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첸스베르거의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를 읽고
은영지 ㅣ 사드저지 평화활동가
어영부영 살다 보니 어느새 살아온 날들보다 죽을 날에 더 가까워진 듯하다. 그래서인지 ‘삶’보다는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삶을 마감하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떠날 수 있을까’라는 공상에 젖어보기도 한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에 나오는 세계 혁명가 25명의 치열하고도 빛나는 삶과 죽음이 내게 더 감동으로 전해오는 이유다. 그들에게 누가 될진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의 정신적 사유와 이념, 철학의 스승으로 간직하고 있는 터라 더 가슴 떨리게 하는 변론들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너무 거창하고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랬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가 엮어 부르주아 법치국가의 허구성을 고발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아픔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었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이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내 지하조직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1975년 4월 8일 도예종 등 관련자 8명의 사형을 확정한 지 18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사형집행을 했다. 반국가활동을 했다는 증거 하나 없이 잔인하게 고문하여 만들어낸 이 기획사건은 남한 정권의 야수성과 폭력성을 날것으로 드러냈다.
우리 사회에 법 칼을 들이대며 권력 놀음을 즐기는 곳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한 예를 들면, 1980년대 후반 다방 여종업원인 강모씨가 두 명의 경찰에게 파출소에서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다. 강씨는 대구여성회의 도움으로 그 가해 경찰을 고소했다가 도리어 무고죄로 구속됐다. 그 당시엔 성폭행범을 처벌하는 일이 드물었고 공권력에 의한 성범죄에 맞서 싸우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일 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래도 경찰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강씨 석방을 돕고자 우리 여성회 회원들은 목숨 걸고 싸웠다. 그녀가 억울하게 당한 처지임에도 죄수복을 입고 재판정에 끌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끈질긴 폭력성에 얼마나 화가 나던지. 재판과정도 한 판 코미디였다. 판사가 입장할 땐 황제라도 되는 양 일제히 기립하고 받들어 모시는 듯한 분위기도 어이가 없었고 재판 내내 높은 자리에 앉아서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피고나 방청석에 수시로 쏘아대는 위압적인 태도를 보면서-그 당시엔 그랬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고 어떤 이유로도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표현은 완전 말장난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불의한 독재 권력에 맞서거나 무장봉기, 혹은 혁명을 꾀하다가 재판을 받게 된 혁명가 25명의 변론이 실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를 읽어내는데 긴 시간의 아픔과 고뇌가 필요했다. 기존의 모든 법질서와 억압적인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혁명은 본래 그 성격상 재판에 회부 될 수 없으며 재판에 회부 될 수 있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실패”라는 저자의 논리에 공감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동적인 자본주의 권력과 착취계급은 법전에도 없는 조항을 급조해 그들의 혁명을 평가절하하여 잡범수준으로 만들거나 혁명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하여, 불온한 시대와 체제에 맞선 우리의 혁명가들은 온갖 수난을 당한다. 검열법 위반, 살인, 방화, 사보타주, 폭력 등이 그들에게 덧씌워진 죄목들이지만 혁명가들은 개의치 않았고 목숨 따위를 구걸하지 않았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보다는 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법정에서 당당히 말했고 힘주어 정의를 설파했다. 그라쿠스 바뵈프, 블랑키, 칼 맑스, 미하일 바쿠닌, 빌헬름 립크네히트, 크로포트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피델 카스트로 등 혁명가들의 변론은 변혁을 학습하는 교과서일 뿐만 아니라 문학 표현으로도 빛이 났다. 살이 찢겨 지거나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견뎌내고, 곧 죽을 수도 있는 야만의 법정에서 그들은 검사와 재판장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명쾌한 논리를 펴는가 하면 멋진 비유를 들어 투쟁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다. 반혁명의 죽은 법을 들이대며 재판정 윗자리에 군림하는 판사와 검사가 궁색해 보일 정도였다.
그중 최고의 변론자로 와 닿는 이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 피델 카스트로였다. 1952년 3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정치를 하자 ‘쿠바인민당’의 일원인 카스트로는 독재정권 타도 투쟁을 한다. 1953년 7월 26일 오리엔테주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지만 실패하여 체포된다. 그해 9월 산티아고에 있는 병원의 작은 방에서 철저한 감시 속에 비공개로 시작된 재판은 완전 코미디였다. 검사는 무시무시한 공소장을 꾸며 그에게 26년이라는 무거운 징역형을 내리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단 ‘2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회보호법의 148조만 앵무새처럼 낭독하는데 그친 그 검사라는 자는 마약밀매 같은 단순한 사건 범죄자들에겐 6개월을 구형하는데 열 배나 긴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말이다. 불공평한 대우 정도가 아니라 헌법 침탈이 아닐 수 없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행위에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 들었다.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은 헌법이 아닌 위헌에 기초한 권력이고 ‘주권을 가진 민중에게서 나온 헌법이 정당한 헌법’이라고 했다. 그 조항에서 언급한 ‘권력들’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통치하는 공화국이고 자신들은 148조 항이 옹호하는 체제를 파괴한, 이른바 독재 권력에 대항한 반란이므로 정당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무장행동은 사전준비나 군사 경험이 없는 비현실적인 모험에 불과해 20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봉기 후 만들어갈 ‘혁명정부의 청사진’을 법정에서 거침없이 나열한 청년 카스트로가 한 마지막 진술은 역사에 길이 남을 감동 어린 문장으로 생명력을 뿜어냈다.
“저처럼 온갖 협박과 광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람에게는 감옥이 혹독한 곳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결국 15년 형을 선고받고 피노스 섬에 감금되었으나 여론의 압력으로 1955년 5월에 석방된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아름다운 여정을 이어 나가게 된다.
최초의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평등의 실현을 호소하는 팸플릿을 출판하여 정치 운동을 했다. 법과 신분의 평등, 교육과 취직의 기회 균등, 토지 사유의 제한, 생산물과 배당ㆍ분배의 국가관리 등을 주장한 그는 비밀 무장봉기를 계획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다. 1797년 2월 프랑스 방돔에서 시작된 재판에서 역사적인 최후진술을 남긴다. 검찰 조서에는 “자신을 애국자로 칭하는 무리가 조국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고 있다”라고 나와 있으나 반동질서에 대한 바뵈프의 도전과 저항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검찰이 혁명을 걱정하는 소수의 혜택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동안, 우리는 민중을 짓누르는 죄악에 신음하고 괴로워하며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그리고 자본주의의 온갖 사기꾼들에게 재산을 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해 울었습니다. 검찰이 특권계급의 미미한 피해에 값싼 눈물을 흘리는 동안, 우리는 혁명을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간, 국경을 초월한 공화주의자들이 전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검찰 측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특권을 ‘질서’라 부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특권층에 노예처럼 빌붙는 것을 ‘질서’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혼란’이라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질서’란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소되기 전 그가 위험인물이라는 걸 낙인찍기 위해 검찰은 그가 발행한 신문과 글을 증거로 삼아 체포령을 내린 바 있다. 그의 아내를 구금 하고 아이들을 컴컴한 다락방에 버려 굶어 죽게 했고 아내마저 배심 재판소에 끌려 나오기도 했다. 프랑스혁명 뒤 왕정주의의 회귀와 비참한 민중의 상황을 비난하고 사유재산을 비판하고 민중해방을 부르짖었던 그는 결국 1797년 4월 27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저는 혁명이 일어난 이래로 언제나 민중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고문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혁명가들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지막 변론 글귀와 처형 소식이 서늘한 바람이 되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프랑스 7월 혁명, 2월 혁명, 파리코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면서 36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빵잽이’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인민의 벗 협회>의 일원들과 함께 반정부 친 공화정 선전 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로 열린 1832년의 ’15인 재판’에서 역사적인 최후진술을 하게 된다.
“3천만 프랑스 프롤레타리아에게 생존권이 있다”라고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블랑키는 “그것이 범죄라면 이 사건에 대해 편견이 없는 사람들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저는 재판관이 아니라 적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중략)이 고발은 우리에겐 더없이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명예로운 피고석에 앉아 프랑스를 파멸시키고 프랑스의 명예를 더럽힌 저 비열한 자들을 고발할 것입니다.”
그는 왕정복고라는 반동체제와 봉건 지주,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를 수탈하는 상황을 맹비난하면서 선전포고 같은 마지막 외침을 토해낸다.
“당신들은 7월 혁명때 사용된 무기들을 모두 압수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총알은 이미 총구를 떠났고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쏜 그 총알들은 지금 전 세계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총알은 현재도 끊임없이 목표물을 명중시키고 있으며 민중의 자유와 행복의 적이 단 한 놈도 고개를 쳐들 수 없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날아가 꽂힐 것입니다.”
부르주아의 반민중적인 법질서에 대항해 노골적인 어조로 변론하고 으름장을 놓는 피고에게 재판관이 수그러들 리는 없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 논리를 고수, 투사이고자 한 블랑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뜻이 맞는 동지와 ‘가족협회’와 ‘사계절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무장봉기를 시도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848년 2월 혁명 직전 풀려나긴 했으나 다시 폭동에 관여해 징역 10년을 덤으로 받았으며 제2제정때 다시 구금된다. 1865년 외국으로 도주했다가 사면된 후 1870년 무기 마련을 위해 병영을 습격했지만 거듭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후의 투쟁으로 두 번째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파리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여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금돼있는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고 석방 운동 덕택에 풀려났으나 1880년 말 한 혁명집회에서 연설 후 졸도, 1881년 1월 1일에 숨을 거두고 만다. 블랑키의 투쟁은 그 당시 억압당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진정성은 엿보였으나 노동자 계급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소수의 혁명가 중심으로 성급하게 봉기하여 평생 핍박을 받게 된다. 그의 투쟁의 명암을 교훈 삼아 노동계급의 관점을 놓치지 않아야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쏜 총알’이 적들 가슴에 제대로 꽂히리라 본다.
우리 모두의 영원한 이념적 스승인 칼 맑스는 국가반역자 신세였지만 한평생 중요한 정치재판에 선적은 없었다. 그가 딱 두 번 법정에 섰는데 두 번 모두 1849년 2월 <신라인신문>의 편집장일 때였다. 첫 번째는 관리와 경찰을 모욕한 혐의였고 두 번째는 신문기사와 서명이 문제가 되었으며 둘 다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때 법정에서 단 하루 동안 열린 재판의 최후진술은 재판의 본래 목적을 뛰어넘어 사회주의 이론을 정리한 역사적인 변론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법정에서 세 단계로 논증을 진행한 맑스는 헌법의 상태를 먼저 설명한 후 법을 집행하는 정부의 합법성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왕권은 혁명을 일으켜 기존의 법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왕권은 폐기한 법률을 가지고 맑스 자신을 법정에 세울 수는 있어도 심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논증’을 처벌할 법적 근거를 무시했다. 그런 다음 맑스는 억압적인 부르주아 권력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혁명’이나 ‘조세거부’ 중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조세거부운동을 하도록 선동 글을 썼다고 하면서 조세제도의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그 운동의 정당성을 재판정에서 조목조목 설명했다. 샤퍼나 슈나이더와 함께 기소된 이 폭동은 신문지상의 일에 불과해 단 하루 만에 무죄판결로 끝난다. 그러나 이 재판에서 명쾌한 이론과 탁월한 문장력으로 배심원들에게 혁명이란 무엇이고, 법치국가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그리고 역사 발전과정에서 시민사회가 갖는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지 피력했고 독일의 미래까지 예견하며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혁명의 승리는 반혁명이 끝난 다음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법정 예언이 실현됨으로써 역사의 발전법칙에서 그의 무게감이 입증된 건 우리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재판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역사적인 대전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붉은 공화국의 출현’을 기다리던 <신라인신문> 편집인들은 ‘진보적 자유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논조를 바꾸게 된다. 이때부터 ‘임금노동과 자본’에 관한 맑스의 연구들이 성과를 낳기 시작했고 맑스의 신문이 공산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검열 당국은 맑스를 무국적자로 판정, 프로이센에서 추방해 버린다. 그 후 파리를 거쳐 런던에 들어간 맑스는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못했다고 전한다.
러시아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혁명지도자인 트로츠키는 1905년 12월 반혁명 세력의 준동으로 소비에트 집행위원 25명이 ‘봉기 기도죄’로 기소되어 1906년 10월 4일 재판받을 때 감동적인 변론을 했다.
“사람들은 늘상 봉기와 바리케이드를 연관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바리케이드는 일방적인 봉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략) 바리케이드는 군대의 이동을 가로막는 지점인 동시에 병사들과 민중의 접점이었습니다. 이 앞에서 병사는 처음으로 솔직하고 용기 있는 말과 형제의 외침, 민중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민족적 열광 속에서 군인들과 민중이 그런 접촉을 가진 뒤에 엄격한 군율은 깨어져 버립니다. 오직 이것만이 민중봉기의 승리를 보장해 줍니다.“
“민중봉기의 승리는 민중이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했을 때가 아니라 공개적인 가두투쟁 가운데 목숨을 바칠 만반의 준비가 돼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차르의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 굴복하지 않고 혁명적 투쟁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1917년 혁명의 전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폴란드 출신의 독일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 평소 그를 존경해온 터라 피붙이를 만난 심정으로 그의 흔적을 탐색했다. 길지 않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간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해 독일 반전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맹활약을 했다. 로자는 1913년 9월 보켄하임 민중집회에서 ‘군국주의 정부와 법의 지시를 따르지 말라’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를 반박하는 그의 최후진술문은, 법조문 몇 개 달달 외운 거 가지고 ‘하느님(?)’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군림하려 드는 무능한 재판관과 검사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로자는 검사의 변론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검사)자신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우리의 이념인 사회민주주의의 복잡성과 학문적 정밀함, 역사적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제도교육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지 새삼스럽게 알게 됐다”라며 비웃음을 날려 보냈다. 로자 자신의 행동이 굳이 ‘선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숭고한 전망으로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도록 선동했다”라고 고백했다.
프랑크프루트 재판 이전부터 정보경찰과 재판에 익숙해져 있을 정도로 탄압을 받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국가모독죄’ ‘황제모독죄’ ‘선동죄’ 등 희한한 죄목으로 벌금형을 받거나 감금되거나 구류형을 살았는가 하면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붉은 로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는 1915년에 또다시 체포, 투옥되고 석방된 후 ‘반역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다시 기소되었다가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9주 동안 자유를 누리는 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15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연루되어 칼 립크네히트와 함께 반동적 군사정부의 손에 살해되고 만다. 독일 공산당을 창당하기도 했고 개량주의에 맞서 위대한 투쟁을 벌인 로자는 한계 또한 많았다고 전한다. 독일노동운동의 내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당의 관료주의에 저항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자발성에 기초한 대중노선을 주도하거나 군사정책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드러냈다.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도주하지 않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의 행위를 책임지며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제게 판결을 내리십시오.”
내면에서 묵직하고 뜨거운 무언가 올라오게 하는 그의 거침없는 마지막 한 마디였다. 시국사건이든 일반 형사사건이든 재판받을 때 탄원서를 쓰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 감형전략을 쓰는 우리 법정의 모습과 사뭇 달라 보였다.
역사의 법정에 선 이들 중에서 냇 터너라는 인물은 독특했고 그의 봉기 역시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냇 터너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노예반란을 이끈 흑인노예였다. 1831년 8월 이틀 동안 도끼와 총, 무딘 칼로 백인 60여 명을 살해한 반란을 저지른 그의 행위를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희대의 살인마로 비난받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남북전쟁 때까지 남부지방 백인들에게 노예제 지지론이 더욱 강경해지고 반동적인 흑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그는 그 일로 버지니아주 예루살렘 법정에 기소돼 교수형을 받고 11월 11일에 처형됐다. 냇 터너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저는 이 지역에 사는 벤 터너의 ‘재산’으로 태어나 지난 10월 2일에 서른한 살이 됐습니다. 어렸을 때 제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사건이 있었고 그것은 백인과 흑인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에게 비참한 종말을 가져다준 열정의 토대가 됐습니다.“
노예 신분인 그는 변론을 할 수도 없고 법정에서 최후진술도 불가능한 처지에서 감옥에 찾아온 백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여 이 책에 수록됐다. 저자에 따르면, 1789년에서 1917년까지 유럽혁명사의 연속성을 깨뜨린 터너의 행동은 어떤 전략적 계산이라기보다는 충동으로 시작됐고, 맑시즘이라는 이념적 기반을 품고 있다 해도 종교적 환상에 더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겪었고 목격해온 ‘계급적 울분’이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인 것만은 분명했다. 평생 1달러도 소유한 적 없고 단 한 번도 도망간 적이 없으며 술 한 방울도 입에 댄 적이 없는 ‘백인의 재물’에 불과한 터너가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면 어땠을까. 흑인노예해방을 이끄는 계급투쟁의 맨 앞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책의 인물 중 냇 터너의 고백이 가장 아프게 다가왔고 우리의 변혁 운동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고 그 도달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했다.
제3세계 좌파혁명운동에 관한 연설이나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의 주역 모하마드 하타, 이란의 코스로 루즈베흐, 반인종차별의 변호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브람 피셔 등의 변론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이란 농민, 노동자들의 궁핍 문제에 관심을 보였던 코스로 루즈베흐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에 얽매이진 않았지만 맑스주의, 사회주의 원리와 관통하고 있던 혁명가였다. 미 제국주의의 야비한 쿠데타 계획과 게릴라 작전에 맞서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그는 1958년 봄 테헤란에서 재판받고 곧 처형된다. 죽기 전 루즈베흐 자신은 죄인도 아니고 사형은 물론이고 어떤 처벌도 부당하다고 하면서도 하나뿐인 목숨을 연명하려고 무릎 꿇지 않았다.
“저는 정식으로 재판부에 저를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합니다. 왜냐면 저 역시 이전에 여러분이 판결했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명심할 것은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인정하는 최고의 재판소, 즉 이란 민중과 이 나라의 역사 앞에서 이미 오래전에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종신형이란 정말 끔찍했네. 목적도 희망도 흥미도 없이 질질 끌려다니는 삶이라니! 매일같이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다네. ‘오늘은 조금 더 둔해졌구나. 내일이면 훨씬 더 둔해지겠지.'”
한평생 저항의 삶을 살아온 러시아 출신의 무정부주의 망명자 미하일 바쿠닌의 피폐해진 모습에서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항상 제도보다 인간을 더 신뢰하고 맑스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밑으로부터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연합과 무정부를 주장하는 그의 행동에 동의하고 안 하고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된 인간 세상을 추구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그의 결박당한 삶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첫 장을 펼쳤다가 혁명가들이 겪어내는 억울함과 고통이 전해지는 듯해 몇 번이나 책을 집어 던지거나 구석으로 밀어놓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혁명가들의 재판정을 순례하고 그들의 최후진술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쯤 단단해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100년 전 ‘프롤레타리아의 총구를 떠난 총알’이 혁명의 에너지로 부활하여 우리 시대를 관통, 해방의 그 날이 올 때까지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에 나오는 혁명가들의 최후진술서는 유효할 것이다. 또한, 아름다운 투쟁 지침서로 영원하리라는 걸 아둔한 나조차도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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