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촛불투쟁을 되돌아보다
1. 시작하면서
광우병쇠고기 저지투쟁이 고비에 이르고 있다. 최근 투쟁동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 7월 5일 대집회 이후 1주일만에 열린 대책회의 주관 집회에는 2만명(주최측)이 모였다. 투쟁의 장기화로 투쟁피로도가 증가된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최근 광우병저지투쟁전선에 발생한 혼선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광우병쇠고기 저지투쟁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최근 투쟁을 둘러싸고 일어난 혼란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후 투쟁의 전망은 어떠할 것인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운수노조는 광우병쇠고기 저지투쟁에 초기부터 적극 참여하였고, 투쟁참여뿐만 아니라 초기 동력 상승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운수노조 내부에서 문제제기는 특히 감만부두와 강동냉장창고 광우병쇠고기 저지투쟁에의 참여방식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다. 감만부두와 강동냉장창고를 중심으로 진행된 광우병쇠고기 저지투쟁을 포함해서 운수노조의 광우병저지투쟁에 대한 평가가 지금 우리가 진행하려는 평가의 한 지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공공운수연맹과 민주노총의 광우병저지투쟁 역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촛불집회 최근 상황
6월 10일 서울 50만명을 비롯해서 전국 100만명 시민이 참여해서 이루어진 촛불집회와 대행진으로 광우병쇠고기 수입결정을 중심으로 한 이명박정권의 전반적 정책방향과 통치행태에 대한 전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보여주었다. 이명박정권은 비틀거렸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전원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 전원은 총사퇴 의사를 표명하였다. 6월 13일 이명박은 촛불집회 민심을 수용하겠다는 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명박은 사과성명과는 달리 미국산쇠고기 재협상인 아닌 추가협상의 시늉을 내고 6월 25일 장관 추가고시와 더불어서 유보하였던 관보게재를 강행함으로써 광우병쇠고기 유통, 수입의 문을 열었다. 6월 10일 대항쟁 이후 투쟁 동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자 이명박정권은 촛불집회에 대한 탄압으로 나섰다. 광화문 사거리를 봉쇄하면서 경찰버스를 이용한 저지선을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둘러싸고 태평로 좌우의 청계광장과 서울시의회 남쪽 지점까지 전진시켰다.
촛불의 장기화와 정권의 탄압으로 급격히 약화되는 것처럼 보였던 촛불집회는 6월 28일 시청앞 광장에 다시 15만여명의 시민이 모여서 강력한 집회, 시위투쟁을 벌임으로써 완벽히 부활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명박정권은 이 집회시위를 무단폭력으로 짓밟고 대량 연행하였다. 그런 후 시청앞 일대를 경찰버스로 봉쇄하고, 광우병쇠고기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를 구속, 수배, 사무실과 집을 압수수색하였다. 촛불집회 보도에 앞장선 인터넷방송사와 인터넷 광장이 열린 포털싸이트 다음 등을 통제, 압박하였고, 불매운동에 앞장선 네티즌 등을 구속, 수배, 출국금지하였다.
이명박정권이 무단폭압을 자행할 이 시기에 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촛불투쟁에 참여하였다. 6월 30일(월)-7월 2일(수) 3일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천주교에서 미사형태로 촛불집회를 주도하였고, 이어서 기독교와 불교가 기도회와 법회를 개최하였다. 7월 5일 다시 서울에서 30만에 이르는 대규모 집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7월 5일 집회는 6월 10일 규모에 못 미쳤다는 것보다, 그 집회형태와 내용에서 대단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청앞 촛불집회 이후 남대문, 명동, 을지로, 청계천 등을 행진하며 태평로와 종로에서 경찰버스벽을 마주하고 대치한 모습은 마찬가지였으나, 이날은 경찰이 막아서면 피해서 간다는 것을 집회, 시위의 원칙으로 정했듯이, 경찰의 방어벽과 대결하려는 기세는 전혀 없었고 경찰버스벽과는 아예 멀리 떨어져서 진을 치고 자체토론과 문화행사를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경찰과 시위대간의 마찰이 전혀 발생치 않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집회시위의 치열성이 거세되어 시위대에 대해서 무단 폭력을 행사하는 이명박정권과의 대결의지가 희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이 집회 시위는 대규모 참여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사회적 효과를 격감시키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7월 6일 오후 갑자기 정의구현사제단이 시청앞 농성천막을 철수하였다. 6월 30일 시청앞에 천막을 치고 매일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전국적으로 200명이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하였던 기세에 비추어서 너무 갑작스런 철수였다. 기독교와 불교 천막 역시 철거되었고 다음 주 개최 예정이던 원불교의 법회 역시 취소되었다.
7월 6일 오후 경찰은 다시 시청앞을 전경버스로 봉쇄하였다. 7월 5일 광우병대책회의 대표들이 청와대로 찾아가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대통령면담을 요청하였는데, 청와대는 정무수석이 요구사항 문서를 접수하면 촛불집회를 중단하기로 했는데, 대책회의 내부 의견 차이 때문에 전달하지 않은 것 같다고 악선동을 해대었다. 지금까지 촛불집회투쟁에 참가하면서 반민주적이요, 반국민적 이명박정권에 대해서 항쟁해 왔던 국민대중은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촛불투쟁이 갑자기 와해되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3. 의문사항?
가. 의문이 제기되는 지점들
○6월 30-7월 2일 카톨릭 주도 소극적 집회
6월 28일-29일 집회를 정부가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시청앞을 봉쇄한 상황에서 6월 30일(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가 미사형태로 시청앞광장을 다시 열어서 안정적 집회장소를 제공한 것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집회에 주최 추산 10만 이상 시민이 모였듯이 시민들은 6월 28-9일 경찰의 폭력탄압으로 두려워서 숨죽였다기 보다도 폭력탄압에 대한 분노로 수많은 인원이 집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월 30일과 7월 1일 집회를 대책회의가 전적으로 천주교에 일임해서, 행진을 하지 않고 미사형태로만 끝낸 것이나, 7월 2일에도 미사 이후 대책회의의 짧고 형식적 집회 이후에 천주교의 요구에 따라서 침묵시위로 일관한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7월 5일 집회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지나치게 퇴행적으로 스스로 경찰 방어선을 회피하고 격리해서 집회 시위를 실행한 것이 적절했다고 볼 것이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6월 5일 청와대 요구사항 전달 잡음
6월 5일 광우병대책회의에서 5개 요구사항을 가지고 대표단을 꾸려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나기로 결정한 것은 과연 필요성이 있었는지? 경찰은 촛불의 재협상 요구를 무시하고 폭력 탄압으로 나오고 있는데 대책회의쪽에서 먼저 대표단을 선정해서 대화와 요구사항 전달을 결정한 것이 적절했다고 볼 수 없다. 요구사항 제5항에 대통령면담 요청이 들어간 것 역시 대책회의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바가 없었을 뿐더러 불필요한 것이었다. 정무수석을 만나기 위해서 대표단 4명이 사전에 비서관을 만나는 절차는 대책회의의 격을 격하시키는 것이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 면담조차도 요구사항을 이명박정권이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도 아닌, 정무수석이 대책회의 대표단을 만나서 요구사항을 접수하는 것에 촛불집회를 중단하는 조건부로 하기로 했다는 청와대의 발표와 거듭된 선전은 청와대의 왜곡과 악선전이라고 할지라도, 왜 그렇게 악용당하는 어리석을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책회의 내부에 촛불집회 중단을 바라는 강력한 견해가 존재하고 애매한 상태로 그러한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종교계와 정당 참여 비상시국회의
6월 5일 집회를 앞두고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YMCA, 생협 등 시민단체 제안으로, 종교계와 정당이 참여하는 비상시국회의를 구성하고 대책회의 8, 종교계 4, 정당 4로 구성된 16인 운영위원회를 두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대해서 민주당 등 정당에서 부담스러움을 표명하고, 천주교 등 종교계에서 민주당이 한미FTA를 체결하였고, 그 전제조건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사전 약속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발생에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므로 함께 하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6월 5일 집회는 대책회의, 종교계, 정당들이 공동으로 주최키로 하였다.
1800여개 단체가 참여한 대책회의를 8개 큰 단체가 자의적으로 운영위원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이로써, 촛불투쟁에 뒤늦게 조직적으로 참여한 종교계에 과도한 지위가 부여된 데에 이어서, 정체성과 태도가 애매한 정당들까지도 촛불투쟁의 공동 주체의 반열에 오르게 함으로써 촛불투쟁에서 정당들, 특히 태도가 애매했던 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의 지위는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촛불투쟁의 공동 주체 지위에까지 공식적으로 참가한 정당들은 6월 5일 집회 이후 급속히 원내복귀를 서두르게 되었다. 마치 공동주체로 참여함으로써 원내복귀에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로 해서 촛불집회는 6월 5일 대집회로서 대단원을 장식한 인상이 확산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6월 5일 국민승리 대회
6월 5일 집회는 왜 국민승리 집회이고 이 대회에서 왜 국민승리 선언을 하였는가? 이명박정권은 재협상을 전혀 수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그를 강제로 퇴진시킨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한때 고개를 숙이고 촛불을 수용하겠다고 하였으나 나날이 꼿꼿이 다시 일어서며 공기업민영화를 비롯해서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가겠다고 하고 시청앞 광장을 봉쇄하고 집회 참가자를 짓밟고 체포 구속하는 등 촛불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국민승리를 선언하고 촛불집회를 중단한다느니, 이제 야당은 원내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용하는 발언들을 하고, 촛불집회를 불매운동으로 전환한다느니, 국민서명을 통한 청원운동을 한다느니 말하는가?
○천주교 등 종교단체들의 시청앞 농성 천막철거와 경찰버스의 시청앞 봉쇄
6월 5일 오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청앞 농성천막이 자진 철거되고, 기독교와 불교 등 다른 종교단체들의 농성 천막 역시 철거되었다. 천주교 외의 다른 종교단체들의 천막철거는 경찰에 사전 동의는 했으나 자진철거하기 전에 강제철거함으로써 마찰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6월 30일 시청앞에서 미사를 개최하면서, 매일 미사개최와 더불어서 전국 200명 성직자가 무기한 단식농성을 진행하겠다고 호언한 천주교와 연이어서 기세좋게 가담한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 종교계가 왜 갑작스럽게 퇴각하는가? 무엇 하나 이루어진 것 없이 이명박정권은 완고하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대책회의 매주 1회(토) 집회 주최
거의 매일 촛불집회를 주최하던 대책회의는 주 1회 토요일 집회를 선언하였다. 그 이외의 날에는 종교계나 각계 자율적으로 집회를 주최하기로 하였다. 매일 하던 집회가 주 1회 집회로 사실상 변경된 것이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촛불집회 분위기를 약화시켜서 결국 촛불집회를 사그러지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5월 중순 이후 촛불집회가 조직화되어가면서 수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매일같이 촛불집회를 계속 주최한 조직적 중심 역할을 해 왔던 대책회의가 촛불집회의 장기화와 정권의 폭압적 탄압으로 지쳤는가? 연일 계속되는 촛불집회에 대해서 시민들의 피로감이 누적되어서 촛불집회의 개최 일수를 조절하게 되었는가?
나. 대책회의의 이후 방침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이미 공표된 대로 7/17(목) 오후 7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전면 재협상! 공안탄압 중단! 헌법파괴 이명박 심판! “헌법에 따라 재협상!” 국민주권 실천 촛불대행진’을 벌인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11일 오후 공덕동 한국사회복지회관에서 ‘전국대표자회의’를 열고, 경찰 ‘공안탄압’에 맞서 오는 14일부터 25일까지 2주일 동안 이를 규탄하는 ‘범국민 캠페인’을 집중적으로 벌이면서, 국민적인 여론을 형성해 대응해나가기로 했다. “공안탄압에도 불구하고 촛불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촛불투쟁의 목표는 당분간은 전면재협상을 위한 부분에 집중하고, 이명박 퇴진을 위한 운동은 추후 논의를 거쳐 검토 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 기간 중에 각 지역별로 경찰폭력의 책임자인 어청수 경찰청장의 퇴진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과 온라인을 통한 ‘촛불 양심수’에 대한 지지활동도 벌여나가기로 했고, 이를 국회의장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촛불집회와 함께 미국산쇠고기 불매운동을 벌여나가되, 불매운동의 구체적인 방법은 오는 15일 오후 참여연대에서 광우병 지역대책위와 각계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비공개로 워크숍을 통해 결정키로 했으며, 17일 집중 촛불문화제에서 이를 발표하기로 했다.
3. 촛불투쟁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가. 민주주의를 되돌리고 민생을 파탄내는 이명박정권
중고등학교 학생, 청소년이 치켜든 촛불이 전 국민이 참여하는 항쟁으로 급속히 타올랐던 이유는 무엇인가? 촛불의 요구는 이명박정권의 정책전반에 대한 반대요, 정책기조 자체에 대한 반대였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국민대중의 행동은 모순적이다. 이명박을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시켜놓고서 그가 추진하려는 정책 전반에 반대하고 정책기조를 바꾸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총선에서는 또 한나라당 과반수를 포함해서 수구세력 200석 2/3이상 당선시키지 않았는가? 대선투표율이 50%초반이었고 총선투표율이 46%였으니 미명박대통령은 국민 1/4이 좀 넘는 지지를 받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1/4도 안되는 지지로 당선되었다고 하면 좀 얘기는 되지만, 국민 절반 전후가 투표에 기권한 책임은 또한 면치 못할 것이다.
촛불투쟁의 핵심적 요구인 광우병쇠고기저지는 국민의 생명권과 건강권, 생존권을 지키려는 염원의 발로이다. 그것은 자주권과 국민주권이 문제요 (인민의) 일반민주주의 실현의 문제이다. 촛불은 광우병쇠고기 협약에 분노하고 절망한 청소년의 행동으로 발화하였지만 5월 2일 집회 첫날부터 쟁점화된 광우병쇠고기와 교육시장화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대운하, 건강보험, 공기업사유화, 방송독점, 유가와 물가폭등 등 이명박정권의 경제사회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로 그 내용을 확산시켜 갔다. 그러면 촛불이 그렇게 급속도로 타오른 배경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명박정권이 반민주주의적이요, 민생을 파탄나게 할 것으로서 국민대중에게 두렵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5월초 청계광장 촛불집회 무대에서 누가 말했다. “쥐박아, 아무것도 하지 마라!” 불행히도 이명박 정권이 하는 일은 일마다 국민에게 고통이요, 국가사회에 재앙이었다.
이명박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은 김대중 노무현정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를 앞세워서 비판하며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토대로 해서 한국사회는 지난 20여년간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전진을 해 왔다. 연이은 각 정권은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거대한 힘에 밀려서 단계적으로 민주화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정권의 전두환의 재판과 백담사행, 김영삼의 군부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전노 내란죄 재판, 김대중의 6.15 남북화해협력선언, 노무현의 당정분리, 권력기관의 상대적 자율화, 선거법개정, 사학법개정 등 민주개혁 시도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10년만에 권력을 탈환한 한나라당은 가장 수구적 집단으로서 그들의 사고와 행동양태는 대단히 반동적이다. 70-80년대 건설기업가 이명박 역시 사고와 행동이 조금도 진화하지 못했다.
이명박정권은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인식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10년전이 아닌 20년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것이 광우병쇠고기 반대 촛불항쟁을 불러 온 직접적 계기요, 촛불항쟁의 와중에 이명박정권이 보인 시대착오적 행동이 국민대중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 이유인 것이다. 노무현이 한미FTA체결의 4대 선결조건의 하나로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약속하고서도 쉽게 내어주지 못하였던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을 이명박은 부시를 알현하는 선물로 선뜻 선심을 씀으로써 불만이 높아가고 있던 국민대중의 가슴에 분노를 불지른 것이다.
70년대 독재와 부르도쟈식 건설기업에서 성장한 이명박의 천박한 민주주의 의식은, 광우병쇠고기의 위험에 대한 천박한 인식과 더불어서, 국민주권과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대중의 상승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의 행동은 촛불집회가 계속되면서 나오는 이명박정권의 탄압정책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공권력, 체포, 구속을 통한 탄압책을 남발해도 촛불을 진압하기는커녕 더욱 키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고소영 강부자 청와대와 내각 임명에 이어서, 공기업사장을 임기도 채우기 전에 청와대, 장관, 한나라당을 다 동원해서 정부가 바뀌었으니 물러나야 한다,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고 압력을 넣다가 나중에는 감사원감사까지 동원해서 밀어내고 이명박 측근인사를 낙하산으로 밀어 넣었다. 이명박정권의 반통일, 반북정책은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반동적 모습을 보였고, 한 시대전의 친미친일적 행각은 국민의 권익을 해치고 자존심을 크게 손상하게 하였다. 개방시대에 이러한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대북, 대외정책이 이명박정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명박정권의 친기업정책은 경제를 성장시키고 민생을 살려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국민들의 신뢰가 잘못된 것임을 단기간에 깨닫게 하였다. 이명박정권의 경제정책은 국민의 삶을 파탄상태로 내몰아서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던 노무현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극단적, 전면적으로 추구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정권을 통해서 정리해고강화법, 근로자파견법, 비정규개악입법, 노사관계 개악입법 등등 노동권을 억압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악화시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그 차별을 심화시키는 주요한 노동관계법들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기간 비정규직은 500만명 이상 증가되어 취업노동자의 65%이상이 되었다. 노동권의 억압, 비정규직의 양산과 차별심화는 노동자 민중의 빈곤화와 생활 파탄, 빈부격차 심화를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박정권의 비즈니스프렌들리 정책은 기업과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하고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더욱 강화해서 급속히 생존권의 파탄으로 내몰 것임이 국민대중의 눈에도 너무나 명확해졌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에다가, 재벌기업들의 규제완화와 부동산세, 법인세, 소득세 등 각종 세금감면 대신에 서민세인 부가가치세 감면 폭 축소는 서민에게는 혜택이 없고 재벌과 부자를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이명박정권의 영어몰입교육, 교육자율화와 학교교육의 사교육시장화는 학생들에게는 살인적인 경쟁과 과중한 학습을 강요하고, 힘든 가계에 과중한 과외비의 고통을 불러왔다. 유가와 수입원자재가가 급등하고 있는데다 설상가상으로 이명박정권의 고환율정책은 수출기업의 이윤을 높일지언정 생활물가의 폭등으로 서민생활을 짓눌렀다.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5%였고 정부가 특별관리하는 52개 생필품가격은 9%대로 상승하였다. 물, 의료, 전기, 가스 등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대신에 사용요금의 상승과 편익의 손상을 가져와서 유가폭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민생에 생계비부담을 더욱 증가시켜 파탄상태로 내몰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명박정권의 대선 중심공약인 747공약이 허구임은 너무 일찍이 드러났다. 우선 7%성장을 임기초에 6%대로 수정하더니 최근 경제를 급속히 악화시키고는 허겁지겁 경제위기를 뇌까리면서 염치볼 것 없이 4%성장으로 낮추었다. 그의 경제정책 역시 실패하리라는 것을 국민대중은 너무 일찍이 간파하였다. 부동산투기와 자녀특혜입학을 위한 15번에 걸친 위장전입, 전국적인 부동산투기, 금융사기와 주가조작 연루, 수백-수천억대 재산가가 아들딸을 위장취업시켜 월 수백만원을 챙겨먹는 쫌팽이임을 알면서도 경제건설능력과 추진력이 있고 민생을 살려 줄 것이라고 대통령에 뽑아주었는데, 민생을 파탄나게 하고 경제성장도 못한다면 국민이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만당한 배신감과 다가오는 민생파탄에 대한 두려움에 급속하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나. 촛불투쟁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1만여명이 모여서 치켜든 촛불은 7월 12일 2만 집회시위에 이르기까지 71일간 계속되었다. 촛불은 이미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①우선 대선과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어 기세등등했던 이명박정권의 기를 꺾어 놓은 것이다. 인수위시절부터 이명박정권 초기 이명박정권이 조만간 실패할 것이라는 판단은 모두들 하면서도 그 기세가 그렇게 급속히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 기세에 주체적, 계획적으로 도전하는 조직이나 세력도 없었다. 대항투쟁을 계획하면서도 태풍처럼 몰아칠 이명박정권의 공세의 긴박성을 간파하고 대응하지 못하거나, 몰려오는 파도에 대응할 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지체시키거나 하였다. 그러나 중고등학생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한 촛불이 감히 이명박정권의 대공세에 맞서서 맞불을 일으키고, 이는 각계각층과 각 세력, 조직들의 합류로 거대한 국민항쟁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결국 이명박정권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명박은 6.10촛불 대항쟁에 청와대 뒷산에 올라서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하였다고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보수수구세력조차도 이명박의 능력, 정책, 지도력에 회의를 느끼고 비판하고 등을 돌리고 있다. 비록 아직도 국민 과반수가 이명박정권 퇴진투쟁에 반대하지만, 국민 다수뿐만아니라 보수수구세력조차도 이명박정권이 앞으로 4년 7개월 자신의 정책을 힘있게 추진하기는커녕, 계속 버텨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다. 이명박정권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그들 세력의 이해실현과 유지강화를 위해서 좋은 것인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대통령중심제 개헌 논의가 강력히 등장하고 있는 배경에는 보수수구세력 자체가 이명박이 완전히 식물인간화했을 경우 대안적 성격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를 반영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이명박정권과 함께 한나라당, 수구언론 조중동과 보수수구세력 전반이 역시 촛불로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나마 보수수구세력에게는 국회의석의 2/3이상을 차지한 거대 한나라당의 존재와 수구세력이 2/3를 차지하는 국회가 그들이 의존할 지주가 될 것이다. 국민에게 인기있는 박근혜나 이회창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②이명박의 정책전반의 방향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다. 이명박은 당선 이후 인수위시기부터 확신에 차서 자신의 친기업정책을 밀어붙였다. 오린쥐교육과 고소영 강부자 청와대와 내각인사에서 비판을 받아 일부 교체하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책을 거침없이 밀고 나가려는 태세는 변함없었다. 7%성장율을 08년에 한해서 6%로 낮추는 것 이외에는 기업활동의 규제를 과감히 풀고 각종 기업과 부유층의 세금을 감축하는 비즈지스프렌들리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였다. 대운하를 추진하고, 교육을 자율화하고,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고, 물사업지원법 제정을 통해서 물상업화를 추진하고, 공무원 교사연금제를 개혁하고, 공무원시스템을 개혁해서 과다한 공무원을 감원, 비정규직화하고, 금융, 언론, 기업을 구조개혁, 재편해서 사기업에게 넘기며, 이를 위해서 구 정권 인물들을 밀어내고 측근 인사를 낙하산으로 박는 것을 거침없이 추진하였다. 정권 초기가 아니면, 이러한 개혁적 과제를 추진하기 어렵다고 집권 초기에 한꺼번에 개혁적 정책들을 터뜨리면서 밀어붙였다.
촛불은 이러한 이명박정권의 친기업적 개혁정책 전반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광우병쇠고기 재협상은 끌어내지 못하였으나 고시연기와 고시관보 게재 연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추가협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궁색한 처지로 몰아넣었다. 이명박대통령 출마 핵심공약이자 7%경제성장의 토대인 대운하 추진을 중단, 정부와 지자체의 특별기구들은 해체하였다. 물, 보건의료, 가스, 전기 민영화는 하지 않겠다고 한다. 효율적 부분은 민간이 경영케 하고 자회사, 하청화 등은 하겠다고 하고 구조개혁과 선진화작업은 추진하겠다고 하지만, 처음의 기세가 크게 꺾인 것은 사실이다. 이명박정권의 성장중심정책은 국제유가 등 원자재가 폭등의 영향과 이명박정권의 고환율 등 성장위주정책의 실패로 인해서 물가안정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론 장악의 중심수단으로 인식하는 YTN, KBS, MBC, 언론재단 등 경영진 장악과 이를 장악해서 신문사나 재벌기업에게 넘기려는 계획은 변함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산업은행과 국민, 우리은행 등의 장악과 구조개편, 민영화 계획 역시 변함없이 추진하고 있다.
③촛불은 2개월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된 이명박정권과 더불어서 총선에서 등장한 거대 여당을 포함해서 합법 의회기관을 무력화하였다. 국민의 거센 항쟁은 정부와 국회라는 제도정치기관을 무력화한 것이다. 이 기간 국민대중의 촛불집회와 거리정치가 이 행정 입법기관을 대체한 것이다. 일시적인 민중 저항의 폭발이 아닌 정부의 전면적 정책에 대한 이러한 거리정치, 국민대중의 직접민주주의적 경험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시화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촛불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풀뿌리민중의 시민주체(국민주체)로서의 자신감이다. 이 사회의 국민대중(인민)과 관련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물론 이미 우리는 이러한 민중 항쟁의 경험을 최근에 이미 몇 차례 경험해 오고 있다. 2002년 겨울의 미선이 효선이 투쟁은 노무현의 대통령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2004년 초 노무현정권 탄핵시에는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이는 이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과반의석 승리와 민주노동당의 획기적 원내진출에 크게 기여하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조금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2002년 6월 전국의 거리를 휩쓴 월드컵 응원전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이러한 대중문화의 바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3. 촛불투쟁의 전망
가. 피로해 진 촛불
6월 10일 서울 50만 전국 100만 대항쟁 이후 촛불은 하강곡선을 그려왔다. 7월 5일 다시 서울 30만의 대인원이 결집하였지만 그 기세는 크게 퇴조하였다. 7월 12일 1주일만에 개최된 대책회의 주관 촛불집회는 2만명(주최측)이 모였다. 촛불은 크게 쇠퇴하고 있다.
5월 2일에 발화해서 7월 12일까지 계속된 촛불은 무척 피로해 보인다. 이러다가 차츰 스러져서 꺼져버리지 않을 가 하는 염려가 일어난다. 아니면 또 다시 촛불은 100만개 아니 수백만개의 촛불로 활활 타오를 수 있을가?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1만이상 수만 규모로 지속적으로 켜질가? 이를 전망하기 위해서 촛불과 관련된 몇 가지 요소들을 검토해보자.
나. 촛불은 시들고 있는가?
①촛불집회 약화의 원인으로는 무엇보다도 한때 60-70%를 상회했던 촛불집회에 대한 지지율이 감소한 데 있다고 본다. 7월 7일 한겨레신문이 리써지플러스에 의뢰해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촛불집회에 공감하며 계속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28.5%였고, ‘공감하지 않는다’가 22%였다. 그런데 ‘공감하지만 중단해야 된다’가 43.7%였다. 반수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촛불집회는 중단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공감하지 않는다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65.7%가 촛불집회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6월 28일 조선일보가 갤럽에 의뢰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촛불집회 중단’이 57.2%였고 ‘촛불집회 계속’이 37.9%로서 역시 압도적으로 중단에 많이 찬성하였다.
그러나 촛불집회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은 72.2%이고, 광우병쇠고기 재협상 찬성 역시 65%이상의 지지율이 나온다. 6월 28일 조선일보-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명박지지율은 20.7%였다. 7월 11일 리얼미터에서 발표한 이명박 국정 지지도는 24.6%였다. 이명박지지율은 최저선인 10%대는 넘어섰지만 여전히 20%대 중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 첫날인 5월 2일 직전 이명박의 지지율은 35.1%였고 이것은 4-5일전의 47.2%에서 12.1%가 급격히 떨어진 지지율이었다. 이명박지지율은 한때 최저선까지 추락하였던 10%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에 대한 지지율하락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촛불이 장기화하면서 서울시내와 각 지역 도시 교통이 마비됨으로써 교통을 이용하거나 생업에 종사하는 대중들의 불편이 증대됨으로써 차츰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간에 급속히 진행된 경제악화로 인해서 국민대중이 고통을 겪고, 경제위기 대응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도 되었을 것이다. 취업률은 떨어지고 실업률(위장포함)은 높아지고, 장사는 안되고, 물가는 폭등하고 주가폭락에 집값(자산가치)마저 붕괴할 우려가 높다. 소비자 기대지수는 급락해서 86에 이른다. 가을에 제2IMF사태가 벌어진다는 애기가 나돈다. 국민 절반이상(50.5%)이 요즘을 IMF시기보다 어렵다고 본다. 이명박정권이 경제위기 원인을 촛불에 전가하는 발언을 거듭하는 것 역시, 사실판단 여하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우병쇠고기 추가협상 결과를 별로 신뢰하고 있지 않음은 여론조사 결과 재협상 지지가 65-70%이상인 것에서 드러나는데, 다만 추가협상을 하고 그 결과 6월 25일 고시와 관보게재를 강행하고 광우병쇠고기 검역과 반출을 강행함으로써 이를 기정사실화한 것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것이다. 촛불을 두달간에 걸쳐서 장기간 계속해도 쇠고기 재협상 같은 명확한 성과가 없는 것과 촛불로는 안된다는 실망감이 동력을 약화시켰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반대로 촛불로 인해서 이명박의 사과와 추가협상노력, 일정 정도의 정책변화를 가져왔으니까 확실한 승리는 아닐지라도 소극적인 태도로 변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할만큼 했으니 이제 이명박정권을 믿고(또는 국회를 믿고) 기다려보자는 생각을 할 것으로 보는 관점은 조사결과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②촛불의 주체로 보면 피로도가 촛불의 참여와 동력을 상당히 약화시켰을 것이다. 연일 밤새워서 계속되는 집회 시위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피로도를 크게 증가시킬 것은 틀림없다. 대책회의 상근 역량들에 대한 구속, 체포영장 발부, 수색 등이 활동력을 약화시키고 있음도 사실이다. 6월 28-29일 집회에서 경찰의 폭력진압 이후 시청앞을 봉쇄하였을 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시청앞 천막농성을 치고 미사형태의 집회를 개최하였을 시 폭력 탄압에 크게 타격을 받은 대책회의가 무조건적 환영과 추수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회의의 완강성의 결여, 주체의식의 실종이 이후 종교계와 정당과의 무원칙한 연합과 정부와의 대화시도를 가져오고, 결국 정당과 종교계가 책임성없이 현장을 떠남으로써 촛불의 힘이 급속히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③이명박정권의 가혹한 폭력 탄압이 촛불을 약화시켰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최초 시위였던 24-5일간의 세종로, 종로 시위에 대한 폭력진압과 5월 29-30일의 폭력 진압과 대량연행은 국민의 가슴속에 분노의 불을 질러서 촛불시위를 오히려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월 28-9일의 경찰의 무단탄압에도 6월 30일 시민들은 월요일로서는 드문 10만(주최측)의 인원이 집결하였다. 다만 촛불에 여성과 노인, 유모차주부가 많이 참석하므로 촛불시위의 참여자와 시간대에 따라서 집회, 시위형태를 세심하게 배치하여야 할 필요는 있다.
촛불의 주체적 입장에서 탄압에 대한 실력방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보다 폭넓은 검토가 필요하므로 여기서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폭력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집회 시위를 억압하고 방해하고 무력으로 짓밟는 공권력의 문제이지 이명박의 잘못된 정책과 탄압에 대해서 정당하게 항의하는 촛불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다. 촛불은 누가 주도하는가?
촛불은 처음에 인터넷을 통해서 청년학생들이 소통하면서 모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한 모임이 거듭되면서 참여 인원이 증대되고 각계각층으로 번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촛불집회의 규모와 진행, 행진의 방향과 형태는 참여한 각 개인과 그룹의 자연발생적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촛불은 특별히 주도하는 주체가 없다. 이것이 촛불의 기본적 특징이다. 1800여개 각종 단체들이 모여서 광우병 국민 대책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책회의조차도 촛불집회 개최와 날자와 집회와 행진방식을 조정하기는 하지만 주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촛불은 중고등학생이 시작하였고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광우병쇠고기에 노출된 자녀를 걱정하는 부인(어머니)이 열렬히 참여하는 집단이라는 것, 대학생, 어른, 어린이, 노인 등 전 국민적 참여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 광범위한 국민대중 그 자체가 촛불의 주체라는 것, 국민대중의 자발적인 모임이라는 것, 그래서 촛불이 집회 후에 행진을 하면 길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함으로써 그들 모두가 주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1800여개의 광범위한 각종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 인터넷까페, 정치단체, 시민단체, 노동단체, 학교단위, 동창회, 친목회 등 광범위한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어느 단체도 이 촛불을 주도할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 너무나 광범위한 단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기도 하고, 매일같이 빈번하게 수만명 이상의 집회가 개최되고, 최대 인원 10여만에서 50만에 이르는 역사적인 규모의 대집회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러한 집회는 어느 특정 단체가 주도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촛불은 인터넷이 중요한 매개 소통 동원 수단이라는 것, 인터넷을 통해서 무수한 의견이 짧은 시간에 상호간에 소통되고 평가됨으로써 여론이 형성된다. 회의나 집회, 투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수많은 견해가 논의되고 변화되고 결정된다. 몇 십분 아니 몇 분만에 수만명의 참여자가 의견을 상호 소통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한다. 의견의 질적 내용은 조회와 추천의 양적 숫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터넷을 통한 여론형성은 쌍방향성, 신속성, 다양성, 대량성과 지속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결과로 행동이 이루어질 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다자간의 상호소통과 여론형성은 단기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다자가 참여하는 온라인게임에서 경험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광범위한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과 여론형성, 결의를 거쳐서 오프라인의 집회로 이어지는 행동양태는 우리 정치사회에서 이미 몇 차례 경험해 오고 있다. 2002년 11-12월 미선이 효순이 투쟁이 대선의 향방을 가르고, 2004년 탄핵당한 노무현을 구한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이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분석되어 있지는 않다. 이번 촛불은 보다 복잡하고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촛불의 특징 때문에 지금 촛불의 향방을 측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4. 촛불에서 노동운동의 위치와 역할
촛불에서 노동운동은 무엇을 얻었는가, 라고 말한다면 바로 위에서 말한 바 ‘촛불투쟁으로 무엇을 얻었는가’에서 말한 바 그것을 노동운동이 얻었다고 할 것이다. 즉 이명박정권자체에 타격을 가해서 비틀거리게 하고 기세등등한 그 기세를 꺾어 놓았다고 할 것이다. 정권 출발 초기에 기를 꺾어버렸다는 것은 이후 노동운동과 민중(국민대중)의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명박정권과 함께 한나라당, 조중동과 보수수구 세력 전반에 상당한 타격을 주어서 약화시켰다고 할 것이다. 촛불은 이명박정권의 정책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고, 거대 여당과 수구세력들 2/3를 비롯해서 보수 세력들의 아성인 국회를 2개월간 무력화시켰고, 이후에도 국회가 아닌 국민대중의 직접적인 정치가 제도정치기관과 맞서고 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인식을 준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국민대중 자신의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신감을 주었다는 말이 된다.
촛불투쟁에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는 대단히 후진 대중임을 보여주었다. 촛불투쟁 초기 이를 주도한 것은 중고등학생과 부인과 네티즌이었다. 촛불이 발생하고 성장 발전해간 5월 한달간 그러하였다. 노동자계급 대중은 촛불에의 참여 시기가 뒤늦었고 참여의 수준이나 열정, 치열성에서 한참 뒤쳐졌다. 참여의 형태에 있어서도 대단히 형식적이거나 관성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활력과 창조성이 크게 떨어졌다. 노동자계급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의 행동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민주노총이 촛불투쟁에 조직적으로 참여키로 결정한 것은 촛불이 한참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6월 초순이었고 조직적 참여가 시작된 것은 6월 10일 100만 항쟁 시기였다. 그 이후 6월 28일 전국적으로 조직적 참여를 하는 등 몇 차례 집회 시위에 조직적 참여를 하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광우병쇠고기저지를 비롯해서 대운하저지, 공공부문 민영화저지, 유가와 물가폭등 저지 등 4가지 요구를 내걸고 6월 10-14일간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조직적 참여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결의 이후에도 7월 2일에 들어서야 실제로 파업을 결행하였고 그나마 금속노조가 2시간 파업을 한 수준이었다. 민주노총은 또한 저장창고의 광우병쇠고기 검역과 반출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하였으나 운수노조를 중심으로 해서 공공운수노조와 부산본부가 담당한 부산 감만부두와 경기 용인 강동냉장창고를 제외하고는 실질 내용이 거의 없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민주노총은 촛불투쟁에 뒤따라가기도 버거워하였고, 촛불투쟁의 어느 국면에서도 주요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였다. 말은 요란하고 실질내용은 빈약한 수준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운수노조, 공공운수연맹, 금속노조, 공무원노조, 보건의료노조 등 연맹이나 산별노조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참여를 해 왔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노총은 스스로의 역할 이상으로 촛불에 참여한 국민대중의 요구와 지지, 기대를 받았고, 이러한 지지와 기대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공공부문 사유화저지 등에서 스스로 한 역할 이상으로 성과를 획득하였다고 할 것이다.
5.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촛불은 피로감을 느끼고 잠시 주춤하고 있다. 그 피로감은 촛불의 주체이자 대상인 국민대중의 피로감이다. 국민여론이 촛불의 자제를 원하고 있고 계속되는 촛불에 참여하고 있는 국민 역시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촛불이 지금 국면에서 절제되어야 함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이명박의 지지율은 20%대 초반이요, 이 지지율은 별로 증가할 전망은 보이지 않고 이 지점에서 맴돌 것이다. 왜냐하면 이명박은 이미 심대한 타격을 받았고 이명박의 정책은 추진하면 할수록 국민대중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광우병쇠고기 재협상에 대한 국민 지지 역시 70%대에 이르고 있다. 광우병쇠고기가 국내에 풀려서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겠지만 그럼에도 이를 경계하는 국민심리 역시 지속될 것이다. 이로 인해서 광우병쇠고기 재협상을 지지하는 국민의사에 큰 변화 역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광우병쇠고기 도입절차는 여전히 광범위한 불신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은 잠시 피로해서 약화되었을지라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광우병쇠고기 저지투쟁은 전체 민중(국민대중)의 민주주의와 주권의 문제요, 생존권의 문제로서 계속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광우병쇠고기 이외에도 다시 일어서려고 꿈틀거리는 대운하반대, 공기업사유화 시장화저지, 의료, 교육, 물 사유화 시장화 저지, 언론 장악과 사유화저지, 유가폭등 물가폭등저지 등 우리 국민에게는 이명박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바꾸고 폐기시켜야 할 수많은 과제가 있다. 이 과제들은 이와 관련된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계급대중이나 민중들에게 직접적인 과제이지만 동시에 전 국민적 생존을 확보하고 삶의 개선을 위한 과제인 것이다.
비정규직철폐 역시 촛불의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민주노총과 각 연맹, 노동사회단체의 적극적 역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마치 비정규직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고 정규직이나,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과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또 좁은 범위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비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문제요 전체 국민의 문제로까지 발전하였다. 1400만 노동자의 65%인 800만 비정규직 문제는 직업안정과 안정적 생산기반의 유지의 문제요,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을 부정하는 (노동자계급내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요, 과도한 자본의 착취로 인한 수요기반의 붕괴와 안정적 재생산 시스템의 결여, 경제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문제인 것이다. 또한 이는 국민대중의 궁핍화와 빈부격차의 증대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직철폐의 문제를 촛불의 과제로 명확히 설정함으로써 전 국민적 과제화하고, 촛불집회에서나 각 부문의 조직적 활동을 통해서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이명박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그 자체가 국민대중에게 고통이요, 재앙을 가져다주는 이명박정권에게 계속 타격을 주어 약화시키는 것 자체는 노동자계급대중만이 아니라 국민대중(민중)의 권익을 지키는 일이다. 이 투쟁과정을 통해서 국민대중을 주체로 일으켜 세우게 된다. 이명박정권이 저지르려고 하는 반민중적(국민적) 정책들을 막아내고 이를 약화, 폐기시키기 위해서 촛불을 계속 들어야 한다. 노동자계급대중의 투쟁은 현 시기에 스스로의 단결된 대오를 중심으로 한 총파업투쟁을 한 축으로 함과 동시에, 촛불투쟁을 또 한 축으로 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수많은 국민대중의 지지와 참여를 통해서,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