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잔혹동화, ‘기생충’

이영주 | 전교조 해고 노동자

영화 ‘기생충’을 본 사람들의 관람평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불편함’이다. 처음엔 그리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는 게 놀라왔고, 다음은 그리 다양하게 불편해 한다는 게 놀라왔다. 서 있는 곳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듯, 서 있는 곳에 따라 불편함이 다르다. 자본주의가 만드는 소외는 인간 세상 모두를 서로 불편하게 한다.

사람들은 불편했던 점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말하곤 한다. 설정이 극단적이라서, 표현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또는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과정에 비해 결말이 과도해서, 거짓말이 많이 나와서 등으로 불편했다고 한다. 또한 인터넷 댓글로 회자되었던 다음과 같은 불편함도 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영화 봤는데, 정말 불편했어요.’ ‘그래서 기생도 적당히 해야 합니다. 선을 지켜야 해요.’ 등등

그런데, 왜 불편할까? 다양한 영화와 소설을 통해 이미 우리는 상징적이고, 극단적이고,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들을 보아왔고,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보며 이리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찌보면 이 영화에서 오는 불편함은 ‘나 자신’을 향한 질문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서있는 걸까?

영화 ‘기생충’은 세 가족의 이야기이다. 전원백수 가족인 기택네는 사업이 망한 아버지 기택(송강호), 운동선수 출신 엄마 충숙(장혜진), 그리고 대학을 가지 못한 장남 기우(최우석)와 여동생 기정(박소담)이다. 또 한 가족은 글로벌 IT기업의 대표인 박사장(이선균)과 부인 연교(조여정), 딸 다혜(정지소)와 아들 다송(정현준)이다. 다른 가족은 박사장네 가정부 국문광(이정은)과 지하실에서 숨어살고 있는 남편 근세(박명훈)이다.

기우는 기정이 위조해준 서울대 학생 재학증명서로 명문대 친구가 소개해준 박사장(이선균)의 딸 다혜의 영어고액과외를 시작한다. 그리고 기정은 가짜 경력으로 박사장네 아들 다송이의 미술선생이 된다. 운전기사와 가정부 국문광도 해고되게 만든 후, 기택과 충숙이 운전기사와 가정부로 취직을 한다. 박사장네 집에 일가족 모두가 취직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 세 가족의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가 영화의 주요 흐름이다.

이미 영화 ‘기생충’에 대한 영화평은 인터넷 곳곳에서 차고 넘친다. 그 중에서 대부분은 이 영화에서 사용하는 상징에 대한 설명과 의미부여이다. 이 영화는 매우 많은 상징을 활용한다. 계단으로 나누어지는 지상과 지하, 반지하로 계급을 상징하고, 산수경석으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선’이라는 말로 계급의 경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우화나 동화로 느껴진다. ‘기생충’은 자본주의의 잔혹동화이다.

이 글에서는 이외의 몇 가지 핵심적인 상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의 불편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첫 번째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공생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목은 기생충이다. 기택네 가족의 이름에는 모두 기생충의 ‘기’나 ‘충’이 들어간다.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고 기생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이 자본을 등쳐먹고 기생한다고?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또한, 영화는 이 집에 기생하는 기생충과 숙주와의 싸움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을 위해 기생충간의 치고받는 폭력과 죽고 죽이려는 싸움으로 전개된다. 처지가 같은 기생충간의 배려와 협조를 예상했던 사람들은 여기에서도 불편해진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보다 더하지 않은가? 승진이나 해고를 앞에 두고 벌이는 우리의 살기 위한 몸부림은 이와 무엇이 다른가.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수 많은 노-노 갈등은 내 이익을 위해 다른 노동자를 공격하고 있다. 정규직들이 같은 사업장내의 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한 차별도 이와 무엇이 다른가.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와 무엇이 다른가.

공생(共生)은 두 종의 개체군이 밀접한 영향을 미치며 함께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생에는 두 개체군이 서로 이익을 얻는 상리 공생(相利共生), 한 개체군에는 이익이 있지만 다른 개체군에는 이익이 없는 편리 공생(片利共生), 그리고 한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에 붙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으면서 피해를 주는 기생(寄生)이 있다.

노동은 인정하지 않고, 임금만을 기생이라 부르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안에서의 공생이 기생이 아니라, 상리공생이 될 수는 없는 걸까? 그건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알을 깨고 나와야 탄생이 가능하다.

다음은 ‘냄새’다. 이 영화에서 냄새는 곧 계급을 상징한다. 나는 박사장도 아니지만, 기택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보던 영화는 갑자기 관객 개개인은 어느 계급인지를 결정하도록 강요한다. 박사장의 단 한마디,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이 표현은 이미 조지오웰이 했던 말이다.

서구사회 계급 구분의 진짜 비밀은 소름 끼치는 한마디, 즉 ‘하층계급은 냄새가 난다.’ 는 말로 요악할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냄새가 있고, 노동, 음식, 취미, 여가 등을 통해 인간에게서도 다양한 냄새가 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풍기는 냄새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긴 삶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위생학의 발달로, 19세기에 향기는 종교와 의학의 영역에서 감정과 관능의 영역으로 쫓겨났다. 대신 시각이 이성과 문명을 이끄는 감각으로 인정된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자신의 냄새를 가지고 있고, 냄새로 영역을 표시하기도 한다. 거기에 비해 현대의 인간은 끊임없이 씻고 닦으며 자신의 냄새를 없애는 독특한 동물이다. 심지어 향수로 자신만의 냄새를 완전히 덮어버리기도 한다.

냄새인가, 향기인가, 악취인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사회와 문화, 시대에 따라 다르다. 권력을 가진 냄새는 다른 냄새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권력을 재생산한다.

현대의 권력의 냄새는 냄새가 없는 무취성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무취성을 보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도 어느새 탈취제와 방향제를 반복하여 사용한다. 후각적 선호와 혐오는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주고 받으므로, 냄새와 관련된 가치를 환기하고 조작하는 것은 사회적 계층구조를 발생시키고 유지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냄새를 되찾을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먼저 우리의 냄새에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세 번째로 ‘거짓말’. 이 영화에서 기택의 가족은 사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먹고 살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가족 아무도 문제제기 하지 않는 이 거짓말들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충고를 할 수 있을까? 백수인 기택은 위조 재학증명서를 들고 돈벌러 나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아버지는 네가 자랑스럽다.’ 자신에게 계획을 묻는 자녀에게 이런 말도 한다.

문광 부부를 본 사람은 우리 식구밖에 없지?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지하벙커에 갇혀있지? 그럼 그들은 없는 거야. 아무 문제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엄마 충숙(장혜진)의 다음 대사는 박사장네 가족에 대한 칭찬이기보다, 기택 가족에 대한 변명으로 들린다. “돈이 다리미라구. 돈이 주름살을 쫘악~ 펴줘.”

마지막으로 ‘대만카스테라’. 기택(송강호)도 대만카스테라로 망했고, 전 가정부의 남편 근세도 대만카스테라로 망해 지하실까지 숨어들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지하실에서 근세의 대사 뒤에 바로 기택의 얼굴이 화면에 잡힌다. 동병상련. 한국에서 ‘대만카스테라’는 서민 사업실패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대만카스테라는 2015년에 프랜차이즈 사업이 시작되었고, 2016년에 브랜드만 19개로 늘어난다. 그러나 2017년에 3개 브랜드만 남았고, 이 상황에서 한 종편이 ‘식용유를 과도하게 쓰는 나쁜 먹거리’라고 방송을 하면서, 판매자들이 해명할 기회도 없이 폐업을 하게 되고 2018년에는 모든 브랜드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기택의 다음 대사는 황당하고 무책임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그의 경험에서 나오는 절절한 현실 진단이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그러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잘못될 일도 없고.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는 거야.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시발 다 상관없다 이 말이지..알겠어?

영화 기생충에서는 기택의 말처럼 계획대로 되는 일도, 계획대로 되는 사람도 없다. 기택네 가족 뿐 아니라, 국문광과 근세도 그러하며, 박사장네도 그러하다. 아들과의 캠핑은 비로 취소되고, 아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생일을 준비하던 박사장은, 아들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고 죽음을 맞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기우가 지하실에 숨어 있는 아버지 기택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다. 기우는 본인이 돈을 벌어 대저택을 구입하면, 그때 기택은 그냥 걸어 올라오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 때까지 건강하세요.’라는 말로 편지는 끝난다. 지금까지 기우의 계획대로 된 일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기우의 계획대로 미래가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산업혁명 시기를 이미지로 표현하며 계급간의 갈등을 담아 자본주의의 열차를 세우자고 주장했다면, 이제 ‘기생충’은 자본주의는 자본가이고 노동자이고 상관없이 그 안에 갇힌 인간 모두를 불행하게 하고 불안정한 미래로 이끌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지 집주인이 바뀐다고 변화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죽기 전에는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그럼에도 영화는 영화일 뿐. 세상을 바꿀 계획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은 솔직하게 나 자신에게 답하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서있는 가?

자본주의에 갇힌 노-노 갈등을 뛰어 넘어,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비정규직 철폐, 그리고 마침내 노동해방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은 우선 내 앞의 선을 넘자!

실패하더라도, 다시 실패하지 않을 계획을 세우자, 계획이 실패하지 않을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자,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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