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27호 그들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로 <현장과 광장> 제3호 특집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를 읽고

김근성 ㅣ 대학생

<현장과 광장> 제3호는 특집으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주제 아래 3개의 글을 실었다. 첫번째는 한국전쟁기 휴전협정을 다룬 <한국전쟁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내야 할 전쟁>, 두번째는 전태일 열사를 다룬 <전태일 동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세번째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5.18 40주년 광주 유감>이다.

이 글들은 역사 중에서도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사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 사건들을 다시 호명하고 있다. 왜 저자들은 지난 역사를 왜 현재에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인가?

휴전협정 : 끝나지 못한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한국현대사 최대의 비극이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싸웠으며 그 대가는 현재 70년이 넘게 이어지는 분단체제였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못한 채 그저 ‘휴전’이라는 결과를 냈으며, 여전히 남과 북은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동국의 <한국전쟁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은 한국전쟁기 휴전협정의 과정과 결과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쟁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되짚는다.

휴전회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넘은 1951년 6월부터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휴전회담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먼저 남북한 모두가 이 휴전회담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북한이 제한적이나마 공산권 국가들과 함께 참여한 정도였고, 남한의 경우에는 아예 배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휴전협정의 결과에도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참전으로 전혀 다른 전쟁이 되었다. 전쟁의 실제적 주체는 미국과 중국이었다. 남과 북은 더 이상 전쟁의 주체가 아니었다. 전쟁의 당사자였지만 휴전협정에서는 보조적 위치에 머물거나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는 북한보다 남한에 더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정전체계의 불안정성과 한국의 애매한 지위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이 냉전의 결과물이었듯이 휴전회담 또한 냉전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은 군사분계선, 군사력 증강 문제, 중립국 감시기구 문제, 해상분계선 문제 등에서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특히 포로 송환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오랜 시간을 끌었을 만큼 심하게 충돌하였다. 양측의 의견대립과 충돌은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협상을 1953년까지 2년 가까이 끌었다.

휴전협정이 지지부진했던 주요 책임은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물론 평행선을 달리며 충돌했던 공산군과 유엔군 양측 모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몇몇 안건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분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개과정을 들여다 보았을 때에는 미국의 책임을 논할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미국은 “휴전협상을 배타적으로 주도하고자” 했으며, 특히 ‘전투 중지’와 ‘포로 송환’의 문제에 있어서는 “전쟁 계속의 원칙”과 “자원송환원칙”을 주장함으로써 어깃장을 놨다. 아시다시피 전투는 계속 벌어졌으며, 미국은 “댐, 저수지, 발전소를 집중적으로 폭격”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공산군 측이 나름의 공세로 대응하니 전쟁은 더욱 더 질질 끌리고 만 것이다.

미국은 1951년 전선 교착화 이후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정치, 심리적 승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또 다른 전쟁, 즉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명분에서라도 승리하자는 새로운 전략이 창조된 것이다. (…) 예상대로 공산군 측의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고, 휴전협정은 장기간 중단되엇다. 휴회는 곧 전선의 혈전으로 연결되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1953년 마침내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이후 미국의 한국에 깊숙하게 개입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근거를 얻었다. 또한 미국은 자신의 동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협정을 체결시켰다. 남북관계는 “현상적으로는 휴전이며 본질적으로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휴전협정에서 미처 다 해결되지 못한 채 넘어갔던 문제점들은 아직도 남북관계에 있어서 여전히 유효한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상기시키며 필자는 왜 한반도에서만 유독 냉전적 대립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한국이 정전체제 이행의 온전한 담당자”가 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갈등하고 체결된 휴전협정, 그리고 거기에서조차도 제대로 봉합하지 못한 사안들. 이것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나서지 못했기에 치러야 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는 당사자로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만 한다. 필자는 글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휴전협정 당시의 업저버의 지위와 역할에 머물러 있는 한 정전체제의 변화를 모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사국의 주체적 노력과 해결의지가 수반되지 않는 평화체제는 존재할 수 없음을 뼈아픈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전태일 : 아직도 유효한 그의 외침

다음 글인 김승호의 <전태일 동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작성한 글이다. 이 글은 전태일 열사가 한국 사회와 역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왜 아직도 전태일 열사가 호명되어야 하는 지를 설득력 있게 말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끝내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하였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 종교인, 학생, 지식인 등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70년대부터 줄기차게 이어진 사회 운동의 주요한 동인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 알의 씨앗이 광야를 불사르다”라는 말이 무엇인 지를 보여준 셈이다.

그의 장렬한 분신항거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신이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하던 시대였다. 종교인들은 비인간적 노동현실에 눈감아 온 기존의 종교활동을 성찰하고 산업선교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청년학생들은 참혹한 노동현실에 무지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지 못한 자신들의 학생활동을 반성했고, (…) 기층 민중운동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불의하고 열악한 노동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쟁해야 함을 개달았으며,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비롯하여 민주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태일의 죽음을 기점으로 야만적인 박정희 군사파쇼에 파열구를 내는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태일의 이름은 자본가 계급을 비롯한 지배세력에게는 고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전태일과 그를 기점으로 타오른 민중의 투쟁을 강조하기 보다는 야당 정치인을 비롯한 몇몇 정치세력만을 ‘민주화’의 상징으로 강조했다. 물론 야당 정치인들의 노고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했다. 소위 ‘민주화’라 불리우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쟁취는 결국 한국 민중들의 가열한 투쟁해서 기인한 것이다. 그 중심에 전태일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전 헌법에서 위선적으로나마 명시해 놓았던 그 ‘민주주의’마저 무참하게 유린하는 폭압적인 파쇼체제였다. 노동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삶은 통제되었으며 변혁을 꿈꾸지 못한 채 숨을 죽이는 ‘겨울 공화국’이 집권 내내 이어졌다. 헌데 전태일은 그 파쇼체제의 일환이었던 야만적 노동착취에 죽음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하게 유신 이전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실현할 수 없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세운 파쇼체제를 변혁함으로써 쟁취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전태일은 그 싸움의 불을 당겼다. 그리고 전태일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런 반체제 변혁운동 세력으로서 민주화운동의 주된 동력이었다.

여기에다가 필자는 전태일의 문제의식이 아직도 유효하는 점을 추가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박정희 파쇼체제의 유산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으며, 무엇보다 빈부 양극화와 독점재벌 그리고 노동인권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뿐 아니라 토대에서도 비민주적인 질서가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의 수기를 읽어 본 적이 있는가? 그 수기에서 전태일은 비인간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6-70년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았다. 본문에서 인용하는 수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보라! 2020년대의 현 한국 사회는 전태일 열사의 이 말에서 자유로운가? 전태일 열사는 비인간적 현실에 맞서 장렬히 싸웠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5.18 : 5.18의 박제화를 넘어

마지막으로 최승원의 <5.18 40주년 광주 유감>이다. 이 글은 특이하게도 앞의 두 글과는 다르게 5.18 광주민중항쟁을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5.18 40주년을 맞이하여 자신의 소회를 솔직하게 풀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5.18을 직접 다루는 것에 비하면 더 깊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5.18이 점차 신화로 박제화 되고 있음”에 대한 우려이다. 5.18이 발생한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5.18은 아직도 ‘광주’에서만 머물고 있으며 “5.18의 전국화”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필자의 경우에는 5.18 강연과 답사 등을 담당해 오면서 몇몇 교사들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의 변화를 주창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번번히 묵살당한다.

또한 5.18을 80년 광주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80년대 내내 그리고 90년대까지 전국에서 이어지는 진상규명투쟁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5.18을 광주에 고립시키지 않고 전국으로, 그리고 현재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실무자들과 나누는 이러한 제안은 번번이 윗선으로 가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리고, 프로그램은 여전히 80년 5.18의 상기와 재현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일쑤였다. (…) 8~90년대 전국 곳곳에서 함께 일구었던 5.18의 역사가 광주에서는 80년 광주 5.18에 머물러 기념되고 박제화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지역정치에서 5.18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함을 지적한다. 5.18의 기억은 광주를 보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외피를 가진 것처럼 만들어주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정치의 한계를 포장해 주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시민단체들은 “감시, 제안의 역할을 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렇게 되니 5.18의 정신은 현재화 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본문에는 두 가지 사례가 나온다. 2014년 진기승 노동열사의 장례식에서 5월 단체 대표들이 “여기는 아무나 묻히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오랫동안 교원노조 활동과 성평등 활동을 해온 배이상헌 교사가 탄압 받을 당시 시민단체들의 외면이 바로 그것이다. 왜 이들의 처지에 함께 하지 못했을까. 앞에서 언급한 필자의 지적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광주에 사는 나는 5.18이 점차 신화로 박제화 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모두의 자양분인 5.18을 누군가는 자신들만의 역사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권은 언제나 4.19를, 5.18을, 87년 6월을 그 시간에 묶어 박제화하려 하듯, 광주의 또 다른 누군가들은 4.19를, 5.18을, 87년 6월을 그 시간에 묶어두고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려 한다. 그들에게 4월과 5월과 6월이 현재화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5.18의 기억은 비단 1980년 5월의 기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야만적 국가폭력에 결연히 저항하였던 5.18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유형의 압제에 저항하는 현재인들의 초상에 살아있다. “철탑 위 고공 농성장에, 청와대 앞 낡아 삭아가는 천막에, 산재 사망 외국인 노동자의 빈소에, 그리고 광주시교육청 앞에도” 이 시대의 ‘시민군’들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5.18의 현재화”는 바로 이들과 연대하고 함께 할 때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5.18은 박제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도 생동하고 있는 역사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넘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에도 여전히 유효한 역사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학생 부모님들을 위로하던 5.18 희생자 부모님들의 위로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을 때에야 5월은 “현재화”될 수 있고 비로소 “5.18의 전국화”도 가능한 것이다.

5.18을 밀어 올린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는 80년에 고립되고, 광주에 고립된 5.18을 해방시켜야 한다. 5.18이 압제에 대한 저항이며, 인간 권리에 대한 선언이며, 자치 공동체를 지향한 희망의 씨앗이라면 5.18은 여전히 현재에 살아 있다. 5.18은 긴 압제에 싸우며 87년으로 이어지며 그 정신을 드러냈다. (…) 5.18 엄마가 4.16 엄마를 안아주며 보낸 ‘당신의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글은 5.18이 여전히 현재에 살아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어쩌면 역사는 현재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철학적 지침이라는 생각이 들어습니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갈파한 이유가 박제화된 해석을 경계하고 사회 변화를 향한 치열한 변증법적 재해석과 실천 철학으로서 역사학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역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나와 공동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적 의무라는 통찰력을 크로체가 선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태일, 5.18……. 이들은 절대로 이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대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겪었던 세대만의 것도 아니다. 한국전쟁 전후를 지배하고 있던 냉전적 논리, 전태일로 하여금 목숨을 던지면서 투쟁하게 한 노동현실, 모든 폭력에 결연히 맞섰던 광주시민의 정신. 그것은 지금 수십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역사”였던 것이 이제는 “우리의 역사”가 된다. 그들의 질문은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며 우리는 거기에 답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그것을 통하여 미래를 설계한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들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수십년 전에는 ‘그들’이 걸었던 길을 이제는 ‘우리’가 걸어간다. 그렇게 역사는 전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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