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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 민주노동당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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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9월 16일 02시 05분 11초
 

달포를 넘긴 민주노동당의 대통령후보 경선 레이스가 결선 투표 끝에 권영길을 후보로 확정하고 막을 내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으러 나설 채비를 얼마나 갖추었는지, ‘중간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전쟁터에 나가기 앞서, 병사는 총기를 닦고 배낭을 챙기고 신들메를 조인다. 부족하거나 빠뜨린 것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채비는 넉넉한가?


 민주노동당에는 21세기를 밝힐 비전과 좌표가 있다. 당 강령에 명시된 ‘민주적 사회주의’의 이념이 그것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끝없는 장기 불황과 전쟁으로 인류를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데 이 처지에서 헤어날 길을 제시해주는 당은 민주노동당 뿐이다. 당 일꾼들은 이를 뒷받침해줄 정책도 훌륭하게 생산해냈다. 아직 운만 뗀 것일망정 ‘택지 국유화’가 제시되었고, 입시지옥을 끝장낼 ‘대학 평준화’안이 선보이는 등, 대안생산 능력은 그리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에는 훌륭한 인물도 많다. 지도자 몇 사람만이 아니라, 수만 명의 당원이 다 이 사회에서 진취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요, 당비를 내는 사람 5만 명은 작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을 엮어낼 ‘조직’도 전국에  빠짐없이 건설돼 있다. 민주노동당 지역조직을 빼놓고는 각 지역의 사회운동이 변변히 굴러가지 못한다.

 정치 은어로 ‘실탄’이라 부르는 것도 5년 전, 10년 전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5년 전 선거예산을 40억 원으로 짰던 것이 올해는 118억 원을 선거 예산으로 잡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국가가 베푸는 선거 보조금도 자그마치 25억원이나 들어 있다! 남 부럽지 않은 신세다.

 당은 ‘시운(時運)’도 따랐다. 그동안 김대중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발이 걸려, 진보정당이 뿌리내리기가 얼마나 더디었던가. 그러나 ‘노무현 탄핵’에 맞서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났을 때 민주노동당도 ‘동반하여’ 입지를 높였고, 열린우리당의 ‘민주화/개혁’ 약속에 실망한 여론이 한때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 상승을 낳기도 했다. 지금도 ‘구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여 (적어도) 제2당으로 올라설 수 있는 ‘호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최근 신정아 파문으로 그들의 대선 전략이 여지없이 어그러진 것을 떠올리자).

       

 민주노동당은 얼핏 보아서는 제법 성공을 거둔 것으로도 보인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문제는 하늘도 돕는 민주노동당에서 왠지 비전과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선거를 채비하는 여지껏의 과정에서 여지없이 확인된 사실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민주노동당에 집권과 변혁을 향한 열정이 살아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도무지 ‘희망’이 되어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사회주의 정당의 견결한 길을 밟아왔는가


 사물을 살피려면 ‘원칙’부터 되새기자. 당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답게” 옹골차게 실천했는지를 따지는 말이다. 사회주의는 언젠가는 모든 권력을 해체하여 대중에게 돌려줄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당 안에서부터 ‘권력정치 타파’를 실천하지 않고서, 더 큰 국가에서 권력의 소멸을 추구할 기풍이 과연 생겨날까? 권력바라기들이 법석대는 당이 어찌 당원들을 주체화할 수 있으랴. 진보세력 내에는 ‘정파들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너무나 끈질기고 뿌리가 깊은데 ‘자기 입지 챙기기(즉 권력)’과 무관하게 활동했던, 즉 계파 아닌 정파가 있기는 했던가?

 활동가 대다수가 어느 정파에든 들어가고 싶어하는 까닭은 그래야 ‘자리’와 ‘입지’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권력을 추구하는 정파들은 관료주의의 온상으로 구실하여 운동의 쇄신을 가로막는다. 권력을 얻은 정파들은 타자의 자리에 설 줄 아는 안목을 잃어가고, 그리하여 자기변화와 상호 침투를 불가능하게 한다. NLPDR 이론이 설명력을 잃어버린지가 이미 20년이 넘었는데도 NL과 PD, 그 쪼가리 하나씩들 움켜쥐고 운동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지금의 진보운동이 길을 찾지 못하는 것 아닌가.

  

 최근에 불거진 사태만 짚는다. 울산북구 전 구청장 이상범은 자주파의 전폭 지원 덕에 관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정파 빽으로 관료 경력을 쌓았고, 그 경력을 팔아 부르주아세력 동네에서 자리를 얻었다. ‘민족’을 내걸고 운동하다가 거리낌없이 보수세력으로 변절하여 진보변혁운동의 기반을 거듭 허물어뜨린 수많은 자주파들의 길을 그도 따라갔는데 그렇게 되도록 당원 대중이 견제할 수 없었다. 

 이갑용의 경선후보 등록 신청을 당 중앙 선관위가 거부한 것도 눈먼 관료주의의 극치다. 당론에 따라 노동자계급을 옹호한 행동에 대해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피선거권 박탈’로 탄압했을 때, 당은 이 조치를 다소곳이 순종해야 하는가? 단지 절차 규정만 들이대며 이 근본 질문을 회피하는 정당을 과연 변변한 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가? 당내 급진좌파의 진출을 막는 데에 당 관료들이 담합한 것이다. ‘경남 도당 회계부정’ 사태도 정파들의 패권 정치가 어떤 지경으로 치달았는지 잘 말해준다.


              자주파와 권력을 나눠 가진 권영길


 경선 과정에서 가장 크게 따질 대상은 권영길이다. 그는 벌써 해체됐어야 할 정파 구도에 버젓이 올라타서 경선을 치렀다. 그가 무슨 장밋빛 청사진을 그린다 한들, 권력 게임에서 종파적 반사회주의적 실천으로 치달았다는 사실을 가리지 못한다. “권영길은 후보가 되어 그 높아진 위상으로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선거에서 든든한 발판을 얻고, 그를 밀어준 자주파는 당권을 유지한다!” 이 뻔한 정치 거래를 삼척 동자인들 모르랴.

 자주파가 권영길을 ‘정파 후보’로 지명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주파가 여러 갈래로 흩어질 조짐이 짙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각 정파들이 내부에서 뿔뿔이 갈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야 ‘정파 해체’의 계기들이 싹트니까 말이다. 그런데 구태의연하게 자주파끼리 똘똘 뭉침으로써 당 전체는 원심력이 더 커져버렸다. 자주파 중에 진정성 있는 부분과 평등파 중에 치열한 부분이 따로 ‘헤쳐 모여’ 해서 정파 구도의 폐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이 그래서 가로막혔다. 그들 자주파는 “권영길의 높은 지지율이 어찌 자주파의 ‘오더’ 덕분이란 말이냐”고 줄기차게 부인했지만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있으랴. 자주파는 경선 초반, 노회찬 비방 영상물까지 돌리는 등 ‘노회찬 죽이기’가 정도를 지나쳐서 일간신문들의 빈축마저 샀다. 

 ‘싹쓸이’도 종파 정치의 극치다. ‘내무반 투표’처럼 한 사업장이나 지역에서 특정 후보표가 100% 가까이 싹쓸이한다는 것은 그 당원들이 대부분 ‘정파에 갇힌’ 정치교육만 받았거나 ‘수동화’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는 ‘당이 죽어 있음’을 알리는 지표가 아닌가.

 

 물론 심상정과 노회찬도 정파(종파) 구도 편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전진’이 둘로 갈렸다 해도 ‘정파 출신’임은 엄연한 사실이고, 한 정파가 후보에 따라 둘로 갈렸다는 사실이야말로 ‘전진’이 어떤 정견도 없이 권력을 좇아 모인 계파임을 방증하지 않는가. 게다가 심상정은 경선과정에서 ‘정파 구도’를 톡톡히 활용했다(이번 경선은 NL과 PD 구도의 구태의연한 재판이었다. PD는 늘 비주류로 머무르면서 NL에 대한 비판의 말을 되뇌는 데 만족했다. NL을 뛰어넘으려면 PD도 환골탈태해야 했다).

 원래 자주파는 ‘우리가 권영길을 지명했소!’하고 널리 떠벌이기가 사실 남세스러웠다. 다른 후보들이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들고 나옴으로써 ‘손 대지 않고 코 풀기’가 된 셈인데, 그러니 두 후보의 섣부른 자주파 공격은 ‘얕은 정치’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비-자주파’를 그러모으겠다고 나설수록 현실에서 더 똘똘 뭉치는 쪽은 ‘우리가 남이가’ 의식이 뚜렷한 자주파 쪽이니 말이다. “자주파, 문제 있다”는 비판으로 반사이익을 거두는 것만으로는 결국 2등을 벗어나지 못한다. 

 

               입지를 좇아 대의를 버린 두 후보


 ‘민중 경선’의 거부도 짚자. 그 명분으로 쓰였던 ‘진성 당원제’는 상향식 공천을 보장하는 정당 개혁의 개념이지, 노동자계급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큰 원칙과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민중경선을 일관되게 반대했던 ‘전진’의 상당수 멤버들이 5년 전에는 이와 대동소이한 ‘백만 민중경선’을 주장했다는 데서도 그들의 반대가 얼마나 ‘정략적인 것’인지 새삼 드러난다.

 이 반대에는 노회찬이 앞장섰는데 그는 어리석게도 큰 판을 잘못 읽었다. 민주노총에 뿌리가 없는 자기로서는 당원만의 투표가 더 유리하다는 계산에서 그랬겠지만 경선 결과는 그의 당내 인기가 막연한 허상에 불과했음을 드러냈다. 차라리 당당하게 불확실한 미래에 승부를 거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미지의 대중에게 다가갈 자신감이 그렇게 없었을까. 그는 경선 유세에 나서고서야 더 큰 변화를 바라는 평당원들의 기류를 읽었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민주노총에 뿌리를 둔 심상정이 민중경선을 거부한 것은 더 비판받을 일이다. 맨왼쪽을 자임해온 자신의 당내 입지가, 확대된 선거판에서 오히려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정략적 계산이 그를 옹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민노당이 민주노총을 통제해야 한다’는 그들의 운동관이 그런 처신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민주노총 80만 조합원들이 주체화될 때에는 오히려 반대의 결과로 나아갈 것이니 말이다. 유념할 것은 노총이든 당이든 ‘대중적 참여’로 나아가야 ‘관료 과두제’를 견제할 힘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천5백만 노동자 대부분에게 아직 민주노동당은 ‘관심 밖’이다. 그 중의 앞선 부분, 80만 조직 노동자들에게조차 다가가지 못하면서 ‘노동자 계급’에게 지지받기를 바랄 수는 없다. 민주노동당은 민중경선을 두 번이나 퇴짜놓은(확인 사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리라. 그동안 민주노총의 세액공제(=선거 후원금) 사업이 진척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다(‘말’지 8월호 참조). 후보 경선이 별다르게 국민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데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터인데, 민주노총과 전농 회원들이 경선에 참여했을 경우와 견주어 보라. 민노당이 군소 정당에 머물기를 바라는 지배세력에게 ‘민중경선 불발’은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 아니었을까?

 

 당이 ‘대중에게 잊혀지고 있는 이유’는 물론 이것만으로 설명될 일이 아니다. 당 지도부에게 ‘집권할 열정’이 없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일 터. 집권할 열정과 대의에 복무할 진정성이 당사(黨舍)에 흘러 넘쳤다면 저마다 총선 비례대표 순위경쟁에 몰두하는 제 앞가림의 패거리 정치는 진작에 사라졌을 터. 정말로 민중에게 감명을 주겠다고 결심했더라면 보수 세력의 이념적 시비 따위에 가슴을 졸이는 개량주의 정치를 선뜻 뛰어넘었을 터. 세 후보가 분명한 ‘변혁의 상’을 제시하고 나섰더라면 비록 당내 잔치일망정 지금보다는 더 대중의 주목을 받았을 터.


              집권과 변혁의 열정도 없었다


 권영길은 ‘진보적 성장론’을 표방했다. 그의 정치노선이 유한킴벌리 사장 문국현의 온정주의 정치와 무엇이 다르며, ‘양극화 해소’를 다짐할 줄 아는 정동영 이해찬과는 얼마나 다를까. 성장을 말할 바에는 차라리 이명박처럼 화끈하게 ‘747’의 애드벌룬을 띄워야 일자리 잃은 서민들에게 환상이나 심어줄 수 있다. 정리해고로 밀려난 노동자들에게 ‘진실함’으로 다가가려면 성장주의 세력과 선전 포고를 벌여야 한다. 대중은 그리 어리석지 않아서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약속하는(다시 말해, 좋은 것은 다 약속하는) 정치세력이 정말로 둘다 실행해내리라고 믿지 않는다.

 노회찬은 뜬금없이 ‘제7 공화국’의 비전을 천명했는데 책상물림의 청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유시민도 ‘제7 공화국’을 다짐했으니 개혁보수세력과 차별성이 없는 것도 문제이려니와, 한국의 현대사는 ‘공화국’들이 늘 쿠데타와 정변(政變)으로 얼룩졌던 까닭에 대중이 이를 구체적인 미래로서뿐만 아니라 진취적인 표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심상정은 ‘아시아 호혜경제공동체론, 한반도 평화경제공동체, 서민경제 혁신론’을 묶어서 ‘세박자 경제론’을 주창했다. ‘아시아 호혜경제’ 발상에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덜어낼 진취성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대중에게 감명을 주려면 한국 경제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상이 긴요하다. 택지와 금융, 재벌 제도를 어떻게 혁파하고 변혁할 것인지가 제시되지 못한다면 ‘당 내부를 향한 이미지 경쟁’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세 후보는 변혁으로 나아갈 지향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민주적 사회주의’의 당 이념은 시렁 위 부처님으로 얹어놓고 다들 외면하지 않았던가. 권영길은 ‘성장론’을 고수하여 ‘자본주의 틀 내’에 머물겠다는 뜻을 가장 분명히 밝혔거니와, 노회찬과 여러 논객들(손석춘, 박세길 등)이 요즘 내세우는 ‘공화주의’도 사회주의에 가 닿지 못하는 담론이다. “사회주의는 자신 없다. 법치주의라도 완벽하게 하자!”는 말에 불과하다. 심상정은 변혁적 색채를 띠려고 애쓰기는 한다. 그러나 아직 ‘수사법’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당 안에서나 호감을 줄 뿐이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이 ‘재벌’ 체제에 단호하게 맞서는 실천도 해오지 않았는데 사회주의 용어를 한두 군데서 거론한다고 대중이 민노당을 ‘변혁 세력’이라고 선뜻 믿겠는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민노당이 대선에서 크게 약진할 뾰죽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권영길과 자주파가 장담한 11월의 ‘백만 민중대회’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문득 돌이켜보자. 수십 년의 정치적 억눌림에서 풀려난 87년 공간에서나 백만 명의 정치집회가 가능했던 것인데, 스스로 패권에 도취한 ‘자주파’가 아무리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려 지령을 내린다 한들, 그런 집회가 선선히 이뤄지겠는가. 허장성세의 뒤끝에는 환멸만이 기다린다.    

 백 걸음을 양보하여 “지금 이대로라도 어떻게든 분발할 길을 찾아보자”고 궁리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분발을 후보가 가로막는다. 한겨레신문 9월 5일자에는 권영길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이 기사로써 그는 대중적 검증을 받은 것이나 진배 없다. 해당 기사에서 그를 비판한 대목을 뽑아 옮긴다.

 <...코리아연방공화국 구상에는 남북 경제공동체와 통일기구에 대한 수사만이 있을 뿐이다... 재벌관련 공약에 대해 묻자 그는 우물쭈물했고, 한미FTA 질문에도 대중과 쉽게 소통하는 방식으로 정리해 보이지 못했다.... 그의 사람중심 경제나 원하청 불공정거래 해결방안은 심지어 박근혜의 공약에도 들어 있다.... 거듭되는 경제분야 질문에 그는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제 3당에게는 추락의 길뿐이다


  필자의 글을 읽고 “왜 그렇게 세상을 어둡게만 보느냐?”고 갸우뚱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둠을 직시해야 어둠을 걷어낸다. 글 머리에서 필자는 왜 ‘원칙’을 말했는가? 사회정치 운동이 끝끝내 ‘원칙’을 지켜내지 않고서는 계급투쟁에서 거듭 몰리고 있는 지금의 정치지형을 뒤집을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환멸스런 권력 다툼과 종파 정치가 활개치는데도 사회정치 운동이 흔쾌하게 전진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진보 변혁운동이 87국면과도 같은 진정성을 품고 있다면 한미FTA 저지투쟁이 지금처럼 맥없이 가라앉고 있을까? 민노당이 비정규악법을 온 몸으로 막아낼 생각이었더라면 그 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될 때 의원단 모두가 값비싼 금뱃지를 기꺼이 던져버리고 백의종군의 투쟁에 나서지 않았을까? 그래야 뜻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 전체 노동운동의 동력을 높여내는 것 아닐까? 지금 지배세력이 몰아붙이는 계급투쟁이 결코 ‘장난’이 아닌데, 그런 진정성과 원칙의 견지 없이 노동자 민중운동이 과연 그들과 제대로 맞장 뜰 수 있을까?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민노당이 집권당의 비정규악법 입법공세에 무기력하게 순종했을 때, 이미 당의 미래는 어두워졌더랬다.


 여전히 당 지도부를 감싸는 사람들을 위해 ‘정세를 보는 관점’을 덧붙여야겠다. 관료들은 ‘이쯤이면 됐다’고 늘 현상을 합리화한다. 아무리 운동이 죽을 쒀도 자기들이 버틸 ‘자리’는 있으니 그들에게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87민중대진출로 빚어진 정치지형이 20년간 엎치락뒤치락해온 끝에 어떤 식으로든 다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이다. 공공연히 거론되는 ‘2007체제’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한국의 지배세력은 보수 양당에게 ‘화합체제’를 주문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깊어졌으니 언제 어디서 민중의 저항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데 이를 받아 안을 진보변혁세력의 싹수를 미리 잘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혁보수세력이 ‘민주세력’이라는 허울을 아직 폐기하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는 민노당이 제3당으로서 어부지리의 끗발이라도 누렸지만, 그들이 거추장스런 ‘민주’의 허울 대신 ‘평화 세력’의 모자를 쓰고 보수대연합으로 나아갈 다음 정부에서는 같은 의석수, 같은 제3등으로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처박힌다. 미국의 보수 양당 화합체제에서 ‘제3당 진출 움직임’이 끊임없이 짓눌렸던 사실을 떠올리자. 지금의 민노당 지도부는 너나없이 ‘제3당’에 자족하는 태도에 갇혀 있거니와 그들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즐기는 순간, 앞으로 펼쳐질 길은 추락의 길뿐이다(최근 MBC 여론조사에서 권영길이 9-11%의 지지율을 기록한 데 대해 권영길캠프에서 “10% 득표는 꿈같은 일”이라고 긍정했다고 한다. 거꾸로, 10%를 밑돌 때는 당의 사활마저 위태롭다. 그런데 이것이 감지덕지할 일인가).  


 여전히 당을 감싸는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 대선 후보로 명망을 누릴 권영길과 경선 2위에 올라 부각된 심상정, 그리고 앞으로 배출될 민노당 국회의원과 그 지망자들에게는 앞날이 별로 어둡지 않다. 아무리 졸전을 벌이기로서니 당이 벼랑에서 떨어지듯 추락하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러니 어떤 말로든 자기들을 변명할 거리는 있다. 그리고 비례대표 덕분에 몇 석이나마 선량(選良) 자리는 건진다. 그들은 입신하리라. 그러나 당의 미래는 없다. 그러니 젯밥에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처럼 세상을 보아서는 세상이 옳게 보이지 않는다. 평당원과 평조합원의 자리에 서서, 아니 당과 조합의 보살핌조차 누리지 못하는 가장 빈한한 프롤레타리아의 응달진 자리에 서서, 울부짖는 마음의 눈으로 지금의 우리를 돌아다 보라.


 - 민주노동당에 희망이 있는가? ‘지금 이대로’로는 한 올, 한 톨도 없다. 누구를 뽑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당이 민중에게 감명을 줄 변혁의 미래를 과연 제시할 수 있을지, 노동자 대중의 손을 어떻게 붙들지, 발본의 모색이 더 중요했다. 시간은 많이 흘러버렸지만 지금이라도 문제를 원점에 놓고 숙고할 일이다. 아, 무엇을 해야 할까? 늙은 로시난테를 타고 거대한 풍차를 향해 나아간 기사 돈키호테가 문득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누구, 사람 없소? (2007.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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