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7호 10-4 여성이 세상의 절반을 만든다-[현장과 광장] 6호를 읽고

하영진ㅣ노동전선 회원

1

[현장과 광장] 6호의 표제는 ‘여성이 세상의 절반을 만든다’이다. 모택동이 혁명 구호로 내걸었다는 ‘부녀능정반변천(婦女能頂半邊天)!’를 의역한 것이라고 편집자의 글은 밝히고 있다. 직역하면 ‘하늘의 절반은 부녀자가 이고 있다’라고 한다. 표제가 드러냈듯이 편집자의 글은 ‘여성’ ‘여성해방’을 6호의 특집 주제로 잡았다고 한다. ‘남녀평등, 여성해방의 과제가 참으로 절박하지만 아직도 미완의 과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편집자의 글은 여성해방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본 원리와 방향을 천명한 것으로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의 서문을 인용하고 있다. “여성문제는 여타의 사회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 해결방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여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전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남녀의 평등과 독립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인간해방은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6호에는 편집자의 글이 ‘특집 주제’라고 밝힌 ‘여성, 여성해방’을 다룬 세 편의 글이 실렸다. ‘여성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보라’(김파란), ‘페미니즘이 아닌’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박한솔), ‘여성해방, 노동해방, 그리고 인간해방’(이현숙)이 그것이다.

이 글은 [현장과 광장] 6호의 특집 주제인 ‘여성, 여성 해방’과 관련한 글들을 중심으로 필자의 의견을 덧붙인 독자 후기임을 밝혀둔다. 위 세 편의 글들이 주장하는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덧붙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편집자의 글이 주장하고 있는 ‘무기력과 비활동성, 그럴듯한 슬로건, 사이비 이론, 위선 등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지배계급과 이데올로기 제공자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서, 또한,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향한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며 단결투쟁으로 노동해방, 여성해방, 인간해방! 새로운 혁명세상으로 거침없이 나아가‘기 위해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내용들도 짚어볼 것이다.

2

[여성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보라]는 글에는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부담을 노동계급의 핵가족이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집단적으로 책임진다면!’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부제를 통해서 글이 말하려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글쓴이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즉, “진정 집단적으로 시회를 책임진다는 것”은 “누구나 사회적 책임에 이해관계가 있고 모든 개인에게 자아실현의 가능성이 활짝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밝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상식에 따르면, 여성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적합하고, 가정은 당연히 여성의 영역이며, 여성은 모든 집안일을 가장 잘 한다.” “성인 여성의 대다수는 집 밖에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개별화된 재생산 노동이 대부분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낀다. 특히 육아휴직의 경우 대부분 여성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생각에 근거해 이뤄지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핵가족은 중요한 소비의 장소다. 워킹 맘을 겨냥한 광고의 주된 포인트는 마치 저 제품을 사기만 하면 여성들은 모든 가사와 육아에서 해방되어서 일도 하면서 좋은 엄마이면서 좋은 아내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은 저임금, 보육시절 부족, 사회적 지원 감축, 저소득층의 열악한 주거 환경, 높은 주거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왜냐면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필요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가족 이데올로기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글의 말미에서 제목에서처럼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진보를 계속해서 뒷받침했고, 전통적인 가족이 약화되고 (양성) 관계가 평등을 계속해서 주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남성과 평등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 시간제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남성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더 크다. 수많은 여성이 시간제로 일하는 까닭은 여성이 육아를 맡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많은 여성 일자리 보고서를 보면 여성이 왜 시간제로 일하는지를 대략 알 수 있다. 이유는 가정 형편, 저렴한 탁아 시설 부족, 직업 능력 개발 부족, 노동시장의 조건과 양질의 일자리 부족, 이런 환경과 조건은 노동시장에서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여성이 시간제로 일하는 것은 생애 주기의 특정 단계와도 관계가 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여성은 시간제 일자리를 택해야 가사와 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느낀다. 만약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부담을 노동계급의 핵가족(여성)이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집단적으로 책임진다면 여성의 삶이 어떻게 바뀔까? 상상해 보라!”

글쓴이는 “여성해방의 가능성도 노동계급 남성들의 해방도 이 ‘낡고 답답한’ 제도 내에서 수행하도록 요구받는 책무들을 사회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포괄적 복지를 제공해야 하며,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유급 육아휴직을 줘야 하고, 육아수당 등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이런 요구들은 “노동계급 전체를 위한 요구”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아이와 노인과 병자를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성 문제’ 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와 노인과 병자를 돌보는 것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국가가 미래를 책임지는 사회를 이루는 것은 여성들만 아니라 남성들의 해방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무엇이 가능할까?’ 글쓴이는 묻고 답한다. “제일 먼저 상층의 특권을 폐지하고, 가장 소외된 계층이 받는 극심한 차별을 완화하는 일을 우선 실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층의 지배계급에게 우리가 요구해야 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도덕성이다. 이 도덕성을 상실한 집권층이 기득권 세력이 되고 이들이 이 땅을 이렇게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권의 폐지’는 ‘선거 정치’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한다.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서 선출되는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그들에 의해 자리하게 되는 고위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삶을 책임져야하는 그들이기에 어떤 대통령, 어떤 국회의원을 선출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진다. 결국, 어떤 대통령, 국회의원이 특권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가 그들을 선출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의 노동자 정치를 통해서 어떤 대통령, 국회의원을 선출할 것이며, 선출 된 이후에 국민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권한 행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특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감시할 수 있는 제도가 중요할 것이다. ‘오래된 미래’인 파리코뮌의 ‘소환제’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통령제나 정당법, 그들을 선출하는 방식인 선거제도에 대한 개선도 관심 가져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3

[‘페미니즘이 아닌’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를 읽고]에서 글쓴이는 ‘한국 사회는 자타가 공인한 극심한 성차별 사회’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성 격차 지수(GGI) 순위는 156개국 중 102위로 조사됐으며, 성별임금격차 또한 여전해서 2020년을 기준으로 여성은 남성 임금의 67.7%밖에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앞서 언급한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여성 대상 범죄도 여성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경찰청범죄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강력범죄 피해자 10명 중 8명은 여성이었으며, 반대로 범죄 가해자의 경우 남성 10명 중 8명을 차지했다. 강력 범죄로 한하면 무려 가해자 중 무려 96%가 남성이기도 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은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을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물음이 생긴다. 글쓴이에 따르면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는 “주류 여성계와 다른 관점에서 여성해방을 전망한다. 어쩌면 (여타 사회주의적 이념과 마찬가지로) 금기시되고 있을지도 모를, 그래서 더욱 생소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불리한 위치에서 억압과 차별을 겪고 있다는 건 엄연한 사실”(7p)임을 인정하고 “우리는 적극적인 여성해방 투쟁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7p하단-8p). 다만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한계를 극복하고 여성해방을 과학의 토대 위에 정초하는 것“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무엇이며 여성해방을 위한 과학적 토대란 무엇인가 묻게 된다. 책은 페미니즘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간략히 검토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결국 역사적으로 살펴본 페미니즘은 그냥 ‘여성억압을 철폐하고자 하는 사상’이 아니라, 여성의 억압을 다른 모든 억압에 앞선 사회의 기본 모순으로 바라보는 사상”(9p)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한계는 바로 여기서부터 나온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 달리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의 영역이 있다고 보고, 실천적으로도 여성억압을 철폐하는 운동이 계급억압을 철폐하는 운동과는 독자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1p). 반면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역사유물론[6]에 의거하여 물질적 생산의 관점에서 여성억압을 포함한 이제껏 존재했던 착취와 억압을 역사적으로 설명한다.”(같은 쪽). 하지만 몇몇 여성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계급 문제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고 여성억압을 부차화 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글쓴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초의 평등은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사적소유와 계급분화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 고대노예제와 중세봉건제에 이은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사적소유에 말미암은 여성차별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계급억압과 여성억압이 서로 보폭을 맞추고 있음을 상기할 때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성차별은 한층 교묘해진 상황이다. 자본가계급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대우를 확대 강화하여 막대한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특히 봉건시대에 구축된 여성의 성별 역할(특히 가정에서의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자본주의 특유의 여성억압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 체제는 잉여가치 착취를 위해 가정에 속박되어 있던 여성조차 외견상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켰지만, 여전히 여성들에게 ‘노동자이자 가정 주부’라는 이중의 억압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여성해방의 길은 당연히 사적소유의 폐지와 사회주의의 건설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면 모든 억압과 차별이 일시에 해소 된다’ 따위의 유토피아론을 설파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과도기인 만큼, 사적소유가 철폐된 여타 현실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치로 여성차별은 어떤 형식으로든 당분간 잔존함이 불가피하다. 그럼에도“사회주의의 건설은 이제껏 여성억압을 존립케 했던 토대를 제거하고 (…) 여성해방을 위한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것”(41p)이다.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요소를 지양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문화적인 성차별은 물론이고 경제 영역에서의 성별 분업과 임금 불평등 역시 폐지하기 위해 마련된 든든한 주춧돌이 된다. 사회주의 건설 이후에 필요한 것은 여성의 사회적 생산 참여를 보장하고,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며,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아울러 계급사회의 잔재인 성차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또한 가열차게 벌려나가야 한다. 사회주의를 건설해나갈 우리에게는 “더욱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실천”(41p)이 요구될 뿐이다.“

필자는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의 영역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이 계급 문제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고 여성억압을 부차화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결국, 물질적 생산의 영역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을 ‘어떻게’ 넘어서 여성 해방, 성 평등을 실현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닌가 묻게 된다. 역사적으로 도달해야 할, 혹은 도달해야 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넘어 사회의 공동 소유의 확대, 개인의 소유를 보장하면서도 불평등과 차별이 없는 사회’로 어떻게 갈 것인가가 문제가 아닌가 묻게 된다.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여성 해방’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과 차별을 넘어서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부터 당장 ‘평등한 사회’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필연이든, 계급투쟁의 산물이든 둘 다 이든 평등한 사회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껏 인류 역사가 그래왔듯이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투쟁들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의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는 투쟁들을 해 나가는 가운데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를 넘어 공산사회로 가야하듯이, (남녀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통해서 평등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 낸 평등의 결과들이 중요하다는 것일 테다. 평등한 사회는 불평등한 현재의 사회를 지양한 사회이지 ‘지금, 여기’를 떠나 도달해야 할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회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4

[여성해방, 노동해방, 그리고 인간해방 – “털이 별로 없는 원숭이”들을 위한 변명 – 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을 중심으로]에서 글쓴이는 ‘청년이 장년이 되려면 세 가지 동화(童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첫째 동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둘째 동화: 노사는 한마음이다. 셋째 동화: 부부는 사랑으로 일심동체이다.”

글쓴이는 엥겔스의 저작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을 풀어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글쓴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대로 듣기만 해도 그런 사회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쓴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장 오래되고 가장 원시적인 가족형태는 … 군혼, 즉 남성 집단 전체와 여성 집단 전체가 서로에게 속하며 질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 가족 형태이다.(p. 46)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성적으로 결합하였기 때문에 “친아버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어머니만을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모계 씨쪽으로 남녀가 무리를 지어, 씨족을 단위로 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근친상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여자들은 동일한 한 씨족에 속하는 한편, 남자들은 여러 씨족에 나뉘어 있”게 되어, 여성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군혼에서 개별적 남녀의 결혼으로 범위가 점점 좁혀지게 되는 이유는, 단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보다 우월한 종족을 생산하여, 자연과의 투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이다.

새로운 문명사회, 즉 계급사회를 탄생시킨 것은 저급하기 그지없는 이해들 ─ 비천한 소유욕, 짐승 같은 향략욕, 더러운 탐욕, 공유재산의 이기적 약탈 ─ 이다; 옛날의 무계급 씨족사회를 균열시키고 붕괴시킨 것은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수단들 ─ 절도, 폭행, 간계, 배신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회 자체는, 그것이 존속해온 2,500년의 전 기간 동안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다수를 희생시킨 위에서의 소수의 발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자본주의 사회]은 특히 그러하다. (p. 111.)

“문명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던,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는 20세기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였다. 공산주의의 원칙은 능력에 따른 노동, 즉 사회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원칙은 “노동에 따른 분배[11])”이다. 분배를 많이 받아서 사적인 부를 키우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적 부에 대한 탐욕을 노동의 동기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도 노동생산물을 분배받기 위해 노동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생산수단이 아니라) 분배받는 생활수단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 동기로 활용된 “사적 부에 대한 탐욕”은 공공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타락시켰다. 그들은 그 권한을 이용하여 사회적 부를 사적 부로 만들었다. 그 최종적 결과가 쏘련의 붕괴이고, 올리가르히(Oligarch)라고 불리는 독점자본가들의 출현이다.

문명은 가족관계, 즉 남녀관계에도 예외 없이 파괴적으로 작용하였다. 그것은 일부일처제, 즉 공공연한 혹은 은폐된 가내 노예제를 확립했다. 그 목적은 사적 부의 세습과 증식이다. 그 이전까지 인류의 역사에서는 자연적 도태가 군혼을 대우혼까지 진행시켰다. 자연적 힘이 배우자를 점차 좁혀가게 만들었다. 이제 문명이 도래하면서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전화는, 그 동력이 사회적인 것이었다.

가축 떼와 기타 새로운 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에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 획득은 언제나 남자의 일이었다. 생계획득 수단은 남자가 생산하였고, 남자의 소유였다. 가축 떼를 길들이는 것이, 다음에는 그것을 보살피는 것이 남자의 일이었다.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으며, 가축과 교환하여 얻은 상품과 노예들도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이제 생업에 의해 얻은 일체의 잉여는 남자의 것이 되었다; 여자는 그것을 소비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소유권은 조금도 없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자리에 만족하였다;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부를 뽐내면서 첫 번째 자리에 올라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내의 분업은 남녀 간의 재산분배를 규정하였다; 가족 내의 분업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내의 분업은 종래의 가족 내 관계를 뒤집어 버렸는데, 이것은 오로지 가족 밖에서의 분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가정에서 여자의 지배[우위]를 보장해주었던 바로 그 원인: 여자가 가사 노동에만 종사하는 것이, 이제는 가정에서 남자의 지배를 보장해 주었다: 여자의 가사노동은 이제 남자의 생계 회득 노동 앞에서 꼬리를 감추었다; 남자의 노동이 모든 것이었고 여자의 가사노동은 보잘 것 없는 부속물이었다.(pp. 178-179.)

이상의 인류사적인 파악을 통해 글쓴이는 “사적 부의 크기가 권력을 결정하는 계급사회에서, 남성 지배를 완화할 수는 있지만,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이룰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결국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자들이 생산하지만, 자본가가 소유하는 거대한 부를 다시 찾아, 남녀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소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 사회, 노동생산물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만이, 오직 애정에 근거한 남녀의 결합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만이 완전한 남녀의 해방, 즉 인간의 해방도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글쓴이는 ‘사적 소유 자체의 철폐’를 말하고 있다. “사적 소유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다. 가장 거대한 사적 부인 생산수단을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사적으로 소유하는 가옥이나 가구 등 생활수단을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등으로) 최소한으로 축소하여야 한다. 그래서 일부일처제의 기초인 상속 재산을 거의 없애야 한다.” 그리고 다가올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다가올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1천 만명, 아니 수억의 사람들이 하나의 경제단위가 된다. 가족은 사회에 흡수된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2세들을 키운다. 사적 가사는 사회적 산업으로 된다. 임신과 출산 등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책임져야만 하는 것에 대해, 사회는 공동의 기금으로 충분하게 배려한다. 가족이 사회에 흡수됨으로써, 임신과 출산이 사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로 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묻는다. “일부일처제가 경제적 원인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해서, 이 원인이 소멸하면 그것도 소멸할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일부일처제는 소멸하기는커녕 비로소 완전히 실현된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전화됨으로써 함께 임금노동, 프롤레타리아트도 소멸할 것이고, 따라서 또한 일정한 수 ─ 통계적으로 산정 가능한 수 ─ 의 여자들이 돈을 받고 몸을 팔 필요도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춘은 소멸되지만, 일부일처제는 붕괴되는 대신에 마침내 ─ 남자에게 대해서도 ─ 현실이 된다.”(p. 87) 사적 소유에 따른 부의 세습이라는 경제적 원인이 해소됨에 따라 일부일처제는 애정으로 더욱 자유로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결혼의 완전한 자유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이 생산이 만들어 놓은 소유 관계들이 제거되고, 그 결과 오늘날 아직도 배우자의 선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든 부차적 경제적 고려들이 제거되는 때에야 비로소 일반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 그때는 상호 간의 애착 이외에는 다른 어떤 동기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점유 획득”하여,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털이 별로 없는 원숭이”들은 동물계를 벗어나고,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비약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어른거리고 있는 제3차 세계대전의 그림자를 보며, 필자는 그것을 자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혼과 출산은 남녀 당사자들이 결정할 문제이다. 한편으로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남녀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국가와 자본이 재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필요해서 출산을 걱정한다면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들을 마련하면 될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고 출산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회를 만들면 될 것이다. 가사 노동과 육아와 고용과 임금에서부터 퇴직과 노후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는 노동환경과 평등한 사회 환경을 만들면 될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노동자들에게 특히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사회만 아니라 사람도 삐뚤어질 뿐이다. 그런 삐뚤어짐이 오히려 사회를 바로 잡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잡힌 사회는 공동으로 생산한 사회적 부가 소수 특권층이 독점하지 않는 사회, 남성이 여성을, 강하다고 약자를, 마침내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지 않는 오히려 존중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5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통한 평등 사회는 여성, 노동자, 인간에게 별개의 문제일 수 없다. 여성과 남성, 다른 처지의 노동자들, 또한 독립된 인간 개체로서 상호 작용하며 상호 연대하며 상호 존중하며 ‘지금, 여기’의 불평등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평등의 상태로 상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상의 여성 해방과 관련한 내용들과 함께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위해서 무기가 될 [현장과 광장] 6호에서 발견한 내용들이 많지만 두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먼저, <정세>란의 [대선 약평, 윤석열 정부, 민주노총의 시간](양동규)이란 글의 ‘노동 정치의 활로 모색’에서 셋째와 다섯째 항목이 특별히 눈길을 끈다. “셋째, (…) 현장에서 사라진 정치교육, 정치토론, 정치투쟁의 단초를 다시 마련해야 한다. 현장 노동자들에게 묻고 들어야 한다. 현장에서 정치토론과 실천모임을 광범하게 구성하고 정치적 훈련에 나서야 한다. 현장의 동지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정당법, 선거법 등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가로막고 있는 정치제도 개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 정치제도 개혁 투쟁은 민주노총과 지역본부, 가맹조직까지 전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과 함께 담론을 형성하고 선거 정치를 통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사회 운동 세력과 연대하며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세>란의 [주체 없는 연대 없다](김장민)는 글의 ‘이후 대선 과제’의 내용이 이목을 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대중을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지지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노동당과 변혁당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사회주의는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하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동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이유를 불문하고 이론과 실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좌파,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 태도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를 최우선으로 두면서도 민주노총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은 아마추어적 태도이다. 조직노동자의 지지도 못 받는데, 미조직노동자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냥 구호일 뿐이다. 굳이 “사회주의자가 되라”고 강변할 필요 없이 사회주의자가 노동자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맞는 정책과 행동을 보여주면 된다.” 머리와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실천하여 실현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하겠다.

[현장과 광장]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편집부의 노고에 감사하며 11월에 발간될 예정인 7호를 기대하며 독자 후기를 마친다.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전선] 147호 10-3 진보교육감 12년, 성과와 한계

다음 글

[전선] 148호 11-1 이곳이 사람 사는 곳인가!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