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파업

천연옥 | 노동전선 회원

1. 글을 시작하며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유지되는 사회이다. 자본가는 시장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결합하여 생산을 한다. 생산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상품의 가치는 애초에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의 가치보다 크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새로운 상품에 이전되기만 하지만,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면서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한다. 이렇게 증대된 가치가 잉여가치이고, 이것이 이윤으로 전화되는 것이 자본의 일반적 공식이다. 그런데 파업은 이러한 생산과정을 중단시킴으로서 자본이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킨다. 그러므로 파업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장 무서운 공격수단이다. 그래서 자본은, 그리고 총자본으로서 국가는 노동자 계급의 파업을 방해하고 제한하고 봉쇄하기 위해서 법률과 이데올로기로 대응한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의 역사이기도 하고, 자본가들의 파업파괴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래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파업론, 파업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살펴보고 경제투쟁으로서의 파업이 정치적 총파업으로 폭발할 때 가지는 파급력의 역사를 되새기고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노동자 계급이 주체적으로 조직되고 투쟁하여야 함을 확인한다.

2. 레닌 <<파업에 대하여>>

레닌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의 파업도 점차 빈번해지는데, 계급 의식화된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파업의 의의 및 방법, 파업에 참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임무 등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고 지적하며, 노동운동에서의 파업의 의의, 러시아의 파업단속법, 계급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가져야 하는 파업에 대한 태도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글은 첫 번째 주제인 파업의 의의에 관한 것뿐이다.

레닌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필연적으로 자본가에 대항해 투쟁할 수밖에 없음을 서술한다. 당시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가 짜르 전제하에 얼마나 잔인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는지를, 17~19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과 5~6세의 아동들도 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을 통해 폭로한다. 노동자들은 끔찍한 한계상황에서 죽음도 불사하고 투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 기계를 부수고 공장을 파괴했다. 그러나 점차 그들은 파업으로 집단행동을 시작하게 된다.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서 파업은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고 질문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대공장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 할수록, 소자본가가 대자본가에 의해 밀려나면 날수록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필요성은 커진다. 왜냐하면 실업이 증가하고, 자본가들이 될 수 있는 대로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려고 하면서(그러려면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임금도 가능한 한 싸게 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지면, 산업변동과 공황 역시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산업이 호황인 기간에 자본가들은 큰 이윤을 획득하지만 그것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황이 발생할 때에 자본가들은 어떻게든 손실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파업은 이 사회체제에 대한 노동자 계급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표명하고, 늘어만 가는 돈지갑의 주인에게 굴종하기를 거부할 때, 비로소 노동자들은 노예이기를 멈추고 인간이 된다. 파업은 언제나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파업이 그들의 지배력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파업은 노동자에게 고용주의 힘은 어디에 있으며 노동자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준다. 자기 고용주나 자기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고용주, 자본가 계급 전체와 노동자 계급 전체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한다. 모든 파업은 항상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은인”이 양의 탈을 쓴 늑대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이 모든 기만을 일격에 무너뜨린다. 파업은 자본가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정부와 법률에 대해서도 노동자들의 눈을 뜨게 한다. “모든 파업 뒤에는 혁명의 괴물이 숨어있다”고 어느 독일 내무장관이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파업은 노동자에게 단결을 가르친다. 파업은 노동자들이 힘을 합칠 때만이 비로소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공장주 계급과 전제적인 경찰 정부에 대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대해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파업을 “투쟁학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가 관리의 압제와 자본의 압제로부터 전인민과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적에 대한 투쟁을 일으키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다. 그러나 “투쟁학교”는 투쟁 그 자체는 아니다. 노동자들 사이에 파업이 넓게 파급되면, 일부 노동자들은(일부 사회주의들도 포함한) 노동자 계급을 파업과 파업기금, 파업 단체에만 한정시킬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오직 파업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은 진정한 처우 개선이나 자신들의 해방까지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작은 파업조차 얼마나 커다란 힘인가를 보고, 일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총파업을 조직하기만 하면, 자본가들과 정부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틀렸다. 파업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을 위한 투쟁 수단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지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만약 노동자들이 다른 투쟁수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로 인하여 그들은 노동자 계급의 성장과 성공을 지연시키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하나하나의 파업에서 근로 대중의 해방을 지향하는 전체 노동자 계급의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거니와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 계급 의식화된 모든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 즉 그러한 해방을 목표로 노력하는 사람이 될 때, 그들이 노동자 속에서 사회주의를 전파하고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적에 대한 투쟁 수단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로 전국적으로 단결할 때, 그들이 정부의 압제로부터 전인민을 해방하고 자본의 압제로부터 전체 근로 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당을 만들 때, 그때 비로소 노동자 계급은 모든 노동자를 결속시키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씌어진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만국의 노동자들의 저 위대한 운동에 완전히 동참하는 것이다.

3.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은 최초의 대규모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 조선, 남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참혹하게 싸우고 있을 때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시작하였고, 이 제국주의 전쟁을 짜리즘 자본주의의 전복을 노리는 국내전쟁으로 전화시켰다. 러일전쟁의 결과 1905년 8월 23일 일본은 루즈벨트[1]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미국의 26대 대통령(1901~1909). 대기업과 노동조합 쟁의에 직면하여 대통령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 아시아와 유럽 문제에 … Continue reading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강화회의에서 러시아로부터 여순항, 사할린 남부, 조선의 세력범위 및 남만주 전부를 빼앗았다.

거의 굶주리고, 심하게 착취당하고, 야만적인 전제지배를 받고 있던 러시아의 대중들은 처음부터 짜르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으며, 혁명의 징후는 1904년 바쿠의 석유노동자의 대파업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규모 파업들이 1905년 내내 발발하였는데, 1905년 파업에 참가한 총인원은 280만 명으로 노동자 계급 전체의 한 배 반을 넘어섰다고 한다. 농민대중도 행동에 들어가 2천 개의 영지가 불탁 그 토지가 재분배되었다. 러시아의 노동자는 8시간 노동일, 짜리즘 정부의 폐지, 헌법제정의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투쟁하였고,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전인민의 투쟁은 12월 모스크바 봉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짜르의 군대에 의해 결국 진압당하며 혁명은 퇴조하였다.

실패하였지만 1905년의 러시아혁명은 세계의 노동자와 억압받고 있는 인민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이때 폴란드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과 인민들의 투쟁이 확산되었는데 그 투쟁을 직접 경험했던 폴란드 출신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 2인터내셔날과, 파리코뮌 이후 세계노동운동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던 독일사민당 내부에 심각하게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사상적 동요,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대중파업론>>을 저술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장. ‘러시아 혁명, 무정부주의, 총파업’에서 러시아 혁명은 대중파업이란 투쟁 무기를 맨 처음 대규모로 시험한 역사적 경험이었기에 러시아의 1905년 혁명 이전에 나온 모든 저술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엥겔스가 제1인터내셔날을 분열시킨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인 바쿠닌주의자들에 대한 1873년의 비판[2]프리드리히 엥겔스, <바쿠닌주의자들의 활동상>, 1873,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 박종철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엥겔스의 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대중파업을 바라보는 태도를 특징짓는 논거를 발견한다. 그것은 총파업에 대한 무정부주의적인 이론(총파업은 사회혁명을 시작하는 수단이며 노동자 계급의 일상적인 정치투쟁과 모순된다는 이론)에 대한 공격이며,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강력한 조직과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총파업을 벌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잘 조직되어 있을 때에는 총파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위에 제시된 논거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했다.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러시아 혁명은 대중파업 사상을 맨 처음 웅대하게 실천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은 총파업을 완전히 발전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발전에 신기원을 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행동의 대립물로 여겨져 배격당하곤 했던 대중파업이 오늘날에는 정치 권리를 위한 가장 힘 있는 투쟁무기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중파업의 선두에 서지 못했다. 무정부주의는 러시아 혁명에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이 아니라 상어떼처럼 혁명의 전함을 쫓아 우글거리는 반혁명적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 간판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 특히 의회적 정치투쟁을 회피하는 수단, 또는 극적인 쿠데타를 통해 갑자기 사회혁명으로 비약해 가는 수단으로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상적인 정치투쟁의 조건들과 특히 의회적 조건들을 창출하려는 수단으로서 벌어졌다. 대중파업이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러시아의 혁명투쟁은 노동대중, 다른 누구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러한 정치적 권리와 조건을 개선하려고 벌인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보았던 대중파업은 그동안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을 부정했던 총파업이 아니라 바로 ‘정치적 총파업’이었다.

2장 ‘대중파업은 역사적 산물이지 인위적 산물이 아니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 시도를 열렬히 찬성하는 독일사민당의 지도자들과 대중파업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독일 노동조합의 지도부들이 대중파업에 대한 개념을 여전히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동안 내세웠고, 그래서 국제 사회민주주의[3]사회민주주의라는 단어는 1906년에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현하는 단어였고, 제2차 인터내셔날의 각 국의 사회민주당들이 전쟁지지로 노동자 계급의 … Continue reading에서 비판했던 그것으로 말하고 행동함을 지적했다. 그들은 대중파업을 위급할 때를 대비해 호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 두었다가 마음먹으면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주머니 칼처럼 생각한다. 노동조합에서 대중파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역사적 토대’와 ‘물적 조건’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취약성이고, 다른 하나는 프러시아-독일 군국주의의 강력함이다. 만약 대중파업이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격정적인 ‘선전’이나 당 지도부의 은밀하거나 공개적인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러시아에서 진정한 대중파업은 아직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대중파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멋대로 결정되고 선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계기에 역사적 필연성을 갖는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하는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1905년 가을 예나에서 열린 독일사민당 당대회에서는 당은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대중파업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이 논쟁의 결과 채택된 ‘예나결의안’은 총파업 요구를 인정했지만, 그것은 정부가 보통선거권을 제한하려는 때에 한정하였다. 여기서 대중파업은 순전히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의회주의에 종속된, 의회주의의 부속물로써 취급되었다. 예나대회에 뒤이어 퀼른에서 열린 독일노동조합대회에서는 총파업에 대한 논의는 불장난이란 이유로 아예 금지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에 지적한 독일사민당과 독일노동총동맹의 상황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공채에 찬성표를 던지고 조국방위를 설교하며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하는 길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이미 한 발자국씩 옮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장 ‘러시아 대중파업 운동의 발전’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혁명적 봉기로 발전한 대중파업은 맨 처음에 1896년과 1897년의 페테르스부르크의 직물노동자들의 거대한 총파업에서 시작되었고, 5~6년 단위로 정체와 반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1902년 3월 코카서스의 바툼 파업, 그리고 1904년 12월에 코카서스와 바쿠에서 일어나 러시아 곳곳을 한 때 마비시켰던 거대한 총파업에 영향을 받아 1905년 1월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살이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노동자들의 투쟁의 계기들이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대부분 아주 우연적이고 사소한 이유들에서 출발하여 곧 대규모 정치 총파업으로 발전하는데, 거기에는 러시아사회민주당의 조직적인 활동과 선전, 선동이 결합되어 있었다. 혁명의 밀물과 썰물의 시기에 경제적·사회적·지적인 측면에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대부분 9시간 노동[4]당시 러시아의 공장법은 11시간 노동일이었다.과 25%의 임금인상을 쟁취했고, 일부에서는 8시간 노동과 더 높은 임금인상을 쟁취하기도 하였다. 모순과 대조로 가득찬 혁명은 놀랄만한 경제적 승리와 자본가들의 가장 잔혹한 보복행위를 함께 불러온다. 오늘의 8시간 노동이 내일은 대대적인 직장폐쇄와 몇백만 명의 실질적인 기아상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의 혁명은 겉보기에 무질서한 파업과 비조직적인 혁명적 행동이 열광적인 조직화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중파업과 시가전의 불꽃 속에서 새롭고 젊으며 강력하고 활기찬 노동조합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때 생겨난 노동조합들은 반동의 시기에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합법·비합법 활동을 결합시키면서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4장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은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대중파업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모든 국면, 혁명의 모든 단계와 요소들을 반영하는 그러한 변화무쌍한 현실이다. 정치파업과 경제파업, 개별 산업부문의 총파업과 개별 도시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 투쟁과 가두의 대량학살, 바리케이트 전투, 이 모든 것은 서로 뒤엉키며, 서로 나란히 진행되기도 하고 서로 엇갈리기도 하며 서로 뒤섞여 흘러가기도 한다. 대중파업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현상들의 바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운동법칙은 명확하다. 그 법칙은 대중파업 그 자체나 대중파업의 기술적인 세부 항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치적·사회적 힘 관계에 있다.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효과를 높이려고 머리에서 쥐어짜 낸 교묘한 방법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방식이며,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현상 형태이다. 대중파업은 일회적인 고립된 행동이 아니며, 경제적 계기와 정치적 계기를 따로 분리할 수 없다. 러시아의 사건들은 대중파업이 혁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대중파업의 주도권과 의식적 지도에는 한계가 있다. 투쟁에 실마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 투쟁의 모든 국면과 모든 순간에 이미 풀려나 움직이는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힘을 당의 투쟁대오 속에서 실현되도록 정치투쟁 전술을 계획하는 것, 사회민주당의 전술이 단호함과 예리함에 바탕을 두고 결정되고 단호함과 예리함이 실제 힘 관계의 수준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며 오히려 그 힘 관계에 앞장서도록 하는 것, 이것이 대중파업 시기에 지도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5장 ‘독일에 적용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자 계급 운동의 교훈’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대중파업의 내적 법칙이 독일의 노동자 계급에게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러시아만의 특수조건의 산물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글을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가진 문제들을 검토하면서 먼저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경제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파업과 임금분쟁은 1890년대 이래로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었다. 둘째로 짜르제국의 노동자 계급이 구제받아 마땅한 빈민의 생활수준에 있었다는 생각에도 많은 과장이 섞여 있다. 정치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투쟁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대도시 대규모 산업에 고용된 여러 노동자 계층은, 삶의 물질적 조건을 놓고 볼 때 독일 노동자 계급과 견주어 수준 차이가 거의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실질 생활 수준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러시아와 독일의 차이는 더 적어진다. 독일에는 노동조합의 따스한 햇볕이 비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후진 부분이 존재한다. 광산노동자들, 직물노동자들, 가내공업 노동자들과 기성복 제조공 노동자들, 전기 노동자들의 빈곤은 독일의 정치분위기가 혼란스러워질수록 이 부분의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경제투쟁을 일으킬 것은 점점 더 확실해진다. 그리고 모든 범주의 독일 노동자 계급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평화적인 경제투쟁에 참여하거나 단결의 권리를 이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철도 노동자들과 우편 노동자들의 뚜렷한 빈곤에도 불구하고 의회적이고 입헌적인 독일 상황에서도 러시아와 같이 절대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혁명전의 러시아와 같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독일의 반동과 함께 철도와 우편 노동자들의 노예 같은 복종이 영원히 지속할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계획과 처방에 따라 거대한 대중운동들을 펼치려는 현학적인 사고들에서는 독일에서 대중파업을 감히 생각하기에 앞서 반드시 철도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사건들이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은 이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오로지 자연발생적이고 강력한 대중파업투쟁을 통해서만 우편 노동자들과 철도 노동자들의 단결권은 획득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수가 많고 가장 빈곤한 농업 노동자들을 전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 대열로 끌여들여야 한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못한 광대한 미조직 대중의 존재는 이른바 러시아 노동자 계급에 견주어 독일 노동자 계급이 경제적 낫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한편 독일의 산업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전위에게 되돌아가서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추구했던 경제투쟁의 목표들을 염두에 둔다면, 가장 구태의연한 독일의 노동조합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러시아에서는 노동자가 아직 미숙한 상태라고 얕잡아 보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이 내걸었던 요구들(8시간 노동일 등)은 독일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것이고, 노동자들의 삶에서 매우 절실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뜻에 따라 골라 벌이는 순전히 정치적인 대중파업이라는 것은 반드시 단지 생기 없는 이론적 도식일 뿐이다. 러시아에서 파업의 추동력이며 이른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조정 메커니즘인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작용은 마땅히 독일에서도 대중파업의 조건의 결과일 것이다.

6장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의 협력’에서 독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태도와 주장(우리는 아직 대중파업처럼 그렇게 위험한 일을 무릅쓰면서까지 우리 힘을 시험해 볼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을 비판한다. 당시 200만 명 이상을 조직하고 있던 독일 노동조합이 충분히 강력하려면 모든 독일 노동자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조직해야 하고, 그러한 상황이 되면 대중파업은 필요 없다고 선언될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조합의 역사는 5만 여 명에 불과했던 1870년대 사회주의탄압법에 대항해 투쟁했고, 1891년 조합원 수는 17만 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투쟁 속에서 자신을 검증하고 투쟁을 통해서 힘을 키워나가는 것, 이것이 노동자 계급 조직에 걸맞은 독특한 성장 방법이다. 앞으로 다가올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기는 진정한 인민대중의 운동이 되어야 하고, 가장 광범위한 노동자 계급이 투쟁에 나서야 한다. 소수의 조직된 집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 계급을 투쟁으로 획득하고 끌어당길 수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단호한 계급 행동에 의존한다.

7장 ‘혁명에서 대중파업의 역할’, 8장 ‘노동조합들과 사회민주당이 공동행동할 필요성’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문구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활동을 부정하는 논리들을 비판한다. 노동조합 지도부를 관료화시키는 특화된 전문적인 행위를 비판한다. 또한 노동조합 관료적 지도부들의 구호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분리와 동등성이란 구호의 오류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노동조합 운동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불합리한 몇몇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환상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승리해 온 노동자 계급 대중의 의식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사회민주주의의 한 부분이다”라고 글을 마치고 있다.

4. 파업에 대한 세 가지 관점, 고민택, 남구현 <파업의 정치학 : 파업과 계급투쟁>

파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사회구성체의 민란과 다르다. 그러나 파업은 노동자 대중의 상태를 본질적으로 개선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고,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데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조합의 한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파업이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되고 실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파업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권리로서 인정되고, 한편으로 자본의 착취가 법, 제도,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는 것이다. 파업의 권리는 투쟁의 결과라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투쟁을 철저히 차단하는 대신 착취의 결과를 둘러싼 투쟁으로 일정하게 인정함으로써 자본관계 자체를 기정사실화하는 효과를 거둔다고 분석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도록 한다. 파업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정치가 지속되는 한, 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주장이나 바람처럼 도덕적 판단이나 의식의 전환에 의해 멈출 수 없으며, 또 개량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 정치를 개선하는 것에 의해서도 결코 사라질 수 없다. 파업은 노동과정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 죽은 노동의 부속물로서 객체화 되었던 산 노동이 이제 자신을 지배하던 죽은 노동에 대해 노동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이제까지 은폐되어왔던 가치증식과정의 비밀이 폭로되는 것은 물론, 부르주아 정치의 계급적 성격도 폭로될 수 있다.

파업에 대한 제 입장들 중에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먼저 아나키즘, 생디칼리즘적 태도는 노동자 대중의 직접 행동에 호소하는 긍정적인 점이 있으나 총파업의 정치적 성격과 의의를 극대화. 주관적 의도와 다르게 노동자 정치를 협소하게 하였다. 파업투쟁을 계급투쟁의 한 형태, 전술의 한 형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최고형태, 혹은 유일한 전술로 위치 지운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동일시하며 노동조합 외에 정치조직을 부정한다.

파업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인 개량주의적 태도는 가능하면 파업투쟁을 회피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경제투쟁에 제한하려고 한다. 노동조합은 경제투쟁, 정당은 정치투쟁이라는 도식과 합법주의와 평화주의, 의회주의로 경사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노동자운동 진영 혹은 맑스주의 제 경향에서 레닌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경제적인 것에 제한하려는 경제주의에 대해서 비판하며, 무계급사회의 전망 속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맑스주의적 운동이라는 입장을 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량주의 정치를 넘어서 나아가는 대중파업의 정치적 성격과 대중투쟁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파업의 정치학

파업은 노동자계급이 대중적으로 겪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정치 학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싹트고 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정치 선전과 선동으로 이룰 수 없는 정치적 성과를 단 한 번의 대중파업만으로 이룰 수 있다. 대중파업이 특히 공장점거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경우에는 그것의 정치적 성격과 의의가 보다 강화될 수 있다. 파업, 공장점거와 함께 진행하는 가두투쟁은 노동자 계급이 투쟁과정에서 여타 계급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대중파업은 공동투쟁의 유력한 수단이다. 오늘날의 계급투쟁 현실과 파업에서 경제와 정치의 분리라는 경향을 극복하고, 의회정치로 수렴되지 않는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

5. 글을 마치며

한국 사회에서 파업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 노동 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교사, 공무원의 노동 2권,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부정, 필수유지업무제도, 교섭 창구 단일화 제도로 인한 소수노조의 교섭권 박탈의 결과 파업의 원천봉쇄, 정치파업 불법화 등 파업을 제한하는 법률들이 차고 넘친다. 또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의 근로기준법 미적용과 전체 노동자의 5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존재는 노동조합조차 결성하기 힘든 조건으로 단결권마저 실현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민주노총이 10.20 총파업의 주요 의제 중의 하나인 노동법 제·개정 문제, 즉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특고노동자에게 노동기본권보장, 근로기준법 18조 개정, 중대재해 근본대책 관련 3법 개정, 교섭창구 단일화제도 폐지와 산별교섭 법제화, 교원·공무원 노동 3권· 정치기본권보장 이라는 요구는 합법적인 파업을 가능하게 하는 요구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노동시간 단축과 근로조건 개선, 심지어는 보통선거권을 위해서도 노동자들이 수 없이 파업을 했다. 1830년대 보통선거권을 위한 영국의 차티즘 운동, 8시간 노동제를 위한 1886년 시카고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이 파업을 계기로 제 2차 인터내셔날에 의해 만들어진 메이데이와 이후 해마다 전 세계에서 진행된 메이데이 파업, 러시아혁명으로 연결되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파업,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노동운동의 고비와 노동자의 역사마다 위대한 파업이 있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조합은 파업이 일반화된 이후에 조직되었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자 더 강경한 파업이 발발하자 자본은 파업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배가압류와 직장폐쇄와 같은 악법들이 생겨났다. 역사적으로 일상적 시기의 경제파업은 정치적 격변기에 정치적 총파업으로 전환되었다. 노동력 판매 조건을 둘러싼 투쟁은 결국 노동력 판매제도 자체를 철폐시키는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개별자본에 대한 투쟁은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무인생산체제와 자동차 산업에서의 전기차로의 전환 등으로 자본주의 생산력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더 이상 조응할 수 없는 지경, 인류의 대다수를 실업자로 폐기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이 물질적 조건을 이용해서 노동자·인민이 주인 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각성이 부족하다. 자본주의라는 인류의 마지막 계급사회를 끝장낼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하도록 선전하고 조직하자.

<참고 자료>

레닌 -「파업에 대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고민택, 남구현 「파업의 정치학 : 파업과 계급투쟁」 2000, 진보평론 3

1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미국의 26대 대통령(1901~1909). 대기업과 노동조합 쟁의에 직면하여 대통령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 아시아와 유럽 문제에 개입,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4선 대통령으로 미국에서 뉴딜정책을 편 32대 대통령은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이다.
2 프리드리히 엥겔스, <바쿠닌주의자들의 활동상>, 1873,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 박종철출판사
3 사회민주주의라는 단어는 1906년에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현하는 단어였고, 제2차 인터내셔날의 각 국의 사회민주당들이 전쟁지지로 노동자 계급의 국제주의를 배반하고 자본주의 정부에 협력하게 되면서, 볼세비키와 제3차 인터내셔날(코민테른)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공산당으로 지칭하였다.
4 당시 러시아의 공장법은 11시간 노동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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