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나 가따리가 스스로는 반파시즘을 말하지만 그 명목하에 (오히려 안전하게) 파시스트적 이론을 퍼뜨리고 파시즘적 실천을 한다. 잠입 공작의 정치.
* 그들은 자기 주장에 대해 '논증‘을 제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성실성의 부족과 오만함.
* 그들 담론은 ‘인식대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인식대상의 내적 논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단조롭게 말한다. 추상적 일반적 세계관적 범주를 모든 것에 적용한다. 탈코드화, 탈영토화, 도주선, 전쟁기계..등등. 여러 가지 변주를 행하지만(분자적인 것, 욕망하는 기계 등등) 이분법이 전체를 관통한다.
* 앙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 : 그들의 이론적 파시즘은 그들의 프로이트 비판과 연관된다.
* 표상과 주체성을 결여한 ‘욕망하는 기계’는 맹목적이다. 사회성 자체를 부정. 그들이 말하는 정신분열증은 욕망하는 기계가 사회체의 등록과 규제에서 이탈하는 것. 파시즘은 사회체의 코드화와 규제를 거슬러 이탈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흐름.
* 파시즘은 ‘억압적 탈승화’ ; 승화와는 무관하고, 충동(과 욕망하는 기계)의 직접적 분출로 이어진다. 무의식이 프로이트적 자아에 의한 매개 없이 직접 사회화되는 것, 그것(이드/다스 에스)이 자아의 매개 없이 초자아와 직접 결합하는 것,
--들뢰즈 가타리도 (프로이트적 의미의 자아인) 주체성을 제거하고 욕망하는 기계를 직접 사회화할 것을 기획.
--라이히, 마르쿠제는 ‘해방’이 실현될 조건을 탐색하는데 2인은 그러하지 않다. 파시스트 혁명만이 ‘욕망하는 기계’의 도주를 통해 이뤄진다.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노골적 파시즘의 경향이 ‘천개의 고원’에서는 일정하게 개선되는 반면,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은 더 퇴행한다. ‘분자적 도주선’이 갖는 (파시즘 또는 죽음으로 이어질) 위험을 지적한다. 도주선은 어떤 연대성도 사회성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은 분자적 도주선이 창조적 잠재력을 실현할 사회조건은 탐색하지 않는다. 단지 그 잠재력을 갖는다고 선언할 뿐이다. 그 위험을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도주하라’고 외친다. 그 도주선은 맹목적 동물물리학적 선이라서 감수성/지성으로 순화되지 않으면 위험한데도.
--그들은 하이덱거에게 파시즘을 전수한 ‘윙거’를 찬양한다. 병사와 노동자가 결합한 독일적 민족공동체의 구상을. 파시스트 이론가 중 가장 전체주의적인 윙거를.
--그들은 ‘인종’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는 파시스트 철학의 범주다. 이들은 인간의 동일성과 사유의 보편성을 부정한다. 파시즘의 위험은 별것 아니라고도 말한다.
---그들은 ‘전쟁기계’가 국가장치에 포섭될 경우 파시즘으로 이어지거나 ‘공포의 평화’로 이어지고, 국가장치에 포섭되지 않을 경우도 자살기계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기로들 속에서도 전쟁기계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을 본다. 자본주의는 부단히 정신분열증을 산출하므로, 욕망하는 기계들이 부단히 자본주의를 벗어나고 있으므로 그 이탈적 흐름 위에서 전쟁기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단지 욕망하는 기계의 도주의 흐름 위에 있을 뿐인 전쟁기계가 자본주의와 대결할 수 있을까?
--국가의 왕립 과학에 대립하는 전쟁기계의 유목과학은 음모와 쿠데타는 실현할 수 있어도 혁명을 이뤄주지는 못한다. 혁명은 자신의 주관성을 직접 사회화하려는 ‘마음의 법칙’에 대립한다. 혁명은 인간의 동일성과 개별성의 인식을 전제하는데 유목과학은 특정 집단의 목적합리성에 종속되어 보편주의적 사고능력을 결여한, 인종주의적인 것이다.
그들은 전쟁기계가 창조적 도주선을 그린다지만 이는 파시즘으로 흐를 가능성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