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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안교과서[교재]가 될만한 책을 하나 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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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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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24일 18시 33분 46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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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역사 공부
--- 참교육은 역사 교육이다
--- 역사를 아는 청년이라야 산다
[살림터 출판사, 저자 정 은 교]
<1부 : 어떻게 살아야 할까>
1. 중2는 이상주의자다
2. 학생들아, 개념을 터득해라
3. 학교는 어떤 곳인가
4. 인류의 미래를 열어제칠 사람됨
<2부 : 우리의 역사>
1. ‘동학’을 통해 역사를 내다본다
2. 민족의 장래는 스스로 결정해야
3. 소설로 읽는 한국전쟁
<3부 : 국가, 이데올로기, 시장, 문학>
1. 국가 : 어느 젊은이가 던져준 질문
2. 왜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할까
3. 시장, 키워야 하나 없애야 하나
4. 근대 문학의 앞날
<4부 : 세계의 역사>
1. 노예에서 사람으로
2. 마녀를 사냥해 자본주의를 얻다
3. 임금노예의 삶
4. 아프리카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다
머리말
참교육은 역사 교육이다
요즘 학교는 안녕하신가? 엄기호 선생이 펴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라는 책에는 ‘폐허’가 된 학교 모습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같은 경우, ‘수업 붕괴’가 널리 만연해 있다고 한다. 수업을 따라갈 의욕이 없는 ‘널브러진 애들’만이 아니라 ‘공부하는 애들’도 수업 붕괴에 한 몫 거든단다. 입시와 관련 없는 과목은 거들떠 보지 않아서다.
우리의 걱정도 엄선생 못지 않다. ‘벌떡 교사’가 멸종하고,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믿지 못해도 좋다. 학교에서 교육적 만남이 이뤄지지 않고, 교사와 학생이 서로 적대 관계로 바뀌는 것까지도 견뎌 보겠다. 교사들이 해준 게 없어, 중고교 시절을 덧없이 흘려보낸 애들이 (어른이 되어서라도 정신 바짝 차려서) 저들 스스로 잘 살아낸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애들이 과연 커서라도 제 삶을 번듯하게 잘 살아낼까? ‘널브러진 애들’ 걱정만이 아니다. ‘공부하는 애들’도 도무지 미덥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지금은 별세別世하신 농사꾼 전우익 선생이 예전에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하고 사람들을 깨우치는 책을 펴낸 적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 지배층은 “저마다 열심히 돈 벌어서 마음껏 누려라!”하는 가볍디 가벼운 덕담 말고는 후손들에게 들려줄 얘기가 없는데, 혼자만 잘 살아서야 그 삶에 무슨 재미도 생기기 어려울뿐더러, 저마다 고개를 파묻고 제 삶을 일으키는 데에만 눈길을 들이파서야 과연 그 삶들이 제대로 살아질지도 의심스럽다.
사부는 불안스럽지 않은 10대와 20대를 만나본 적 없다. 다들 걱정을 달고 산다. 중고교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서 멘탈 붕괴에 빠진 경우도 있다. 기성 사회가 시키는 점수따기 공부만 했을 뿐, 삶의 좌표를 찾아가는 (속 깊은)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학업성적 올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단순무식한 가치관만 주입받았던 학생이 교과서 어느 대목에서 ‘가치(관)의 충돌’을 따지는 내용을 접하고 혼란에 빠졌던 경우도 있다. ‘정신질환에 걸렸음직한 애들이 많다’고 탄식하는 선생도 봤다. 자폐증에 가까울 만큼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도 주변에 한둘이 아니다. 학교는 솔직히 ‘예비노동력 임시 대기소’일 뿐인가? 이 꼬락서니는 애들을 다들 ‘제 앞가림’에만 골몰하게 만든 것의 결과가 아닐까? 이 애들이 먹구름 짙게 덮여오는 21세기를 어찌 살아낼꼬!
참교육 실천을 나름껏 해온 이계삼 선생이 ‘교육이 불가능해!’하고 다질러 버린 적 있다. 학교만 무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사회 전체’가 사람을 키워낼 역량이 없다고 질러댄 비명이다. 권력을 쥐고 자족(自足)하는 지배세력은 아예 그럴 눈길(안목)도 없고, 시민사회[=진취적 사회운동+지식인집단]는 시대의 흐름에 맞설 응전력應戰力이 말라붙었다. 기성 사회는 “좋은 데 취직해! 그럼 됐지, 뭐!”하고 태평스런 나팔이나 불러쌓고 있고, 인류의 길잡이가 돼온 지성知性들의 가르침은 아이들 가슴에 가 닿지도 않는다. [번듯한 데 얼른 취직하라고] ‘목구멍 = 포도청’이 시키는 명령을 따르느라, 또 무미건조한 학업노동에서 풀려난 시간에는 소비사회가 퍼부어대는 감각적 자극[=스마트폰이 선사하는 멋진 신세계]을 넋없이 즐기느라, 아이들은 세상을 넓고 깊게 둘러볼 겨를이 없다. 게다가 현대 사회체제는 ‘과거와 미래를 다 잊고, 오직 현재에만 매달리라!’는 사악한 명령을 쉼없이 발동하고 있다. 길이 어디 있을까.
사부는 (이것도 잘 들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역사 공부부터 시작하자!’고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다. 그러면 될 수도 있다. 그럴 근거는 있다. 대다수 학생이 제 앞가림에만 눈을 팔고 살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현실에 대해 조금씩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월호 침몰사건’을 접한 학생들 중에 ‘나는 옳게 살아야겠구나!’하고 깨달음을 얻은 학생이 참 많다. 자본과 관료, 언론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지배세력이 이 사건을 아니 사태를 일으키는 데 저마다 한 몫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들이 싹터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현실에 부대끼는 가운데 늦든 빠르든 앎을 얻는다. 그런데 그 앎이 더 단단해지려면 ‘역사에 대한 앎’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옛적에 함석헌 선생[1901~1989]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제대로] 산다’고 늘 사람들을 꾸짖고 다녔는데, 그 꾸짖음도 새겨 뒀으면 좋겠다. [함선생을 패러디하자면] 역사를 아는 청년이라야 산다! 이 말을 시급히 새겨야할 사람은 사실 아이들이 아니고 [이런 사태가 어김없이 일어날 터인데도 미리 막지 못한] 우리 어른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글[‘중2는 이상주의자다’]에는 아직 살아 있는 아이들의 생각이 짤막하게 소개돼 있다. 내가 만난 중학교 2학년생들은 ‘시험 없는 세상’만 꿈꾸었을 뿐아니라, ‘돈도, 법도, 권력도 없어진 세상’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아이들의 가슴 밑바닥에는 사람답게 살아볼 세상[곧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다들 깃들어 있다. 상급학교로 가면서 그 꿈이 차츰 사그라들고 다들 어떻게든 제 밥벌이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에 제 눈길을 가두지만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그 꿈들을 희망의 불씨로 살려내기 시작한다면 우리 사회 한 귀퉁이에서라도 ‘배움의 가능성’을 증명해내는 실천 사례들이 생겨날 것이다.
왜 참교육은 역사 교육인가? 왜 ‘역사’를 먼저 깨치자고 하는가?
무엇보다 눈앞의 심상치 않은 인류사회의 흐름이 그것을 요구한다. 알다시피 (21세기 들어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列强이 틈만 나면 국가간 대결과 전쟁을 부르꾀고 있지 않은가. 일본 지배층은 행정부 멋대로 헌법을 해석해서 ‘집단적 자위권’을 합법화하고 있다[그들의 배후에는 군수산업으로 재미 보려는 독점자본이 있다]. 이는 북한과 중국을 가상假想 적국敵國으로 삼는 짓이어서 그들의 강경한 반발을 사고 있다. 미국의 지배층은 ‘신사神祀 참배’로 주변 나라들과 불화不和를 빚는 일본을 짐짓 말리는 척하면서, 일본과 남한을 두루(사이좋게) 데불고 중국을 압박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한편 남한 지배층은 이 참에 ‘(북한의) 흡수통일’이라는 대박을 터뜨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남한 군대는 최근 ‘4세대 전쟁’이라는 허울 밑에 분란전[게릴라 투입]으로 북한의 ‘급변 사태[붕괴]’를 끌어내겠다는 호전적好戰的인 작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한겨레 2014. 6/ 14일자 보도]. 여기서 우리는 일본이나 미국이 떠드는 ‘집단적 자위권’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실제로 그들이 꾀하는 것은 ‘집단적 공격권[침략권]’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전쟁의 먹구름이 서서히 동아시아 쪽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금 동아시아가 청일전쟁[1894]의 전야前夜와 가까운 상황에 있다.”고 일본의 가리타니 고진이 최근 경고했다. 그는 제 경고를 경청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푸념을 덧붙였다. ‘자연과 인간[도서출판b]' 190쪽.
그 시나리오를 한번 들이대 보려고 일본은 ‘역사 왜곡’이 굳히기 단계에 들어갔고, 남한은 ‘뉴라이트(신우익) 교과서’를 학교에 들이미는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은 애시당초 ‘역사 교육’이랄 게 없으니 (학교교육을 놓고) 신경쓸 것도 없다. 미국영화인 올리버 스톤이 “미국 학생은 규격화된 역사교과서에서 형편없는 내용만 배웠다. 미국인의 역사적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그의 책 ‘역사는 현재다’]. 미국 사회운동가 아로노위츠는 “미국 교육체제가 우리가 누구인지 잊게 하려고 온갖 짓을 저질렀다.”고 개탄한다[그의 책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이처럼 당장 민족과 사회의 명운과 안녕이 뒤흔들릴 수도 있는 암울한 세상을 맞아, 그에 대해 올곧은 앎을 전달하는 것만큼 교육자에게 긴요한 실천 과제가 없으리라. 인류가 여지껏 확보해낸 문명적 가치[파시즘과 침략전쟁 반대]를 지켜내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사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바를 (함께 긴급히) 고뇌하지 않는 교육자들이 학교 교실에서 무엇으로 제 구실을 하랴! ‘수업 붕괴’를 고뇌하는 것만큼 민족과 인류 사회의 앞날도 더불어 고뇌할 때라야 참교육운동의 침로針路가 가까스로 열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교육이 떠맡아야 할 더 원대한 임무도 있다. 아이들에게 미래를 열어갈 상상력을 틔워주는 일이다. 그래야 그 애들이 듬직한 어른으로 크지 않겠는가. 아이들은 (두서없는 낮꿈이나마 어렴풋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산다. 그런데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살피지 않고서는 그 갸륵한(안쓰러운) 꿈을 풀어줄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자본과 국가 자체가 사그라든 세상이 어디 만만하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하지만 그 꿈을 꼭꼭 품고서 역사를 궁구窮究하면 또 ‘그 꿈이 실현 가능하다.’는 앎도 문득 깨치게 된다. 돈도 권력도 별로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사회가 예전에 있었다면 그런 사회를 다시 본때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는 거냐!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고 서슬 퍼렇게 뇌까리는 놈들은 지금 세상에서 내로라 하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아니더냐. 제 뱃속의 이해利害 관계가 내리먹이는 지령指令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영혼 없는 패거리들!
역사책을 들추면 물론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밑바닥 민중의 처지에서 쓴 우리의 역사책을 가리킨다.
우리의 중2들과 똑같은 꿈을 꾸며 설렜던 옛 어른들을 수없이 만난다. 보편종교의 불길을 일으켰던 2천5백년 전의 어른들을 비롯하여, 제 목숨을 지푸라기로 내던지고 싸웠던 한국현대사의 선배들에 이르기까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꼭 있을 게다. 간절한 뜻을 품은 사람들이라면 없던 길도 뚫어낸다. 길은 본디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닌가?
1부에서는 청소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살아가야 할지, 살펴 봤다. 왜 어른으로 커가는 데에 ‘개념을 터득하는 공부’가 핵심 열쇠인지, 찬찬히 새기기 바란다. 그런데 그 개념공부는 이 세상을 더 트인 곳으로 바꿔 나가는 실천으로 이어질 때라야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그럴 때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된다. 지금의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어려운 형편을 헤치고 나가려면 청소년들이 어떤 사람으로 커가야 할까? 전태일 열사烈士가 그 길을 보여줬다. 사회의 운명을 제 것으로 받아 안는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의 길을!
2부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폈다.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과거는 ‘근대가 시작될 무렵’이다. “선배들은 옛 봉건사회를 어떻게 극복했으며, 근대 사회는 또 어떤 새로운 모순과 맞닥뜨렸는가?” “근대 사회를 극복하려면 근대 이전 사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가 핵심 화두다. 그런데 교과서는 그런 실천적 문제의식이 증발돼 있고 특히 근대와 현대를 서술한 대목이 뒤죽박죽이다. 역사 공부의 본령本領은 정작 ‘근∙현대 알기’에 있는데도! 요즘 동아시아 정세도 구한말舊韓末의 나라 꼴을 다시 떠올리게 하므로 역사의 거울을 꺼내들 필요가 절실해졌다.
3부는 캐묻고 움켜쥐어야 할 ‘기본 개념’을 몇 개 살폈다. 교과서는 ‘법, 도덕, 문화, 경제체제, 자원....’ 숱한 일반 개념을 겉핥기로 늘어놓고 있으나, 정작 우리가 씨름해야 할 개념은 ‘국가, 이데올로기, 시장’과 같이, 사회현실을 구체적으로(압도적으로) 주름잡는 것들이다. 이 책은 ‘시장’ 개념에 대해 변죽을 울리는 데 그쳤지만 인류 사회가 공황[경제 위기]의 늪에서 빠져 나올 지혜를 얻으려면 ‘시장’에 대해 뿌리까지 들이파야 한다. ‘문학’ 논의도 워낙 광범한 얘기라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훑은 아쉬움이 남는다.
4부는 세계의 역사를 살폈다. ‘마녀 사냥’은 근대 사회를 주름잡은 지배세력들이 잊어버리고 싶어할 부끄러운 역사다. 교과서가 이 역사를 ‘모르쇠’한 것은 어떻게도 변명할 수 없다. 교과서는 ‘[식민지] 노예제도’도 건성으로 훑었는데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또는 버팀목]이요, 근대 사회가 얼마나 야만스러운 곳인지 섬뜩하게 말해주는 으뜸 증거다. 아프리카 이야기는 지금의 세계체제가 과연 인류의 희망이 되어줄지 묻는 글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수백년 간 아프리카에서 실컷 단물을 빨아 먹었다. 아프리카로 눈길만 힐끗 돌려도 교과서가 ‘혼합자본주의는 괜찮다, 어쩌구’ 하고 자본주의를 두둔하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런 짓인지 금세 드러난다.....
참교육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덕교육이 아니다. 내 말은 학생들에게 공자님과 예수님, 칸트나 간디의 말씀부터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한참 나중에 할 공부이고, 먼저 학생들에게 ‘인류 역사가 어떻게 어느 쪽으로 흘러왔는지’를 제대로 일깨워 주는 것이 요체[=알맹이]다. 역사를 알아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 문학과 사회를 보는 눈이 트인다[이때의 역사는 교과서가 숨기거나 억압하고 있는 역사다]. 도덕 공부도 공자와 칸트의 말씀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읽게 해줘야 살아 숨쉬는 공부가 된다.
인류 역사의 절절한 기억을 옳게 전해주지 않는[=바꿔 말해, 인류 역사가 폭력과 야만으로 얼룩져 있음을 정직하게 성찰하지 않는] 학교교육은 제 아무리 든든하게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여준다 해도 눈이 멀고 길을 잃은 허접쓰레기 교육일 뿐이다. 그럴 때의 ‘학업성취도’란 낮도깨비 같은 물신(物神)에 지나지 않는다. 핀란드와 프랑스의 학교교육이 아무리 성취한 바가 많다 해도, 그들의 역사[와 사회] 교과서가 ‘우민화(愚民化)’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면 그 [교육제도의] 민주화와 진보는 속이 빈 강정이다.
이는 현대 자본체제의 모순이 깊어지고, 유럽 열강列强이 역사적 앎을 봉쇄해서 그 모순을 덮어 숨기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참교육이 거의 실종된 나라로 미국과 일본을 꼽는다. 그 나라 대중들의 평균적인 역사의식이 어떠한지, 대강 짐작할 수 있어서다[가령 일본 지배층이 제 나라 대중에게 줄곧 ‘전쟁 준비’를 선동해온 데 대해 일본 대중은 넋없이 따라가고 있다].
참교육은 무엇인가? 교육자에게 참교육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다. 인생의 선배가 말[=수업]과 실천[=본보기가 되는 사회활동]을 통해 후배들을 씩씩한 사회적 이타적利他的 개인으로 힘껏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어린 사람[후손]들을 하늘님으로 섬기지 않고서는 이런 선배로 구실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학생들에게 참교육은 제 앞가림만 하는 좁은 눈길을 넓혀 인류의 운명을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받아 안는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 학교 기관과 인문사회 교과는, 국가와 지배체제의 명령에 다소곳이 따르는 수동적인(受動的, passive) 존재로 학생들을 찌그러뜨리는 데에 톡톡히 공범共犯 노릇을 해왔다.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세월호의 터무니없는 안내방송에 단원고 아이들이 순진하게 따랐듯이, 한국의 아이들은 [현대 사회가 침몰해 가는] 바깥 광경도 유심히 내다보지 않고 저 높은 데서 내려오는 목소리에 그저 순종해 왔다. 그래야 이 사회에 탈없이 편입되는 줄 알고!
사부 같은 사람은 여러분을 좁은 객실 안에 주저앉힌 지배세력의 졸개요, 병신이었다. 사부에게 이 설익은 책은 교육자로서 병신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요 속죄 행위다. 여러분이 유관순 누나와 전태일 선배와 히틀러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어간 소녀 안네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기억하는 데에 이 책이 다소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안내 방송’을 의심할 눈과 귀를 여지껏 틔우지 못한 여러분도 솔직히 바보요, 머저리가 아니었을까? 머저리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알파도 역사 공부요, 오메가도 역사 공부다. 인류 역사의 동력動力은 그 앎과 깨우침에서 생겨나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격언은 그럴 때 써야 할 말이다. 1600년 무렵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과학의 발달을 자랑하며 한 말. 그런데 이 말은 근대[=과학기술의 시대]의 본질도 나타내지만, ‘사람들의 앎이 역사 발달의 동력’이라는 더 큰 뜻도 나타낸다.
50년 전에 황명걸 시인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 혈혈단신의 아이야 / 너무 외롭다고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 그 누구도 믿지 마라 /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 맑은 눈빛의 아이야 /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그때의 아이들 처지가 고단했던 것 못지않게 요즘 여러분이 맞닥뜨린 처지도 고달프다. 다들 제 밥벌이 길을 찾느라 안간힘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너무 힘들다고, 가까운 몇몇끼리 고독의 성城을 쌓지 말고, 이 야만스런 세상에 맞서는 법과 분노하는 법을 배워서 부디(!) 더 너른 세상을 열어가기 바란다. 아아, 맑게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야!!
덧대는 말 : 이 책은 교과서가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은[=사회 지배층이 감추고 싶은] 인류의 어두운 역사를 밝히는 데에 주로 몰두했기 때문에 다 읽고 나면 [학생들이] 세상에 대해 어둡고 슬픈 정조(情調, sentiment)에 휩싸일 수도 있다. 세상을 조심스레 낙관할 근거[=노동해방 인간해방의 견결한 역사]도 있는데 이 책은 거기까지 충분히 다룰 지면이 없었다. 이 점을 유념하고 독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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