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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펌]한명도 구하지 못한 정부, 왜 이렇게까지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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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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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16일 11시 11분 17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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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펌]한명도 구하지 못한 정부, 왜 이렇게까지 하나
<주장> 세월호 참사 집회 갔다가 세 차례 조사 받아
허 영 구
작년 4월16일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가 침몰한 지 270여일이 지났다. 아직 팽목항에는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망부석처럼 외롭게 남아 있다. 광화문광장에는 여전히 천막이 쳐져 있고 안산 역시 말없는 아픔이 곳곳에 배어 있다. 안산 단원고 3학년 졸업식장에서 살아남은 2학년 학생들의 눈물은 차마 볼 수가 없다. 떠난 아이들과 대화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온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런데 당사자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 세월호 참사, 심신 치유하는 일은 아직 첫발도 내딛지 못해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이 아니라 가족들과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데 국가가 무고한 생명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여기에 더하여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하는 대통령과 위정자들, 기레기언론과 극우세력까지 이 더러운 꼴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야만과 지옥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 해가 바뀌고 세월호 특별법도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서서히 잊혀 질 채비를 한다. ‘세월이 약’이라는 대중가사처럼 세월호 참사 아니, 세월호 학살사건은 시간을 끌면서 유야무야 되어간다. 유가족들에게 언제든지 청와대로 찾아오라던 대통령도 엊그제 신년 기자회견에서 만날 만큼 만났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부정선거의 쟁점이 지속되던 시범에서 터진 세월호 참사는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라는 전 국민적 분노로 이어졌다. 그러나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책임을 회피했고 야당의 헛발 짓 때문에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다. 국가는 왜 목숨을 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쫓기던 청해진 해운 실소유주 유병언이 백골이 되어 나타나고, 이후 청와대 십상시, 찌라시사건이 터졌으며, 최근에는 화재, 살인 등 숱한 사건사고에 묻혀가고 있다.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세월호의 아픔을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다.
작년 11월 7일 진상규명 특별법, 금년 1월 12일 세월호 피해 구제와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법적인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정치사회적문제는 여전이 남아 있다. 특별법을 통과시킨 새누리당이 임명한 진상규명 위원의 면면을 보면 도저히 진상규명을 할 수 없는 인사들이 추천되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세월호 참사로 아픔을 당한 사람들의 심신을 치유하는 일은 아직 첫 발도 내딛지 못했다. 반면 그 동안 진실규명을 위해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은 연행과 구속, 추가 소환 그리고 엄청난 벌금과 재판에 시달리고 있다.
-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 참석 후 세 차례 조사 받아
세월호 침몰 당시 급박했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어야 할 청와대와 7시간 동안 대통령의 부재는 아직도 명쾌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나도 세월호 참사에 마음 아파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그리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꾸준히 집회에 결합했다. 그 중 세 차례 피(혐)의자 신세가 됐다.
첫째는 작년 5월 17일 열린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촉구하는 시국대회와 시내행진참여다. 시국대회 주 대오는 종로를 따라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했지만 <세월호 학살 박근혜 퇴진 노동자행동> 깃발로 모인 대오는 종로 3가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동 현대빌딩 앞에서 경찰에 의해 막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의 핵심으로 청와대와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 위한 대규모 집회였고 청와대 가장 가까운 곳까지 행진대오가 접근했다. 경찰은 즉각 해산을 명했고 동시에 인도 위로 올라가 뿔뿔이 흩어지는 대오를 급습해 대규모 연행을 시도했다. 나는 연행은 면했지만 넘어져 발목을 크게 다쳤다. 그래서 이튿날 깁스와 목발을 한 채 다음날 청계천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5개월이나 지난 뒤에 경찰로부터 소환장이 날아왔다. 작년 연말에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겹쳐 출석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작년 6월 28일 시국대회와 맞물려 민주노총이 주최한 노동자궐기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행진대오가 종각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향하면서 경찰벽에 가로막혔다. 이후 경찰이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원래 1박 2일 투쟁으로 기획되었으나 가두행진 대오가 줄어들었고 민주노총이 총궐기를 주장했지만 물대포를 쏘자마자 해산하는 바람에 ‘궐기’라고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가두행진이 종료되었다. 그 와중에 가장 선두에서 연좌하던 나는 경찰에 연행됐다. 서울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어 그 다음날 저녁까지 갇혔다. 이 유치장에서 만났던 2012년 대선부정 박근혜퇴진과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며 2년이 넘도록 1인 시위 등 투쟁하고 있는 한 시민을 만났는데 그는 당시 3차례 연행된 상태였고 이후 구속되었다. 검찰이 3진 아웃을 방침을 밝힌 뒤였다.
세 번째는 8.15 대회 때다. 수사권·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8·15 범국민대회가 시청광장에서 열렸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대회, 청와대를 향한 10만의 함성’을 내걸고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이하 가족대책위), 세월호 참사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회(이하 일반인대책위),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이하 국민대책위)가 공동주최했다.
-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작년 연말부터 출석요구서 날아와
유가족의 연설과 김장훈, 이승환의 공연 등이 끝나고 청계천 방향으로 행진했고 마지막은 종각에서 경찰에 막혔다.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이 채증되어 역시 작년 연말부터 소환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 종로경찰서에서 작년 5월 17일건과 8월 15일 도로교통법 위반 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300명이 넘는 승객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안 국가 컨트롤 타워 청와대가 7시간 동안 정지되었는데 진상을 밝히라는 수많은 사람들은 경찰에 연행당하고 해가 바뀌어도 소환당하고 재판받고 벌금폭탄을 받고 있다. 청해진해운 유병언 일가와 비정규직 선장 등 선원들에게만 모든 책임이 전가되었고 정부관료들은 그 누구도 처벌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300명이 넘는 사람이 몰살을 당했고 그래서 국가가 단 한 명도 구하지 못(안)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라는 국민들에게는 도로교통법이니, 집시법이니 하는 온갖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사법처리를 하고 있다.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정부가 왜 그랬느냐, 왜 가만히 있으라고 했느냐고 항의하는 국민들은 색출이라도 하듯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잡아들이고 있다.
나도 오늘 세월호 관련 3건의 조사를 마무리했다. 검찰의 추가조사가 있거나 한 뒤 벌금이 나올 것이고 다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던 당사자가 대통령인 국가가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는 300명에게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만 말한 채 수장시켜 버렸다. 아니 학살한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모두 처벌당하고 있다. 국가의 법질서는 무엇인가? 나는 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내가 지문을 채취당하고 손 도장을 꾹꾹 찍은 경찰조서가 검찰과 법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치욕으로만 생각하지 않겠다. 이것조차 투쟁의 과정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세월호 투쟁의 역사적 기록으로 삼으려 한다. 진도 앞 바다에서 자본의 탐욕과 권력의 음모에 의해 타살당하고 수장된 아름답고 해맑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일이다. 평생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는 이런 야만적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2015.1.15.목, 오마이뉴스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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