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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대학살의 배후는 누구인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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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18일 12시 10분 40초
전두환 신군부깡패집단인 공수부대의 학살에 뒤이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한미관계를 재구조화하는 전환점이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한국 국민에 대한 대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미국은 반공을 지향한다면 그 정권이 비록 독재정권이라 할지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광주항쟁이후 한국에서 미국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것은 1980년 6월에 만들어진 「광주시민 의거의 진상」이라는 문건이다. 문건은 광주항쟁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참으로 오랫동안 혈맹의 우방으로 생각하고 신뢰해왔다. (…) 그런데 이번 광주사건을 비롯한 10•26 이후의 일련의 미국의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종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수 없게 되었다. 한미협의하에 실시되는 국군의 작전이 어떻게 동족을 살육하는데 이용되었으며, 미국은 이에 동의할수 있었을까.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옹호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우선할수 없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상 우리는 미국을 새로운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 광주 대학살에 미국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데 이어 레이건이 ‘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자 미국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적개심과 배신감은 점점 커져갔다. 그 결과 1980년대 한국의 역사는 군사독재와 미국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 기록으로 점철 되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구속당할 각오를 하면서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때로는 미 문화원을 점거하거나 미 대사관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었다. 대학생들의 반미시위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다. 광주항쟁과 뒤이은 1980년대의 반미시위는 미국을 영원한 ‘우방’으로 여겨왔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한국 민중은 냉정한 ‘제국’이자 탐욕적인 ‘외세’로서 미국의 면모를 새롭게 각성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한국에서의 반미투쟁의 필요성을 인식시킨 역사적 계기로 되었다. 미국이 전두환 깡패집단을 통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에 어떻게 개입되였는가 하는 역사적 자료는 2008년 5월29일 조지 카치아피카스가 쓴 강연자료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에서 여실히 들어나게 된다. - 1980년 2월 미국은 전두환이 38선 후방에서 북한과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은 특전사단을 시위진압을 위해 광주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 - 1980년 5월 8일 미 국방정보국이 합동참모국에 7공수 특전여단 (광주에서의 최악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이 “전주와 광주의 대학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것 같다”고 보고함. - 1980년 5월 8일 글라이스틴이 특수부대가 “가능한 학생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옮겨졌다고 워싱턴에 보고함. - 1980년 5월 9일 글라이스틴이 전두환과 만나서 미국은 남한이 “만약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는 긴급대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함. - 1980년 5월 9일 미 국무부와 국방정보국의 전문 :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대를 학생시위에 동원할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승인을 해주었음을 명시함. - 1980년 5월 10일 미 국무부 차관 크리스토퍼가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 “우리는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려는 남한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 1980년 5월 16일 미국은 제 20사단을 그들의 작전통제권에서 방출함. “워싱턴에 있는 그의 상관들과 의논한후에” 위컴은 제 20사단이 광주로 배치될수 있도록 승인함. - 1980년 5월 19일 한미연합사령관 존 A 위컴 주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빨리 힘을 규합하고 어떤 형태로 그것을 가져갈것인가이다.” - 1980년 5월 21일 글라이스턴이 DC에 보낸 전문: “광주에서의 대규모 반란은 아직 통제밖에 있으며 걱정스러운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대규모의 폭도가 일시적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있으며…” - 1980년 5월 22일 미 국방부 대변인, 위컴이 “한국정부로부터 나의 작전 지휘권아래 있는 특정 한국군을 시위대의 진압작전에 동원할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수락, 동의하였다”고 시인했음을 발표함. - 1980년 5월 23일 워싱턴에서 미 국무부 대변인 호딩 카터(Hodding Carter), 카터 정부는 “남한의 정치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연기하는 한편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고 발표. - 1980년 5월 24일 미국, 한국에 미국군의 코랄함대가 도착할때까지 광주 진압을 연기해달라고 요구함. - 1980년 5월 25일 국무장관 무스키의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언급”. 그의 정보통은 “온건파 수습위는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과격파가 등장해 세력을 장악했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약간의 처형이 이뤄졌다. ”라고 보고함. - 1980년 5월 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나쁜 쪽으로 과격한 전환을 했다.과격파들로 이뤄진 무장그룹과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 1980년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평화로운 해결을 중재해줄것을 요청. 글라이스틴은 대답을 거절함. - 1980년 5월 31일 카터 대통령, CNN과의 인터뷰에서 “때로는 안보의 중요성이 인권의 중요성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고 발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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