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옥 ㅣ 부산 노동전선
필자는 작년에 노동전선 ‘정치학 강좌’에서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강의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 강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련 도서들에 대한 서평을 쓰기도 하였다.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에서는 페미니즘의 갈래와 역사,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사상으로서의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을 클라라 제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라는 위대한 여성혁명가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페미니즘의 여러 조류에서 주장하듯이 여성억압의 기원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 때문이 아니라 인류역사의 발전단계에서 나타난 사적소유와 계급의 발생이 모계씨족을 해체하고 부권제로 이행하였기에 남성에 의한 여성의 종속이 시작되었으며, 여성해방은 계급사회의 극복과 함께 완전히 실현될 수 있으며, 남성에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삶은 여성이 사회적 노동으로 편입되고, 가사노동이 사회화 되는 과정에 의해서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수 있으며,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서 ‘모든 계급의 여성이여 단결하라!’ 라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녀남노동자의 단결에 의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원고가 언급했던 시대는 기껏해야 1930년대에 끝나는 것이었고, 사실상 1917년 러시아혁명 후의 상황, 이제 백 년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보자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재도 어렵게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인 쿠바와 북을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글을 못 쓰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변혁당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을 ‘계급환원론’이라고 비판하는 글이 나오고, 이에 대해 노동자연대에서 ‘20세기 사회주의’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다고 하면서 변혁당을 비판하는 입장의 글을 발표한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겠다 싶어 부족하지만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여성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이름으로 자본주의화 된 구 소비에트 국가들에서 여성의 처지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통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2.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1)『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미국의 여성운동가 헬렌 버제스가 쓴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우리의 삶, 우리의 꿈』은 작가가 직접 3개월 동안 두 차례에 소비에트 연방을 여행하면서 각기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거의 100명에 달하는 소비에트 여성을 만나 그들의 일과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과 인터뷰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모스크바에서 1988년에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1989년에 번역되었다. 소련해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소련의 모습을, 70년 동안 걸어온 사회주의를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소비에트카』를 쓴 이리나 말렌코의 인터뷰는 그 이후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기에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이 책과 이리나 말렌코의 인터뷰는 잘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만 요약·인용해 보았다.
제1장 또 하나의 삶, 또 하나의 문화
레닌이 페드로그라드(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으나 1991년 이후 다시 페드로그라드로 불리게 됨)의 스몰리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천명한 직후, 처음으로 채택한 두 개의 법령은 러시아의 참전 중단과 농부에게의 토지분배였다. 그 다음 법령은 여성에게 법적인 동등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혁명은 러시아 제국내의 모든 여성들에게 철저한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여성들의 지위가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와 같이 극적으로 변화된 곳은 없었다.
키르기지야 공화국의 여성들은 유목생활의 고통과 이슬람의 영향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새로운 정부는 키르기지야 여성의 법적 지위에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곧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봉건적인 정신 상태는 아직도 모든 삶이 신에 의하여 정해져 있고 그러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회적 지위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 지워져 있고, 그 지위를 함부로 고치는 것은 신성한 법칙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변화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며, 두려워해야 하고 맞서 싸워야 할 어떤 것이었다. 농부들의 희생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슬람의 성직자와 세리들, 타락하고 부패한 러시아의 지배자들 그리고 농노제도가 붕괴되었는데도 그들의 땅에 농노를 부리고 있는 부유한 농부들-에게는 새로운 정부는 현실적인 경제적 위협이었다. 이들 중에 바스마치 혹은 산적떼라고 불리우는 집단들은 무지한 농부들의 공포에 편승하여 내란을 조장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키르기지야와 중앙아시아의 모든 여성들을 봉건제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도적들은 내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위원인 자밀라는 키르기지야의 여성들이 깊게 뿌리박힌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싸우고 죽었는지 설명했다. 자밀라의 이모는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하여 여성의 새로운 권리 즉, 재산소유권, 교육받을 권리, 포악한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권리, 직업을 가질 권리 등을 알려주다가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28년 마을 소비에트 지도자로 선출된 여성 살리바는 여성으로서 전통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자밀라의 이모는 새정부의 특수학교를 거쳐 당의 일꾼으로서 여성을 위한 특별부서에서 일을 계속하였다. 자밀라는 내년이 혁명 70년이 되는 시점이며, 키르기지야를 비롯한 소비에트 어디에도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키르기지야와 인접한 우즈베크도 19세기에 이르러 제정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모슬렘 여성에게 인권은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노예였다. 성적 노리개감이었고, 일하는 동물이었으며, 많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는 남자들에 의해 매매되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기본 법규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짜르 행정부는 모슬렘 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관용적이었다. 1927년에 베일을 벗어던지는 행위로 상징되는 후점운동이라는 여성운동이 시작되었다. 후점운동은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도 모든 개인에게 부여되어 있는 권리를 지닌 완전한 인간임을 믿게 하고자 시도한 운동이었다. 1927년 3월 8일 레지스탄 광장에 모인 수 천 명의 시위대는 불기둥에 베일을 벗어던졌다. 그 후로 그들은 학교에 가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공장에 나가 일을 하였다.
예상한 바대로 여성해방운동은 남편들이나, 아버지, 형제들에 의한 반발과 폭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아주 극단적이었고, 당시 영국 원조를 받던 바스마치가 이러한 반응에 편승하였다. 그 도적떼에게 붙잡힌 여성들은 죽거나 몸이 망가진 채로 돌아왔다. 뉴로브칸이란 여배우는 베일을 벗고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오빠에게 살해당했다.
전형적인 농민들은 “암탉이 새가 아니듯 여자도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러시아에서 문맹은 1930년대에 없어졌다. 여성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에서 출발해서 문자해독학교와 전문행정학교에 갔다. 다른 여성들을 가르치고 지방정부와 노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은 세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여성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하며, 또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이 권리의 사용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 물질적 조건은 이러한 권리의 사용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마련되어져야 한다. 셋째, 그 조건들은 남성들의 정신 상태를 포함한 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 마련되어져야 한다.
현대의 여성들은 그들의 권리를 알고 있고,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완전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을 발전시키고자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이제 자유롭고 동등한 교육에의 접근기회와 똑 같은 노동에 똑 같은 임금, 광범위한 탁아시설, 기숙학교와 여름캠프, 자유로운 소아과 병원, 확장된 산전 산후휴가, 그리고 이미 확대된 가사서비스체계 등을 누리고 있다.
제2장 당당한 목소리
혁명 초에 당은 오늘날 여성평의회의 전신인 제노텔을 설치해서 여성을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벌였다. 제노텔 조직자들은 우선적으로 여성들의 문맹퇴치운동을 조직하고 새로운 정부 하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알려주는 일에 전념했다. 어떤 남성이 여성에게 불법적인 행동을 고집하면 제노텔은 그를 체포할 권한이 있었다. 예컨대 중앙아시아에서 제노텔은 남성에게 팔려가지 않도록 여성들을 보호했고 그런 짓을 하려는 부모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일할 수 있고 시장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협동농장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해주고 그것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했다. 1929년에 제노텔은 해체되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되었고 일, 교육, 사회적 활동 등에 완벽하게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여성평의회는 제노텔처럼 당의 일부가 아니지만 그들은 당과 그리고 변화를 추구하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일한다. 어떤 여성이 문제를 갖고 평의회에 오면 그녀의 주장은 노동조합, 행정부, 당 위원회, 혹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기관에 전달된다. 또 다른 형태의 조직인 여성위원회는 지방에서 국가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정부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여성들의 작업조건 및 생활조건을 위한 위원회, 그리고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한 위원회라고 불린다.
여성평의회와 여성위원회 외에 소비에트 여성위원회가 있다. 그것은 모든 공화국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2차 대전 전에 파시즘에 대항하여 여성들을 국제적으로 결속하려는 시도 속에서 출발했다. 전후에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평화와 군비철폐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국제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젊은 여성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1986년에 소련 내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에 입학하고 있는 66개국 1,000명 이상의 여성에게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국내적으로 여성들을 위해 일한다. 그곳에는 전국에서 들어오는 편지들을 읽고 답하는 특별부서가 있다. 일 년에 약 20만 통의 편지가 온다고 한다. 일단 문제가 분석되고 조사단이 해결책을 제시하면 위원회는 고위 입법부서에 그 제안의 심의를 의뢰한다. 일례로 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편지에 대해 국가의 양육보조를 건의했다. 그러한 기금은 만들어졌고 남성들이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자녀 양육비가 제공되었다. 여성들이 그들의 권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주요한 수단은 사회단체인 여성평의회, 정부기관인 여성위원회, 그리고 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이고, 그 속에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도 여성위원회가 있다.
마야와 같은 방송작가이면서 당원인 여성은 여러 여성조직과 클럽을 통해 활동한다. 이 외에도 여성들은 정부의 공식기관과 공산당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1984년에 선출된 최고회의에는 여성이 1/3(32.8%)이다. 최고회의는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연방의회로서 똑같은 인구를 가진 선거구에서 선출되며, 다른 하나는 국민의회로서 소수민족의 이익을 위해 각각의 공화국, 자치구나 자치지역에서 온 특정 대표들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각 의회는 750명씩으로 전체 1,500명의 선출 대표들로 이루어진다. 전체적으로 4만 6,582개의 소비에트들이 소련 내의 모든 수준들에 있다. 1982년 현재 지역 소비에트에는 여러 공화국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의 50%, 혹은 114만 6,000명이 여성이었다.
여성참여의 측면에서 보면 당내의 여성의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역대 당대회 대표 중에서 여성의 비율을 보면 1952년에 19%, 1973년에 23%, 1981년에 26.1%였다. 공산청년동맹의 경우 회원의 50%가 여성이다. 공산청년동맹에 비해 당에서 여성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지역 내의 평균 자녀수가 다섯이고,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은 시간을 자녀양육에 보내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의 최고 지도층에 여성의 수가 적다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70년이나 계속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낡은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여성들은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3장 부엌살림
벨소리가 나타샤를 침대에서 흔들어 깨운다. 나타샤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걸치면서 그날 할 일을 생각한다. 남편인 빅토르는 벌써 일어나서 한 시간 전부터 책을 읽고 있다. 빅토르는 아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차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직장에 있는 간이식당에 산 둥근 빵을 데우려고 오븐에 집어넣는다. 막 옷을 입고 일할 준비를 끝낸 나타샤는 12살 난 아들 유리를 깨우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부엌으로 가기 전 나타샤는 걸레를 꺼내서 거실 가구를 닦는다. 파란 영 파이오니어 유니폼을 입은 유리가 방에서 공책을 찾느라고 엉망진창 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 그녀는 막 일을 끝낸다. 약간 귀찮아 하면서 그녀는 유리가 찾는 것을 도와준다. 공책을 찾자 둘은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빅토르에게 간다. 나타샤와 빅토르는 지하철 정거장까지 함께 걸어가서 시내의 직장으로 가는 전철을 탄다. 나타샤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그리고 진공청소기로 거실과 침실, 유리의 방을 청소한다. 세 식구가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는 빅토르가 한다. 빅토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나타샤는 테이블을 닦고, 유리에게 가서 다음날 학교 갈 준비를 도와 준다. 나타샤와 빅토르는 함께 tv를 보다가 칫솔질을 하고 침대에서 독서를 하다가 잠이 든다. 이것이 소비에트 여성의 하루 생활이다.
소련 헌법 35조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입법부에서는 결혼관계에 있어서 배우자들의 완전한 평등을 설정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권리를 찾고 행사했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들과는 헤어졌으며,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그들은 재산을 갖게 되었고, 낙태를 했다. 그들은 교육받게 되었고, 지역 정부와 산업의 요직으로 진출했다.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공식적, 법적인 평등은 그들의 생활실태와 부합하지만, 가사부문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이 대부분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각종의 사회학적 자료에 의하면 비교적 젊은 남성들은 가사일과 양육에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했다.
소련에서 여성을 육아에서 해방시켜주는 기본 제도는 탁아소이다. 전형적인 탁아소는 120명의 아이들과 35명의 직원들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의사, 간호원, 치과의사 및 기타 전문가들이 포함된다. 모스크바의 탁아소 내에 있는 실내수영장 수영선생과 같은 전문교사들은 제외된 것이다.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일 년에 두 번 신체검사를 받으며, 신경과 전문의 등 많은 전문의들로부터 진찰을 받는다. 어떤 이상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지방 종합병원으로 보내진다. 대규모 탁아소에는 의사가 한 명 있지만, 소규모 탁아소에는 보통 2명의 풀타임 간호원과 일주일에 두 번씩 오는 의사가 한 명 있다. 지진아는 원인이 시력장애인지 발육부진인지 아니면 어떤 복잡한 문제 때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에게로 보내진다. 만약 문제점이 교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아이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특수 탁아소로 보내진다. 그곳에는 특수아동들을 대상으로 일하도록 훈련된 직원들이 있고, 거기서 특수 아동들은 좀더 개별적인 배려를 받는다. 소년 소녀들은 같은 프로그램으로 같은 반에서 공부한다. 소년 소녀들은 함께 차시중 놀이를 하며 함께 식탁을 꾸몄다.
탁아소의 직원은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풍자만화 하나를 소개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남편은 집에서 파자마를 입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노크소리에 문을 여니 아내가 서 있다. 그녀의 팔에는 식료품 한 꾸러미가 안겨져 있고, 양손에 각각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발로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와 곧장 부엌으로 간다. 아이들은 울고 있고, 그녀는 음식을 만들고 고기를 갈고 있으나 너무 지쳐서 마루위에 쓰러진다. 다음 화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숙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바쁘니 엄마에게 가서 부탁해봐”라고 말한다. 만화는 남편이 부엌으로 가서 아내를 마루에서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그의 육체적 힘을 과시하면서, 그녀를 부엌 테이블에 앉히고는 “저녁식사를 언제하지?”하고 묻는 것으로 끝난다.
제4장 일하는 여성들
에이너는 18세 때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봉제일을 하면서 공장의 공산청년동맹 활동에 참가했다. 공산청년동맹 회원의 자격은 28세까지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녀는 28세를 넘기자 공산청년동맹을 떠나 노동조합에 관여하게 되었다.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은 약 250명으로 구성된 교대조들로 나누어져 있다. 에이너는 이 중 한 교대조의 노동조합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그녀는 그 지위를 계속 지켜오고 있다. 노동조합은 주로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노동자의 대부분(93%)은 소련 내 30개 조합 중 하나에 속해있다. 여성들은 이들 조합의 30개 중앙위원회 중에 9개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전체 노동조합원의 50%가 여성이고,전체 중앙위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4.5%이지만, 전체 위원회에서 지도자격인 여성의 비율은 66.4%에 이른다. 에이너가 이끄는 노동조합의 위원회는 다섯 가지 다른 분야들(주택, 생활조건, 노동안전, 학교와의 연락, 스포츠)을 책임지고 있는 13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조합은 작업장내의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은 혹은 그에 못지않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초과달성을 해야 할 필요성은 서구 여성들이 익히 아는 바이다. 이러한 문제들 중 약간은 소련에도 존재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70년이 채 안 지나서, 소비에트 여성들의 지위와 여성 자신들은 급격히 변화했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과 국가와 사회의 업무를 다루고 있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양 분야에서 연구자들의 40%가 여성이고, 전문직의 60%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들은 산업, 통신, 수송과 건설 등에서 고위직의 20%를 점하며, 그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여성들은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을 하고, 의사의 68%, 인민판사의 37%, 예술인의 30%를 차지한다. 소련에서 남녀 임금격차는 차별의 증거가 아니라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에 낮은 임금을 주는 사회제도 속에서 여성이 덜 힘든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제5장 함께 가꾸는 건강생활
종합진료소와 병원에서의 의료 치료는 누구에게나 무료이며, 외국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약값은 대부분 몇 센트로서 아주 적다. 아동과 성인들의 종합진료소 외에 여성진료센터라 불리는 여성진료소가 있는데, 이곳은 산부인과 및 부인과 전문이다. 낙태는 혁명 직후에 합법화 되었다가 1930년대 여성들의 요구에 의해 불법화 되었다. 출산통제책이 필요해 짐에 따라 1955년부터 다시 합법화 되었다. 임신중절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최고 5루블(6.25달러)을 내야하며, 수입이 적은 여성들은 무료이다. 낙태는 여성이 원하면 남편이나 가족과의 상의 없이도 여성진료소를 이용할 수 있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 여성들은 “산원”이라 불리우는 임산부 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으로 간다. 임신 후기 단계에 이르면, 여성들은 각기 특별히 마련된 산모용 구급차를 전화로 부를 수 있는 번호를 받는다. 산부인과 의사 한 명과 조산원 한 명으로 구성된 구급차량이 여성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원이나 본인이 원하는 산원으로 운송한다. 그녀는 진료소나 산원에서 특정한 의사를 요청할 수 있지만, 출산 담당 의사는 산전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와 다르다. 소련에서는 의료실 직원들이 감염과 청결을 염려해서 방문자들을 임산부 병동에 들여보내지 않는다. 남편이 옆에 있기를 원하는 소련 여성들도 있지만 대부분 출산은 남편 없이 완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소련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상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강간이나 폭행을 걱정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돌아다닌다. 소련에서 배우자학대는 본인이 신고하든 제3자가 신고하든 다 가능하고 형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배우자학대는 일어나기는 하지만 서구에서처럼 널리 만연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환청구를 위한 많은 방법들이 있다. 첫째, 여성은 인민재판소로 갈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여성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이루어진다. 고발된 남자가 당에 속해있다면, 여성은 그렇다고 말해야 하며, 타박상 같은 증거가 있으면, 그는 여성이 자치대에게 호소하지 않더라도 당 조직에 의해 처벌될 것이다. 대개 그 남성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에서 사회적 비난을 불러 일으키고 그를 굴욕적으로 만들며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이 된다. 남성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비난을 낳을 것이며 그의 생활은 힘들다는 차원을 넘어 보다 훨씬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비난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았다.
혁명 직후 당은 제노텔을 통해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완전하고 평등한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지시켰다. 제노텔이 담당한 일의 한 부분은 아내 구타를 방지시키는 것이었고, 남성들은 그 때문에 감옥소로 갔다. 남성들이 아내를 구타할 권리를 주장하다가 즉시 구속된 많은 사례들이 있다. 새 정부의 법령들과 제노텔은 여성들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여성학대는 용납되지 못한다는 분위기를 창출시켰다. 여성학대를 방지하는 중요한 방책들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다. 소련이 아닌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여성학대를 참고 사는 여성들은 구타를 경제적 안정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인다. 소련의 여성들은 좋지 못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성의 93%가 일을 하며, 그들은 고용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기혼 소비에트 여성의 2/3가 자기 남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번다. 기초 필수품의 가격이 저렴하고 집세는 수입의 3%에 불과하고 교육과 의료가 무상이다.
소련에서는 여성 동성애는 불법이 아닌데 남성들 간의 성관계는 불법이다. 외설물은 소련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에트 여성에게는 외설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21년 외설금지법이 대중적 발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이후 사회는 외설물의 유입을 통제하고 그것을 국내에서 발생하지 않게 함으로써 외설을 국가로부터 몰아내고자 성실하게 노력하였다. 소련 내로 들어오는 모든 비디오를 감시한다. 외설물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 존재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하였을 때 소비에트 여성들은 놀라며 왜 그러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가를 물었다. 소비에트 매체에는 성폭력 물과 폭력이 전혀 없다. 광고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외설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여행의 전 기간동안 내가 여성이라는 왜소한 생각을 느낀 적이 없다. 이곳 소년들은 소녀들을 성적 노리개감으로 생각하도록 자라지 않는다.
제6장 삶을 창조하며, 제 7장 희망찬 미래를 위하여 에서는 여성으로서 화가, 조각가, 작가, 영화감독, 성악가, 발레리나, 비행기 조종사 등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혹함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여성들이 한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 소련의 예술가동맹과 젊은 예술가 동맹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재능있고 의욕있는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는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며 착취당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가 지망생들과 대조를 이룬다.
2)『소련기행』, 『소련인상』
『소련기행』은 월북한 작가 이태준이 1946년 8월 10일에서 10월 12일까지 약 2개월 동안 <평양 조소문화협회>의 소련방문단의 일행으로 소련을 방문한 후 쓴 책이다. 초판은 1947년 5월 1일에 발행되었다. 한국에서는 2001년 이태준문학전집 18권 중에서 4권으로 <소련기행> 만이 아니라 북의 토지개혁과정을 그린 소설 <농토>, 해방 후 남북의 정치상황을 그린 소설 <먼지>가 같이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전체적으로 『소련기행』은 소련의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찬사와 북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그리고 특이하게는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1930년대 소련을 방문하고 나서 쓴 『소련방문기』(러시아 혁명과 소련을 지지했던 앙드레 지드는 소련을 방문하고 나서 실망을 나타냈다. 조악한 공산품과 상점에 늘어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을 보고, 국민들의 가장 소박한 욕망도 채워주지 못하는 국가와 무관심과 기강해이에 빠진 노동자들의 자세 비판, 기차의 일등석이 남아있음에 불평등한 사회라고 비판하였다)에 대한 비판이 군데군데 들어있다. 그리고 소련의 여성들이 밝고 명랑하며 모든 직업의 분야에서 많이 일하고 있음에 놀라워하고 있다.
교육, 의료, 주택, 문화, 노동조합,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 레닌묘지, 혁명박물관, 고리끼 박물관, 붉은 광장, 지하철 등에 대한 묘사와 감상을 적었다. 도시로서는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레닌그라드에 갔는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스탈린그라드와 레닌그라드의 참혹한 피해상황과 복구를 위한 소련 인민들의 노력을 묘사하고 감상을 적었다. 그리고 소연방으로 아르메니아 공화국, 그루지아 공화국을 둘러보고 소련에서 민족문제가 가장 신중히 논의되었던 때가 1923년에 있었던 12차 당대회였음을 지적한다. 당대회 기록에 의하면 스탈린 동지는 민족문제에 대한 보고·연설에서 민족문제에 대한 우리 정책의 국제적 의의를 역설하였고, 피압박 민족들은 민족문제의 해결과 민족억압절멸의 표본을 소비에트 동맹에서 발견하게 할 것이라 하였다.
‘붉은 광장’에서 이태준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이만큼 번화한 거리엔 더 다채한 진열창들과 더 포장 고운 상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양찬란한 도시엔 슬픈 이면이 있다. 이 도시엔 저녁먹이를 위해 인륜을 판다거나 병든 부모가 창백한 여공딸의 품삯이나 기다리고 누웠는 그런 불행한 식구나 암담한 가정은 없다. 단순한 영양적 시각으로 상품진열창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는 어느 사회가 그 원칙에 있어, 그 제도에 있어 더 정의요, 더 진보요, 인류의 문화와 평화를 위해 더 위대한 가능성을 가졌는가 그 것일 것이다.”
『소련인상』은 월북한 역사학자 백남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상으로서 1949년 3월 김일성과 함께 <조소문화협정>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한 후 쓴 책이다. 이태준의 방문기는 작가의 개인적 서술이었다면, 이것은 북의 관료가 공식 일정 후 작성한 공식보고서와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에 현대한국학연구소에 의해 출판되었고, 해제는 연세대 사학과 방기중 교수가 썼다.
책의 마지막에 백남운은 소련인상을 총괄적으로 정리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계급적인 대립이 근절된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착취도 압박도 없고 실업도 기아도 공황도 있을 수 없는 인민의 나라이다. 그 소련 인민들은 노동의 질과 양에 의한 보수로서 자유롭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나는 가는 곳마다 목도하였다. 또한 강도 팟쇼 도당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고 생사부문의 생산발전이 전전의 공업총생산 수준을 41% 초과하였고, 전후 4년 동안 대기업소가 5,200개소나 신설되었다. 공업수준은 전전의 3배로 제고되었다. 미제는 1년 동안 22% 생산이 감퇴한 것에 비교된다. 소련정부는 배급제도를 폐지하고 일용생필품의 가격을 3차에 걸쳐 인하했다. 이 저물가 정책으로 소련인민은 이익을 보았고, 노동자는 24%, 농민은 30%의 수입이 증가되었다. 미국노동자의 수입은 인플레와 공황, 실업 등으로 17% 감소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사회주의체제의 제도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둘째,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공산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스탈린적 계획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높은 단계을 지향하여 발전되고 있다. 이것은 유일당인 볼쉐비키당의 혁명적 원칙과 유일관리제의 조직적 집행의 세계사적 승리이므로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러시아 황제를 타도하고 위대한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끈 소련인민은 내전과 반파쇼전쟁에서 영웅적으로 헌신성과 조국애를 발휘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등질적으로 발전된 혁명적 근로인민들이다. 훈련되고 교양된 사회주의적 인간형이다. 우리 인민에 대한 사상적, 정치적 교양을 높여야 한다. 넷째, 소비에트 인민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풍요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예술이 결부되었고, 생활의 문명이 예술화하는 점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생활인이며, 가장 고도의 문명생활인이다. 인민예술의 발전은 조각, 음악, 무용, 건축물에 잘 표현되어 있다. 소련은 인류의 새역사를 창조한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나라인 동시에 진정한 과학의 나라이며 인민예술의 나라이다.
백남운은 방문기간에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개최된 부녀절대회(3·8세계여성의날 대회)를 참관하게 되었는데,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의 결정문을 인용했다. 소련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문화의 적극적인 활동가이다. 남자들과 함께 그들은 우리 인민의 정신적 자원을 증가시키는데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권한을 광범히 이용하면서 여성은 소비에트사회의 거대한 문화력으로 성장하였다. 고등교육을 마친 모든 전문가의 44%는 여성이다. 과학 발명 문학 예술에서 있어서의 훌륭한 공적에 대해 237명의 여성이 스탈린 상을 받았다. 인민 교육 및 보건 부문에 있어서 여성은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소비에트 제도가 전취한 소비에트 여성들의 동등권과 그의 고상한 사상 및 정치적 향상은 노동자들의 행복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전세계 여성들을 고취 격려하는 모범으로 되어있다.
3) 『소비에트카』의 저자 이리나 말렌코
이리나 말렌코는 22세까지 소련에서 살았다. 모스크바의 역사기록 대학을 졸업하고 개인적 사정으로 네델란드로 이민을 가서 8년을 살며, 레이덴 대학에서 슬라브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직장을 찾아 아일랜드로 가게 되었고, 현재 아일랜드에 살면서 번역과 통역을 하면서 정치활동가로 살고 있다. 2013년 당시 45세였던 이리나 말렌코는 스리랑카의 사회주의 청년조직의 스리랑카어 기관지인 SYU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내용은 전국노동자정치협회에서 번역해서 2014년에 노동자정치신문에 실었다. 2009년도에 이리나 말렌코는 『소비에트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스스로 공산주의며 소비에트 여성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리나 말렌코는 소련에 대한 진실과 오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의 언급들은 위에서도 충분히 나온 내용들이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행복했던 어린 시절, 안전하고 보장된 실업도 스트레스도 범죄마저 거의 없었던 사회에 대한 그리움, 무료 스포츠클럽, 무료 도서관과 저렴한 도서, 연극, 콘서트, 박물관, 전시회. 아주 문화적이고 교양 있었던 소비에트 사회를 회상한다. 여성들은 안전했고, 성차별은 용납되지 않았고, 성폭행이나 강간 같으 범죄는 거의 드물었고, 포르노 따위의 외설물이 없었다. 이런 것들이 『소비에트카』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젊은 새대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미 알지 못하게 되었고, 믿기 어려워한다.
여성에 대한 공격과 함께 여성 모욕은 1988~1989년 경, 고르바초프 정권하의 소련의 마지막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규제되었던 포르노물들이, 영화에서 ‘성애의’ 장면들과 ‘성애의’ 잡지들로 허용되었다. 우리의 소녀들이 매춘부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문구로 집중공세를 당했는데, 그 공세는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당 지도자들과 반역자 무리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사랑은 “죽을지언정 사랑 없는 키스는 하지마라!”라는 유명한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작가인 체르니세프스키에 의해서 표현되었다. 오늘날의 러시아 젊은이들 다수는 열악한 교육과 자본주의 미디어에 세뇌당하여 사실상 소련에서의 삶과 소비에트 가치에 대해 실제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조금씩 오늘날의 비극적 현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소비에트 여성들은 자존감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소년과 소녀들 사이에서 갈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여전히 러시아에서 축하행사가 개최되고 있는 국제여성의 날은, 서방에서의 어머니의 날과 달랐다. 국제여성의 날은 우리 사회에 대한 여성의 기여와 여성의 평등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남성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평등이 아니었다. 우리는 평등했지만 특별했는데, 이것이 우리의 남성들 다수가 여성들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다. 소련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서방사회는 이리나말렌코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극단적인 성차별을 가했다. 이리나의 꿈은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볼 때까지 오래 사는 것이고, 활발하게 사회주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리나 말렌코는 2013년 8월에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레디앙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 스리랑카에서의 인터뷰와 동일하지만 스탈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소개한다. 질문자가 스탈린 격하사업이후 지지도가 하락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최근 여론조사에서 과반이상으로 지지도가 높게 나왔는데,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이리나 말렌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 작업이 되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스탈린 시대에 소련 사회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스탈린과 소련 사회가 성취한 것을 연관지어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1920~30년대 문맹률, 실업률이 많이 낮아졌고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바뀌었고 집단농장도 만들어졌고 나치에 맞서 싸워 승리한 성과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스탈린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3.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사회주의 신중국 건립 이후, 새로운 ‘혼인법’ 반포를 시점으로 해서 중국여성들은 구시대에서 받아왔던 온갖 억압과 불평등에서 벗어나 사랑과 결혼의 자유를 비롯해서 여성들의 자주적인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1954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농업생산합작사 발전에 관한 결의’를 통해 남녀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규정했다. 이로서 경제활동에 있어 여성의 차별이 금지되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촉진하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는 데 중요한 근간을 마련했다. 이러한 노력은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관념을 전환하면서 사회 전반에 양성평등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현재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후 정부의 여성차별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약화되고, 시장원리의 추구는 남성과 달리 생리주기와 임신, 출산을 겪는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경쟁구도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이제 중국에서 여성은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당하고 있다. 중국의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여성의 ‘성상품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4. 독일민주공화국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2017년에 펴낸 ⌜동독 사회보장제도:역사와 변화⌟에 의하면 동독의 여성정책은 다음과 같다.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통치에 놓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통치 지역에 1949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건국되고, 같은 해 10월 소련 통치 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탄생하였다. 동독이 정식 국가로 건국하기 이전에 소련군사정부와 독일공산당은 1945년 5월 은행을 국유화하고, 9월에 대지주와 나치 정권 지도자 소유 토지를 국유화하고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땅을 농민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0월에는 중공업 기업을 국유화했다.
건국 이후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제7조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 여성에게 불평등한 모든 법률과 규정은 철폐한다”라고 명시하였다. 제18조는 공화국이 노동권, 노동법, 노동보호와 관련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함을 밝히는 조항이다. 남녀노소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보장하고, 노동환경은 노동자 본인 및 가족의 건강과 문화적 욕구, 존엄, 그리고 남녀 간, 성인과 미성년자 간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한 권리와 임금을 보장해야 하며, 특히 여성은 노동관계에서 특별히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했다. 헌법 32조에서 여성은 임신·출산기에 국가의 특별한 보호와 돌봄을 받을 권리를 갖고, 공화국은 모성보호법률 제정과 모자보호 시설을 만들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명시했다. 1950년 ⌜여성의 권리와 모자보호에 관한 법률⌟을 통해 임신·출산 육아휴직 시기에 임금의 100% 수준에 해당하는 급여, 출산 후 산후조리비용, 수유비용, 아동수당을 여성에게 제공하고 사회적 돌봄시설 확대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였다. 헌법 33조는 “비혼 출산으로 인하여 부모와 아동이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며, 비혼 출산 아동과 부모를 차별하는 법률과 규정은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하여 법률혼에 기초한 전통적인 가족과 모성보호를 강조하면서도 남녀평등을 위해 노력했다.
여성의 노동권 보호와 모성보호 확대를 위해 사회적 돌봄 인프라를 확대하여 영유아(1-3세)돌봄시설은 1955년에 1,586개, 수용률은 1,000명당 91명에서 통일직전 1989년에는 7,707개, 수용률은 802명으로 거의 완벽한 수준에 이르렀다. 여성의 신체적 자주권을 상징하는 낙태권은 1972년에야 합법화 되었다. 완전한 일자리 보장과 성평등한 노동사회를 위해 노력하여 여성 고용률(취업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1949년에 40.9%, 1970년 50.1%에 달하여 완전한 고용평등을 이루었다.
헌법 26조는 주거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였고, 특히 나치 정권 피해자, 중증장애인, 전쟁 피해자 및 난민은 주거권 보장에서 우선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동독은 주거 공급을 대규모로 확대하였으며 주거의 공공성을 강화하여 국가 및 공공소유 주거의 규모가 대폭 늘어났다.
통일부에서 『독일통일총서 8 여성분야 통합관련 정책문서』를 2014년에 발행했다. 2장에 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의 여성실태를 비교한 자료가 있는데, 동독의 경우 위에서 정리한 바와 동일하고, 서독의 경우를 살펴보자.
1949년 5월의 서독 기본법 제3조 2항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누구도 성별 때문에 (중략) 우대받지 않는다”고 규정하여 동독의 그 내용과 다르지 않는 듯 보이나, 사실 1949년 6월 23일에 제정된 서독 기본법 제3조 2항 “남녀는 평등하다”가 규정되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제헌의회에 이 조문이 2번이나 통과되지 못하자 도시와 시골의 여성들이 데모를 한 이후에야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조문의 실현은 오랫동안 반쪽짜리에 불과했는데, 이 조문을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기본법 제 117조에서 “기본법 제3조 2항에 위배되는 법률들은 기본법의 규정에 맞춰 개정될 때까지는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1953년 3월 31일을 넘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1958년에야 여러 타협을 거쳐 남녀평등법이 제정되었다. 1952년 모성보호법의 제정으로 여성이 가사·육아를 병행하면서 사회적 노동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아동보육시설이 거의 없어 일하러 가기위해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는 것에 ‘까마귀엄마’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89년 통일 직전 동독에서 15세에서 65세까지의 여성경제활동인구의 취업률은 78.1%였으며, 여기에 교육을 받거나 직업훈련을 하는 여성까지 포함한다면 91.3%의 높은 취업률을 보여준다. 반면에 서독의 경우 1989년 15세부터 65세까지의 여성경제활동인구의 취업률은 55.5%였는데, 1961년에 48.9%에 비해 큰 진전은 없었다.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재 주권방송으로 통합된 NK투데이는 2018년에 ⌜북한은 왜?⌟라는 시리즈를 통해 북의 여성정책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다. 요약해서 인용한다.
조선의 여성들은 해방 이틀만인 1945년 8월 17일 서울에서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한다. “우리 조선의 전국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됨에 의하여서만 그의 일부분인 우리 여성 문제가 비로소 해결될 것이며, 동시에 우리 여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국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1945년 12월 ‘건국부녀동맹’은 전국 부녀단체 대표자회의에서 ‘조선부녀총동맹’으로 개편하고 총 150개에 80만 명을 회원을 갖게 되지만 38선의 장벽으로 사실상 이남만의 여성단체로 되었고 1947년 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38선 이북지역에서 1945년 11월 18알 ‘북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이 독자적으로 출범했다. 창립당시 30만 여명의 여성들이 참여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1946년이 되면 60만 여명으로 배가된다. 여성의 권익 향상과 여성의 조직사업을 담당했던 여맹은 식민지 잔재와 봉건적 잔재의 청산, 인민정권의 건설 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 여성 대부분은 농촌에서 농업노동과 가사노동, 강제혼, 매매혼, 축첩 등과 같은 봉건적인 혼인관계와 가족관계로 고통을 받았다. 해방 후 남녀관계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이데올로기가 여성들이 건국사업에 나서는데 많은 제약을 낳고 있었다. 식민지 반봉건적인 제도와 관습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1946년 2월 출범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3월 토지개혁, 6월 노동법령 제정에서 남녀평등을 규정했다.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1946.3.5.)’에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권리를 갖고 토지분배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 ‘노동법령(1946.6)’에서 노동생활의 남녀불평등적 요소를 없애고 모성보호 내용을 담았다. 1946년 7월 30일에는 남녀평등의 모든 영역을 총괄하는 법으로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이 제정되었다. 1조 국가, 경제, 문화, 사회, 정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은 남자들과 평등권을 가진다. 2조 지방주권기관 또는 최고주권기관 선거에서 여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3조 여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노동의 권리와 동일한 임금과 사회적보험 및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4조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이 자유결혼의 권리를 가진다. 결혼한 본인들의 동의 없는 비자유적인 강제적인 결혼을 금지한다. 5조 결혼생활에서 부부관계를 더 계속할 수 없는 조건이 생길 때에는 여성들도 남자들과 동등한 자유이혼의 권리를 가진다. 모성으로서 아동양육비를 이전 남편에게 요구할 소송권을 인정하며 이혼과 아동양육비에 관한 소송은 인민재판소에서 처리하도록 규정한다. 6조 결혼연령은 여성 만 17세, 남성 만 18세 이상으로 한다. 7조 중세기적 봉건관계의 유습인 일부다처제와 여자들을 처나 첩으로 매매하는 여성 인권유린의 폐해를 앞으로 금지한다. 공창, 사창 및 기생제도(기생권법, 기생학교)를 금지한다. 이 항을 위반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처벌한다. 8조 여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재산 및 토지 상속권을 가지며 이혼할 때에는 재산과 토지를 나누어 가질 권리를 가진다. 9조 본 법령의 발표와 동시에 조선 여성의 <<권리>>에 관한 일본제국주의의 법령과 규칙은 무효로 한다. 본 법령은 공표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어 1946년 9월 14일 법령 시행세칙(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 78호)에서 이혼소송절차, 양육비부담방법 등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시행세칙에서 성매매에 가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였다. 한국에서는 성매매자를 처벌하지 않는 1961년 ‘윤락방지법’에 이어 2004년에 겨우 제정된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성매매처벌법, 성매매특별법이라고 하며, 이 법이 제정되자 엉뚱하게 성노동자운동이란 것이 생겨났다)에서 “성매매를 한 사람에게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라고 한 것과 비교된다. 당시에 아주 파격적인 법이 큰 혼란 없이 시행된 것은 여맹 등의 여성들의 사회운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여맹은 법령이 제정되자 해설사업과 문맹퇴치 사업을 진행하고 이것은 여맹의 조직확대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급증으로 이어졌다.
연합뉴스 민족뉴스취재본부 북한부 심규석 기자가 『통일경제 2001 7·8』에 쓴 ⌜북한의 여성정책 ; ‘여성은 혁명의 한 쪽 수레바퀴’⌟에는 1990년대 말까지 북의 여성정책의 흐름과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87년에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남과 비교하여 북이 41년이나 앞섰다는 것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법이 평등을 선언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위의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의 풍자만화에도 나오지만 수 천 년 이어온 성차별적 문화의 잔재는 남성들 사이에는 가사일을 분담할 경우 ‘바보’라고 통하기도 하였다. 결국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뒤따라야 여성의 실질적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다. 1976년 4월 ‘어린이 보육교양법’, 1978년 ‘사회주의 노동법’, 1993년 ‘어린이 보육교양법 세칙’을 통해 모성보호법의 토대를 정비했다. 1996년 경제활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49%에 이른다고 밝혔다. 북의 언론매체에 따르면 권위 있는 교수, 박사를 비롯한 수십만 명의 여성 과학자, 기술자, 전문가들이 여러 부문에서 한 몫을 당당히 하고 있다. 지난 98년 선출된 총 687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으로 치면 국회의원)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20%에 달하는 것은 세계 평균 11.7%, 당시 남한 여성 국회의원 비율 3%에 비교하면 아주 높은 것이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 진출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탁아소와 유치원, 편의봉사시설이 확대되었다.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 사무처장으로 북을 십여 년 방문했던 김이경처장이 쓴
『좌충우돌 아줌마의 북맹탈출 평양이야기』에는 유아교육과 보육정책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여성이 완전한 동등한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육아와 가사 노동의 독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다. 북의 보육 정책은 출산 전부터 시작된다. 임신 8개월이 되면 산전 휴가 60일, 아기 탄생과 함께 식량 일일 50g이 아버지 직장에서 배급표로 나온다. 출산 후 3개월까지는 산후 휴가 90일이 보장된다. 이것만 보아도 한국의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보장된 산전 산후 합하여 90일보다 훨씬 훌륭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 전쟁이 시작되는 한국과 달리, 북은 생후 4개월부터 36개월까지 탁아소가 젖먹이반(4개월부터 8개월까지), 젖떼기반(18개월까지), 교양반(19개월에서 36개월까지)으로 전국에 28,000개에 이르는 탁아소가 1,281,000명의 아동을 보살핀다. 37개월부터 48개월까지 유치원 준비반을 거쳐 만 5세까지 유치원을 의무 교육으로 하고 있으며, 전국에 13,638개의 유치원에서 69,774명의 아동을 교육한다. 이것은 2012년 자료인데, 한국의 2016년 자료에 의하면 국공립 유치원과 사립 유치원을 모두 합하여 8,987개로 북의 절반을 조금 넘는데, 북의 인구가 남쪽의 반 정도라는 점을 감안해서 보아야 한다. 아래 표들는 91쪽에 있는 것이다. 자료 출처 : ⌜북한의 영유아 교육보육제도-역사적 관점⌟(양옥승, 2012)
<표1>출산전부터 시작되는 북의 보육정책
출산전부터 시작되는 북의 보육정책 | ||
임신 8개월 | 산전휴가 60일 | |
탄생 | 식량 일일 50g, 아버지 직장에서 배급표 | |
3개월까지 | 산후후 휴가 90일 | |
탁아소 | 젖먹이반 | 4개월부터 생후 8개월까지 |
젖떼기반 | 18개월까지 | |
교양반 | 19개월에서 36개월 | |
유치원 | 유치원준비반 | 37개월부터 48개월까지 |
유치원 | 만5세까지 | 의무교육 |
북한의 탁아소와 유치원 시설 수 및 아동 수 | ||||
탁아소 | 유치원 | 계 | ||
시설 수 | 아동 수 | 시설 수 | 아동 수 | 1,972,774 |
28,000 | 1,281,000 | 13,638 | 691,774 |
<표2>북한의 탁아소와 유치원 시설 수와 아동 수
<표3> 2016년 한국의 유치원 현황
2016년 교육통계연보 학교 기본통계 설립별 유치원 수 | |||||||
구분 | 국립유치원 | 공립유치원 | 사립유치원 | ||||
단설 | 병설 | 법인 | 개인 | 군부대 | 기타 | ||
유치원 수 | 3 | 305 | 4,388 | 506 | 3,739 | 14 | 32 |
소계 | 3 | 4,603 | 4,291 | ||||
합계 | 8,987 |
김련희의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를 보아도 북에서는 국가에서 육아를 다 보장해 주니까 전업주부가 된다는 것은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 의하면 북이 1970년대 여성의 가사노동의 무거운 짐을 덜기위해서 중점을 두어 생산 증대를 추진한 것은 세탁기,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었다. 이 같은 제품들은 1960년대까지 중공업 우선정책에 밀려 공급이 극히 제한된 품목들이었다. 이 밖에도 여성의 가사노동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공식품과 주방용품의 생산 확대가 적극 추진되었다고 한다.
6. 쿠바공화국
쿠바혁명사 등의 자료를 보면 여성정책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배진희가 2019년에 쓴 『거꾸로 가는 쿠바는 행복하다』에서 쿠바의 여성들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매년 세계경제포럼에서 국가별 남녀 성 격차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하는데, 2015년 한국은 145개국 가운데 115위를 차지하고, 쿠바는 29위를 차지했다. 성 격차 지수는 경제활동 참여와 기회, 교육 성취, 건강과 생존, 정치적 권한 등 네 영역을 평가해서 산출한다. 쿠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54.2%로 OECD 평균 62.3%부다 낮다. 이에 대해 쿠바여성연맹의 담당자는 통계청 자료는 공식적 집계 결과일 뿐 현실은 조금 다르다고 한다. 자영업자나 민간 사업장에 일하는 여성들은 통계에서 누락되었다며 실제로는 6~70%에 이른다. 그럼에도 남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83%에 비하면 낮은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연금제도 개혁 전까지 여성의 정년이 55세였고, 2011년 연금제도의 개혁으로 59세로 조정되었다. 55세를 기점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낮아진다. 또 하나는 육아는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강하다, 하지만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과 남성은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성별에 따른 임금차이는 없다.
세계경제포럼은 성별 문자 해독률, 성별 초·중·고등교육 취학률 등을 통해 교육성취도를 평가한다. 쿠바의 문자해독률은 100%에 가까운데 여성은 99.9%로 남성 99.86보다 조금 더 높다. 초등교육 취학률은 남성 99.3%, 여성 99.2%이며, 중등교육 취학률은 남성 81.0%. 여성 85.8%이다. 대학 및 대학원 이상 교육과정 진학자 성비를 보면 여성이 59.6%를 차지하고, 대학원 이상 과정 진학자는 54.4%가 여성이다. 또한 기술 전문직의 66.4%가 여성이며, 교수, 기술자, 연구자의 50% 이상이 여성이다.
쿠바에서 낙태는 합법이고,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여성친화적인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2012년에서 2013년의 선거결과를 보면 시의원 중 여성비율은 33.5%, 도의회와 국회는 여성의원 비율이 50% 내외였다. 이러한 통계 수치들이 의미하는 것은 쿠바가 무척 성평등한 국가라는 것이고, 이것은 사회주의의 기본 제도들, 무상교육, 무상의료, 공공주택, 성평등한 법, 육아와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는 여러 조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7.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들
이상의 소련, 중국, 동독, 북, 쿠바의 여성의 상황을 살펴보면 사회주의 건설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법적으로 평등한 권리의 공포, 토지개혁에서 여성의 동등한 재산권, 노동권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법 해설과 문맹퇴치, 무상교육, 무상의료, 공공주택, 여성을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여전히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만약 20세기 사회주의가 붕괴되지 않았다면 지속적인 인민에 대한 교양으로 점차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급사회의 모든 잔재가 남아 있는 한, 남성의 성역할에 대한 낡은 의식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베벨이나 엥겔스가 말했듯이 완전한 여성해방은 모든 계급이 폐지될 때 가능한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이 완전히 폐지된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지구의 절반 이상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고 그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하고 이에 맞서 인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사용해야 할 노동과 생산물을 전쟁무기 만드는데 사용해야 했다. 발달한 생산력을 인민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국내에서도 여전히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수정주의의 길을 걸었던 소련의 지도부들에 의해서 소련 붕괴의 조짐들은 점점 더 자라고 있었고, 이러한 역사적 후퇴는 여성해방의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계급해방과 분리되는 여성해방은 무엇일까? 위와 같은 객관적 조건(법적으로 평등한 권리의 공포, 토지개혁에서 여성의 동등한 재산권, 노동권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법 해설과 문맹퇴치, 무상교육, 무상의료, 공공주택, 여성을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들)들이 없이 완전한 여성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계급해방이 된다고 해서 여성해방이 자동으로 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부장제가 지속된다”고 주장하는 변혁당에서 최근에 펴낸 『코로나 19 위기와 사회주의 처방전』에는 여성 항목이 없다. 만약 여성 항목이 있었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 더 무엇을 넣을 수 있었을까?
클라라 제트킨은 “여성해방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도 이런 정신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하여 혁명의 절반의 힘으로 만들었고, 혁명 이후 위와 같은 객관적 조치들을 취하면서 남성에게 남아있는 낡은 의식과 투쟁했던 것이다.
러시아혁명 이후 당의 한 부서로 만들어졌던 제노텔(여성국)이 가장 열성적으로 그 일을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탈린의 반동적 조치가 제노텔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 말이 되어 여성문맹이 대부분 해결되고 법령 해설 등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서 소비에트 여성위원회 등으로 조직 개편한 것이란 것을 헬렌 버제스의 책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사회주의 승리에서 여성의 역할은 북에서 ‘여성은 혁명의 한 쪽 수레바퀴’라고 표현되었다.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되고 영화로 만들어졌던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의 고통은 어떻게 해결 가능한가?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서 취한 조치들이 있었다면 ‘김지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남편의 행동으로 보아 가부장제가 문제가 된 것은 더더욱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소련에서 스탈린의 반동적 조치로서 낙태죄가 부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1930년대 낙태죄 부활은 스탈린이 아니라 소비에트 여성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유는 낙태가 건강에 해롭고, 자유로운 낙태를 악용하는 남성들에 의한 강요된 낙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것은 법률에서 누가 처벌대상이었는지에 의해서 확인된다. 낙태를 받은 여성은 견책, 낙태를 시행한 의사는 징역 1~2년, 여성에게 낙태를 받도록 강요한 자는 징역 2년, 밀실낙태나 옷걸이 낙태를 행한 자는 징역 최소 3년이었다. 이후 소련은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낙태에 관한 의술이 좀 더 발전하고 강요된 낙태의 문제보다 여성의 자주권이 더 우선시되자 1955년에 낙태죄를 다시 폐지하게 된다. 소련에서의 낙태죄의 부활은 가부장제의 사례가 아니라 당이 여성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강요된 낙태를 처벌함으로써 소비에트 남성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상은 ⌜쏘련에서의 여성의 권리와 낙태에 관하여⌟, 2017.11.8.전국노동자정치협회.에서 요약·인용함)
자본주의 국가들도 법적으로는 얼마든지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의 문구상의 평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위의 사회주의적 조치들이 동시에 행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육아와 가사노동의 사회화한 명목으로 진행되는 사회서비스일자리는 저임금·비정규노동으로 여성을 착취하고 여러 민간자본들의 난립으로 무수한 문제를 만들고 있는 보육, 간병의 분야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련이 해체되고 중국, 베트남 등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며 자본주의로 변화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현재 여성의 현실을 살펴보면 더욱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진보노동당은 ⌜소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 라는 글을 통해서 소련 및 동유럽 소비에트 국가들의 붕괴이후 20년 동안 인민들의 삶이 얼마나 붕괴되었는지를 생활수준과 건강의 쇠퇴, 여성에 대한 공격과 여성의 권리의 후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1995년까지, 구 소비에트 연합 전체에 걸친 기대수명의 저하 때문에 연간 50만에서 100만 정도의 추가 사망자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에서 시장 개혁은 남성 심장 질환 증가를 유발했고, 자살률이 50% 상승하기 까지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사망률은 출생률의 두 배에 달한다. 이러한 건강의 쇠퇴의 근본원인은 사회주의적인 의료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결핵, 콜레라, 디프테리아, 이질과 같이 이미 오래전에 근절되었던 질병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부활하였다.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여타 공공서비스가 사라진 것이다. 난방연료 보조 폐지, 공공기업 사유화, 2007년 푸틴에 의해 통과된, 벌목을 통한 사적 이익 추구와 부패한 지방 관료들의 손에 러시아의 광대한 산림을 넘겨주는 산림법. 이와 같은 것은 사람들이 깨끗한 물이나 전기, 난방을 저렴하게 이용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삼림의 훼손에 의한 산불의 발생은 두 배로 증가했다.
구소련 지역에서 건강에 대한 최후의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적 관계가 노동자계급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다. 자본주의에서 항상 존재하는 스트레스와 소외감으로 심장병 발생이 증가했고, 약물 중독과 알콜 중독은 동유럽 전체에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시장 전환 2년 만에 약물 남용이 80% 증가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용하였다. 소비에트 지역의 금주프로그램을 없애고 값싼 술을 대거 시장에 도입했다. 보드카의 가격은 노동자의 임금보다 더 빨리 하락했다. 최근 러시아상공회의소는 러시아에서 매년 알콜중독으로 50만 명이 사망한다고 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담배 판매가 부진해진 1990년대에 소련붕괴는 담배산업의 생명줄처럼 보였다. 미국 자본은 즉시 새롭게 사유화한 동구권의 담배 공장을 모두 사들였고, 무차별적으로 광고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동유럽은 담배와 말로보맨의 사진으로 넘쳐났다. 이 결과 구소비에트 국가들에서 흡연자의 수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혁명의 승리는 전 세계 여성들의 거대한 승리이며 마찬가지로 소련의 붕괴는 중대한 패배를 의미한다. 여성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해서, 1996년 러시아에서 실업의 80%가 여성이었다. 그들은 가정 적은 임금을 받는 일이나 낮은 기술의 일에 고용되었고, 어느 회사에서나 가장 먼저 해고되고 가장 늦게 고용되었다. 소련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유급 임신·출산 휴가, 남성과 동등한 승진과 임금, 특별훈련기회, 작업장에서 특별한 안전장치와 같은 모든 권리는 박탈되었고, 직장에서 무수한 성희롱을 당하게 되었다. 한 폴란드 여성은 이제 취업하기 위해서는 “젊고, 아이가 없고, 가슴이 커야한다”고 통탄했다. 동독 사람들의 88%는 자본주의 5년 동안 생활에 비해 과거 동독의 여성 조건이 훨씬 나았다고 한다. 동독 출신 한 여성은 “여성이 빼앗긴 것은 단지 보육시설과 수입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삶, 인간관계, 일터로 집중되어 있는 공동체적 연대감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함께하고, 자본주의의 한 부분인 성차별은 동유럽 여성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회주의에서 강력하게 금지되었던 외설물과 성매매는 독일통일과 소비에트 붕괴이후 성산업이 퍼지고, 포르노 가게는 온 나라에 생겨났다. 성차별의 부활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끔찍하게 증가했다.
7.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소련, 중국, 동독, 북, 쿠바를 통해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성 문제가 사회 전체 문제의 한 부분이므로 사회주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여성문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70년 이상 반공교육을 받고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회에서 자라고 살고 있는 우리는 사회주의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다. 최근에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기관지 『정세와 노동』 159호부터 문영찬 동지의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이 연재되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헬렌 버제스 지음, 여성한국사회연구회 옮김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1989 앎과함
이태준 『소련기행· 농토· 먼지』 2001 깊은샘
백남운 『소련인상』 2005 선인
김이경 『좌충우돌 아줌마의 북맹탈출 평양이야기』 2019 내일을 여는 책
김련희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2017 도서출판 615
심규석 ⌜북한의 여성정책: ‘여성은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 2001 통일경제
NK투데이 ⌜북한은 왜?⌟ 2018
문영찬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2020 『정세와노동』 159호~163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배진희 『거꾸로 가는 쿠바는 행복하다』 2019 시대의 창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돌베개
이리나 말렌코 ⌜소련사회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2013 레디앙 주최 간담회 및 스리랑카 사회주의 청년조직과의 인터뷰,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미국진보노동당, 번역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후(2)⌟, 2012.11.30. 노동자정치신문 90호
통일부, 독일통일 총서 8 『여성분야 통합 관련 정책문서』 2014
정재훈·박수지 『동독 사회보장제도 : 역사와 변화』 2017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윤성혜 ⌜‘여성해방’주도했던 중국공산당, 지금은?⌟ 프레시안 2020.7.13
박현숙 ⌜중국여성들은 새로운 ‘평등과 자유’를 원한다⌟ 2001 오마이뉴스
천연옥 ⌜노동운동과 페미니즘⌟ 『현장과 광장 2호』 2020 노동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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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g Jifan은 도울 수 없었지만 말했습니다. “전하께서는 당근을 사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