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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해보는 생각...
민주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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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24일 08시 03분 38초
 

-전교조 교사대회가 있는 날 꼭두새벽, 耳鳴의 일깨움에 눈떠 일어나 자판을 두드리다.


당신은 다음의 이야기를 수긍하지 않는가?

한때 세계 민중에게 열렬한 희망을 주었던 ‘현실 사회주의’는 거대한 실패로 끝났다. 사회주의 이념에 변변히 부합하는 실천은 (거의) 없었다(쿠바 정도가 다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듯). 가령 레닌의 팜플렛 ‘국가와 혁명’에 담긴 내용은 대체로 혁명적이고 옳지만 그들의 실천 자체는 자기 책을 따라가지 못했다(소비에트의 해체!).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의 취지는 좋았지만 그들의 사상이 (허술하여)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실패로 귀결. 

현실사회주의를 가리켜 ‘국가사회주의’라느니 ‘국가자본주의’라느니 입씨름을 벌이지만 어느쪽도 완전한 규정이라 보기 어렵고, “자본주의를 벗어났지만 사회주의 이념에 변변히 부응하지는 못한, 독특하고 과도기적인 어떤 체제”로 보아야 한다. 위의 실랑이는 ‘사회주의 = 착취 유무’로 협소하게 바라본 논쟁이다.   


사회주의는 ① 정치 ; 피지배자가 ‘자기 통치’를 벌이는 것이다. 실질민주주의, 참민주주의, 평의회, 콤뮌, 소비에트... 한 사회가 엘리트/대중으로 갈리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이런 사회의 원시적 모델(즉 원시 콤뮌)이 있었으니, 이를테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경우다. 추장은 동료의 대표였을 뿐, 성인남자들 대부분이 戰士전사였고 각자 무기를 지녔으며 중요한 일(투쟁계획)을 함께 결정했고 그랬기에 전투적 견결함이 생겨났다. ‘만 명쯤’의 사회도 이렇게 규율될 수 있었다.

--레닌 시대는 반혁명의 위험이 높아서 ‘피티 독재’를 ‘피티 민주주의’보다 중시했으나

 피티 기반이 넓어지고 세계혁명으로 나아갈 지금은 ‘피티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그 아래에 ‘피티 독재’를 포괄할 수 있다. 가령 차베스의 ‘피티독재’ 개념은 온건하다(일정기간의 수권법). // 레닌은 피티민주주의를 벌이지 못했고, 모택동의 ‘인민민주 독재’는 사실상 독재로만 끝났다. // 현실 사회주의는 당/대중 이분법을 고수했는데 이는 엘리트의 부활로 이어져 피티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당(엘리트)와 대중의 이분법을 극복하라.

--- 레닌은 민주집중주의를 말했으나 ‘집중’이 지나쳐서 민주가 훼손되었고 그 반발로 자율주의, 무정부주의 흐름쪽에서 ‘네트워크’ 개념을 거론하지만 이는 ‘자연발생성’에 내맡기는 산개론/탈집중론이어서 실천적으로 무력하다. 양자를 극복하는 ‘집중적 민주주의’를 추구.


② 경제 : 노동자의 자기경영(=탈자본화)에서 시작하여 (노동력까지도) 탈-상품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경제의 발달’에서 싹터, 노동력의 상품화로 도약함으로써 자본화로 진전.

- 왜 노동자가 자기 경영을 못하는가? 중요한 결정은 얼마나 투자하여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느냐는 선택이다. 중요 문제의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라야 ‘그 조직 내에 자신이 참여한다’는 의식을 품을 수 있다. 즉 ‘소외’에서 벗어난다.

‘전문성/전문가’를 들먹이지만 굵직한 문제는 대다수 대중도 다 판단할 줄 안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쟁기업이 있다’는 구실로 경영사항을 ‘비밀정보’로 챙겨버렸다. 경쟁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정보 공개를 못할 이유가 없다.


③ : 자본주의 사회는 ‘부富’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여 맹렬하게 운동한다. 그 부는 ‘교환가치’로 표현되므로, 교환가치 생산에 몰두한다. 화폐 물신, 상품 물신의 사회요, (돈 벌려는) ‘욕망’에 휘둘리는 사회다.

사회주의는 이 뒤집힌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로잡는다. 富의 생산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교환가치와 전혀 결별하여 사용가치의 생산에 주력한다.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부를 만들어낸다. 즉 경제의 목적은 ‘사용가치의 생산’이다. 그런데 ‘자연’이 사용가치를 1차적으로 제공해주므로 ‘자연-친화’의 인식이 절로 싹튼다.

사회주의 사회의 목적은 (부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 형성’이다, ‘단순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은 소극적인 지향이고, ‘창조적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것.     

   

④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앎의 진전’에 따라 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일종의 ‘깨달음/통찰’의 과제다. “어느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큰 역사 흐름을 세계 전체의 관점에서!

-우선 옳으냐/그르냐의 문제인데 ; 이것을 추상적으로 토론해서는 안되고 시대흐름에 비추어 볼 일. 여전히 진보적 의의가 있다면, 즉 <공/과>가 반/반이라면 사민주의를 말할 수도 있다. 결론은 진보적 의의를 깡그리 잃었다는 것. 그래서 질문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가 아니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이고 그 결론은 이미 백 년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내렸다.

 

가령 ‘생산력’의 개념!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자연 파괴와 인간 파괴로써! ‘출산 거부’, 허드렛일만 하도록 내몰리는 청년들!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건희의 주장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대다수 인간을 ‘허드렛 일꾼’ 취급한다는 말. 


⑤ 사회주의는 ‘실천’의 문제이므로 그 수용은 ‘결단’의 문제가 된다 ;

   ㉠ 머리도 따라오지 않는 사람 : 기성 사회에서 ‘출세’ 또는 ‘행세’할 건덕지가 있는 사람은 굳이 딴 사회를 지향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운동권 권력이든, 학문 권력이든 권력을 누리는 사람은 그저 눈앞의 목표만 추구하지 긴 앞날을 설계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 머리는 따라오는데 몸은 따라오지 않는 사람 ; 사회주의 실천은 ‘부/권력’의 추구와 결별하는 일이다. 그런 사회가 사회주의이므로. 가령 그러기 때문에 사회운동 동네에서도 쬐깐한 자리를 놓고 정파 다툼을 벌이는 주체들은 사회주의의 진정성이 결여돼 있는 것. --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는 자기 동네가 이미 ‘실리주의’에 쩔어 있는 곳이므로 거기서 사회주의를 ‘몸’으로 실천하기는 아주 갑갑하다. 다만 ‘양심’으로 버틸 뿐.

-- 우리 대부분은 우선은 ‘양심’에서 출발할 뿐이다.


⑥ 자기 이익과 결부된 관심들을 떨치고 ‘양심’의 눈으로 우선 보라.

  -식량위기로 허덕이는 세계민중들, 이는 숙명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가 빚어낸 결과인데 우리 모두는 그 재생산에 연루돼 있지 않은가?

  -특히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데, 이는 민족문제로서든 세계동포의 문제로서든 제국주의들과의 대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을 시험한다.

  -‘고용 없는 성장’이 당연시되는 사회다. 갈수록 인간을 ‘백수’ 취급하겠다는데 이것을 ‘점진적인 개량’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당장은 ‘현안 해결’만 하고, 큰 변혁은 먼 훗날 하는 것으로??

-- ‘경제성장’을 외치면서 ‘증시 부양’을 말한다. 투기판을 벌여서 부를 더 축적한다? 이런 경제에서 설령 한때의 윤택함을 얻는다 한들 그것이 인류 사회의 희망인가? (...以下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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