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16호 여성해방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서, 사회주의 승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클라라 체트킨 선집』을 읽고-

천연옥(노동전선 회원)


1. 글을 시작하며 『클라라 체트킨 선집』의 엮은이는 필립 S. 포너이고, 옮긴이는 조금안이다. 1986년 12월 동녘에서 출판되었다. 엮은이와 옮긴이에 대한 정보는 찾아보았지만 능력의 부족으로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필립 S. 포너는 이 책의 중간 중간에 달린 주(注)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70년대 활동한 미국의 여성운동 이론가인 듯하다. 조금안은 역자후기에서 “‘마르크시즘은 여성문제를 경시하고 있다’라든가 ‘계급해방과 여성해방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 현실에서 드러났다’ 등등의 편견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 우리는 올바른 비판을 위해서라도 고전에 대해 좀 더 진지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천박한 ‘수정’이나 ‘비난’이 급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시즘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좀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다. 체트킨 선집은 이와 같은 노력의 하나로서 선정하여 번역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일단 책의 내용을 요약하였다.

2. 안젤라 Y. 데이비스의 서문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분석에 근거한 중심 개념들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나 아우구스트 베벨과 더불어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규명한 뛰어난 이론가이며, 제도화된 여성억압과 남성우월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극복한 사회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 전략가였다.
그녀는 동시대의 사회문제를 탐구함에 있어서 결코 냉정한 관찰자는 아니었고, 가장 실천적인 활동가로서 위대한 10월 혁명 전후 수 십 년 동안의 저명한 공산당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충실한 보호자로서 실제 정치활동만이 아니라 이론적 작업에 있어서도 계급적인 입장을 잃어버린 적이 결코 없었다. 그녀가 행했던 이론적·실제적 활동들은 그녀 자신의 역사적 시기에서만 빛을 밝혀주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 인종주의에 대한 저항, 여성평등과 평화를 위한 투쟁 사이의 관련성을 우리에게 더 잘 이해시켜 주고 있다.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지니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독일사회민주당의 남성당원들에게 호소했다. 평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투쟁과 부르주아 여성들의 투쟁 사이의 일차적인 차이는 후자는 자기 계급의 남성들에게 대항하는 데 초점을 두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자본가 계급에 대항해서 공동의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남편과 형제, 아버지와 아들들과 함께 동참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성참정권운동은 부르주아 여성에겐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는 남성들과 동등한 기초위에서 계급투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전투무기 정도로 인식하였다. (이 서문에 포함된 내용이지만 다음 글에도 계속 반복된 부분은 일단 생략하였다)

3, 필립 S. 포너의 서문

클라라 아이스너 체트킨(1857~1933)은 독일의 소농민들과 섬유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 뷔데라우에서 1857년 7월 15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학교 교사이면서 오르간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자유주의적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교육협회 설립에도 참여했다. 아버지의 강의로 학교수업은 보충되었고,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평생 동안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었다. 1872년 아버지의 은퇴이후 가족은 라이프찌히로 이사했다. 여자였기 때문에 김나지움에서 공부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지성에 감동한 자유주의적 학자인 아우구스테 슈미트(1833~1902, 루이제 오토 등과 함께 독일여성운동의 선구자)에 의해 당시 독일에서 최상급이었던 라이프찌히의 반 슈타이버대학 사범학교에 무료입학허가를 받았다. 그곳에서 4년 학습하는 동안 문학, 역사,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국어를 배웠다. 재학시절 여성평등에 대한 관심은 여성교육협회와 전독일여성연합과 관계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테 슈미트의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 라쌀레(1825~1864)의 글들을 읽었다. 1878년 봄, 슈타이버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사자격증 취득시험에 통과하고 난 직후 라이프찌히에 살고 있는 러시아 망명학생 그룹과 사귀게 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클라라의 자유주의적 교사, 어머니와 자매들은 그녀의 새로운 교제에 반대하였는데, 클라라는 그들과 헤어지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아우구스테 슈미트와 자기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녀는 오데사에서 온 러시아 망명자로 라이프찌히에 살면서 혁명집단에서의 활동과 목수 일을 하는 오십 체트킨을 새로운 교사로 만났다.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체트킨의 도움으로 클라라는 1878년 중반 경 완전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여자였기 때문에 당원이 되는 것이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클라라는 독일사회민주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 조직과 철저히 행동을 같이 했다. 1878년 10월 21일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통과시켰고, 곧바로 독일 사회민주당과 그 출판물들은 비합법적인 것으로 선언되고 지도자들은 추방당했다. 독일에 남아있는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클라라는 비합법화된 당과 추방당한 지도자들을 위해 자금을 모으면서 비합법적인 활동에 가담했다. 1880년 가을, 오십 체트킨이 독일에서 추방당할 때 까지 라이프찌히 교외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던 클라라는 추방당한 오십 체트킨이 있는 오스트리아에 가서 그와 재회하고 린쯔에 있는 부유한 공장소유자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린쯔에서 1년 반을 지낸 후 스위스 찌리히로 갔다가 오십 체트킨이 살고 있는 파리로 옮겼다. 파리에서 오십 체트킨과 함께 살면서 그의 성을 따랐으며 2년 동안에 두 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가부장적인 결혼법 하에서 자신의 독일시민권을 잃지 않기 위해 결혼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10년 가까이 사실상 혼인관계로 살았다. 추방당한 사회주의자들은 직장을 얻기가 어려웠고, 체트킨의 가족들은 매우 빈곤한 생활을 해야 했다. 체트킨 부부는 생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회주의 정기간행물에 글을 썼으며, 번역자로도 일했다. 클라라는 주부이며 어머니로서 가정교사로도 일했다. 이 모든 일로 그들이 얻은 수입은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였다. 집세를 지불하지 못해 새벽에 거리로 내쫓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체트킨부부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했다. 클라라는 라우라 라파르그(마르크스의 둘째 딸 라우라는 폴 라파르그와 결혼, 1911년 파리에서 동반자살했다)와 더불어 시위에 참여했으며, 문헌을 찍어내고 파리의 사회주의적 노동여성들을 결집해 나갔다. 이런 비참한 생활조건은 클라라의 건강에 굉장한 손상을 끼쳐, 1886년 봄에 그녀는 영양부족과 과로로 결핵에 걸려 눕게 되었다. 딸의 비참함을 안 클라라의 어머니는 화해를 제안하여 몇 달 동안 라이프찌히로 돌아가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 명의 외손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녀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1826~1900,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 창당함)를 다시 만나 라이프찌히의 비밀회합에서 외국에 있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활동을 보고하는 최초의 공식연설을 하였다. 3개월 남짓 머무르는 동안 매 주에 두 세 번씩 비밀회합에 나가 자신의 경험과 비합법적인 당 활동, 특히 운동에서 더욱 증대하고 있는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연설을 하였다. 그녀의 연설 속에는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의 『여성과 사회주의』(1879년 초판 발행)에 대해 아주 대중적이며 인기있는 논의가 포함되었다. 오직 부르주아 사회의 몰락을 통해서만 노동계급과 여성들은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논지는 그녀의 여성문제 분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베벨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가정을 나와 산업과 직장에 뛰어드는 것이 필연적인데, 그것은 경제적 발전이 그와 같은 정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들은 역사발전의 고도단계, 즉 남성들과 평등한 관계라고 하는 최종목표에 좀 더 접근하는 단계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양성간의 평등과 독립이 없다면 인류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클라라는 파리로 돌아가자 가사일과 오십 체트킨의 간호에 매진했으나, 오십 체트킨은 척추결핵으로 1889년 1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충격에서 벗어나자 1889년 7월 14일 바스티유감옥 함락 100주년에 열린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조직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베를린 노동여성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도록 선출되었고, 19개국 대표 400여 명 중 8명의 여성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대회 6일째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해방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대회는 클라라 체트킨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성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을 동일한 권리 하에서 노동계급속에 포함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민족의 차별 없이 남녀 노동자의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요구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독일대표들에 의해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집행부가 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당과 노동조합에 대한 선동을 계획하고 지도하는 여성선동위원회를 세울 것이 제안되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의 실각이후 반사회주의법의 연장이 거부되어 독일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클라라 체트킨도 독일로 돌아와 슈투트가르트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잡지 <<평등>>의 편집자가 되어 25년 가까이 활동했다. 1892년 1월 10일 <<평등>> 창간호 발간사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평등은 여성의 수천년 동안의 열등한 지위의 근본원인을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법령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 소유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고 썼다. 클라라 체트킨은 그 잡지를 사회민주당과 당 좌익의 정치적 원칙과 동일시했고, 조직된 노동계급 여성들을 위한 소식지로 만들었고, 사회민주주의의 기초위에서 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여성동지들을 진군하게 만드는 목적을 실행했다. 격주로 발간된 그 잡지는 좀 더 대중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으로 1905년 1월 이후에는 주부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보충판이 나왔다.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클라라 체트킨은 1908년 10월까지 <<평등>>과 보충판을 혼자서 편집했다. 1903년 11,000부, 1906년에는 67,000부, 1910년에는 85,000부, 1914년에는 125,000부가 배포된 그 잡지는 1908년에 12페이지에서 24페이지로 늘어나면서, 보충판을 책임질 보조편집자로 케이트 둔체를 기용했다. 사회주의 출판물에 글을 쓰고, <<평등>>을 편집하면서도 노동조합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무수한 독일노동조합의 국제적 연관을 수립하기 위해 자신의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했다. 인터내셔날 서기로도 활동하면서 수년 동안 300회가 넘는 연설을 수십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대중 앞에서 진행한 당 연설자 중 한 사람이었다. 1884년에 출판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을 읽고 여성억압의 기원을 남성의 육체적 우월성에 둠으로써 빈번히 부르주아 여권운동의 분석을 반영하고 있었던 초기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유재산의 발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확고히 가지게 되었고, 부르주아 여권주의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사회주의자 여성협의회에서 15개국 59명의 대표들은 사회주의 여성들 간의 조직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제여성뷰로를 설립하고 클라라 체트킨을 서기로 선출하고, 인터내셔날과 연합하는 사회주의 여성들의 공식 기관지로 <<평등>>을 지명하였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날의 두 번째 여성협의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사회주의 여성의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였고, 여성협의회는 매년 3월 8일을 모든 나라에서 세계여성의 날로 지정하고, 여성참정권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11년부터 최초의 세계여성의 날이 시작되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1892년부터 독일사회민주당의 당원으로 활동했고, 1895년 즈음 최상위 지도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 해에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부에 선출됨으로써 독일사회민주당 집행부에서 일하는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모든 점에서 독일 사회주의여성들의 대변자였지만, 당 지도부와의 관계는 조화롭지 못했다. 당내에 독자적인 여성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지도부에 의해 사회주의 여성들에 대한 결정은 전체 여성을 대표하는 한 명의 여성이 참여하는 당 실행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실행위원은 클라라 체트킨이 아니라 루이제 찌츠가 선출되었다, 여성조직의 독자성 문제만이 아니라 당 지도부와의 갈등은 독일사회민주당내에 성장하고 있는 수정주의에 대한 그녀의 비판 때문이기도 했다. 수정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에듀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의 지지자들이었다. 베른슈타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좀 더 균등하게 부를 분배하려는 경향과 함께 미래에 일어날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배제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무한한 팽창가능성을 보장하는 조직능력을 발전시키게 되었다고 하였다. 클라라 체트킨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 칼 리프크네히트(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와 함께 열정적으로 이러한 경향에 대해 투쟁하였다. 베른슈타인과 그들의 지지자들에 반대하는 주요한 연설과 무수한 논문을 썼으며, 당 교육담당 중앙위원회 구성원으로서 당학교 요원에 수정주의자들을 저지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을 요원으로 임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혁명정당의 주요한 전술로서 ‘의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의회 밖에서의 정치생활의 위대한 힘과 대중활동조직들에 더 많은 강조를 하였다. 당내에 독일제국주의에 대한 지지자들과도 투쟁하였고, 1914년 연방의회에서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채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을 때 공개적으로 당의 입장을 비난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당의 승인을 받지 않고 클라라 체트킨은 <<평등>>지 1914년 11월 7일지에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여성들에게>를 실었다. 1915년 3월 인터내셔날 사회주의 여성조직의 의장으로서 스위스 베른에서 ‘비합법적인’ 여성협의회를 소집하여 전쟁에 대한 반대 결의안을 채택했다. 베른의 여성협의회 직후에 그 집회에서 작성된 성명서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넉 달 동안 ‘보호감금조치’를 당했다. 1917년 3월 사회민주당 실행위원회는 클라라 체트킨을 <<평등>>의 편집진에서 제명하였다. 1917년 반전사회주의자 그룹이 창당한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하기 위해 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들은 1918년 스파르타쿠스연맹을 조직하고 1918년 독일공산당을 창당했는데,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클라라 체트킨도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우익사회주의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움직이는 반동적인 의용단에 의해 칼 피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후,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중앙위원회의 멤버로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였고, 쏘련과 독일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쏘련에 정착하였다. 1919년 3월에 열린 제3인터내셔날(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결의가 포함되었다. 그녀는 1920년 봄, 국제공산주의 여성서기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62세였다. 레닌과 여성문제에 대해 나눈 대화를 팜플렛으로 만들어 배포했으며, 국제노동계급운동과 인종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는 동안 자주 아파서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해야 했다. 국제적색원조를 조직해서 1931년 미국에서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9명의 흑인 소년들을 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씌워 전기의자에서 사형하려는 것을 구하는 국제 캠페인을 벌였다. 이 소년들은 사형집행은 면했지만 강간고발은 하나의 장난에 불과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지막 희생자가 풀려난 것은 1950년이었다. 1932년 여름, 클라라 체트킨은 시력상실과 질병, 그녀의 생명에 대한 나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매년 가장 나이가 많은 의원에 의해서 소집되는 연방의회의 전통에 따라서 8월 30일 연방의회 첫회기 소집을 맡았다. 그녀는 바이마르공화국(1918~1933, 군주제 폐지하고 사회민주당 집권) 첫 국회부터 마지막까지 독일공산당원으로서 연방의회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찌의 테러가 전국을 휩쓸고 있는 그 때에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극적으로 연단에 오른 그녀는 파시스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파시즘을 비판하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하며, 그것은 여전히 성적노예로서의 사슬을 짊어지고 있는 가장 억압받는 계급노예들인 여성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소비에트독일의 제 1차 소비에트대회를 소집하는 명예회장으로서 행운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연설을 끝맺었다. 그녀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했고, 쏘련으로 돌아간 클라라 체트킨은 6월 22일 사망했다. 그녀의 최후의 저작이며, 죽기 직전에 출판된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근로인민들』에서 1914년~1918년의 제국주의전쟁 동안의 반전운동과 노동계급과 전체인민들에게 미친 그 전쟁의 쓰라린 결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 특히 쏘련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하려는 자본주의국가 그리고 쏘련의 평화정책에 대해 분석하였다.

4. 선집에 실린 글들

1)여성해방을 위하여, 국제노동자대회(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의 연설, 1889년 7월 19일 파리
-인간해방을 자신의 기치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절반들에게 경제적 의존을 통한 정치적·사회적 노예화의 운명을 지워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종속되어있다. 그들이 노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는 한 그러한 종속은 계속될 것이다.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부터 자신들의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여성노동자들은 여성해방의 문제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문제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현 사회에서 이 문제가 사회의 기본적 변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다. 여성의 해방은 노동의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틀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오직, 사회주의 사회에서만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성도 자신들의 충분한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여성노동이 남성노동의 일자리를 뺏고 임금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여성노동을 철폐해해 한다는 주장에 대해 기계제 대공업에 의해 비숙련노동을 고용함으로써 더 낮은 임금과 더 많은 이윤을 착취하려는 자본의 책임임을 강조, 남성노동을 더욱 더 착취하기 위해 여성노동을 이용하는 자본을 향한 투쟁에서 남녀노동자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우리들의 이념과 전체노동계급의 이념이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요구하는 보호입법 외에 임신한 여성의 경우라는 예외만을 인정하며 어떤 특수한 여성들만의 보호입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입장은 후에 여성들의 특수한 보호입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해방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은 사회민주당에 참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도움 없이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 기치 하에서 자신들의 해방과 동등한 인간존재로서 인정을 받기위해 싸워나갈 것이다. 사회민주당과 손을 맞잡고 걸어가면서 이 투쟁이 수반하는 모든 부담과 희생을 나누어 가지고, 승리의 쟁취 이후에 정당하게 그들의 것인 모든 권리를 맹렬하게 요구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여성들은 권리만이 아니라 희생과 의무에 관한 한, 동일한 조건하에서 투사그룹이 되는데 있어서 남성동지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2)1893 여성노동과 노동조합조직,<<평등>> 1894년 11월 1일
-1893년 경제공황으로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가운데, 남성노동자 수는 감소하고 여성노동자 수는 증가하고 있다. 남성노동자의 절반이나 1/3밖에 되지 않은 임금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사회라면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과 이로 인한 여성노동의 참여는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한 자본주의는 축복을 저주로, 부유를 빈곤으로 변화시켰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행하는 산업 활동의 경제적 이익은 단지 극소수의 이권배당자들과 이윤강탈자들의 신성불가침한 길드에 도움을 줄 뿐이다.
-여성노동의 경제적 결과와 그것에 관련된 오용에 놀라 조직노동자들은 처음 얼마동안 여성노동을 금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임금문제라는 좁은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의식으로 계급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는 여성해방과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여성의 산업노동을 철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의 요구를 철회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법률적 보호와 노동조합 조직 속에 여성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것을 통해서 여성노동이 가져오는 좋지 않은 경제적 결과들을 감소시키려 한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존재는 더 높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시간을 위한 투쟁을 번번이 실패하게 만든다. 여성노동자는 경쟁자에서 파업파괴자로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여성노동의 임금이 낮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 모두를 위해 싸우고 모두가 개인을 위해서 싸우는 조직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용기와 강함, 저항정신, 저항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조직이 제공하는 의식화와 훈련이 결여되어 있다. 여성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은 긴급한 과제이다. 공장에서 혹은 작업장에서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하여 자신들의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조직된 여성노동자들의 수가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여성들의 임금은 더 빨리 더 많이 오를 것이며, 성의 차이와 무관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을 쉽사리 깨닫게 될 것이다. 남성노동자들과 동등하게 된 조직된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의 파업파괴자, 경쟁자이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현재 조직된 여성조합원의 비율은 첫째를 기록하고 있는 담배노동자의 경우 23.1%에 불과하고, 대부분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수행 실적 목표량은 과제가 지니고 있는 긴급성과 중요성에 미치지 못했다. 여성노동자의 조직화는 단지 소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기계노동조합원들이 공장과 작업장에서 자신의 여성동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때 의미 있는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젊음, 아름다움, 즐거움, 명량함 등에 따라 유혹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보기를 멈추어야 한다. 조잡하고 육체적인 성적 목적으로 여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여성노동자들을 여성프롤레타리아로, 계급노예제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동지로, 계급투쟁에 있어 필요불가결하고 동등한 전우로서 고려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노동조합의 중요한 과제는 계급투쟁을 위하여 모든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훈련시키고 교육하는 것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여성노동의 계속적인 증가와 그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일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함시키려는 노력으로 남성노동자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관심을 여성노동자들에게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은 자살을 범하게 될 것이다.

3)오직 프롤레타리아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 고타의 독일사회민주당대회에서의 연설, 1896년 10월 16일. (이 연설은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사회민주당의 최초의 주요한 정책성명서였다, 이후 팜플렛으로 출판되어 선동자료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 전(前)자본주의 시대에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생계수단과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었던 구래의 가족경제체제를 파괴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여성문제를 발생시킬 사회변동을 만들어낸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였다. 1882년 동안에 2,300만 명 중에서 550만 명이 전시간제로 고용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여성인구의 1/4이 가정 내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근대적 제 계급 내에서 각 계급의 상황에 따라 양상이 다른 여성문제가 존재한다. 소수상류계층의 여성들은 재산덕택에 자유롭게 살지만 여전히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다. 강요되지만 않는다면 그녀들은 언제라도 배우자로서, 주부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하인에게 떠맡길 수 있다. 이들의 요구의 핵심은 자유롭게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 재산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적 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 쁘띠부르주아, 중류층,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집단에서 여성문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들 계층에서 가정을 해체시키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주로 자본주의 생산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이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는 한 중간계급과 쁘띠부르주아는 점점 파멸을 향해 몰락해 갈 수 밖에 없다. 이 집단의 여성들은 아직 남성과 동등한 경제적 평등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동등한 전문직업훈련과 양성에 대한 동등한 취업기회의 보장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이러한 순수한 경제적 동기만이 아니라 ‘인형의 집’에서 뛰쳐나와 빵만이 아니라 정신적 자양과 개성의 발전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여성권리옹호의 지적·도덕적·경제적 노력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에 관한 한 여성문제를 창출한 것은 끊임없이 값싼 노동력을 요구하고 착취하려는 자본주의의 욕구 때문이다. 기계는 근육의 힘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고 여성의 노동은 남성과 똑같은 생산결과를 가져왔다. 여성은 값싼 노동력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거칠게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경제적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일말의 가능성도 얻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해방투쟁은 부르주아 여성이 자기 계급의 남성에 맞서 싸우는 투쟁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전체 자본가계급에 맞서 자기 계급 남성과 연합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요구들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요구들의 실현은 단지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더불어 동일한 무기로 무장하고 전투에 임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서만 생각할 뿐이다.
-최초로 계급정의, 계급국가, 계급지배라는 말의 의미가 여성에게 분명해진 것은 반사회주의법이었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족생활을 잔인하게 방해하는 세력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 것이 이 법이었다. 반사회주의법이 무수한 여성선동가들조차 이루지 못했던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법 아래에서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라는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며 위대한 행위가 나왔다. 베벨은 이 책에서 만일 우리가 여성들을 우리의 전우(동지)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지도이념은 여성에 대한 특수한 선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사회주의 선전을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과 직업의 차별 없이 함께 싸워나갈 때 자신의 해방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식으로 그것은 성의 차별 없이 함께 싸워나갈 때만 자신의 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투쟁 속으로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여성대중을 합류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적 이상의 승리와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의 하나이다.

4)모든 나라의 사회주의 여성들에게 , <라이프찌히 인민신문> 1917. 6.19.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에 의해 내가 27년간 이끌어왔던 <<평등>>편집장 자리로부터 쫓겨났다. 징계의 진짜 원인은 이 정간물의 원칙주의적 입장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다수파의 생각대로 입장을 수정하고, 전쟁 채권의 발행을 승인하고, 당투쟁 중지에 동의하고, 또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것들을 역사적 업적이라고 찬양하는 따위는 나로서는 국제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그런 정책에 대하여 침묵한다는 것은 비겁자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평등>>의 과업과 존재의 정당성은 국제 사회주의의 목표에 봉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사회주의만이 인류를 구제할 수 있으며, 만인에게 완전한 인권을 보장해 주는 세계사적 구원자임을 근로인민 여성에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잡지이다. 나는 인터내셔날의 서기로서 국제여성협의회 및 국제사회주의대회의 명령과 결정에 따라 이 집지를 편집해왔다. 각국의 지도적 여성동지들과 함께 일하고 협력하여 오는 동안에 나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완전히 성격이 다른 정간물에 <<평등>>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도 없다. 소위 ‘정화’된 <<평등>>은 사회주의 여성 인터내셔날의 기관지 일 수 없다. 따라서 각국 여성 동지들은 이와 같은 사정을 알고 모든 보고서와 원고를 인터내셔날 서기인 나에게 보내주기 바란다. 나에 대한 징계처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여성 인터내셔날은 아직 고아가 되지는 않았다. 옛 <<평등>>을 대신할 새로운 잡지가 곧 나타날 것이며, 이를 통해 여성동지들의 원고를 게재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임무가 될 것이다.
-나는 차기 국제여성협의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여 궁극적인 해결책을 내리게 될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임시방책에 대하여 외국 여성동지들이 동의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차기 국제여성협의회가 충성엔 충성으로 보답한다는 것과 <<평등>>이 사멸하면서까지 지킨 원칙들을 만장일치로 지지해주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있어야 할 것은 순수한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곳이다. 국제사회주의 만세. 클라라 체트킨 인터내셔날 서기.

5)회교도 여성 클럽에서 , 1926. 『해방된 코카서스에서』
-티플러스(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이며 쿠라강 연변의 소련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회교도 여성 클럽은 공산당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당 여성분과의 특수 과업이다. 이 클럽은 소비에트 체제의 확립으로 회교도 여성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소비에트법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 한 성의 다른 성에 대한 특권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 법안 자체가 그들에게는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회교도 여성 클럽은 모든 사회 영역에서 소비에트가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갈망하며 이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제 막 깨어난 회교 여성 대다수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낡은 편견으로부터 방해받고 있다. 때문에 대다수 여성들은 남성들과 나란히 서서 자신들의 지위를 주장하기를 꺼리게 된다. 굳게 잠긴 하렘(회교국의 부인들이 거주하는 방)의 문은 여성들의 소망과 그 소망의 실현 사이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티플러스의 남녀 동지들은 회교도 여성들을 위해 차단된 가정 내 존재와 집회 장소의 중간에 위치하는 새로운 반(半)거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회교 여성들의 숨겨진 열망을 뚜렷한 의식과 투쟁의지로 성장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조지아의 혁명적 재구성은 회교 여성의 의지에 반대하거나, 그들의 협력 없이는 달성하기 불가능함을 알고서부터 그들은 회교도 여성 클럽을 조직하여 위에서 말한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클럽에서 만난 한 연사는 이런 말을 했다. “혁명 전에 우리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들은 고작 10~12세 혹은 그 보다 더 어린 나이의 우리를 마치 양처럼 팔았습니다. 남편은 우리에게 폭압적으로 대하면서도 애정과 사랑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대로 몽둥이 채찍으로 우리를 때렸습니다. 우리는 밤낮 노예처럼 봉사해야 했습니다. 싫증이 나면 지옥으로 꺼져버리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친구들에게 하룻밤 여자로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멋대로 굶기기도 했습니다. 기쁨이요, 도움이 되기도 하는 귀여운 딸들을 빼앗아갔습니다. 우리를 사들였듯이 딸들을 팔아버렸습니다. 어느 회교 경전도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법률상으로 도움을 줄 재판관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매 여러분, 지금 모든 것은 참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혁명은 마치 강력한 폭풍처럼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부정과 노예제도가 타파되었으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6)파시즘을 쳐부수자, 연방의회 명예 의장의 개회사, 1932.8.30. 『1932년 제6대 연방의회 회기간의 의사록』, 1932년 베를린
-독일의 정치권력은 연방의회를 배제해 버리고, 독점자본주의와 대농장주의 시녀에 불과한 방어 내각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그 주축 세력은 국방군의 장성들이다. 방어내각은 그 절대권력에도 불구하고 대내외 정책에서 실패하였다. 그들은 고통에 맞서 싸울 대중의 권리를 부정하고 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농장주, 파산한 산업가, 대은행가, 조선업자와 파렴치한 방관자들뿐이다. 과세, 관세와 산업정책은 광범위한 노동 계층을 착취하여 소수의 특정 이익집단에 이윤을 갖다 바치는 것이며 수입, 수출과 소비를 제한함으로써 위기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외교정책은 노동인민의 이익을 해치고, 주로 제국주의적 발상에 의해 수립되며, 오락가락하며 독일을 더욱 더 베르사이유 조약의 체결국들에 의존케 만드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방어 내각은 나찌 돌격대 위에 단일 깃발을 들고 파시스트 내란군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지난 수 주 간의 살육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 그들은 쓸데없이 국가 간의 힘 분할을 놓고 동맹국들과 싸움을 야기 시켜 정부의 정치적·도덕적 과오를 인민들이 잊도록 하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피는 그들을 영원히 살인자 파시스트들과 연계시킬 것이다.
-연방의회는 현재의 특정 문제를 주제로 채택하기 전에 먼저 그 중심이 되는 과업에 열중해야 한다. 헌법을 어기고 연방의회를 완전히 배제시켜 버린 공화국 행정부를 타도하는 것이다. 이 투쟁은 철권으로 모든 노동계급의 의사표시를 막으려고 하는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힘은 의회의 의석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적들도 잘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힘은 오히려 정치조직, 노조 조직 및 문화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대중 스트라이크가 가장 심각한 경제 침체 기간에도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벨기에의 예에서 입증되고 있다.
-가장 긴요한 당면과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 자신의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고, 나아가 조직의 세력과 힘을 보존하기 위해서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노동자계급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과 고통받고 해방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파시즘과 정부 내의 그 하수인들에 맞선 연합전선에 가담해야 한다. 독일에서 구성되고 있는 노동자 연합전선에 수백만 명의 여성들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성노예의 사슬에 묶여있는 가장 억압받는 노예 계급이다.
-이제 나는 명예의장으로서 임무를 완수하고, 건강이 좋지 않더라도 장차 소비에트 독일의 첫 소비에트 의회의 명예 의장이 되어 지금처럼 개회사를 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본 개회사를 맺는 바이다.

5. 글을 마치며

이 책은 두 개의 서문과 20개의 클라라 체트킨의 연설문 혹은 <<평등>>이나 <<라이프찌히 인민신문>>에 실린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안젤라 Y. 데이비스의 서문은 클라라 체트킨의 이론과 실천의 역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면, 두 번째 필립 S. 포너의 서문은 클라라 체트킨의 혁명적 삶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서술하고 있다. 선집에 실린 총 20개의 글들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여섯 편의 글을 요약해 보았다.


여성노동은 기계제 대공업이 등장하면서 남성노동을 밀어내면서 남성 임금의 절반이나 1/3 정도의 값싼 노동으로 자본의 이윤에 이바지하기 위해 등장했다. 러다이트운동을 거쳐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조직된 남성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여성노동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노동이 남성노동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노동자의 책임이 아니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노동자를 조직해서 남녀노동자의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또한 남녀노동자의 단결로 자본에 대항해야 함을 강조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정주노동자들의 태도는 초기 여성노동에 대한 남성노동자들의 태도와 아주 유사하다. 클라라 체트킨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를 단순히 임금문제라는 좁은 시각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선전으로 계급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각도에서 즉 여성의 해방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한, 그것의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립해 왔는데, 처음에는 독자적인 여성조직의 문제로 부딪혔다. 이것은 이후 1920년 레닌과의 대화에서 여성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독자적인 여성조직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클라라 체트킨의 입장이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베른슈타인과 그 지지자들이 가진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 흐름과 대립했고, 이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독일사민당을 탈당하고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스파르타쿠스단으로, 그리고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이후 제3인터내셔날(코민테른)의 여성서기로 국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지도하였다. 가장 마지막에 요약한 <파시즘을 쳐부수자>는 1932년 8월 30일, 독일 연방의회의 최고령자(75세)로서 관행에 따라 의회를 소집하고 개회사를 하는 권한이 주어져서 위험을 무릅쓰고 쏘련에서 독일로 돌아와 한 연설이다. 당시 제 1당이던 나찌들이 맨 앞줄에 앉아 있는 가운데 75세의 여성혁명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파시즘에 대항해서 노동자 통일전선 건설을 제안하고 특히 여성들을 제외시키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의 간절한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고, 1933년 3월 히틀러는 일당독재를 확립하게 된다. 쏘련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던 클라라 체트킨은 1933년 6월 22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18년 창당한 독일공산당은 32년 총선거에서 의석을 89석을 얻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33년 이후 히틀러정권의 탄압으로 비합법 정당이 되었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동독의 인민민주주의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2011년 3월 8일 연합뉴스의 기사 <세계여성의 날…잊혀진 영웅 제트킨>에 의하면 독일 통일이 되기 전 동독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존경받는 혁명가이며 국가적 영웅이었다. 10마르크 지폐에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생겼고, 그의 이름으로 불렸던 학교와 집단농장이 있었다. 그가 태어나서 15세까지 자란 뷔데라우 마을 교차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동독이 무너진 후 어느 날 그 동상은 쓰러져 있었고, 지금은 그가 태어난 가정집 앞에 서 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거리도 학교도 집단농장도 지금은 없어졌다. 매년 3월 8일이면 혁명의 순례지가 되어 방문객들로 넘쳐났던 ‘클라라 체트킨 기념 유적지’는 ‘옛마을 학교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년 200명 정도가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클라라 체트킨은 3·8 여성의 날을 제안한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의 치열했던 혁명적 삶과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그 발자취들은 이제 너무나 잊혀져 가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이 위대한 혁명가의 이론과 실천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준 동지들에게 감사한다. 클라라 체트킨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자면 완전한 여성해방은 오직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고, 또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이론과 실천으로 보여준 위대한 혁명가의 삶에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참고자료
필립 S. 포니, 조금안 옮김 『클라라 체트킨 선집』 동녘, 1986
클라라 체트킨 <여성문제에 대한 레닌과의 대화>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지음, 이현애, 정호영 옮김, 『위대한 사랑』 , 노사과연, 2013
<세계여성의 날…잊혀진 영웅 제트킨> 연합뉴스, 20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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