의 미래로 가는 길에서 노동자계급과 지도적인 당의 의식적 행위가 발현되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에 관한 지식의 습득과 철저한 이용이 불가결하다는 사실이 잘 정리돼 있다.

이렇듯 치열하게 사고하고 살아생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보고자 했던 마르크스는 1881년 폐렴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지만 학문연구에 계속 몰두하다가 1883년 3월14일 조용히 잠들게 된다. 1881년 사랑하는 아내 예니가, 1883년 1월11일 장녀 예니가 숨을 거둔 후 슬픔에 잠겨 더욱 쇠약해진 직후였다. 엥겔스는 조르게에게 친구를 잃은 슬픔을 전했다.

“인류는 한 영혼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날로 매진하곘지만 프랑스인, 러시아인, 미국인, 독일인이 결정적인 시기에 언제나 명확하고 모순됨이 없이, 오직 천재와 완전한 전문가만이 줄 수 있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자문할 중심점이 사라졌다.”

엥겔스는 또한, 마르크스의 혁명적 활동을 기리는 조사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그는 많은 적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개인적인 적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수백년 동안 살아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언집행자인 엥겔스는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 유작들을 정리하여 펴내는 한편, 노동자계급 조직활동이나 과학적 사회주의를 위해 활발한 연구와 저작활동을 하며 죽는 날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복무한다. “1895년 8월 6일 밤 10시 30분 엥겔스가 큰 고통없이 숨을 거두었다”는 전보가 전세계 계급의식적인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날라갔다. 실제론 그는 죽기 몇 주전부터 식도암이라는 불치병을 앓았다고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애도사에서 “우리는 그대들 두 사람이 가르쳤던 것을 이룩할 것이다. 그대들은 실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라고 썼다.

3. 마무리하며- 우리의 과제

마르크스가 죽고 12년을 더 살면서 투쟁하다가 간 엥겔스가 유럽 여행 중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자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마르크스를 회고하며 한 발언이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죽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자신의 생의 업적을 그토록 정당한 긍지를 가지고 회고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헛되이 살지 않았다.”

우정은 다 아름답지만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우정이 더욱 빛나고 의미있는 건 그들은 반동과 불의한 부르주아 역사를 끝장내고자 의기투합한 점이었다. 같은 시대 다른 공간에서 각자 과학적 공산주의 혁명을 꿈꾼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역사적이고 극적이었다. 죽을 때까지 서로 존경하며 비판과 토론을 통해 힘이 되어 주었던 그들의 우정에 대해 “인간의 우정에 대한 고대인들의 가장 감동적인 전설조차도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했다”고 레닌은 말했던가. 혼자 있어도 빛나는 천재성과 뛰어난 이론, 투쟁력을 지녔지만 함께 했을 때 더욱 광채가 난 ‘두 사람’이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노동자 민중은 ‘혁명’이라는 화두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게 아니라 19세기 두 혁명가가 피를 토하며 내놓은 변증법적ㆍ 사적 유물론에 기반한 혁명이론을 무기삼아 반드시 ‘착취자들을 착취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현시켜야 진정한 마르크스ㆍ엥겔스주의자라 할 수 있다. 바쁜 시간 쪼개 읽는 내내 감동으로 벅차 올랐다. 첫사랑 연인처럼 오래 간직될 <두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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