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정오께 교섭에 들어가려는 노측 교섭위원들과 주간연속2교대 재협상을 요구하는 대의원들
현자노조, 10년 전과 10년 후[2008년 8월 25일]10년 전 오늘, 양정벌을 가득 메운 조합원들의 결사항전의 함성을 뒤로 한 채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필요하다”며 정리해고에 합의한 치욕의 역사가 있었다. 아무리 지도부가, 일부 노동운동가가, 역사가가 ‘아름다운 투쟁’이라고 추켜세워도 투쟁에 참여한 2만 여명의 기억 속엔 노동조합이 스스로 자기 조합원을 정리해고 시킨 배반의 역사로 각인되어 있다. 그 투쟁의 결과, 조합원들도 더 이상 노동조합을 믿을 수 없다며 떠나가게 만든 치욕스런 투쟁으로 남아 있다. 36일간의 영웅적인 공장점거투쟁, 사전에 배치되었던 민주노총 1차 총파업, 그리고 자체 투쟁까지 포함한다면 몇 달간의 힘겨운 투쟁을 행복하게 했지만 지도부의 결단이라는 미명으로 순식간에 조합원들을 배신했던 투쟁의 역사!
영웅적인 투쟁의 역사, 치욕과 배신의 역사 김대중 정부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들었던 양정벌에 울려퍼진 함성! 그 함성이 직권조인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 그 자리에 김광식 집행부는 속죄한다는 듯이 “부결하라”고 했다. 조합원들은 압도적으로 부결시켰으나 무엇 하나 바꿔놓지 못했다. 김광식 집행부는 사퇴했고 정갑득 위원장이 집권했지만 초토화된 현장을 살려내지 못했다. 희망퇴직, 무급휴직, 정리해고로 텅 비어있는 자리에 사측 맘대로 배치전환 했고 조합원은 말 잘 듣는 어린 양 마냥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정리해고자 전원이 복귀할 때까지 몇 년간 현대자동차는 사측 말이 법인 냥 통용되는 절망의 공장이 되어버렸다.
"입 다물고 나중에 부결투표나 해라"10년 후 오늘 투쟁의 역사가 빠진 채 배신의 역사만 되풀이 될 것인가. 08년 투쟁이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윤해모 집행부가 조합원들에게 어떻게 각인될지 아직까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으론 무쟁의 2년의 실현자, 주간연속2교대제를 팔아먹은 집행부, 조합원을 기만한 집행부로 각인될 것 같다. 협상장을 가로막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대의원들을 후안무치한 놈으로 만들면서까지 자본가의 언론은 노골적으로 윤해모 집행부를 편들고 있다.
이에 화답하듯 윤해모 지부장은 매일경제신문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는 노사가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의견접근을 이뤘다”며 “제도가 시행돼도 생산량과 임금을 현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등 노력했고 조합원을 위해 최선을 다한 안인만큼 교섭을 막지 말고 잠정합의가 되면 부결운동을 통해 입장을 표명하라”고 말했다. 의견접근안(밀실 잠정합의안)을 폐기하라는 대의원, 현장조직위원들의 현장투쟁을 일부 소수 대의원들의 지각없는 행동 --노노 갈등을 부추기는 행동-- 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나중에 부결투표만하라고 한다. 민주노조, 현장조직력 강화 더 나아가 현장권력 쟁취를 운운하면서 하는 짓거리란 게 현장운동을 짓밟는 행위인가. 10년 전보다 죽어 있는 현장, 입만 열면 현장을 되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방치하는 현장, 아니 사측과 함께 현장 죽이기에 나서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요식행위가 되어버린 대의원 간담회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전통 중 하나는 대의원들의 총의를 모으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 어려움에 처할 때, 중요 사안을 힘 있게 결정하고 자본과 맞서 싸울 때, 혹은 전략상 후퇴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대의원대회, 또는 대의원간담회를 개최해 왔다. 21년의 투쟁의 역사를 가진 현대자동차노조 역시 그래왔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대의원대회, 대의원간담회는 집행부의 의지를 강요하는 요식행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특히 대의원간담회는 민주적 절차의 외피로 활용하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21세기 들어 현자노조는 그 심각성이 더 커졌다. 2001년 7월 5일 총파업을 무산시킨 이상욱 집행부, 2002년 발전노조의 대정부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민주노총의 무기한 총파업을 4시간 파업으로 재해석해 무산시킨 이헌구 집행부도 대의원대회를 통해 그렇게 했다.
08년 윤해모 집행부의 의견접근안에 대한 간담회 역시 위와 다를 바 없다. 울산 대의원 간담회에 이어 전 공장 대의원 간담회가 진행되는 동안 간담회장이 성토장이 되어도 집행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교섭권과 체결권은 자신에게 있다며 권한에 도전하지 말라는 지부장의 모습은 10년 전보다 훨씬 더 절대 권력화 되어 있다. 이는 현자지부만의 모습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조합 임원들의 권력은 한층 강화되고 조합원들은 부르주아 선거마냥 표 찍는 기계 --위원장 선거, 쟁의행위 찬반투표, 가 ․ 부결투표 -- 로 전락하도록 만들고 있는 게 노동조합운동의 현주소이다. 현장투쟁을 파괴하려는 자본만큼 현장투쟁을 통제하려고 하는 게 노동조합운동의 현주소다.
"21년 동안 이런 임단투는 처음"21년 역사상 19번의 파업을 경험한 조합원들은 매년 있었던 뜨거운 여름을 기억한다. 매년 교섭과 교섭결렬 그리고 파업, 잠정합의안과 파업종결 및 가 ․ 부결투쟁 이런 마무리를 수 없이 겪었던 조합원들. 특히 유난히 뜨거운 여름을 지새웠던 10년 전 여름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조합원들은 사측과 언론이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오늘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울산, 전주, 아산 할 것 없이 모든 조합원들이 말한다. “21년 동안 이런 임단투는 처음”이라고. 이를 전주공장의 자주회는 대자보로 “노동강도 강화 없는, 실질임금 삭감 없는, 고용불안 없는 3무원칙”이 “조합원 없는, 대의원 없는, 교섭위원 없는 3무원칙”으로 변질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무엇이 조합원들에게 “21년 동안 이런 임단투는 처음”이라고 한탄하게 만들었나? 교섭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조합원, 대의원, 하물며 교섭위원조차 모른다고 한다. 조합원들은 지부 지도부가 “합의안이 도출되지 않았기에 해줄 말이 없다”는 어이없는 변명에 놀라자빠질 지경이다.
교섭과 파업 - 10년 전과 오늘10년 전 우린 공장점거파업을 했다. 작년 한 해를 빼고 매년 파업했다. 그래서 보수언론은 파업을 위한 파업을 한다고, 더운 여름 쉬려고 파업한다는 말까지 지어냈다. 여지껏 노동조합은 교섭은 파업투쟁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역으로 파업은 노사간의 힘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어 교섭에 힘을 실을 수 있다고 했다.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관계에서 말로, 정책으로 노사가 윈-윈 하는 게임이란 없다. 따라서 파업은 교섭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전술이었다. 게다가 파업에 돌입하면 자본가가 주인인 세상이 아닌 노동자의 새 세상을 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작년 무쟁의 전까지 우린 파업을 했다. 노동조합의 요구, 현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파업으로, 일상적인 라인 정지로 조합원의 요구를 관철했다. 하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 야간노동에 시달리는 조합원의 사활적인 요구인 주간연속2교대제를 놓고 교섭만으로 의견접근안(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조합원들은 분노하고 있다. 지부장에게 의견접근안(잠정합의안)이 “최선의 안”일지 모른다. 지부장의 말을 인정한다 해도 파업 없이 교섭만으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안일뿐이다. 파업으로 쟁취할 안과 비교한다면 “최선의 안”은 “차선의 안”에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조합원들은 머리 좋고 말빨 있는 실무위원, 교섭위원 몇 명의 논리로 사측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보수 언론에 뭇매를 맞으면서도 파업을 한다.
교섭이 파업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측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조합원들의 핵심요구를 묵사발 내는 것을 폭로하고, 그 분노를 파업투쟁의 자양분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08년 지금 과거와 같은 교섭과 파업투쟁이 있는가? 과연 교섭과 파업투쟁의 관계 설정을 ‘파업에 종속된 교섭’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07년, 08년을 제외하면 파업과 교섭을 병행했다(파업을 했다는 것과 파업전술이 올바르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임을 숙지해 주셨으면 한다). 파업 과정은 사측의 양보안이 조금씩 조금씩 나오는 과정이었다. 조합원들의 단결력은 파업 과정에서 나온다. 조합원들의 자신감도 여기에서 나온다. 무쟁의는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앗아간다.
파업의 역사와 무쟁의 역사는 180도 다르다. 무쟁의 사업장 중 살아있는 현장이 있는가. 회사가 하자고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전환배치하면 쫓겨 가면 되고, 임금삭감하면 허리띠 졸라매면 되고, 나중엔 정리해고 하면 잘리면 된다. 효성노조는 최근 조합원이 사측의 전환배치 강요에 시달려 자살해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노조는 87년 보다 조합원 숫자가 수천 명이 줄어도 사측과 얼굴 맞대고 희희낙락한다(정규직은 수천 명이 줄어도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더 많아졌다). 현자 자본이 무쟁의에 목숨 거는 이유다. 2시간 파업지침이 ‘보고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도 어쨌든 파업인데, 그런데도 웬일로 사측이 B55코드 대신 시간할애를 해 준 것을 보면 얼마나 애타게 무쟁의를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만능이 되어버린, 그러나 아무것도 쟁취할 수 없는 부결투쟁교섭과 파업이 이렇게 망가진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관료화되었기 때문이다. 현자지부는 관행으로 잠정합의안이 나오면 3일 뒤 찬반투표에 부친다. 08년 임투와 주간연속2교대제 투쟁은 보고대회, 집회, 파업이 없었으므로 잠정합의안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를 조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부장이 주간연속2교대의 잠정합의안이라고 했던 의견접근안이 나온 상태에서 사측이 돈으로 조합원의 눈을 멀게 할 요량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대의원, 현장위원들이 협상장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이제 겨우 현장투쟁을 조직할 시간을 벌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현장에서 지적하는 실수나 오류를 극복하려 하기보다 선거로 심판받는 걸 선호한다. 현장에서 제기하는 것을 극복하려면 사측과 맞서 싸워야 하지만 투표는 조합원들 내부의 심판을 받는 것이기에 더 편안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관료는 그러는 동안 노동조합이 만신창이가 된다는 걸 애써 망각한다.
부결되면 조금 수정한 안으로 재투표에 부치고 가결되면 관료들의 승리라고 하고 또 부결되면 3차 투표에 부친다.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관료적 행위에 지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그렇게 노조로부터 멀어진다. 관료들은 승리하고 조합원들은 패배한다. 08년 현자 집행부가 이 짓을 하려 한다. 그렇기에 부결투쟁은 언제나 차선의 전술로 배치되어야 한다. 우선 과제는 비상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관료화된 지도부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대의원간담회 동안 대의원과 조합원이 던진 비판 가운데 “사측 안을 설명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있다. ‘집행부가 사측의 대변자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 의견접근안은 정신, 기조, 합의안 전체에서 사측 입장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의견접근안을 투표에 부치게 해선 안 된다. 아니 재협상이라는 미명으로 조금 수정한 안을 부쳐서도 안 된다. 의견접근안 자체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