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124호 수많은 전태일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현장실습생

김경엽 ㅣ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복 75년, 한국은 일제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사회 전반에서 여전히 상흔은 남아있다. 고등정신 기능을 다루는 교육도 예외일 수 없었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부가 분배되는 근대에서 일본제국의 교육은 제국 식민지 통치의 수단으로, 근대화 교육은 국가 경제 발전의 밑바탕으로 역할을 한정 짓는다. 한편에서 공교육은 개인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충분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중학교 입시 폐지, 고교 평준화 정책, 고등교육 확대 정책이 펼쳐진다.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중학교 진학부터의 분리교육은 대학교육부터 이루어졌다. 학업 능력을 갖춘 개인이라는 전제된 상태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양은 계급 간 분리교육이 아닌 것 같다.

공정한 제도가 마련된 현실이지만, 실상은 고등학교 입학시기부터 분리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직업계고등학교 적성과 소질에 따른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기업의 기능인력을 키우는 취업교육이다. 직업계고 서열화에 정점에 있는 이명박표 ‘마이스터 고’의 교육목표가 대신 답을 해준다. 역대 정부에서 고등학교의 비율은 50:50(직업:일반)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교육을 통한 계층을 이동하려는 교육열로 직업계고등학교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되었다. 강력한 취업률 정책을 펴면서 정책자금을 쏟아부었던 정부에서도 조차 실현하지 못했다고, 직업계고 30% 비중확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일학습병행(도제학교)을 완수한 정부도 같았다. 전체 고등학교에서 소수로 남아 있는 직업계고등학교는 계급분리교육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한 축이 현장실습제도이다.

그동안 실습생 사고가 있을 때마다 대책은 발표되었지만, 지금의 현장실습제도는 뒤엉킨 실타래와 같다.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현장실습이 2017년 그해는 가장 많이 우리 곁에 존재를 알렸다. 2017년 1월에는 콜센터에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의 죽음이 있었고, 8월에는 병원에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의 죽음이 있었다. 또한 11월에는 제주 음료 생산 공장에 나간 고 이민호 학생이 기계 오작동 사고로 죽었다. 며칠 사이에 경기도 안산 공단의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이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그해 5월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 첫 교육부 장관은 언론에 ‘근로를 제공하는 현장 실습을 폐지’하고 학습 중심 현장실습을 단계적으로 정착시키겠다고 했다. 8월 대책이 발표되고, 11월 사망 사건 이후 12월에 교육부는 단계적으로 시행하겠다던 학습중심 현장실습(‘파견 현장 실습 폐지’보다, 노동을 제공하는 현장실습 폐지가 정확한 표현이다)을 2018년으로 앞당겨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해석하면 그동안 직업교육훈련촉진법에 근거해 기업에서 훈련과정을 이수하는데, 현실은 훈련이 아니라 노무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현장실습을 훈련과정으로 나가는 학생은 표준협약서를 사용하고, 조기취업을 전제하여 기업에 나가는 경우 근로계약서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원적 관리체계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훈련과정 이수로 관리하겠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2년이 지난 현재의 현장실습은 단일한 체제만 남았다. 학습현장실습은 온데간데없이 ‘조기 취업’만 남았다. 이는 근로계약서라는 양자 간의 계약을 전제로 한 시민법률체제 속으로 완벽하게 편입된 것이다. 그동안 반복되는 현장실습 사건의 원인이 이원체제가 실질적인 보호조치로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만든다는 점을 충분히 반영해서 정책 기조를 확립했다. 이렇게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순수하지 않을까.

성장이 지속하는 사회에서는 교육은 계층상승의 사다리로 충분한 기능을 가졌다. 가정과 같은 배경이 개인의 노력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고도성장이 멈추고 계층 이동성이 낮아지는 사회에서는 계급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계적 평등은 실질적이지 못하다. 교육받는 기간뿐만 아니라 교육내용도 우리는 평등하게 마련해야 한다. 개인이 넘을 수 없는 장막을 거두어 주는 정의로운 사회가 성장이 정체된 시기에 필요하다. 어린 나이에 입시 경쟁교육에서 배제를 경험하고, 또 다른 경쟁 장에서 취업교육을 마치 다양한 성공경로라고 말하는 것은 분리교육 현실을 은폐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이 되려면 일정 수준의 평등한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평등한 사회가 기계적 기준처럼 몽상적 사회로 치부하는 세력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질문에 공정한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너의 책임이라고 세뇌하고 있다. 70년대 배고픔으로 배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전태일과 배움의 기회는 열려 있으나, 계급 유지 수단으로 전락한 교육으로 제대로 된 기회를 제공받지 못 하는 직업계고 학생, 현장실습생의 삶은 똑같지 않지만 비슷한 위치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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