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트21> 59호 | online 입력 201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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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끝내 사회주의 관련 구절을 삭제하는 당 강령 개정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이번에 추진한 당 강령 개정안의 핵심은 기존 강령에서 사회주의 관련 구절과 반자본주의적 내용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었다.
그래서 당대회를 앞두고 조중동은 이런 후퇴를 환영하며 더 나아가 ‘종북주의까지 버리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이 사실은 도대체 강령 개정이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지 잘 보여 준 사례였다.

△6월 19일 오전 일산 킨텍스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사회주의 관련 구절 삭제에 반대하는 당원들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유병규
반면, 다함께 회원들을 비롯한 이런 후퇴를 반대하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당 대회를 앞두고 지난 며칠간 대대적인 강령 개정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불과 닷새만에 총 8백19명의 당원들이 강령 개정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이병수 대구시당 위원장, 성소수자위원회,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 씨 등 당내 원칙있는 활동가들도 공개적인 비판 주장을 펼쳤다.
당대회 첫날 열린 당 강령 개정 토론회에서도 대부분의 패널들과 압도다수의 청중 발언자들이 강령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1백여 명의 당원들이 모여 강령 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다함께가 주도한 이런 캠페인의 결과 당 강령 개정 문제는 급속하게 이번 당 대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의원대회가 열렸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지도부도 개정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원래 지도부가 기대했던 만장일치 통과는 어림도 없다는 게 분명했다.
어림 없는
19일 오전에 시작된 당대회에서 첫 안건은 진보대통합 연석회의 합의문 승인이었다. 연석회의 합의문 자체는 만장일치로 통과됐지만, 합의문 내용 중 ‘내년 선거에서 진보 후보의 독자완주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는 말과 모순되는 구절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진보대통합을 민주대연합(민주당과 계급연합)으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참여당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당 지도부가 참여당을 진보대통합에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야 하고, 원칙있는 진보대통합과 투쟁을 건설할 때 진정으로 참여당 지지자들을 진보 쪽으로 견인할 수 있다는 비판이었다.

△6월 19일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이 표결을 하고 있다. ⓒ유병규
이어서 당 강령 개정 안건 논의가 시작되자 수십 명의 당원들이 대회장 안에서 개정에 반대하는 침묵 팻말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수많은 대의원들이 강령 개정이 왜 정치적 후퇴인지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최영준 대의원은 이렇게 비판했다.
“개정안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노동존중’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민주당 손학규 대표도 쓰는 표현이다. 노동자가 주체라는 의미에서 노동자를 객체화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 밖에도 ‘노동자 자주관리’,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 종식’ 등등의 문구도 다 삭제됐다. ‘공적 소유’도 ‘소유구조의 다변화’로 바뀌었다.”
또, 사회주의 신념을 지킨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당원들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냐는 비판들도 나왔다.
대구시당 이병수 위원장은 “강령개정위원회 만들 때 특정 입장만 반영하면 통합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과연 그 정신대로 하고 있나? 당 내 사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다 있는데 그런 입장들이 과연 세심하게 조율된 것인가”라며 당권파의 패권주의적 밀어붙이기를 비판했다.
강화연 대의원은 ‘중소기업주도 포함하는 계급연합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최규엽 강령개정위원장의 주장에 대해 “중소기업주도 노동자를 고용하고 착취한다” 하고 비판했다.
눙치고 넘어가기
당 강령 개정과 같은 중대 사안을 당원들에게 충분히 알리지도 않고 개정하려 한다는 비판도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최규엽 위원장과 당 지도부는 계속 이런 제기들을 얼버무리거나 발뺌했다. 대의원대회 안건지를 일주일 전에 공지하기로 돼 있는 규정을 지키지 않아서 개정안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는 비판에 ‘중앙위 회의 결과와 회의 자료에 결국 다 나와있는 내용’이라는 식으로 넘어간 게 대표적이다.
성소수자위원회 활동가는 “강령 개정 반대 의견서까지 제출했음에도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는데, 민주적으로 토론됐다고 얘기하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최규엽 위원장은 “나도 사회주의를 무지하게 좋아한다”, “이 강령에는 결국 공산주의도 담겨있다”, “어차피 당원들이 현재 강령도 잘 모른다”며 계속 눙치고 넘어가거나 물타기식 답변으로 일관했다.
특히 ‘진보적 민주주의가 바로 해방 정국 때 선배들이 주장했던 것이고 반제국주의’라는 최규엽 위원장의 주장은 역사적 무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조선 공산당이 스탈린주의 노선에 따라 미국을 해방자로 환영하고 혁명을 민주주의 단계로 제한하려 하면서 재앙을 낳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강령 개정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가령, 최규엽 위원장은 ‘사회주의 문구가 있으면 우파가 공격할 것이다’, ‘수권정당이 되려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사회주의가 이상으로는 유효하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등의 주장을 했다.
즉 ‘대안도 되지 못하는 사회주의를 붙잡고 있다가는 우파들의 공격만 당할 테니 급진성을 탈색해서 선거에서 표를 얻는 게 집권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진보정당으로서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실용적 선거주의 궁리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요즘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민주당 등과 선거연합에 치중하고 있고 나아가 연립정부까지 추진하고 있는 것과도 연결돼 있다.
최규엽 위원장은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고 연방제 방식의 통일국가 세워야 한다’는 내용을 강령 개정안에 담았다는 것도 강조했다. 이것은 특정 정파가 중시하는 가치로서, 이런 강령 개정이 통합진보정당 추진에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대의원들의 질의와 토론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모두 강령의 후퇴에 반대하는 주장이었다.

△김인식 대의원이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 관련 구절 삭제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유병규
김인식 대의원은 “현재 강령에선 ‘노동’이라는 단어가 157회 나오지만 개정안에선 96회 나오며, ‘계급’은 7회에서 2회로, ‘소수자’는 5회에서 1회, ‘사회주의’는 4회에서 아예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반면 늘어나는 단어는 ‘자주’가 26회에서 41회로 늘고, ‘통일’도 늘었다. 강령 개정안은 불비례적이다. 또 강령은 여론조사처럼 당원의 현재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 지향하는 미래 사회체제를 보여줘야 한다.”
전지윤 대의원도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해방 사회를 건설한다’는 당의 강령을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이 커지는 지금 왜 후퇴시켜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2008년에 일심회로 탄압받던 당원들을 제명하자던 주장과 지금 사회주의를 빼자는 주장에서 비슷한 논리를 본다”고 비판했다.
수정안
지도부의 곤혹스러움 때문인지 강령개정위원이 타협안을 내기도 했다. 강령 개정안에 “사회주의 이상을 계승하고”라는 구절을 추가하자는 수정 동의안이었다.
어차피 강령 개정을 막기 어렵다면 ‘사회주의’라는 말이라도 남기자는 심정에서 이 타협안을 지지한 대의원들도 있었다. 강령 개정 반대 서명에 함께했던 한 대의원도 “나는 강령 수정에 반대하지만, 이거라도 안 들어가면 가슴 아파하는 동지들 많을 것 같아 이거라도 지지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강령 개정 반대 캠페인을 주도했던 당원들의 많은 수는 이 타협안을 거부했다. 왜냐면 이 타협안이 ‘사회주의 이상을 계승하고’라는 한 문구만 추가하는 것일 뿐 전반적인 강령의 후퇴를 되돌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의 이상이 좋다는 것은 자본가들도 인정하는 말”이지만, “사회주의의 원칙은 논의의 여지가 있으니 빼자”는 수정안 제안자의 말처럼 이것은 원래 강령의 취지를 살리자는 취지가 아니었다.
물론 강령 개정에 반대하는 당원들의 적극적인 주장과 활동이 당 지도부로 하여금 이런 타협안을 내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당 강령의 전반적인 후퇴를 중단할 생각은 없이 반대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해 타협안을 낸 것이었다. 결국 이 수정안은 강령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찬성을 얻지 못해 부결됐다.(587명 중 374명 찬성)
강령개정안이 “당원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고, 진보통합 시점에서 왜 강령 개정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안건반려안도 나왔다. 비록 통과되진 못했지만 이 제안도 192명이나 되는 대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논란과 논쟁 끝에 사회주의 구절을 삭제한 강령개정안이 대의원 600명 중 421명의 찬성을 얻어 가까스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것은 당 지도부의 상처뿐인 승리이다. 당 지도부는 자신감은커녕, 반자본주의적 강령의 후퇴에 반대하는 당원들의 압력 때문에 자신들의 후퇴가 좌절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조준호 당대회 의장은 계속해서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발언 기회와 내용을 제한하려 했고, 강령 개정 반대 팻말을 들고 대회장 앞에 서있던 당원들에게 계속 뒤로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심지어 4명에게 개정안에 대한 반대 발언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찬성 발언이 한 명도 나오지 않자 발언 기회조차 박탈해 버렸다.
강령 개정에 대한 찬성 발언 신청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그것을 핑계로 반대 발언의 기회를 제한하려는 지도부의 의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강령 개정 찬성의 논리가 궁색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8백여 당원의 목소리
이렇게 했는데도 당 지도부는 겨우 20여 표 차로 아슬아슬하게 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조중동의 눈높이를 보면서 노동자 민중 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되돌리려 한다’는 불명예스러운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후퇴를 주도한 셈이다. 이런 상처뿐인 승리를 두고 기뻐하는 당 지도부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결국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 계승 발전’이라는 상징을 제거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후퇴를 가져 온 장본인이 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이제 ‘강령에 사회주의를 담고 있는 유일한 제도권 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조차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보수 언론의 칭찬을 받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매우 다양한 통제 시도와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30퍼센트나 되는 대의원들이 그런 후퇴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목격해야 했다. 이번 강령 개정 반대 서명에 함께 했던 8백여 당원들의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무시할 수 없는 원칙 있고 단단한 좌파들이 의미 있는 규모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강령 개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 사람들은 좌절할 이유가 없다. 이번에 우리는 비록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진작부터 개혁주의적 실천을 해 왔지만, 강령에서마저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삭제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후퇴를 의미한다고 보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제 그 투쟁은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의 강령을 만드는 과정에도 이어져야 한다.
이번에 우리가 벌인 투쟁은 진보대통합당 건설 과정에서 그 당의 강령과 정책을 더 왼쪽으로 이동시켜서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더 고양시키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더 중요하고 더 의미있는 투쟁과 과제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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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 후퇴] 지도부의 상처뿐인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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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태그 : 2011년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 사회주의 강령 삭제, 민주노동당 강령 개정, 진보대통합, 사회주의 구절 삭제
기사주소 : http://www.left21.com/article/9844
ⓒ<레프트21> 59호 | online 입력 2011-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