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124호 절망에서 전망 찾기 -강수돌 교수의 〈노동을 보는 눈〉을 읽고-

은영지ㅣ 사드저지 평화활동가

자본주의 체제 한국은 가진 자 천국이라는 걸 매분 매초 마다 느낀다. 오죽하면 삼성 재벌공화국이라는 말이 다 있겠나. 이재용 구속과 삼성 재벌해체 선전전을 하고 있으면 이재용과 사돈의 팔촌의 인연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시민들이 다가와서 삿대질을 해댄다.

“삼성 망하면 우리가 어떻게 먹고살라고 그러냐. 나라 망하는 거 보고 싶냐?“

그들 중에는 건물 청소하다 말고 걸레 들고 쫓아와 욕설하는 중년 여성도 있다. 이재용이 이건희로부터 물려받은, 세금을 뺀 40여억 원을 종잣돈으로 해서 분식회계를 통해 기업가치를 부풀렸다 축소시키고 주가를 조작하면서 떼돈 벌고 국민의 피 같은 세금 6000억 원을 말아먹으면서 6조나 되는 돈으로 뻥튀기한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는 어림도 없다’라는 설립자 이병철의 유업을 이어받아 노조 만들려는 노동자들을 핍박하고 해고했다는 말을 서슬 퍼런 그들에게 꺼내지도 못했다. 쥐뿔도 가진 거 없고 나약하기만 한 우리 노동자 민중들끼리 한 판 말싸움이 벌어진 이 현실을 어이해야 할까. 국가(나는 ‘정권’이라고 부르고 싶다)와 자본과 언론이 얼마나 짝짜꿍이 되어 대국민 사기를 쳤길래 저리 삼성을 감싸고 도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노동과 관련한 여러 쟁점과 노동의 역사, 의미를 쉽게 풀어쓴 강수돌 교수의 2012년 저작 <노동을 보는 눈>을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노동자 가족인 내게 이 책은 별 새로울 게 없었다. 현장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해본 적은 없으나 공장 생활을 하며 노조 만드는 걸 업으로 하다가 거대한 자본에 의해 판판이 깨져본 남편과 살았으니 반푼수 경지에 오른 셈이다. 해서 우리 부부에겐 “오늘 저녁 뭐 먹을까?”라는 대화보다 파업이니 근로기준법이니 복직 투쟁이니 하는 얘깃거리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강수돌 교수는 ‘노동시장이 탄생하는 데 국가가 무슨 역할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가 정리한 내용은 우리가 늘 비판해온 문제의식과 같았다. 국가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자본과 공생하는 정경유착의 행태를 보여왔다. 자본 수호를 위해 필요하면 폭력도 행사했다. 이를테면 경찰과 감옥, 그들에게 유리하게 끌어다 쓴 노동법 등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업에서 노사 간 임금협상이나 단체협상, 정리해고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질 때 국가의 공권력이 다양한 형태로 개입한다.”

정책이나 법률 제정 과정에 자본가들이 로비활동이나 뇌물을 먹여 그들에게 유리하게 하거나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저지시키는 일, 국가 관료 출신이 독점 대기업의 주요 간부로 들어가기도 하고, 독점 대기업 출신 인사가 국가의 주요 요직에 발탁되기도 하는 행태를 예로 들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시장 개입은 봉건국가의 못된 잔재라고 하면서 저자는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을 소개했다. 농사지을 땅을 빼앗긴 수많은 농민들은 유랑민, 혹은 거지가 되거나 공장에 품을 팔러 갔다가 힘이 들어 도망치면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구민법’을 만들어 통제했다.

”도망갔다가 잡히면 등에다 ‘S’자 도장을 찍게 하고 또 도망가면 한쪽 귀를 베게 했으며, 그래도 도망가면 바로 죽일 수 있게 했다.” 영국 왕 헨리 8세 치하에서 그렇게 죽은 사람만 7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구빈법은 말 그대로 빈민을 구제하는 법이지만 신흥부르주아의 요구를 받아들여 노동 강제법으로 시행했고 빈민을 구제하는 복지기관인 ‘구빈원’ 역시 강제노역소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나라 상황도 비슷하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농촌을 떠난 젊은이들이 공장 노동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할 경우 감옥에 가두거나 노역을 시켰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제주도 ‘5.16 산업도로 강제노역’이었고 전두환 때는 악명높은 ‘삼청교육대’가 있었으며 노동자 민중을 억압한 사례는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차별 문제에 대한 저자의 논리에 대해서도 공감이 갔다. 근대 시민혁명의 상징인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문에 나온 자유, 평등, 박애와 소유를 존중하고 있으나 진정으로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하게 대한다면 자본이 이윤을 얻기 어렵다. 해서 ‘정당한 차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능력에 따른 차별을 합리화해왔다. ‘인적 자본론’을 강조하여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은 노동자들에게 보상을 높여주고 자본에 복종시키는가 하면 성차별, 연령차별, 학력차별,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등 온갖 차별을 만들어내는 못된 짓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사람을 지하자원처럼 ‘인적자원’ 취급하여 물질화, 상품화하는 행태를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속이 뒤집힌다.

이 책이 소홀히 취급한 부분을 덧붙이고 싶다.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의 돈벌이를 위해 약소국 침략도 서슴지 않았으므로 제국주의 속성도 지녔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대량생산한 상품을 비싸게 팔아먹고 값싼 원료를 약탈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세계 곳곳을 침탈해왔다. 우리나라엔 일제 침략기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지금까지 미군이 점령하고 있다. 미국은 미 군산복합체의 돈벌이를 위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군사력까지 총동원해 전 세계노동자 민중을 짓밟는 자본주의 행태를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열거하자니 도무지 끝이 없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정리한 내용에 공감이 가서 옮겨본다.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산 1만 년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돈벌이 경제가 사회를 주름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0~700년밖에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 역사의 3~7%밖에 되지 않고 93~97%의 역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는 인류가 자본 없이도 95% 내외의 역사를 잘 살아왔지만 5% 역사밖에 안 되는 자본주의는 인간 없이 지탱하기 어렵다.“

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투자해 기계나 원료, 노동력(인간)을 사서 물건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데 생산자도 인간(노동자)이고 구매자도 인간(노동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배짱을 부려야 할까, 자본이 배짱을 부려야 할까’에서 답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체제가 천 년 만 년 지속하기라도 할 듯 자본가들이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고 군림하는 행태를 보면 가소롭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계가 생산의 중심이 되면서 노동자들은 기계에 맞춰 일해야 한다. 이쯤 되면 자본과 노동의 힘 관계 속에서 ‘신성한 노동’은 구호에나 나올 정도로 추락하고 만다고 하면서 저자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예로 들고 있다.

“주인공 찰리는 공장의 컨베이어 라인에서 반복적으로 나사못 죄는 일을 하는데 나중엔 사람들의 코까지 조여버리려 하는 등 눈에 띄는 모든 걸 조이려 하는 강박증에 걸린다. 컨베이어 라인 위의 노동자들은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노동에 인간성마저 황폐화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 미국과 서유럽 등의 국가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의 인간화’와 ‘산업민주주의’를 표방했던 ‘포드주의 또는 케인스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노동자의 상황은 괜찮았으나 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나빠졌다.

“기업과 국가는 노동조합의 집단적 보호막을 하나씩 벗기고 오로지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을 하게 만든다. (중략) 갈수록 노동자들은 무의미한 노동조차 일종의 ‘생존전략’으로 강하게 동일시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노동을 마치 자신의 정체성인 것처럼 강력하게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무산자는 노동동일시와 일 중독자로 전락해 버리고 실직하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닐 정도로 의미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고귀한 목숨줄을 자본에 저당 잡히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떤 모습인가? 노동력을 상품화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공부와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되다가 좌절하면 취업, 결혼, 가정, 집 장만,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이른바 3포, 5포, 7포 세대로 전락해버렸고 흙수저의 비애를 맛보게 된다. 노동자의 존엄성과 행복을 빼앗는 이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희망이라는 걸 꿈꿀 수 없는 헬조선의 우리가 아닌가. 저잣거리의 야바위꾼 같은 자본주의 한국에서 십자가나 마찬가지인 노동계급의 앞자리에서 전태일 정신을 실천하고자 몸에 기름을 끼얹고, 살기 위해 굴뚝 위로 올라가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석 달 열흘 단식투쟁이나 삼보일배를 하며 투쟁의 역사를 쓰는 노동자들이 있어 힘을 얻곤 하지만 삼성 재벌로 상징되는 자본의 야비함은 끝이 안 보일 정도인 몹쓸 자본주의 체제이다.

강수돌 교수 역시 “노동의 세계는 희망보다는 절망, 삶의 기쁨보다는 삶의 불안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진단하면서 노동의 미래를 두 가지로 전망했다. 우선, ‘기술 유토피아적’인 전망으로, 기계나 기술 시스템이 인간을 대신해 모든 일을 수행하면서 노동자들을 자본의 필요에 맞게 끌어들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두 번째로 노동의 미래는 ‘절망적’이라는 전망으로, 극소수의 우대받는 노동자와 대다수의 버림받는 노동자로 갈라지는 ’20대 80 사회’, ‘1%대 99% 사회’로 양극화되어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는, 노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노동 중심성’에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노동뿐만 아니라 농사, 자연생태계, 관계 맺음 등에 의미를 두자고 권유했다. 절망이야말로 새로운 전망이 생길 출발점이라며 그가 인용한 근대 중국 사상가 루쉰의 말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길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원래 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다 보면 길이 생기는 법이다.”

저자는, 자본이나 국가, 시장이나 권력이 제시하는 그 어떤 해결책도 인간의 보편적 행복을 추구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길은 우리 자신 안에 있으니 “우리 스스로 나서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라고 했다.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허전함과 아쉬움은 남는다. 역사 변화의 전망과 노동의 자유, 노동해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럿이 함께’ ‘끝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기’라는 마무리 화두 속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방법론은 보이지 않았다. 과학적이고 변혁적인 고민과 대안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자본의 지배와 착취가 대리석처럼 단단하고 노동의 미래가 암울할수록 노동계급의 실천 투쟁을 담아낼 이념적 지향성과 ‘사회주의’라는 귀결점이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책을 읽고 나니 더 심란하고 갈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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